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과 같은 심각한 사건이 드러났을 때 대중의 관심은 가해자에게 집중된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가해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가해자에게 어떤 수위의 처벌이 내려지는지 등등. 사법 체계 자체가 가해자의 범죄를 특정하고 그에 알맞은 형벌을 내리는 과정이고, 언론 보도 또한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해자가 징벌을 받은 것이, 혹은 받지 않은 것이 이슈가 되고 그 일이 지나가면 사건은 잊힌다. 물론 가해자가 적절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 소외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뉴스앤조이>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해, 교회 혹은 신학교에서 목사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 5명을 인터뷰했다. 자신이 입은 피해를 공론화한 후 수개월에서 수년이 지난 현재, 이들은 어떤 일상을 살고 있을까. 그들이 원하는 '피해 회복'이란 무엇이며, 그 회복이 삶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지, 회복에 도움이 혹은 방해가 된 것은 무엇이었는지 들어 봤다. 이들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기억을 기꺼이 다시 끄집어낸 이유 중 하나는 '교회를 위해서'다. 이들이 교회를 향해 던지는 말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 기자 주
*'교회 성폭력 생존자의 오늘' 전편 보기(클릭)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청소년 시절 박진희 씨(31·가명)에게는 교회가 유일한 피난처였다. 아빠는 폭력적이었고 엄마는 가출했다. 그런 진희 씨에게 교회와 지역 아동 센터를 운영하던 목사 S는 수년간 성폭력을 가했다. S는 진희 씨가 교회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진희 씨는 수없이 피해를 당하면서도 교회를 쉽게 떠날 수 없었다. 전형적인 '그루밍 성폭력'이었다.

그가 교회를 떠난 건 대학 진학 후였다. 가해자에게서는 벗어났지만 무의식적으로 봉인한 기억이 하나둘 떠오르면서 본격적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침 심리학과에 진학했고, 당시 상담대학원에 다니던 친척 오빠에게 피해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심리학에 대한 이해와 친척 오빠의 도움으로 전문적인 심리 치료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10년간 받은 상담 횟수만 해도 500회가 넘는다. 그의 20대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가해자를 고소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와 동생이 사는 집에 가해자가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생과 이야기하던 중, 동생도 S에게 성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도 S가 10여 년 만에 찾아와 동생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는 말을 듣고 진희 씨는 "끝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진희 씨는 동생과 함께 기독교반성폭력센터의 도움을 받아 2019년 7월 가해자를 고소했다. 피해를 당한 지 13년 만이었다.

징역 7년. 경찰·검찰 조사와 재판을 거쳐 1년 반 만에 1심 판결이 나왔다. 곧바로 진희 씨와 동생은 기독교반성폭력센터를 통해 S가 속한 기독교한국침례회(기침)에 그를 치리해 달라고 요구했다. 기침은 S를 윤리위원회에 회부했지만 이후 어떤 논의 과정을 거쳤는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윤리위원회에서는 가해자가 무죄를 주장하고 있으니 2심 판결까지 기다려 보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 와중에 가해자가 소속한 기침 춘천지방회가 그의 사임서를 수리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기침은 결국 9월 총회에서 S를 제명했지만, 진희 씨는 7개월간 아무런 답변도 듣지 못한 채 가슴을 졸여야 했다.

가해자는 1심 판결과 함께 법정 구속됐으나, 시종일관 '무죄'를 주장하며 계속해서 피해자들을 괴롭혔다. 아무 근거도 없이 피해자들이 신천지라고 주장하는 한편, 항소심 진행 중에는 자신의 성기 부분에 특이점이 있다며 피해자들이 정말 피해를 당했다면 이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황당한 논리를 폈다. 주장 자체가 피해자들에게는 2차 피해였다. 말도 안 되는 요구였지만 가해자는 이를 빌미로 보석까지 얻어 내 잠시 석방됐다. 우여곡절 끝에 항소심 재판부는 12월 1일, 가해자의 주장을 모두 배척하고 원심 그대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그는 다시 한번 법정 구속됐다.

가해자를 가두고 그의 목사직을 박탈하기까지, 지난 2년 반은 진희 씨에게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는 듯 하지만 가해자는 사과는커녕 여전히 자신의 죄를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진희 씨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그는 어떻게 그 모든 과정들을 뚫고 왔을까. 이 글은 그가 지나온 시간들에 대한 기록이다.

