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과 같이 좋은 날씨는, 7월 4일 미국인들의 축제를 위해 마련된 드문 날씨이다. 맑은 하늘, 산들바람과 향기로운 공기는 이날을 완벽한 휴일로 만들어 주었다. 국방부에서 친절하게 빌려준 천막이 햇빛을 가려 주었고, 많은 경찰들은 이전에 이런 모임을 본 적이 없는 한국 군중이 밀려오는 것을 제재하고 있었다.

 

피아노 전주로 기념식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기도를 드리고, 의장 H. G. 아펜젤러가 몇 마디 말을 했다. 애국심을 부르는 몇몇 합창에 이어서 독립선언문 낭독이 있었고, 이어서 연설이 시작되었다. 

 

'동방에 온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이라는 연설이 있었는데, 정열적인 연설로, 앵글로색슨의 열정과 헌신이 동방 국민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즉 선교사들이 설교만 하러 여기 온 것이 아니고, 그들 앞에서 모범적 삶을 보여 주려고 온 점을 강조하였고, 이렇게 유익한 선교 활동의 범위는 인류가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까지 미쳐야 한다고 했다. 선교사의 봉사 형태는 다양하지만 모든 봉사 속에는 앵글로색슨 문명이 기반이며, 방파제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우리 목사님의 연설문을 들었는데, 진정한 애국심이란 협소하고 자기중심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남의 장점을 수용하는 넓고도 관대한 감화력이지 부풀리거나 허세를 부리거나 이상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조목조목 이론을 전개하는 내용이었다. 이 연설은 특히 서울과 같은 국제적인 도시에 사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유익한 충고로 들렸다." [H. G. Appenzeller, '7월 4일 축제(1896)', <아펜젤러와 한국>(배재대학교, 2012), 53~54쪽]

위 글은 1896년 서울에서 개최한 미국 독립기념식 축제 행사를 참가한 <독립신문>의 서재필이 영문으로 전체적인 내용을 정리한 기사의 일부다. 초기 내한 선교사의 다수가 미국인이었다는 점에서 한국교회는 미국교회의 종교적·정치적·문화적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00년 남짓한 신생독립국가였던 미국 특유의 애국주의는 개화의 기치를 내걸고 사대를 넘어 독립의 길을 모색하고 있던 한국의 당대 개화파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당연한 태도로 인식됐을 것이다.

1861년 간행된 '컬럼비아 만세(Hail Columbia)' 악보 표지. 이 곡은 1931년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가 국가로 제정되기 전까지 비공식적인 미합중국의 국가로 불렸다.
1861년 간행된 '컬럼비아 만세(Hail Columbia)' 악보 표지. 이 곡은 1931년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가 국가로 제정되기 전까지 비공식적인 미합중국의 국가로 불렸다.

이날 행사에서 서재필은 회중을 대표해 '미국 독립선언문(1776)'을 낭독했으며, 제창된 주요 노래들을 순서대로 열거하면 '아메리카', '공화국전투찬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 '양키 두들(Yankee Doodle, 미국에서 애국심을 표현하며 즐겨 불린 노래이며, 독립전쟁 당시 군가로 쓰였다. 코네티컷주의 주가이기도 하다.)', '성조기(The Star-Spangled Banner, 1931년 이후 현재까지 미국의 국가)', '컬럼비아 만세(Hail Columbia, 1931년까지 비공식적으로 사용된 미국의 국가)'등이었다. 행사에서 불린 모든 노래가 찬송가가 아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군가·애국가였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동방에 온 앵글로색슨 선교사들'이라는 연설은 19세기 말 미국인 내한 선교사들의 세계 인식과 선교관을 잘 보여 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단순히 복음의 전파라는 종교적 역할 수행에만 국한하지 않고 '앵글로색슨'의 민족적·국가적 모델을 선교 현장에 이식하는 것, 즉 미국식 문명· 문화·정치·경제 등 "인류가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로의 선교적 확대를 넓은 의미의 '선교'라고 인식한 것이다. 그들이 보여 준 애국심과 애국적 태도 또한 그들이 한반도에서 자주독립국을 모색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선교의 일부였음을 언더우드의 연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행사의 마지막 순서는 '국가를 위한 기도'였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미국 독립기념일 외에도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탄생일'을 축일로 기념해 즐겼다. 사진은 1900년 미국공사관 내 알렌의 공관에서 벽 전면에 성조기를 게양하고 가든파티를 즐긴 선교사들의 모습이다. 참석자들은 워싱턴 시대의 의상을 입고 미국 건국 초기의 역사를 연극으로 시연했다. 사진 왼쪽부터 궁내부 고문관 샌즈, 전기회사 기술자 모리스, 선교사 노블 부인, 존스 부인, 정신여학교 교사 웜볼드, 아펜젤러, 벙커 선교사다. 이처럼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선교 현장에서 성조기의 게양·게시를 통해 강렬한 애국심을 표현했다.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미국 독립기념일 외에도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탄생일'을 축일로 기념해 즐겼다. 사진은 1900년 미국공사관 내 알렌의 공관에서 벽 전면에 성조기를 게양하고 가든파티를 즐긴 선교사들의 모습이다. 참석자들은 워싱턴 시대의 의상을 입고 미국 건국 초기의 역사를 연극으로 시연했다. 사진 왼쪽부터 궁내부 고문관 샌즈, 전기회사 기술자 모리스, 선교사 노블 부인, 존스 부인, 정신여학교 교사 웜볼드, 아펜젤러, 벙커 선교사다. 이처럼 초기 내한 선교사들은 선교 현장에서 성조기의 게양·게시를 통해 강렬한 애국심을 표현했다.
초기 한국교회의 성조기와 태극기 게양:
동경과 우호의 표현

