내 사랑 케밥

그동안 제 기사가 안 보여서 의아하신 분 혹시 있으셨나요? 눈치 못 채셨다고요? 더 분발하겠습니다….

저는 추석 연휴 기간 전후로 2주간 프랑스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저번에 잽싸게 백신 접종을 완료했다는 글 보신 분들 있으실 텐데요. 그게 다 프랑스에 가기 위해서였어요. 프랑스에는 하나뿐인 언니 가족이 살고 있어요. 코로나19로 2년간 만나지 못해 매번 영상으로만 통화하다가 자가 격리 제한이 풀린 시점을 틈타 얼른 다녀왔어요. 제 사정을 이해해 주고 흔쾌히 다녀오라고 해 준 우리 동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언니와 만나서 감격적인 눈물의(?) 상봉을 했어요. 조카들도 2년간 정말 많이 성장했더라고요. 즐겁게 밀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식사 때가 되었어요. 언니는 '말만 해, 맛있는 거 다 사 줄게'라는 태세로 제 입만 보고 있었는데요. 그때 제가 고른 음식은 어이없게도 '케밥'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북아프리카권 이민자들의 영향으로 케밥이 보편화돼 있어요. 각 가게에서 만든 빵에 장시간 천천히 구운 고기를 얇게 긁어 내어 넣고요. 그 안에 하리싸라는 매운 소스, 요거트 소스, 알제리안 소스(마요네즈 맛 나는 매콤한 소스)와 각종 채소를 넣어 먹는 음식입니다. 감자튀김은 항상 곁들여서 나오고요.

그런데 왜 어이없냐고요? 오랜 시간 고르고 고른 음식이 프랑스 유학 시절 제일 많이 먹던 저렴한 케밥이었기 때문이죠(참고로 언니는 손에 100유로를 쥐고 있었습니다. 100유로 = 13만 9000원 정도?). 케밥은 십수 년 전 저의 주식이었어요. 4유로(당시 한화 약 4500원) 안 되는 돈으로 정말 푸짐하게 먹을 수 있었거든요. 매장마다 자신 있게 추천하는 빵과 소스가 다 다르고, 고기 맛도 어떤 양념을 어떻게 조합했느냐에 따라 확 달라져요. 늘 빠듯한 예산에 어쩌다 한번 외식할 때 부담없이 선택할 수 있는 메뉴였어요. 아무리 먹는 걸 좋아하는 저지만 한 끼에 수십 유로씩 쓸 수 없으니, 케밥 맛집을 발굴하는 일로 위안을 삼았죠.

사 온 케밥을 한입 베어 무는데 옛 추억이 촤르륵 지나가더군요. 괜히 제가 울컥하니까 언니가 '뭥미?‍♀️' 하는 눈길로 절 보더라고요.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맛있게 먹었어요. 그 후로도 틈만 나면 나 "케밥!"을 외쳤습니다. 프랑스에 14일 머무는 동안 제가 몇 끼를 케밥으로 먹었을까요. 맞추시는 분에게는 뭘 드리지…

여튼 저는 14일을 잘 보내고 왔어요. 방전된 에너지를 XX개의 케밥으로 잘 충전하고 돌아왔습니다. 케밥 에너지로 벌써 1박 2일 총회도 다녀왔고요.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뛰겠습니다. 이 케밥 지방이 다 없어질 때까지요….

편집국 은혜

친절한 뉴스B

셀럽(?)과 '참여 금지' 

이제는 셀럽(?)이 되어 버린 전광훈 목사(사랑제일교회)가 교계에서 '제재' 대상으로 전락했어요.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배광식 총회장)과 예장고신(강학근 총회장)은 이번 106회 총회에서 전 목사를 두고 '참여 금지'를 결의했어요. 그간 신성모독 등 논란을 야기한 전 목사에게 일종의 책임을 물은 것이지요. 예장합신(김원광 총회장)도 전 목사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고 논의하기로 했어요.

이번 총회 결의 과정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셀럽(?)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다는 걸 느꼈어요. 결의 과정에서 전 목사를 비호하는 목소리가 적잖게 나왔기 때문이죠. 대표적으로 정부 방역 지침에 반대하며 대면 예배를 강행한 손현보 목사(부산 세계로교회)를 들 수 있는데요. 손 목사는 "이런 식으로 이단으로 규정하면 이단 안 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전 목사를 감쌌어요. 또, 정치 참여(문재인 퇴진 운동)와 이단 문제는 별개로 봐야 한다며 '이단 규정'을 강하게 반대했죠.✊

사실은 작년 총회에서 다뤘어야 할 문제를 이제야 다뤄서 김이 빠져 보이기는 했는데요.‍ 늦게라도 주요 교단에서 전광훈 목사에 대해 '참여 금지' 결의를 했으니, 교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네요. 그나저나 예장통합 소속 노회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전 목사를 연구해 달라고 헌의했는데요. 심의 부서인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가 헌의안을 임의로 뭉개고 보고조차 하지 않았어요. 내년에는 어떻게 나오는지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봐야겠네요.

