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에서 태극기로

해방을 맞았다. 그동안 옥죄던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서 벗어나 잠시 자유를 찾은 듯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이내 해방 이전 훼절·부역의 유무·정도를 놓고 정죄·논쟁에 몰두하며 분열을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교회와 학교에 게양됐던 일장기는 내려졌지만 '국가'와 '민족'이라는 새로운 억압 기제가 그 자리를 대치代置해 가고 있었다.

남한 지역에서는 미군정이 시작됐다. 약 3년간 지속된 미군정기 동안 한국 사회는 남북으로 분단되고, 좌우로 분열됐다. 교회도 이 모든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일장기를 게양하던 교회에 태극기가 게양되자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당황했다. 조국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교회 지하에서 태극기를 제작하고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기억은 무의식으로 아련히 침잠한 것일까. 해방 직후 그리스도인들에게 태극기는 국가 의례라는 미명하에 강요된 신사참배와 일장기 배례를 연상케 하는 트라우마의 매개로 전락해 있었다.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독립국가 건설을 부르짖는 구호와 청사진은, 이미 익숙해진 일제의 파시즘적 퍼포먼스와 구호를 답습하며 신자들의 일상에 침투하고 있었다.

점령 직후 신속한 치안 유지와 정국 안정을 모색한 미군정은 친일 부역 인사들을 재발탁했다. 이들은 정부 요직과 경찰·군사·교육·문화·종교 등 다양한 영역의 헤게모니를 빠르게 장악했고, 이전에 누리던 특혜와 기득권을 유지·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애국심은 악당들의 최후의 피난처가 될 수 있다." - 새뮤얼 존슨

그렇다. 해방 공간에서 친일 부역 세력은 '애국'이라는 이름 뒤에 숨었다. 예상치 못한 분단 체제는 '반공이 곧 애국'이라는 도식을 정당화했다. 반공 노선을 선명하게 견지한 미군정기 친일 부역 세력은 태극기를 마치 수개월 전 일장기를 다루던 그 눈빛과 애정으로 신성히 여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기괴한 풍경을 목도하며 당대 양심 있는 시민과 그리스도인들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 이제부터라도 순전한 신앙을 지켜 나가자 다짐한 해방 공간의 신앙인들은 국가國家도 국기國旗도 언제든 '우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기억을 자연스레 담지하고 이를 경계했다. 그리고 여전히 일제강점기와 동일하게 '국기에 대한 배례'를 실시하고 있는 학교 교육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부산 금성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손양원 목사와 손명복 목사 자녀들은 학교 조례 시간에 국기 배례를 거부했다. 안동에 살던 이원영 목사도 국민학교에서 국기 배례를 강요하자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특히 이원영 목사 딸 이정순은 국기 배례를 참여하지 않기 위해 안동여자중학교에서 대구 신명학교로 전학하기까지 했다.

퇴계 이황의 14대손 봉경 이원영 목사(1986~1956).
퇴계 이황의 14대손 봉경 이원영 목사(1986~1956).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가 부산 좌천동 일신여학교 2층을 빌려 개교할 당시, 여학교 학생들이 국기 배례를 하는 모습을 본 신학생들이 이에 항의한 사례도 있으며, 1947년 경기도 파주 봉일천국민학교에서는 죽원리교회를 다니는 남준효 학생이 처음으로 혼자 국기 배례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미군정기 학교 교육 현장의 국기 배례를 둘러싼 갈등이 처음으로 지역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시점은 1947년 3월 즈음이었다. 이때 안동농림중학교(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에서 국기 배례를 거부한 학생 5명이 정학 처분을 당했던 것이다.

안동농림중학교 전경.
안동농림중학교 전경.

"(안동 19일발 UP조선) 지난 7일 안동농림중학교에서는 벌써부터 전 교장과 열여덟 직원 사이에서 알력이 있었다는데 교유 전근敎諭轉勤(교사 인사이동 - 필자 주)이 발단 되여 직원의 교장 배척排斥으로 총사직總辭職을 감행하였다. 교장은 휴교를 선언하였으나 그 후 쌍방 교섭은 결렬되어 11일 직원 측은 1. 전 직원을 복직시킬 것, 2. 금후 직원의 전근 및及 재직을 보장할 것, 3. 교장의 독재 배척 등의 7조항을 요구하고, 이어서 학생(생도) 측에서도 역시亦是 1. 교장의 독재 배척, 2. 교장의 교유(교사)에 대한 성의 부족 등을 항의하였다. 그 후 생도 측에서는 급속 복교를 탄원한 바 있었는데, 일방(한편), 학부형회장이 21일 도道 학무과에 가는 등, 당지에서는 학원의 불상사가 처음인 만큼 일반의 물의가 자자하다." ['민의 무시한 교장 - 안동농림교 불상사 발생', <서울석간>, 1947년 3월 20일 자 2면]