선교 초기부터 미국인 선교사들이 적극적으로 보여 준 애국적인 국가 의례·의식·퍼포먼스와 기념물 제작 등의 행태는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독립문 건립, 태극기 공포·보급, 한국인의 민족 공동체, 한 국가의 시민이라는 정체성 발견 등은 이러한 선교적 특징·성격과 연동된 현상이었다. 당시 독립협회를 주도했던 이완용도 독립문 정초식에서 다음과 같은 친미적 연설을 통해 미국을 하나의 근대 독립국가의 모델로 상정한 바 있다.

"그 후 외부대신 이완용 씨가 연설하되 조선 전정前程이 어떠할까 한 문제를 가지고 연설을 하는데, 의논이 모두 절당하고 이치가 있더라. 독립을 하면 나라가 미국과 같이 세계에 부강한 나라가 될 터이요, 만일 조선 인민이 합심을 못하여 서로 싸우고 서로 해하려고 할 지경이면 구라파에 있는 펄낸(폴란드)이란 나라 모양으로 모두 찢겨 남의 종이 될 터이라. 세계 사기(역사)에 두 본보기가 있으니 조선 사람은 둘 중에 하나를 뽑아 미국같이 독립이 되야 세계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든지 펄낸 같이 망하든지 좌우간에 사람 하기에 있는지라. 조선 사람들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하더라." ('독립관 연회',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자)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근대 시민 국가의 모델로서의 미국에 대한 동경·우호의 감정을 교회와 사회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초기 한국교회의 각종 행사에서 태극기뿐만 아니라 성조기도 함께 게양한 여러 사례가 확인된다.

조이스 감독의 방한을 맞아 태극기와 성조기를 높이 게양했던 돈의문.
조이스 감독의 방한을 맞아 태극기와 성조기를 높이 게양했던 돈의문.

"이번 감독이 나오신 후 5월 9일 예배를 처음 드릴 것인데 배재학당은 좁아서 능히 여러분이 움직일 수도 없는지라 정동 새 회당이 아직 완성은 되지 못하였으나 대강 수리는 하였으니 거기서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여러 도시 각처의 교중 형제자매들이 다 모였는데 남녀노소 합하여 천여 명이었다. 서대문 위에 대조선 국기와 대미국 국기를 보기 좋게 높이 달고 전도소 앞에는 각색 화초로 아름답게 단장하고 마루 한가운데는 흰색 포장을 길게 치고 남녀 교우가 좌우로 장소를 나누어 앉았다. 그 후에 감독께서 전도하시고 시크란돈(스크랜턴) 목사가 우리말로 번역하여 들려주는데 누가복음 5장 1절부터 4절까지 보신 후에 깊은 뜻과 참 이치를 절절히 해석하며 글자마다 형용하여 한 시간 동안 강론하시니 듣는 자 뉘 아니 감복하였겠는가? 후에 조원시(존스) 목사가 또 연속하여 논설하니 그 넓은 곳에 빈틈없이 앉은 사람들이 모두 흐트러짐이 없고 조금도 떠들지 않고 다 재미있게 들으며 기쁜 마음으로 일제히 찬미하는 소리에 북악산이 진동하는 듯하였다." ['회중신문', <죠선크리스도인회보>, 1897년 5월 12일 자]