진희 씨는 10대 때 목사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한 후 13년 만에 사건을 공론화한 교회 성폭력 생존자다. 
진희 씨는 10대 때 목사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당한 후 13년 만에 사건을 공론화한 교회 성폭력 생존자다. 
지지적인 환경에 노출돼야 해요

피해 당시 기억이 끊어져 있어요. 중간중간 두꺼비집이 내려간 것처럼. 큰 교통사고 후 환자가 깨어나면 기억을 잘 못한다잖아요. 일종의 해리 장애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상담을 받으면 조금씩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럴 때마다 너무 괴로운 거예요. 충동적으로 위험한 행동을 했어요. 제가 예전에 살던 집 근처에 저수지가 있었거든요. 뭐에 홀린 듯이 그 저수지에 들어가 있고. 정신 차려 보면 소양대교 위에 서 있기도 하고…. 20대 중반쯤 그런 위험한 경험을 몇 번 했어요. 정신이 분리돼서 현실에 있지 못하는 거예요.

대학을 심리학과로 진학했어요. 당시 상담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친척 오빠에게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이야기했어요. 이후 오빠가 전적으로 저를 보호해 준 게 큰 도움이 됐죠. 오빠가 소개해 준 상담사들은 물론 학교 상담실도 적극적으로 이용했어요. 진짜 받을 수 있는 상담은 다 받은 거 같아요. 상담사마다 주는 에너지가 다르더라고요. 저는 남자에 대한 공포가 너무 강해서, 남자가 저에게 호의를 보이면 극도의 불안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남자 상담사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선생님들이 그 부분을 좋게 보시더라고요. 어쨌든 두려움을 이겨 내려고 하는 거니까.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니까 저에게 가장 독이 되는 건 이 일을 회피하는 것이라고 지식적으로 알고 있었거든요. 이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전문적인 치료와 상담을 받아야 해요.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니까. 반복적으로 노출돼야 점점 고통이 줄어드는데, 문제는 그냥 노출되면 안 되고 지지적인 환경에 노출되고 위로받아야 조금씩 나아질 수 있어요.

안 그러면 자꾸 내가 나를 공격해요. 제가 다른 피해자 친구들을 만나서 재판 때 증인으로 서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요. 이야기하는 중에 친구들도 "내가 그 교회에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목사가 부를 때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일요일에만 가고 평일에는 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저도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내가 그때 이랬어야 했는데', '내가 바보였지' 하면서 나를 탓하는 거예요. 이걸 가만히 놔두면 뭐든 자기 탓을 하는 게 성격이 돼요. 그러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죠.

상담과 치료를 오랫동안 받았는데, 뭔가 근본적인 공허함, 내적인 공허함은 해소가 잘 안 됐어요. 어쨌든 직면하고 풀어야 하는데 풀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감정도 생각도. 저에게는 기도하는 거 외에는 풀 방법이 없더라고요.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방법 외에는 내가 이걸 이해할 수도 없고, 누군가의 위로도 위로가 되지 않던 때가 있었어요. 당시 다니던 교회가 기도실을 24시간 개방했거든요. 잠이 안 오면 밤이고 새벽이고 가서 기도했어요. 휴학하고 시간 많을 때는 하루에 6~7시간도 있었어요. 하나님에게 원망도 하고 부탁도 했죠.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언젠가 하나님이 명료하게 깨닫게 해 주시기를,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를 기도했어요.

그렇게 기도해서인지 몰라도, 가해자가 동생 집에 찾아와서 아무 일 없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때가 됐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아, 더 이상 혼자 숨죽이지 말고 어딘가에 이야기할 때가 됐나 보다'라고 느꼈어요. 그리고 그 목사를 고소했죠. 제가 처음 피해를 당한 중학생 때부터 서른 살까지 똑같은 악몽을 꿨는데요. 뱀이 저를 막 감싼다든지, 잡아먹는다든지 하는 꿈이에요. 심리학적으로 뱀이 성적인 것을 상징하는데, 그런 꿈을 오래 꿨어요. 그런데 고소하고 나서부터는 안 꿔요. 이제 정말 확 노출이 돼 버려서 그런지 그 악몽에서 15년 만에 벗어났어요.