1947년 3월 안동농림중학교에서 발생한 사건은 당시 교장의 독재적 행태로 불거진 교사들과의 갈등, 학생들에 대한 과도한 징계 등을 이유로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징계에는 국기 배례를 거부한 학생 5명에 대한 퇴학 조치도 포함돼 있었을 것이다. 사건 발생 한 달 반쯤 후에 발행된 <독립신보> 기사는 아래와 같이 의미심장한 지적을 한다.

'민의 무시한 교장 - 안동농림교 불상사 발생', <서울석간>, 1947년 3월 20일 자 기사.
'민의 무시한 교장 - 안동농림교 불상사 발생', <서울석간>, 1947년 3월 20일 자 기사.
'안동농림중학서도 다수 학생을 퇴학', <독립신보>, 1947년 5월 9일 자 기사.
'안동농림중학서도 다수 학생을 퇴학', <독립신보>, 1947년 5월 9일 자 기사.

"[경북안동지국발] 안동농림중학교에서는 지난 1일 불순분자 그리고 교내 질서 교란자라는 다수의 학생을 퇴학 처분하였다 한다. 그런데 동교 교장 전영한 씨는 일제시대의 도회의원道會議員, 해방 후에는 독촉회장獨促會長(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 필자 주)이라 하며, 이번의 다수 학생 퇴학 처분에 대하야 비난이 크다." ['안동농림중학서도 다수 학생을 퇴학, <독립신보>, 1947년 5월 9일 자 2면]

학생들을 '불순분자', '교내 질서 교란자'로 몰아 퇴학 처분한 교장 전영한 씨는 불과 수년 전 일제 당국에 협력하는 도회의원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이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을 지내며 지역사회의 지도층, 교육자로서 대규모의 학생들을 퇴학 처분했다. <독립신보>는 이에 대한 지역사회의 충격과 비난이 크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1947년 3월 학생 5명의 퇴학 처분으로 발발한 사태는 이후 직원들의 반발과 총사직, 7월 말 재학생들의 시험 거부로 이어졌으며, 학교장은 시험 거부에 동참한 학생 143명을 추가로 퇴학 처분했다. 사태의 전개 과정은 몇몇 언론에 보도됐으며, 대강의 흐름은 신문지상 기사 제목만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1947. 3. 20. <서울석간>, '민의 무시한 교장 - 안동농림교 불상사 발생'
1947. 3. 20. <부녀일보>, '안동농림교 소동 - 교장 배척코 교유 총사직'
1947. 3. 21. <부녀일보>, '안동농림학교 소동 해결?'
1947. 5. 9. <독립신보>, '안동농림중학서도 다수 학생을 퇴학'
1947. 9. 13. <영남일보>, '150명 퇴학 처분 - 학무국서 진상 조사 착수'
1947. 9. 19. <영남일보>, '안동농림생 퇴학 처분 - 경과 진상을 발표'
1947. 10. 2. <영남일보>, '안동농림교 사건 복교 편입?'
1947. 10. 14. <부녀일보>, '민주 학원 건설 위하야 전제적 교장 파면하라 - 안동농교 퇴학처분거부투위 성명'
1947. 10. 24. <부녀일보>, '150명 퇴학 처분한 안동농교 사건 미해결'
1947. 10. 24. <영남일보>, '안동 농림교 사건 - 해결은 생도 측 자숙에서'