1897년 제12회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연회에 참석차 중국에 주재하던 조이스 감독(Bishop I. W. Joyce)이 서울을 방문했다. 당시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은 준공을 보지 못하였지만 대강 자리를 마련해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1000여 명이 운집했다고 전한다. 당시 조이스 감독이 주재한 연회에서는 감리회의 청년 선교 단체인 엡웟청년회를 정식으로 조직했다. 당시는 독립문의 건립(1897년 11월 20일 준공)과 시기가 겹쳐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한껏 부풀었을 때였다. 사람들은 돈의문(서대문)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보기 좋게 높이" 달았다. 이러한 현상은 19세기 말 한국 사회가 동경하고 모델로 삼았던 우호적 국가가 미국이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기독교인들은 성탄절에 황제의 나이 수 만큼의 태극등을 게양한 것과 더불어 교회당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교차해 설치하기도 했다. 다음은 1900년의 인천 내리교회 성탄절의 풍경이다.

"이번 구세주의 탄일을 당하여 본 교회에서 기쁜 마음으로 경축할새 회당 안에는 구세주 강생 여섯 자를 크게 써서 달고 홍십자기를 한문으로 '금일대벽성위이생구주' 열 자를 금자로 새겨 전도소에 달고 좌우에는 태극기와 미국기를 달았으며 그 앞에는 등 열다섯 개에 국문으로 '오늘 대벽성에 우리 위해 구주 나셨네' 열다섯 자를 써서 높이 달고 가운데에는 그리스도 탄일 나무를 성양 물종으로 단장하여 세웠으며, 밖에 대문 앞에는 청송으로 취병을 틀어 세우고 그 밑에는 큰 등으로 금자로 '구주탄일경축' 일곱 자를 한문으로 크게 써서 달고 그 앞에는 십자기와 태극기를 엇메어 끼었으며 각색 등 수백 여 개를 상하로 달았습니다. ['엡웟청년회: 제물포교회', <대한크리스도인회보>, 1900년 1월 10일 자]

성탄절에 교회 대문 앞에 십자기와 태극기를 교차 게양하는 것과 더불어 교회 내부 좌우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교차 게양한 풍경은 오늘날 교회에서는 가히 상상이 되지 않는 풍경이지만, 이를 통해 당시 한국교회가 기독교 복음의 메신저이자 추종해야 할 모델국으로 '미국'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미국을 향한 한국교회의 우호적 표현은 평양에서 사역하다 본국으로 귀국하게 된 사무엘 오스틴 마펫(마포삼열) 선교사의 송별 행사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음은 길선주 목사가 <그리스도신문>에 기고한 평양 소식의 일부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대동강과 모란봉, 평양성 북성의 문루들. 마펫 선교사의 송별회(1905년) 당시 이곳에서 배 10척틀 띄우고 각 배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게양한 후 전별회를 성대히 거행했다. 사진 제공 미디어한국학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대동강과 모란봉, 평양성 북성의 문루들. 마펫 선교사의 송별회(1905년) 당시 이곳에서 배 10척틀 띄우고 각 배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게양한 후 전별회를 성대히 거행했다. 사진 제공 미디어한국학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숭실학교 졸업식(1907년)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고,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숭실학교 졸업식(1907년)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고,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양되어 있다.
평양 장대현교회 초기 당회원들, 중앙이 길선주 목사, 왼쪽이 마펫[마포삼열], 오른쪽이 그레이엄 리[이길함] 선교사다.
평양 장대현교회 초기 당회원들, 사진 중앙이 길선주 목사, 그의 왼쪽이 마펫[마포삼열], 오른쪽이 그레이엄 리[이길함] 선교사다.

"양 6월 1일에 마 목사께서 이곳에서 떠나 본국으로 들어가는데 몇 날 전에 이곳 형제 수삼백 명이 한 전별회를 열고 대동강에 수상선 10척을 준비하야 모든 풍류와 각색 음식을 갖춘 후에 모든 뱃머리마다 태극기를 높이 달고 각 목사 탄 배에는 미국기호(성조기)와 태극기를 쌍으로 단 후에 강파에 떠서 재미있는 풍류를 치며 좋은 노래를 하며 기쁜 찬미로 즐거이 놀고 헤어진 후에 그 떠나기 전날에 또 각 목사와 각 부인들이 일본 부리사와 그 다른 일본 사람과 이곳 장로 두 사람이 일제히 회집하야 전별회를 열고 리길함 목사가 회장이 되어 영어로 전별하는 연설을 하는데 목사 2~3인이 연설한 후에 마 목사께서 연설할 때에 모든 목사와 부인들이 이별을 슬퍼하여 눈물을 흘리더라. (중략)