왜 피해자가 숨어야 하는가

고소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는 '이게 끝난 일이 아니라 지속될 수 있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가해자가 10여 년 만에 찾아와서 동생에게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는 말을 듣고 '이건 또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 '이 사람을 어떻게든 사회에서 격리해야 내가 안전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고소하는 방법밖에는 없잖아요. 처벌을 받게 해야 하는 거니까. 그러면서 또 알게 된 거죠. 가해자가 2017년에 비슷한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걸. 아동 센터에서 그런 일이 계속 있었다는 거잖아요. '너무 늦었나'라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결심하긴 했는데 중간중간 힘들기는 했어요. 조사받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검찰·경찰에서 "왜 저항하지 않았나", "왜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나", "그런 일이 있고 나서도 왜 또 교회에 갔나" 하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구체적으로 진술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질문에 답해야 할 때마다 너무너무 포기하고 싶은 거예요. '괜히 했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면 일상생활이 안 돼요. 하루 종일 배탈이 난다거나, 하루 종일 잠이 온다거나, 피곤하고 아프고….

증인으로 섰던 친구들도 많이 힘들어했어요. 증인신문할 때 상대편 변호사가 되게 못되게 공격하더라고요. "예전에 너 가난했지?", "너 그 목사 딸한테 5만 원 꾸고 그랬다며?" 이런 상관없는 질문을 법정에서 해요. 마음을 흔든다고 해야 하나? 정신을 흔들어서 진술을 못하게 하려는 전략인 것 같아요. 판사님이 그런 질문은 하지 말라고 해도 끝까지 하더라고요. 그게 상처가 돼서 친구가 증인으로 나선 걸 후회한다고 했어요. 어렸을 때 가난했던 거, 부모님 이혼하셨던 거, 그런 얘기로 왜 모르는 사람에게 공격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내 얘기를 원치 않게 자꾸 남의 입에서 들어야 한다는 자체가 힘들더라고요. 특히 공판할 때 가해자 입에서 제 얘기가 나오는 걸 보는 게 힘들었어요. 동생과 저를 아니까 '작은 증인', '큰 증인' 이런 식으로 표현해요. 그런 얘기가 나올 때 화가 나야 하는데… 그 상황에서는 그냥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어요. 되게 수치스러운 느낌. 그 입에서 내 얘기가 나온다는 거 자체가, 그리고 그쪽 변호사들에게서도 내 얘기가 나온다는 거 자체가 수치스럽게 느껴졌어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진지하게 공판만은 가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정신 건강에 너무 안 좋다고. 지지해 주는 사람 얘기를 들어도 모자랄 판에, 가해자를 눈앞에서 보면서 공격적인 얘기를 듣고 있는 자리니까요. 공판 갔다 오면 그냥 힘이 빠지는 정도가 아니긴 해요. 정신과에서는 기억이 '침투'한다고 하는데, 기억이 갑자기 팍 쳐들어와요. 나는 원치 않는데 누가 내 집으로 확 쳐들어오는 것처럼 기억이 확 침투하는 거예요. 그럼 저는 본능적으로 방어하게 되죠. 그 과정에서 동생은 고열이 나고, 저는 두드러기가 나요. 그러다 호흡곤란까지 오면 응급실 가는 거죠.

PTSD 반응이라고 하더라고요. 의사 선생님이 약을 주셨어요. 신경계를 일시적으로 확 떨어뜨리는 약이 있거든요. 호흡곤란이 오면 빨리 약을 먹으라고 하시더라고요. 공판 끝나면 그날 밤이나 그 주 주말에는 관찰을 해서 호흡곤란이 오면 약 먹고 바로 응급실에 가요. 저는 '내가 몸이 약해서 이런가' 생각했는데, 의사 선생님들은 전형적인 PTSD, 해리 장애 반응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정신과 선생님도 몇 분 만나 봤는데 다들 비슷한 말씀을 하셔서, 정신과 상담도 지속적으로 받아 보려고 해요.