※ 주요 장로교단 106회 총회 전광훈 관련 결의 내용✍️
・ 예장합동・예장고신: 참여 금지
・ 예장합신: 총회 임원회와 실행위원회에 일임
・ 예장통합: 보류

편집국 용필


신학교에 사람이 없다‍️

지난달 마무리된 2022년 대입 수시에서 주요 대학 신학과가 저조한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지방 신학교부터 시작한 '미달' 사태가 수도권, 주요 교단 신학교까지 위협하고 있는데요. 특히 교세 120만 명으로 국내 교단 중 3위권을 차지하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감리교신학대학교가 0.65대 1, 교인 수 40여만 명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유일 신학교인 한신대학교가 0.67대 1을 기록했습니다.

신학과가 존립을 걱정해야 할 처지까지 내몰리게 된 현실…. 정원 미달을 소개한 기사가 나간 후 생각보다 많은 독자가 관심을 보였습니다. 한 대학에서는 이 기사 때문에 교단 목사들의 항의를 엄청나게 받았다고 하네요. "왜 우리 교단 신학교가 미달이냐, 입학처가 일 제대로 하는 거 맞느냐"는 항의였다고 합니다.

문제는 정시입니다. 수시 미충원분만큼 정시에서 학생을 더 뽑을 수 있지만, 거기서도 학생을 채우지 못하면 미달 상태로 새 학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이 때문에 각 대학은, 인재를 뽑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데려와 앉히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소명 의식 부족, 경쟁력 약화에 따른 내실 있는 신학 교육이 약화된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요즘 신학교를 보면,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석탄 산업이 떠오릅니다.⛏ 저의 처가가 있는 강원도 태백은 한때 '동네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속설이 있을 만큼 번성한 도시였는데요. 탄광이 대부분 문을 닫으면서 지금은 카지노와 관광 산업 아니면 명맥을 잇기도 힘든 처지가 됐습니다. 한때 태백에 가면 "폐광지역개발지원에관한특별법(폐특법) 시효 연장하라"는 플래카드가 한가득 걸려 있기도 했어요.

사회적 존경을 받으며 폭풍 성장했던 한국교회가 사양화되는 모습은 씁쓸하기만 하네요. 교세는 나날이 줄어들고, 사회적 이미지와 신뢰도는 추락하고…. 교회를 가고 싶지 않아 하는 교인들과 청년들의 마음이 어땠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봐야겠습니다.

편집국 승현


맨 땅에 헤딩하는 1인 출판사들

사양산업(ㅠㅠ)으로 평가받는 출판계에 굳이(?) 뛰어들어 고군분투하고 있는 소규모 기독 출판사들을 소개하기 위한 야심 찬 프로젝트, '1인 출판사 인터뷰'를 지난 4월부터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바람이불어오는곳'을 시작으로,'감은사''도서출판 100''도서출판 학영' 대표들을 독자님들께 소개했는데요(헐떡헐떡). 이번에 5번째 인터뷰이로 '도서출판 다함' 이웅석 대표(39)를 만나고 왔습니다.

'다함'이라는 이름은 초등학교 4학년 된 이 대표의 아들 이름에서 따왔다고 해요. 아들과 출판사 모두를 잘 양육해서 키워 나가겠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이 느껴지는 네이밍었습니다. 이 대표가 출판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소 특별한데요. 공부를 하다가 좋은 외서를 발견할 때마다 출판사에 출판을 요청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해요. 그래서 오기로 출판사를 차리게 됐다고 합니다. "다른 출판사가 안 내주면 내가 직접 내서 소개하겠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올랐던 거죠. 그 전까지 출판계와 하등 관련없는 삶을 살아온 이 대표에게는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이었을 텐데요. 그에 따른 어려움도 많았다고 해요(자세한 내용은 인터뷰 기사를 확인하세요^^).