안동농림중학교 사태가 지역사회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도지사와 학무국 장학사들이 조사에 나섰다. 그 과정을 통해 밝혀진 재학생들의 7월 시험 거부 사유는 "전에 퇴학당한 5명의 동료를 복교시켜 달라는 요청에 대한 학교의 불응"('안동농림생 퇴학 처분 - 경과 진상을 발표', <영남일보>, 1947년 9월 19일 자)이었다. 투쟁 과정을 보도한 <부녀일보> 10월 14일 자 기사 '민주 학원 건설 위하야 전제적 교장 파면하라 - 안동농교 퇴학처분거부투위 성명'은 "날조 죄목"으로 5명이 퇴학당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친일 이력이 있는 학교장의 일방적인 국기 배례 강요', '이에 신앙 양심상 거부한 일부 학생에 대한 중징계', '교직원과 전교생의 반발과 학사의 파행' 등이 이 사태의 본질에 가까운 설명 아닐까. 결국 안동농림중학교의 '국기 배례 거부 사건'은 전교생 중 무려 150여 명이 퇴학당하며 학교와 투쟁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비화하는 촉발점이 됐다.

당시 학교 당국의 국기 배례 강요 정책에 강한 불만과 경계를 보였던 원로 이원영 목사는 안동농림고등학교 이홍원 교장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항의했다.

"국기에 경배하는 일이 신앙인으로서는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동일하므로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처벌당한 학생은 어떤 처벌이라도 각오하고 신앙 양심에 따라 국기 경배를 거부한 것이다. 그 용기와 신념이야말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되면 참 애국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양심에 어긋난 것을 '아니오'라고 거절하는 정신을 길러 주는 것이 참 교육이 아니겠으며, 다른 민족이 우리 민족을 유린할 때 용감히 항거할 줄 아는 인물을 길러 내는 것이 학교 교육이 맡은 중요한 일이 아니겠느냐" ['김세현의 증언', 임희국, <선비 목회자 봉경 이원영 연구>(기독교문사, 2001), 220쪽]

안동에서 벌어진 큰 소란은 국기 배례가 가져올 전국적 혼란에 대한 사회와 교계의 우려를 고조시킨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1월 16일 주일예배에서 손양원 목사는 사도행전 14장 8~18절, 마태복음 24장 24절을 본문 삼아 '국기 경배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설교 했다.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손양원 목사(1902~1950).
손양원 목사(1902~1950).

"국기를 보고 경배하는 것은 망국지본亡國之本입니다. 국기 경배하는 나라는 다 망합니다. 조선교회 지도자들이여, 너희는 진정한 선지자의 책임을 다하십시오. 조선의 운명은 조선교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묵시를 받아 나라의 흥망성쇠를 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다 보여 주십니다. 오늘 교회 지도자의 책임은 중합니다.
 

듣고도 보고도 알고도 말하지 않는 지도자여, 너희 죄는 더욱 중합니다. 나라를 사랑합니까? 국가의 흥망성쇠는 종교에 달려 있습니다. 종교가인 정치 지도자들이여, 종교로써 국가를 지배하십시오. 국기 경배는 우상입니다. 예수의 사진에도 경배하지 않습니다.
 

우상인 줄 알고 섬기는 자가 있고 우상인 줄 모르고 우상을 만드는 자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을 보고도 절을 못하게 합니다. 조선의 삼강오륜三綱五倫 중에 절세 가지가 있습니다. 즉 여자가 남편에게, 아들이 부모에게, 백성은 임금에게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답례할 줄 아는 자에게 합니다. 국기 경배는 우상입니다. 임금의 얼굴을 본 후에야 절해야 합니다.
 

불신자에게 국기는 기 행렬 할 때, 만세 부를 때, 나라 경절慶節때 집집에 달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기 자체입니다. 국기는 경배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다. 국기에 대한 의무는 이 세 가지입니다. 국기의 원리가 지나치면 나라가 망합니다. 조선의 태극기에는 태음太陰, 즉 우주가 들어 있습니다. 우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주인은 경배하지 않고 주인이 만든 물건에게 경배하니 죄입니다. 저도 태극기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절은 아니합니다. [손양원, '국기 경배에 대하여', 1947년 11월 16일 주일예배 설교, <한국 기독교 지도자 강단 설교 - 손양원>(홍성사, 2009), 55~56쪽]

손양원 목사의 눈에는 곧 도래할 대한민국 신생 정부의 미숙하고 어설픈 국가주의적 전횡·강요가 선연히 그려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준엄하게 경고하는 '태극기 우상화'는 이내 현실이 됐다. 그 자신도 한국인이기에 태극기에 대한 애정을 부인하지 않았으나, 절을 하는 행위에는 결코 타협할 수 없었다. 손 목사의 경고와 함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때는 가까워 오고 있었다.