재판이 열렸던 춘천지방법원. 뉴스앤조이 구권효
재판이 열렸던 춘천지방법원. 뉴스앤조이 구권효

그래도 공판에 매번 참석하는 이유는…. 저도 동생도 이런 사건에서 피해자가 숨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이에요. 가해자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숨지 않는데 말이죠. 공판에 가는 건, 가해자와 가해자 측 사람들에게 '우리가 정당하다'고, '너희가 유죄고 나는 무죄다'라고 나름대로 선포하는 거예요. 무섭긴 해요. 법원 들어가서도 늘 떨려요. 가해자와 그 가족들 얼굴, 표정 다 보이니까. 그렇다고 돌이킬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선택해 여기까지 왔고 그럼 끝까지 가야 하는 거지, 중간에 힘들다고 내가 모습을 숨기면 가해자 측은 오히려 더 기세등등하게 거짓말할 것 같아요.

가해자 측은 저희가 신천지라고, 친척 오빠가 신천지고 저희가 오빠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공격해요. 계속 그렇게 거짓말하는 걸 보면서 복합적인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저를 옛날에 가난하고 보호자가 필요했던 연약한 모습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얕잡아 보는 느낌? 무시하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가해자와 그 가족들 표정이나 눈빛, 말하는 내용을 보면 '얘네 별거 아냐. 변호사 선임해서 이렇게 밀고 나가면 돼'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오빠가 배후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제가 혼자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느낌이 들면 화가 많이 나요.

힘들지만 나아가는 방향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째는 내 상처를 드러내서 치료할 기회를 얻는 거예요. 돌아보면 제 상태를 더 안 좋아지게 했던 건, 그냥 잊으려고 했던 거였어요. 나에게 일어난 일을 억지로 잊으려고 하는 거요. 근데 그런 마음은 계속 들어요. 지금도 그래요. 오늘(인터뷰 당일 - 기자 주)도 되게 오기 싫었어요. 얘기하기 싫고 떠올리기 싫고 그래요. 늘 하기 싫어요, 이 사건과 관련한 모든 일을. 기자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게 나를 존중해 주는 거거든요. 억지로 '아니야. 해야 돼. 그래도 해야 돼'라고 하지 않고, '나는 하기 싫어. 너무 하기 싫어' 이렇게 제 마음을 존중하는 거예요. 그런 후에 '그래도 하자'고 선택하는 거죠.

둘째는 결국 신앙적인 부분이에요. 교회 안에 약자들, 피해를 당하고도 억눌린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길을 한번 트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교회에 묻는 거죠. "왜 교회에 성폭력 가해 목사를 징계하는 규정이 없습니까? 이런 피해자들이 계속 나오는데 왜 우리 영혼에 관심이 없습니까? 왜 교회가 생명에 관심이 없습니까?" 많은 사람이 거슬리고 불편해할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제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좀 더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진실을 가지고 있는 건 난데

1심 판결 소식을 들었을 때는, 기뻤어요. 소송을 진행하면서 다른 성폭력 사건 기사들을 읽어 봤는데 형량이 정말 낮더라고요. 징역 2~3년 이런 거예요. 그런 걸 보니까 징역 7년이면 중형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개인적으로는 7년이 그리 길어 보이지는 않지만… 어쨌든 현재 상황에서는 7년이 중형이니까요. 저희 변호사님은 물론이고 검사님, 판사님께도 감사하더라고요. 제가 판결문을 몇 번 읽어 봤는지 몰라요. 증인 서 준 피해자 친구들도 판결문을 몇 번 읽어 봤는지 모른대요. 너무 위로가 돼서…. 거기 나오는 말은 어렵지만, 어쨌든 우리가 했던 말이 법적으로 사실이라고 인정된 거잖아요.

소송을 진행하면서 정말 말하기가 힘들었거든요. 제 말이 다 증언이 되잖아요. 가해자 쪽에서는 어떻게든 제 말에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고요. 증인신문할 때도 친구들이랑 달달 떨었어요. 혹시 우리가 잘못 이야기할까 봐, 그 말로 우리가 오해당할까 봐 두려웠어요. 반면, 가해자 쪽에서는 정말 아무 말이나 다 했거든요. 하고 싶은 공격 다 하는데, 우리는 늘 신중하게 참고 혹시나 불리해질까 오해받을까 걱정했어요. 글 하나 쓰더라도 되게 조심스러웠고 늘 변호사님과 상의해야 했어요. 진실을 갖고 있는 건 난데, 이걸 듣는 사람이 믿어 준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 그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어요. 판결이 나왔을 때는 '내가 갖고 있는 진실을 알아주네'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무도 안 알아줄 것 같았거든요. '법이 내 편을 들어 줬다'는 사실이 괜히 자랑스럽기도 했고.