 

그 이튿날 신학도 오십 명이 서로 사랑하는 정을 기념하고자 각각 열심히 돈을 모아 은으로 기념장 두 개를 만들어 한 개는 목사께 드리고 한 개는 부인께 드렸는데, 그 기념장 만든 법식은 가운데에는 태극기호를 파란으로 놓고 가장자리에는 국문으로 '대한국 신학부 학도등 사랑표'라 하고 뒷 면에는 '마 목사 각하'라고 하고 자위 옆에 '성신보호'라 새겼고 부인께 드리는 기념장도 이와 같이 새기고 '마 부인 각하'라 하였으며 그 기념장을 드릴 때에 신학도들이 일제히 모여 학도 중 두 사람이 총대로 한 학도는 마 목사께 기념장을 드리고 한 학도는 부인께 기념장을 드린 후 학도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떠날 때에 네 곳 소학당 학도들 수삼백 명이 태극기를 받고 일제히 모이고 세 곳 여소학당 학도들 수백 명이 일제히 모여 각 목사와 각 부인들과 남녀교우 천여 명이 일제히 모여 외성 정거장으로 가서 모든 학도들이 삽보를 벗어 두르며 남녀교우들은 수건을 둘러 전별할 때에 마 목사와 그 부인과 여러 형제자매들이 다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랑하는 정이 밀밀하여 이별을 슬퍼하니 장하도다.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길 쟝로, '평양래신', <그리스도신문> 제10권 제26호, 1906년 6월 28일 자]

마펫은 이날 전별회의 감동에 대해 "저는 겨우 16년 만에 평양시에 그토록 뚜렷한 변화가 왔다는 것을 깨닫기가 힘들었습니다. 16년 전 이달 그곳에 처음 들어갔을 때 그 도시에는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었습니다. (중략) 남성, 여성, 남학생, 여학생이 모두 줄지어 서서 송별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볼 때 우리의 가슴은 벅찼습니다. (중략) 우리는 주님께서 한국에서 섬기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마포삼열, 옥성득 편역, <마포삼열 자료집 4: 1904~1906>(새물결플러스, 2017), 537쪽]라고 기록했다.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서 사역한 16년 동안 서북 지역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에 평양 시민들은 물론 선교사 스스로도 크게 고무된 흔적이 역력하다. 아울러 미국과 한국의 우호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커다란 성취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확신에 차 있는 듯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 초기 한국 기독교 내부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더불어 게양된 풍경은 기독교 신앙이 새로운 국가 공동체와 시대를 열어 가는 이데올로기로서 양국 간에 적극 수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서울 거리에 나부낀 성조기:
망국의 지푸라기

"모건 미 장관은 예상되는 손님들의 환영 계획에 있어서 서울의 자원을 고갈시켰다. 한국군과 일본군, 황실악대, 루스벨트 여사의 황실용 가마를 비롯한 궁궐의 여행용 의자 등이 연회를 기다렸고, 길가에 서서 몇 시간 동안이나 기다렸던 한국인들의 긴 행렬이 연회 장소로 향했다. 한국의 관료들은 또한 가능한 한 모든 가게와 집 앞에 성조기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이날을 기리려고 했다. 각각의 경우에 미국 국기는 '가정에서 만든' 것이었다." ['Happenings of the Month: The Bible Conference', <The Korea Methodist>, Vol.1, No.11, 1905년 9월 10일 자]

1905년 9월 간행된 미감리회 선교 잡지 <The Korea Methodist>의 기사다. 미국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50여 명의 제국순방단을 조직해 한·중·일을 순방하는 과정에서 중국에 이어 9월 19일 한국을 방문했던 당시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고종 황제는 일제의 국권 침탈 야욕에 맞서 고군분투 중이었으며, 미국 대통령 딸의 방한 소식에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앨리스 루즈벨트를 국빈급으로 환대했다. 황실에서는 앨리스를 위해 황실용 전용 기차·가마를 비롯한 최대한의 인원과 자원을 제공했다. 심지어 앨리스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순방단 일행이 지나가는 동선마다 환영 인파를 동원했으며, 거리의 모든 집과 상점마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게양하게 했다.