다함은 '역사적 개혁주의'를 지향합니다. 이 대표는 특별히 네덜란드 개혁파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1854~1921)에 매료돼 관련 서적을 출간하고 있어요. '보편성의 신학자'라고 불릴 만큼 공정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 준 바빙크가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어요. 주변으로부터 종종 배타적·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소위 자칭 개혁주의자들에게, "역사적 개혁주의는 '사랑으로 말하는 진리'를 추구해 왔다"고 한 이 대표의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편집국 운송

그리스도인을 위한 경제 이야기

천민자본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중국에 지진이 일어나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죠. 유럽에 사는 어떤 사람은 그 소식을 듣고 희생된 이들을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합니다. 존재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할 수 있는지 비탄하면서요. 그런데 그 유럽 사람이 깜짝 놀랄 소식을 듣게 됩니다. 내일이 오기 전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이 절단될 거라고 말이지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새끼손가락을 지켜낼 궁리를 시작합니다. 밤을 새는 건 기본이죠. 손가락이 언제든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니까요. 중국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그에게 아무런 이슈가 되지 못합니다. 그게 사람 아니겠습니까? 이제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든지 그가 자신의 손가락을 지키는 데 모든 관심을 집중하는 것을 나무랄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누구든 그럴 테지요.

그런데 만약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지키기 위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다소 극단적인 상황 설정이기는 합니다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극단적 상황만큼 적나라한 것도 없지요. 요즘 유행하는 '오징어 게임'의 주제와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질문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애덤 스미스입니다. 1759년 집필한 <도덕 감정론>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금 각색했을 뿐입니다. 중국에서 일어난 지진과 유럽인의 새끼손가락이라는, 다소 당황스러운 예시를 통해 인간이 어떤 기준으로 윤리적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려고 했지요. 애덤 스미스는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물론 감정이 없는 싸이코패스나 미친 독재자들은 예외로 하고요.

애덤 스미스의 결론에 동의하는지 여부와 별개로 그가 인간의 윤리적 선택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아는데 '새끼손가락'은 모르고 있다면 애덤 스미스를 절반만 아는 셈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데이비드 흄을 비롯해 당대 철학자들과 윤리에 대해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윤리와 경제를 함께 고민했던 것이지요. <국부론>과 <도덕 감정론>은 하나의 세트입니다. 둘을 함께 읽어야 비로소 애덤 스미스를 이해하게 됩니다. 애덤 스미스뿐만이 아닙니다. 소위 고전학파로 분류되는 이들은 대체로 윤리와 정치를 경제와 함께 고민했습니다. 자원의 배분과 생산이라는 주제를 연구할 때 윤리적 토대를 벗어나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이 윤리와 정치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한 건 19세기 말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로 대표되는 존 스튜어트 밀과 제레미 벤담의 공리주의가 자본주의경제학의 철학적 토대가 되면서 경제학의 목표는 효용 극대화가 되었습니다. 수학적 엄밀성을 통해 공리주의적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경제와 윤리가 분리된 책임을 공리주의자들에게 뒤집어 씌울 수는 없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제레미 벤담의 주장을 매우 진보적이고 파격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시 경제적 효용을 독점하다시피 한 기득권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으니까요.

20세기 초부터 정치・윤리・경제는 별도의 학문으로 분리되어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애덤 스미스가 <도덕 감정론>에서 주장한 이론이나 벤담・밀의 이론이 노직・매킨타이어・롤스와 같은 학자들로 계승되었고 우리가 잘 아는 마이클 샌델이 그 연장선상에 있지요. 경제학도 경제학만의 계보를 이어 가고 있고요. 그러나 이 둘은 애초에 떨어질 수 없는 샴쌍둥이 같은 존재이기에 지금도 활발한 토론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입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국부론>만 읽고 <도덕 감정론>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것이 뼈아픈 사실입니다. 윤리는 창고에 처박아 놓고 효용 극대화만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종종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현상을 '천민자본주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여럿 있겠습니다만 자본만 들어오고 윤리는 내팽개친 탓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가 출발했던 서구는 그래도 윤리적 토대라는 전통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지만 우리에게 자본주의는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시스템의 절반만 들여온 결과가 바로 '천민자본주의'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몇 년 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100만 부 이상 팔려서 큰 화제가 되었지요. 천민자본주의에 지친 민중의 몸부림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은 자원의 배분과 생산, 그리고 그 생산물의 분배 문제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의 근원에는 윤리적 질문들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경제 고민은 세상과 달라야 하겠지요.

글을 마치면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고민하는 것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되뇝니다. 함께 고민하는 분들이 더 많아지길 기대합니다.

뉴스앤조이 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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