근데 항소심 때 보석으로 석방된 건 정말…. 저희는 이미 수사에 열심히 임했고 법정에서도 다 증언했는데, 그래서 1심 판결을 얻어 냈는데, 항소심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또다시 처음부터 이야기해야 하는 건지 너무 지치고…. 가해자가 제 앞에 나타날까 봐 무섭기도 했죠. 가해자가 석방되고 처음에는 외출을 못 하겠더라고요. 불안해서요. 뭔가… 호랑이처럼 저를 해칠 것 같다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뱀처럼 혐오스러운 걸 내가 원치 않는 순간 봐야 하는 공포 같은 거였어요. 그래도 후에는 '만나면 신고하면 되지'라고 계속 되뇌면서 마음을 다잡았죠.

항소심이 예상보다 길어지니까 솔직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오더라고요. 가해자 측은 시간을 지연시킬 의도였는지, 서면도 공판 당일 제출해서 저희가 방어하기 힘들게 했어요. 처음부터 신체 감정에는 대응하지 않기로 했지만, 어쨌든 그런 주장을 계속해서 저희는 계속 2차 피해를 당했죠. 항소심에서도 유죄가 인정돼서 한 번 더 매듭이 지어졌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솔직히 감정적으로는 너무 서운해요. 저희는 1년 가까이 '신천지다', '성기 모양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2차 피해를 입었는데, 그리고 가해자 쪽에서 사실 조회서를 남발해서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했거든요. 그런 게 형량에는 하나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게 좀 답답하더라고요.

언론 기사가 많은 도움이 됐어요. 누군가 내 시각을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에서 이 사건을 쓴 거잖아요. 객관적인 시각으로 '이건 너무 잘못된 일이다. 당신은 피해자다'라고 해 주니까, 당사자인 저도 자각이 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혼자 숨어서 내 탓하고 있는 사람에게, 사회에서 "이건 가해자 책임이야. 가해자가 못된 거야"라고 얘기해 주니까 자기 객관화가 되는 거죠. 친구들도 증인신문하고 나서는 수치스러워했는데, 언론 보도를 보고 위로를 받았대요. "하기 잘했다",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 힘든 일을 당한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세상이 우리 편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성폭력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한 질문도 받아 봤지만, 기본적으로 기자님들이 먼 곳까지 찾아와 취재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그 외에도 공론화 후 많은 분에게 위로를 받았어요. 기독교반성폭력센터나 강원여성연대 분들이 말씀해 주시는 것도 위로가 많이 됐어요. 그분들은 아무 죄도 없는데 오히려 저에게 미안해하시더라고요. 이렇게 대응하는 게 '귀한 일'이라고 말씀해 주시기도 했고요. 그 마음이 따뜻하게 느껴져서 감사했어요.

주변에서 이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많이 말씀해 주셨는데, 사실 처음엔 그리 와닿지 않았어요. 근데 증인 서 줬던 피해자 친구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와닿기 시작하더라고요. 피해 입은 걸 그냥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공론화 후 사람들이 분노해 주니까 친구들도 그제야 화를 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건강한 반응이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얘기해 줬어요. "가난했던 것도 네 탓이 아니고, 부모님이 학대해서 교회로 도망친 것도 네 탓이 아니"라고요. 제가 얘기했을 때는 잘 안 믿다가,(웃음) 판결과 기사가 나오니까 "그 말이 맞구나" 하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공론화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뭐 나라를 뒤흔들거나 한국교회를 바꾸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어요. 한 영혼이라도 회복된다고 한다면, 제가 회복되고 피해자 친구 한 명이라도 회복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나 싶어요. 또 어쨌든 가해자를 가둬 놓게 됐잖아요. 앞으로 비슷한 일은 못하게 해 놓은 거니까 그 부분도 의미가 있다고 봐요.