태극기, 우상인가 상징인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고, 헌법은 종교의자유를 보장했다. 하지만 정부가 진행하는 국가 의례는 일제 말기 파시즘의 습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김양선 목사는 그의 저서 <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서 "1949년 봄부터 일부의 국가지상주의자들에 의해 태극기에 대한 경례가 강요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해방 직후 남산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1945년).
해방 직후 남산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모습(1945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경축식에서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1948년 8월 15일).

1949년 4월 28일 경기도 파주 조리면 죽원리교회(현 대원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초등학생 수십 명이 국기 배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이 학교 교장이 기독교인 학생 42명을 퇴학 처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래는 <동아일보>에 소개된 관련 기사인데, 아마도 정부 당국의 입장을 소개한 지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4년 건축 직후의 죽원리교회(현 대원교회, 사진 위)와 죽원리교회 주일학교 교사 및 학생들(1948년 12월 26일, 사진 아래). 사진 제공 대원장로교회
1954년 건축 직후의 죽원리교회(현 대원교회, 사진 위)와 죽원리교회 주일학교 교사 및 학생들(1948년 12월 26일, 사진 아래). 사진 제공 대원장로교회

"일부 종교인이 국기 배례는 우상숭배라고 이를 거부하고 있으나 이는 절대로 우상숭배가 아니오 우리 국기는 우리 국가의 상징이기 때문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국가 밑에서 종교를 발전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국기 배례를 거부하여 퇴학된 학생에 대해서는 만약 국기 배례를 승인하면 복교시키겠다." ['談官長安 - 국기 배례는 당연', <동아일보>, 1949년 5월 13일 자]

정부 당국의 논리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닌, 단순한 국가 의례"라며 기독교 지도자들을 회유·설득하던 일제 당국의 논리와 매우 흡사하다. 당시 안호상 문교부장관(대종교 핵심 인물)은 "극소수의 종교인이 우상숭배라고 해서 국기 배례를 반대하고 있는 듯하나 이는 그릇된 해석이며 이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국가의 상징인 국기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종교 신앙은 자유거니와 국가를 떠난 종교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연합신문, 1949년 5월 13일 자]."라고 주장했다.

국기 배례 거부 사건이 전국적인 교계 이슈로 부상하게 된 현장인 파주 봉일천초등학교. 사진 제공 봉일천초등학교
국기 배례 거부 사건이 전국적인 교계 이슈로 부상하게 된 현장인 파주 봉일천초등학교. 사진 제공 봉일천초등학교
'국기 배례 거부한 국민교생 42명을 퇴학', <자유신문>, 1949년 5월 8일 자 기사.
'국기 배례 거부한 국민교생 42명을 퇴학', <자유신문>, 1949년 5월 8일 자 기사.

한국 교계에서도 일련의 반응이 나타났다. 제35회 장로교 총회(1949년 4월 19~23일)에서는 경남노회·군산노회가 '국기 경례 방식 변경'에 대한 헌의를 제출했고, 죽원리교회 최중해 목사는 봉일천국민학교 국기 배례 거부 사건에 대해 보고했으며, 총회는 '국기에 대한 주목례 변경 문제'를 손양원 목사에게 맡겨 정부 당국과 교섭하는 것으로 결의했다.

한국기독교연합회(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5월 11일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기 배례를 '주목례'로 하자는 진정서를 제출해 찬성 회신을 받았다. 그리고 17일 한국기독교연합회 실행위원회 주최로 각 파 대표 연석회의를 실시해 현 사태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공표했다.

파주 대원교회에 세워진 100주년 기념 십계명 신앙비. "그들은 대원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퇴학당하고 집에서 쫓겨도 나고 이 소식을 들은 전국 교회는 기도했고, 대통령에게 진정서가 전달되고, 국무회의를 소집한 대통령은 행사시 '국기에 대한 경례' 대신 '국기에 대하여 주목(오른손을 왼쪽 가슴에)'으로 결정했고, 학생들은 복교가 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뒷면(사진 오른쪽)에는 국기 배례 거부에 참여한 이들(교장·부장·반사·학생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사진 제공 대원교회
파주 대원교회에 세워진 100주년 기념 십계명 신앙비. "그들은 대원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퇴학당하고 집에서 쫓겨도 나고 이 소식을 들은 전국 교회는 기도했고, 대통령에게 진정서가 전달되고, 국무회의를 소집한 대통령은 행사시 '국기에 대한 경례' 대신 '국기에 대하여 주목(오른손을 왼쪽 가슴에)'으로 결정했고, 학생들은 복교가 되었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뒷면(사진 오른쪽)에는 국기 배례 거부에 참여한 이들(교장·부장·반사·학생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사진 제공 대원교회
죽원리교회 주일학교 교장이자 봉일천 국기 배례 거부 사건으로 구속된 최중해 목사(사진 가운데, 1949년 3월). 사진 제공 대원교회
죽원리교회 주일학교 교장이자 봉일천 국기 배례 거부 사건으로 구속된 최중해 목사(사진 가운데, 1949년 3월). 사진 제공 대원교회

