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성범죄로 피해받은 성도들에게 3억 요구하는 정신 나간 평남노회 목사들이 기독교인이냐!""하나님 믿는 목사인가! 돈만 쫓는 먹사인가!"2023년 8월 31일, ㅇ교회 교인 20여 명은 평남노회 재판국이 열리는 경기도 용인의 한 교회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이날 재판국은 ㅇ교회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재판을 열었다. 혐의는 '교단 탈퇴 선동 및 예배 방해'. 고발당한 교인들은 소환에는 응했으나 재판에는 응하지 않았다. 재판 시작 전 목사들에게 경고하고 자리를 떴다. "우리는 당신들이 우리에게 했던 짓들에 대한 증거 자료를 다
3."노회장님, 여기 ㅇ교회 임원들이 다 모여 있는 데서 저를 임시당회장으로 임명한다고 말씀해 주세요.""네, 우리 유장춘 시찰장 목사님을 임시당회장으로 제가 임명합니다.""네, 감사합니다. 박수 박수."천 목사가 사임을 발표하기 하루 전, 자신을 ㅇ교회 임시당회장이라고 주장하는 목사가 갑자기 예배당에 등장했다. 유장춘 목사는 ㅇ교회 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대뜸 당시 평남노회장 현영일 목사에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어 자신을 임시당회장으로 임명해 달라고 말했다. '임시당회장을 이런 식으로 임명하나?' 교단 돌아가는 일은 잘 몰랐던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ㅇ교회 교인들에게 천 아무개 담임목사는 '인생을 바꿔 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상담 센터를 겸했던 천 목사는 행복·치유 상담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주로 부부 관계나 자녀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인생에서 만나는 여러 문제에 해답을 얻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교회에는 실제로 천 목사의 가르침대로 살았더니 문제가 해결된 사람들이 있었다. ㅇ교회 강단에서는 매주 이런 교인들이 간증을 했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교인들은 이런 모습을 보며 더욱 천 목사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천 목사의 가르침은
6.박성철 목사(51)는 독일에서 '정치신학'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15년 귀국했다. 2006년 독일로 떠났으니 꼭 10년째 되는 해였다. 귀국 후 여기저기서 강의를 요청해 왔다. 1~2년은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후 그의 강의를 눈여겨본 여러 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그의 전문성은 한국교회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당시 한국교회에는 반동성애 광풍이 불고 있었고 소위 반동성애 강사들은 '네오마르크스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교회와 세상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음모론을 설파했다. 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3."이런 모든 일은 사회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있으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저도 하고 싶었지만… 목사님은 주의종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아멘!)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아멘!) 선지자입니다! (아멘!) 그래서 나는 못 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너무 두려워서…."사직하겠다는 말을 수차례 번복해 온 김영남 목사에게 교인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한 장로가 나와서 울분을 토하며 말했다. 2018년 11월 18일 일요일, 인천새소망교회에서는 김 목사와 교인들의 간담회가 진행됐다. 이날은 평소 교회에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천새소망교회 전 부목사 김다정 씨의 그루밍 성폭력 사건. 김 씨는 교회에서 여성 청년들을 미성년자 시절부터 길들여 성폭력을 일삼았다. 김 씨를 고소한 건 네 명이지만, 교인들이 알아본바 피해자는 스무 명도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결국 2022년 4월 징역 5년을 확정받고 수감 중이다. 이 과정에서 교단의 유력자였던 그의 아버지 김영남 목사는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사건은 한국교회의 성폭력 대응 중 최악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김영남 목사 부자
7.2014년 12월의 어느 날. 교인들은 추운 바람을 피해 서현동 맥도날드로 하나둘 모였다. 당시 밤늦게까지 운영했던 맥도날드는 B교회 투쟁 때부터 교인들의 단골 회의 장소였다. 다시 이런 일로 모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더 이상 C교회에도 갈 수 없게 된 교인들은 자연스럽게 맥도날드로 모였다. 다들 B교회 개혁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이었다. 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이야기했다.C교회에 계속 간다면 벌어질 일들은 명약관화였다. ㄹ 목사에게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또다시 긴 싸움이 될 것이었다.