이 과정들을 뚫고 올 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은, 제가 아동 양육 시설에서 일했다는 거예요. 가정에서 학대받고 부모와 분리된 아이들을 돌보는 시설에서 일했거든요. 아이들이 부모의 돌봄이 없는 상태로 자라면 심리적으로 문제가 생겨요. 놀이 치료나 상담을 통해 애착을 형성해서 아이들이 학교도 잘 다니고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게 돕는 일을 했어요. 5년 정도 일했는데, 제일 어린아이가 생후 20개월 때 와서 7살이 됐죠. 거의 엄마 역할을 한 거예요. 그런데 제가 몸이 안 좋아져 수술을 해야 해서 몇 달 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저도 아이들도 엉엉 울고 그랬죠.

일하면서, 학대받은 아이만 가정에서 빼내 시설로 보내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전반적인 사회 환경이 바뀌어야 하는 거죠. 제가 하는 소송도 아이들이 살아갈 환경을 조금 바꾸는 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과의 관계가 힘이 많이 됐어요. 내가 학대받은 사람에서 학대받은 사람을 지켜 주는 사람이 됐다는 마음이 소송을 포기하지 않고 가게 해 줬던 것 같아요. 아이들이 주는 힘이죠. 아이들은 어떤 조건을 달고 나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무조건 사랑하는, 그런 데서 오는 힘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삼일교회에서 배운 것들

민사소송은 '해 볼 수 있는 거 다 해 보자'는 생각에 시작했어요. 나중에 돌아봤을 때, 당시 뭔가 두렵고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하자고 동생과 다짐했거든요. 언론 대응도 처음에는 꺼렸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냥 다 하자는 마음으로 했어요. 민사소송도 그런 의미예요. 소송하느라 또 비용이 들긴 할 텐데, 인생에서 한 번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돈 때문에 걱정할 건 아닌 것 같아요. 일단 '후회하지 말자, 돈은 또 벌면 되니까'라고 결심했어요.

제가 일하면서 서울에 살 때 삼일교회(송태근 목사)를 다녔어요. 전병욱 사건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제가 삼일교회 다닐 당시 교회가 전 목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어요. 제가 궁금해서 팀 모임 때 "전병욱 목사님은 어떻게 된 거야?"라고 질문했는데, '전병욱'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분위기가 얼어붙고 교인분들이 되게 불쾌해하시더라고요. "우리는 그런 얘기 하고 싶지 않아", "다 지난 일이야", "왜 궁금해해?" 대부분 이렇게 반응했어요. 삼일교회 사람들은 제가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은 몰랐거든요. 그런 거 보면서 좀 두렵기도 했어요. '교회 사람들은 이런 얘기 하는 걸 싫어하는구나. 이런 갈등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제 이야기를 해도 교회 사람들이 안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죠.

삼일교회에 오래 다니신 분과 나중에 일대일로 깊이 있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어요. 전병욱 사건을 기억해 내는 것 자체가, 그에게 설교 듣고 은혜 받고 신앙생활을 했던 모든 시간이 다 부정당하고 더럽혀진 느낌이 든다고, 그래서 싫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좀 이해가 되긴 했어요. 자기가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즐거웠던 시간까지도 다 잘못됐고 도둑질당하고 더럽혀지는 느낌이 들었다니까 당연히 얘기하기 싫었겠죠.

송태근 목사님이 그런 교회 분위기를 바꾸려고 많이 노력하신 것 같아요. 예배 후 아예 전 목사 사건 관련 브리핑과 Q&A 시간을 만들어 공적으로 이야기했어요. 송 목사님이 하신 말씀들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사건 초기 교인들이 피해자를 '꽃뱀'이라고 하는 일이 있었잖아요. 송 목사님은 교회가 성도를 보호해야 하는데 오히려 성도를 공격했다고, 가해자는 반성 없이 승승장구하고 오히려 피해자가 교회에 남아 있을 수 없게 됐다고 강하게 비판하셨어요.

교회가 전 목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 것을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세상 법정에 세우는 게 다는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였죠. 소송은 최소한으로 해야 할 기본적인 것이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 피해자들에게 지은 죄도 회개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거기서 제가 위로를 얻었던 것 같아요. 목사님이 저 대신 화내 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느낌이 들었어요. 송 목사님이 성도들 앞에서 90도로 고개 숙이며 사과하신 적도 있잖아요. 저는 기사로 보긴 했는데 많이 울었어요. 감동받아서. 삼일교회가 재발 방지를 위해 기독교반성폭력센터를 후원한 것도 의미가 크죠.