"한국기독교연합회 실행위원회에서 17일 기독교 각파 대표와의 연석회의를 열고 국기 배례가 우상숭배냐 아니냐를 의제로 격론을 전개한 끝에 국기는 우상이 아니나 현재의 배례 방법은 일제 잔재적인 형식이라는 데 대체의 의견 일치를 보았다고 한다. 파주군 봉일천국민학교의 교인 가정 아동의 42명이 국기 배례를 거부하여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을 계기로 기독교 각 파에서는 국기 배례가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일대 파문을 일으켜 그 귀추는 한 개의 사회문제로 주목되었던 것이다. 17일의 연석회에서도 각 파간의 의견이 구구하여 좀처럼 통일적인 결론은 얻기 곤란하였다고 하는데 대체 이번의 결론으로 기독교인들의 국기 내지 이의 배례에 관한 태도는 결정된 것으로 동회의同會議의 대체 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국기는 우상이 아니다. 一. 현재의 국기 배례 방법은 일제 잔재적인 형식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우상숭배라 할 염려가 있다. 一. 국기를 우상화하던 일본과 나치 독일은 패망하였다. 一. 기독교는 애국적인 양심에서 국기의 우상화를 방지하려는 것이다." ['국기 배례 문제에 기독교 각 파 의견 일치', <동아일보>, 1949년 5월 23일 자 2면]

'국기는 우상이 아니다 - 기독교 각 교파 의견 일치', <영남일보>, 1949년 5월 22일 자 기사.
'국기는 우상이 아니다 - 기독교 각 교파 의견 일치', <영남일보>, 1949년 5월 22일 자 기사.
'국기 배례 문제에 기독교 각 교파 의견 일치' <동아일보>, 1949년 5월 23일 자 2면 기사.
'국기 배례 문제에 기독교 각 교파 의견 일치' <동아일보>, 1949년 5월 23일 자 2면 기사.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국기가 우상이 아닌 것은 인정하지만, 우상화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국기 배례 문제에 대하야 그리스도교의 입장을 천명함>이라는 8쪽 분량의 소책자를 간행해 적극적인 입장을 펼쳤으며, 국기 우상화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해 1949년 10월 20일에는 안호상 문교부장관의 반기독교적 문교 정책을 조사하는 특별대책위원회를 조직하게 됐다. 또한 대한예수교장로회는 1950년 3월 국기 배례를 '주목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 청원서('경애하옵는 이 대통령 각하')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일제의 '일장기 배례'와 유사한 형태의 '태극기 배례' 의식은 기독교적 규범과 신앙 양심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우상숭배'로 인식돼, 당시 친기독교적 성격을 띤 이승만 정부가 '배례拜禮'를 '주목례注目禮'로 전환하는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정부에 국기 배례를 '주목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공개 청원서 '경애하옵는 이 대통령 각하'(1950년 3월). 사진 제공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정부에 국기 배례를 '주목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 공개 청원서 '경애하옵는 이 대통령 각하'(1950년 3월). 사진 제공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국기 주목례를 실시하는 모습. 영화 '국제시장' 갈무리
국기 주목례를 실시하는 모습. 영화 '국제시장' 갈무리