3."목사님, 제가 기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사과하고 이 문제를 잘 마무리하시면 세상에까지 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목사님이 잘 풀지 못하시면 기사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김혜원 집사(62)는 2003년부터 <오마이뉴스>에 시민기자로 글을 써 왔다. 삶에서 경험하는 소소한 이야기를 써 왔는데, 수백 편을 쓰다 보니 그의 기사 때문에 사회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그가 지금도 기억하는 기사는 2005년 10월 31일 쓴 '"나무꾼과 선녀처럼 살고 싶었어요"'다. 필리핀인 아내가 암에 걸렸는데 한국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교회 분쟁은 겪지 않으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설사 그것이 어떤 영적 성장의 계기가 된다 해도. 목회자의 부정과 그로 인한 교인들의 분열, 그 과정에서 느끼는 인간에 대한 배신감과 회의감은 영혼에 깊은 상처로 남는다. 애초에 교회라는 게 어느 정도 영적 성장을 위해 다니는 곳이라면, 원래는 그런 상처를 받지 않아도 영적 성장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교회에서의 갈등으로 두 번이나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있다. 이우교회는 '이삭의 우물'이라는 뜻처럼, 두 번이나 우물을 빼앗긴 사람들이 만든 교회다
5."근데 집사님, 유튜브로 예배하는 것도 좋은데… 우리 서로 교제하고 그런 게 너무 그리워요."2021년 5월 어느 날, 주혜영 집사는 김정자 집사와의 통화에서 말했다. 주혜영 집사는 2020년 11월부터 어쩌다 보니 A교회에서 '나와져 있는' 상태가 됐다. A교회를 떠날 생각으로 안 나가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내 교회'였으니까. 그런데 내 교회에 도저히 갈 수가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몇 주간 다른 교회 온라인 예배를 드렸다. 진주 내 다른 교회를 가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어디를 가든 비슷할 것 같았다. 동네가 좁아서 A교
3.A교회 분위기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어떤 것보다 성경 말씀에 집중하는 교회였다. ㄱ 목사는 사람이 유하고 공부를 많이 하는 이미지였다. 개척 초기부터 함께했던 김명자 권사(64)는 그렇게 기억했다. 김 권사는 ㄱ 목사가 부임한 1993년 이전부터 A교회에 출석했다. A교회가 지금의 자리로 이사해 온 과정도 잘 알고 있다. A교회 최초로 집사 직분을 받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명자 권사가 A교회를 떠난다는 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 권사 스스로도 '진주에 사는 한 A교회를 섬기겠다'고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와 교인들이 동성애를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독버섯처럼 퍼진 교계 반동성애 강사들의 주장은 왜곡되고 과장됐으며, 때로는 아예 사실과 다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보통의 목회자들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강단에서, 교인들이 모인 채팅방에서 전파한다는 데 있다. 소위 '반동성애 운동'의 성과라면 성과이겠으나, 그것은 곧 한국교회의, 나아가 한국 사회의 불행이다.'보수'와 '진보'라는 성향 차이를 떠나,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교회를 중
8.오정현 목사의 실체를 밝혀내는 데 힘을 쏟는 동시에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를 지속해 나가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초창기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는 자신들을 또 다른 '교회'로 정체화하지 않았다. 몇 년 전까지 '예배'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마당 기도회'라는 말을 그대로 썼다. '분리 예배'를 처벌하는 교단법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 스스로 사랑의교회 교인이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담임목사에 대한 입장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김근수 집사나 김성만 집사의 생각처럼, 사랑의교회갱신공동체가 진짜 사랑의교회 정신을
5."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사랑의교회 서초 예배당 본당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멋들어진 캘리그래피가 떴다. 본당 6500석을 가득 메운 교인들은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넓고 큰 무대에 전 연령대로 구성된 교인 100여 명이 빨간색 목도리를 두르고 올라와 있었고, 오정현 목사는 중심에 자리했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교인들과 함께 찬양을 부르는 그의 얼굴은 황홀감에 젖어 있었다. 사랑의교회는 2013년 11월 24일 일요일 서초역 앞 신축 예배당으로 예배 장소를 옮겼다. 일주일 뒤 진행된 '입당 예배' 때는 국내뿐 아니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예전에 사랑의교회는 '제자 훈련'의 상징이었다. 설립자 고 옥한흠 목사는 만인 제사장 원리에 따라 일반 신자들도 목회자와 동역하는 관계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신도를 깨운다는 목표로 제자 훈련을 정립했다. 사랑의교회에서 파생된, 혹은 옥한흠 목사의 제자를 자처하는 목회자들은 저마다 교회에서 제자 훈련을 시행했다. 사랑의교회가 단순히 규모만 큰 대형 교회들과는 조금 다른 '점잖은' 이미지였던 이유는, 이 제자 훈련이라는 트레이드 마크가 있었기 때문이다.이제 사랑의교회는 제자 훈련보다는 '교회 분쟁'의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