그런데 송태근 목사님이 욕을 많이 먹더라고요. '교회가 약자의 편에 서는 게 당연한 일인데 그걸 욕하는 사람이 많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도 목사님은 그냥 옳은 길 가시는구나' 싶더라고요. 그러면서 저도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던 것 같아요. 공론화한다면 이렇게 욕먹을 각오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람들 여론에 크게 휩쓸리지 말아야겠구나. 훈련이라고 해야 하나? 목사님이 그렇게 하시면 성도도 같이 훈련받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제 신앙생활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진희 씨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살기 위해 오히려 살기 위해 더 기도했다. 
진희 씨는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살기 위해 더 기도했다. 
나는 교회 공동체의 일부라고

교단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하나예요. 가해자가 구속될 때까지도 계속 교회를 운영했기 때문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는 상태였으니까요. 근데 이 일을 교단에 알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더라고요. 오래전에 친척 오빠가 저 상담해 줄 때, 이 교회가 위험하다는 걸 기침 교단에 알렸대요. 연락처를 찾기도 어려워서 춘천에서 제일 큰 침례교회에 전화했는데 "우리랑 상관없는 교회다. 난 그 목사와 안 친하다" 이런 식으로 답변이 왔대요. 그 일 이후로 '교단에 알리는 건 개인이 해 봤자구나. 한다면 어떤 단체를 통해서 해야겠구나' 싶었죠. 이번에 기독교반성폭력센터를 통해 기침 교단에 알렸는데, 그렇게 해도 뭐 바로 응답이 오거나 액션이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법원 판결이 있으면 될 줄 알았어요. 그래서 1심 판결이 날 때까지 기다린 거예요. 근데 교단 쪽에서 "2심 판결이 아직 안 나왔다" 이런 식으로 반응하더라고요. 인정하기가 싫은 건지…. "판결이 나야 우리가 뭘 할 수 있다"면서 자꾸 법적인 판단에 의지하는 건 굉장히 소극적인 자세잖아요. 교단 내에서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시인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가해자를 바로 면직·출교하지 않더라도 교단이 할 수 있는 다양한 액션이 있을 텐데, 아예 의지가 없는 것 같았어요. 한 영혼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그저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큰 것 같더라고요.

9월 교단 총회에서 결과가 나오기까지 7개월간 저에게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어요. 기독교반성폭력센터를 통해서 따로 사과를 하겠다고 했다는데, 전혀 연락받은 게 없어요. 답답한 정도가 아니라 화가 많이 났죠. 이 문제를 회피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계속 회피하고 무시하면 보통 피해자들은 너무 힘드니까 포기하잖아요. 지쳐 나가떨어지게끔 하는 게 보수적인 집단의 특징인 것 같아요. 최대한 피하고 숨겨서 피해자들이 포기하게 하는 거요. 그래서 저는 순간순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어요. 또 기자님이나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계속 관심을 가져 줬잖아요. 그런 게 힘이 많이 됐어요.

같은 교단이라도 연대 의식이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임 있는 목사들이 저러고 있는 걸 보면서… 미룬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내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기침 교단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적으로 연대 의식이 부족한 것 같아요. 누군가가 '개독'이라고 욕해도 '우리 교회는 아닌데?' 하고, 우리 교회에서 문제가 생겨도 '나는 아닌데?' 하는 거죠. 책임을 져야 할 목사들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소외감이 들더라고요. 제가 자꾸 갈등을 조장하는 느낌을 받는 거예요. 저들은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인데 제가 계속 돌을 던지는 거죠. '내가 왜 그런 사람이 돼야 하나' 소외감이 들었어요. 반대로 저는 이번 일을 통해서 제가 교회의 일부라는 느낌을 크게 받았거든요. 나는 이 공동체의 일부라고, 이 공동체의 문제는 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저에게 강하게 있더라고요.