"지난 25일 개회한 국무회의에서는 종전에 실시하고 있던 국기에 대한 예식을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우리가 국기에 대하여 존경하며 애국심을 가지는 것은 국기가 민족을 대표하는 상징인 까닭에 종래 우리가 허리를 꾸부리고 배례하는 것은 일제식이고 우상숭배의 형식에 가까우므로 금번에 이를 변경하여 다만 국기에 대하여 주목하면서 부동자세로 '차렷'한 후에 오른편 손을 왼편 가슴 심장 위에 대기로 하였다. 그런데 군인 및 경찰관만은 종전 예식대로 실시하게 되었다 한다. 또한 각종 의식 때에 묵도는 일체 폐지하기로 되었다 한다. (이상 <동아일보> 제847호에 기록된 대로 옮겨 적음] ('국기에 대한 예식을 변경 - 오른편 손을 왼편 가슴에', <조선감리회보>, 1950년 4·5월호, 15쪽)

'배례'에서 '주목례'로 변경됐지만

1949년 국기 배례가 주목례로 변경됐지만, 봉일천초등학교 국기 배례 거부 사건 이후로도 함평국교와 안동 남후국교, 1950년대에 들어서도 횡성 공근국교와 거창 위천국교, 울산 방어진초급중학교 등에서 다양한 유형의 국기 배례 거부와 이에 따른 탄압 사건이 발생했다. 관련 기사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번 국기 배례 거부 문제로 파주군 봉일천과 고양 지도초등학교 아동 수십 명이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함은 기보한 바이어니와 함평초등학교 교사 임영권(가명, 20)은 기독교 신자로서 요즈음 일부에서 국기우상론國旗偶像論이 대두하자 국기 배례는 일제 잔재 행위이니 주목은 하나 배례는 할 수 없다 하여 학교 당국의 누차에 긍한 주의에도 불응하고 최후에는 사표까지 제출하였다는데 학교 당국의 사표 수리는 지난번 문교부 방침의 견지로 보나 학원 내에서의 개인 자유행동을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므로 책임자로서 부득이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는데, 이 문제는 교육상 견지로나 정치적 관점으로 보아 중대한 문제인 만큼 경시할 수 없을 것이라 하며 전기前記 임(교사)은 동교의 모범 교원이었던 만큼 동(임) 교사의 사표 제출에는 일반이 애석히 여기고 있다고 한다." ['(각지 소식) 국민학교 교사가 국기 배례 거부 - 주목은 하나 배례는 일제 잔재 행위라고' <호남신문>, 1949년 6월 15일 자 2면]

"기독 신자의 국기 배례 폐지에 대한 진정 문제 - 그것은 부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전국적인 문제인 만큼 나로서는 가부可否에 대하야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이 사건 처리는 물론 중앙 당국에서 할 것임으로 경찰로서는 동태를 조사하여 보고할 따름이나 기독 신자의 진정은 실로 유감으로 생각한다." ['최 경찰국장, 기자회견담, 양산 폭도 침입은 보복 수단, 이재민들은 응급 구호, 기독교인의 국기 배례 폐지설 동태를 조사', <자유민보>, 1950년 2월 25일 자]

"[방어진] 한동안 진□ 모 중학교 생도가 국기 배례를 거부하여 세간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 기억도 사라지지 아니한 이때 방어진초급중학교 생도 5명이 □□히 성명姓名을 비합 □이 아침 조례 시에 국기 배례를 거부한 불순 생도가 있어 학교 당국으로부터 이들 생도에 대하여 단호 퇴학 처분을 하였다는데 □제 그 진상을 탐문컨대 이들 생도는 모두가 기독교 신자로서 우상을 숭배치 아니한다는 그릇된 기독교 신조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국기 배례 거부 학생 퇴학 처분', <자유민보>, 1950년 4월 23일 자 2면]

아래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 직전(1947~1950)까지 '국기 배례'를 둘러싸고 전개된 교회와 국가 간 갈등 상황을 요약한 내용이다. 

1947. 파주 죽원리 교회 주일학교 학생 남준효 국기 배례 거부.
1947. 3. 안동농림고교 국기 배례 거부 사건 → 거부 학생들 퇴학.
1947. 월남 재건교회 무인가 초등학교 운영 → 박형채 교장, 국가 교육 거부.
1948. 6. 고양 지도(능곡)국민학교 학생 수십 명 국기 배례 거부 → 몽둥이로 구타당함. 모두 퇴학 처분 후 30여명은 학교에 사과 후 복교 조치. 나머지 12명은 서울 모 학교로 원거리 통학.
1949. 5. 파주 봉일천국민학교 국기 배례 거부 → 42명 퇴학.
1949. 6. 함평초등학교 교사 임영권(가명, 20) 국기 배례 거부 → 학교 당국의 주의를 받던 중 사직. 
1949. 8. 안동 남후국민학교 국기 배례 거부 → 50여명 퇴학(김수만 장로 자녀 포함).
1950. 1. 안중섭 전도사의 수난. 공근국민학교 학생들 국기 배례 거부로 전도사 연행 → 안 전도사 공산주의자로 몰려 춘천형무소에 수감, 검찰 10년 구형, 수감 80일만에서 '주목례' 정책으로 변경돼 무죄 석방.
1950. 3. 거창 위천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수난. 3·1절 행사에서 위천국교 학생 54명 국기 배례 거부 → 교사와 학생들 군인에게 구타당해 피범벅이 되고 아수라장. 교사 2명과 53명 학생은 경찰 이감.
1950. 4. 울산 방어진초급중학교 학생 5명이 아침 조례 국기 배례 거부 → 모두 퇴학 처분.

국기 배례가 주목례로 바뀐 상황에서도 1972년 유신 체제부터는 다시 국가주의가 강화되면서 유사한 사건들이 재발했다. (이하 <한겨레21>, 2006년 1월 10일 자, 3월 28일 자 참조)

1972년 광양 진원중앙국민학교에서 학생 50여 명이 국기 경례를 거부해 경찰들이 10대 학생들을 심문·체벌·추궁했으며, 주일학교 교사 양영례 씨는 국기·국장을 비방한 혐의로 구속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양씨는 1개월여를 순천교도소에 복역하다 보석으로 풀려났다.

같은 해 제천 동명초등학교 학생들이 국기 경례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남천교회 백영침 목사와 주일학교 강태호 교사를 국기 경례 거부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백 목사와 강 씨는 자신들의 애국심을 강조하며 종교적 차원에서 우상숭배를 금하는 십계명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점을 변증했다. 하지만 2개월 정도 구치소에 있는 동안 험한 조사 과정으로 온몸이 피멍으로 얼룩졌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애국심' 입증에 주력하여 마침내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

1973년 9월에는 김해여고에서 국기 경례를 거부한 기독교인 학생 6명이 제적당했다. 교련 검열 대회 준비 과정에서 35명의 국기 경례 거부자가 적발되자 추후 서약서에 연명하지 않는 6명을 교장 직권으로 제적한 것이다. 이에 학생들은 헌법이 보장한 양심과 종교의자유를 침해당했다면서 제적 처분 취소소송을 냈지만 3년여의 재판 끝에 대법원은 학교의 손을 들어 줬다.

국기 배례를 홍보하는 영화. 해방 직후 진행된 국기 신성화 및 우상화 정책은 독재 정권에 권위를 부여하고 국가 폭력을 정당화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국기 배례를 홍보하는 영화. 해방 직후 진행된 국기 신성화 및 우상화 정책은 독재 정권에 권위를 부여하고 국가 폭력을 정당화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이상의 사건들을 살펴보면 1970년대 사법부는 국가주의와 종교적 양심의자유 사이에서 일관성 없는 엇갈린 판결을 내려 신앙 양심을 지키려 했던 신앙인들을 '반국가 사상범'으로 낙인찍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주변 기독교인들마저 그들의 행동을 극단적이라고 평가하며 냉소했다고 한다. 1972년 유신 체제 출범으로 더욱 강화된 국가주의와 독재 체제에 순응적이었던 당시 한국교회 대다수의 정체성과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강요된 충성과 국가의 성역화는 마치 1930년대 말 일장기 배례와 동방 요배, 황국 신민 서사 제창을 강요하던 일제 당국 및 이에 순응했던 한국교회 모습과 극명하게 겹쳐 보인다.

반면 일제강점기, 불굴의 신앙 의지와 저항 정신을 계승해 독재 정권의 국가주의와 국기 숭배의 구습에 저항했던 소수의 보수적 신앙인들은 해방 이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용공분자', '공산주의자', '반국가 사범'으로 규정됐다. 분단과 한국전쟁, 좌우 분열과 이념 대립은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 또한 굴절시키고 왜곡하는 역사의 일그러진 프리즘이 되고 말았다. 분단과 냉전 체제는 한국 기독교에서 '보수'의 자리를 바꿔치기 했다. 그 자리에는 일제 말기 교회 지도자들이 권력과 안위를 보장받으며 거래했던 '욕망'이라는 물신, 우상숭배가 슬며시 똬리를 틀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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