가해자가 총회에서 제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처음에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어요. 그래도 제가 기도하면 할수록 교회가 변화하고 있는 것 같아서 위로를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아직 너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변화하려는 결단을 한 거잖아요. 그게 위로가 되더라고요. 근데 가해자가 제명된 게 교회를 떠난 피해자들에게는 크게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증인 서 준 친구는, 어차피 자기는 그 이후로 교회 안 다니니까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어요. 한편으로는 그런 안타까움이 있었어요.

교회에서 성폭력을 당한 사람들은, 목사나 교회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교회 사람들에게 당한 피해가 곧 교회에 상처받은 기억으로 남게 되는 거죠. 오히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려야 하는데, 반대로 교회를 떠나게 돼요. 제 기도 제목 중 하나예요. 교회에서 상처받고 떠난 사람들을 위한 적응 프로그램을 만드는 거요. 어떤 행사를 하자는 게 아니라 지지적인 환경을 만들자는 거예요. 교회를 떠난 친구에게 언제든 다시 돌아오고 싶으면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해요. 그 친구는 두렵다고 하더라고요. 어릴 때 피해당한 기억이 너무 강한 거죠. 이런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 왜 새 신자 프로그램은 되게 잘 갖추고 있잖아요, 교회들이.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분석인데요. 자기애성 성격장애나 반사회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타인이 자기를 우러러보게 해야 하거든요. 타인이 우러러보는 직업이 별로 없어요. 되기도 힘들고. 근데 '목사'는 권위를 갖는 직업인데도 되기가 어렵지 않아요. 교단들이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목사가 되면 안 되는 사람들을 잘 걸러 줬으면 좋겠어요. 이런 사람들이 더 이상 목사라는 직업과 교회가 가지고 있는 권위를 이용하지 않게 해 줬으면 해요.

교단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일반 교인 입장에서는 헷갈리잖아요. 제가 목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니까 주변에서 여러 이야기를 해 주더라고요. 자기가 목사에게 사기를 당했는데, 그 목사가 교회를 없애고 다른 곳에다 또 교회를 차렸다는 거예요. 저번에는 이 교단, 이번에는 저 교단, 이렇게 옮겨 다니면서요. 이건 범죄자가 한국교회 특성을 이용하는 거라고 봐요. 이런 걸 어떻게든 막아야 하지 않을까, 교단에 등록할 때 어떤 절차를 갖출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복지시설에서도 요즘에는 심리검사를 통해서 부적절한 인력을 배치하지 않는 제도가 생기고 있거든요.

이런 프로그램이나 제도가 만들어지려면 우선 교회 성폭력이 심각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죠. 근데 현실은 인정 자체를 안 하니…. 예전 직장 동료 중 한 교단 강도사가 있었는데,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그런 제도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건 곧 교회 안에 성폭력이 많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목사들은 절대 안 한다는 거예요. 목사들이 굉장히 자존심이 강해서 목회자 세계에 성폭력이 많다는 걸 시인하기도 싫어하고, 그간 묵인했던 자기 삶을 인정하기도 싫어한다는 거죠.

안전한 공간이 필요해요

편안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안전한 공간이요. 성폭력 피해자들은 수치심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게 어렵거든요. 그런 중에도 타인이 나를 안타깝고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에 대한 불편함도 있어요. 안타까운 일이 맞긴 하죠. 근데 너무 나를 불쌍한 사람, 딱한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만 보는 것도 부담이 돼요. 아마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피해자들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어찌 됐든 한 발씩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요.

저에게 피해가 회복된다는 건… 저라는 사람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행복감을 누리는 거예요. '절대 그가 나를 부수지 못했다' 그런 의미예요. 계속 기도하고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이번에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진행하는 교회 성폭력 피해자들 글쓰기 모임에 참여했는데요. 솔직하게 쓰고 돌아보면서 제 인생을 재정의해 봤어요. 요즘에는 기도 중에 '하나님이 내 아픔도 상처도 포함해서 그냥 내 인생 자체를 소중히 여기시는구나'라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가해자가 보석으로 풀려났을 때, 두려움이 큰 만큼 저도 회복하려고 더 노력했어요. 그랬더니 오히려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훨씬 더 단단해진 느낌이 들었어요. '내 앞에 나타나려면 나타나 보라지' 이런 마음도 생기고, 제가 잘 대응할 수 있을 같은 믿음도 생기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지고 단단해졌다고 느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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