앨리스 루즈벨트가 대구를 방문했을 당시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양된 경상북도관찰부 정문 앞 풍경이다. 문루에는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라는 편액이 붙어 있고 아래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교차 게양돼 있다. 코넬대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 촬영
앨리스 루즈벨트가 대구를 방문했을 당시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양된 경상북도관찰부 정문 앞 풍경이다. 문루에는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라는 편액이 붙어 있고 아래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교차 게양돼 있다. 코넬대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 촬영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앵> 1905년 10월 8일 자 표지에 실린, 황실 가마를 타고 구한국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궁으로 들어가는 앨리스 루즈벨트의 모습.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앵> 1905년 10월 8일 자 표지에 실린, 황실 가마를 타고 구한국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궁으로 들어가는 앨리스 루즈벨트의 모습.

이러한 정부 당국의 과도하다 싶은 조치를 지켜본 당시 <대한매일신보> 논설위원은 성조기와 태극기의 거리 게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적인 입장을 게재했다. 

"원래 한국은 가까운 나라隣邦 일본日本과 같지 않아不同 겉으로만 좋게 보이려 하는 것은 오히려 의미 없는 일不用外飾로 보거늘 이제 앞으로는至于此日 도성 내 모든 집집마다滿城家戶 한미 국기를 교차해 높이 달아 놓아交叉高掛 경의를 표하니以表敬意 놀랍고 괴이한 일이라고 할만可謂驚怪之事 하다." ['논설: 令娘嘉賓', <대한매일신보>, 1905년 9월 22일 자]

1905년 미국 대통령 딸의 방한에 대한 한국 사회의 호들갑을 <대한매일신보>는 "놀랍고 괴이한 일"이라고 일갈했다. 소위 일본인의 속성이라 불리는 '혼네와 다테마에本音と建前'를 한국이 답습하는 것과 같아 불편함과 모욕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매일신보>가 태극기와 성조기 교차게양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로 게재한 논설.
<대한매일신보>가 태극기와 성조기 교차게양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로 게재한 논설.

이처럼 1905년은 망국의 기운이 어둡게 드리운 시절이었고, 고종은 '한미수호통상조약(1882)'을 통해 맺어진 한미 간의 우호와 상호 보호의 약속을 미국이 이행해 주기를 간절히 기대했다. 그러나 이미 국제 정세가 일본에 기운 시점에서 미 대통령 딸에게 최후의 읍소를 하는 대한제국 황제의 모습은 망국을 향해 치닫는 초라한 초상이었다. 그는 고종의 모습과 한국 방문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앨리스 루즈벨트의 순방을 기념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게양한 모습(사진 위). 순방단이 대구를 방문했을 당시 거리 가옥의 모습(사진 중앙). 모든 깃발이 가내수공으로 제작된 것이기에 성조기의 가로줄이 세로로 잘못 제작돼 있다. 대구 시내 아동들도 환영 행사에 동원돼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도열했다(사진 아래). 성조기의 제작 수준이 매우 조악하다. 코넬대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 촬영
앨리스 루즈벨트의 순방을 기념해 태극기와 성조기를 게양한 모습(사진 위). 순방단이 대구를 방문했을 당시 거리 가옥의 모습(사진 중앙). 모든 깃발이 가내수공으로 제작된 것이기에 성조기의 가로줄이 세로로 잘못 제작돼 있다. 대구 시내 아동들도 환영 행사에 동원돼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도열했다(사진 아래). 성조기의 제작 수준이 매우 조악하다. 코넬대 도서관 소장, 윌러드 스트레이트 촬영

"우리는 고종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갔다. 전반적으로 다소 연민을 자아내는 분위기였다. 그는 여러 벌의 아름답고 하늘하늘한 의복을 입었고 슬퍼 보였다. 전혀 호화롭지 않았다. 식사를 하러 들어갈 때 그는 다정하게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그의 팔을 잡지 않았다.

 

환송 회견장에서 황제와 황세자는 각각 사진을 나에게 주었다. 그들은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제임스 브래들리 지음, 송정애 옮김, <임페리얼 크루즈>(프리뷰, 2010), 305~315쪽]

앨리스는 방한 기간 내내 오만하고 무례하고 방종하기까지 했다. 그는 고종을 만나는 시간, 말 위에서 승마복과 장화를 신고 시가를 피우며 나타났다. 대한제국의 황실 격식과 의전에도 장난스럽게 대응했다. 마침내 명성황후가 모셔진 홍릉을 방문했을 때도 정중히 예를 갖추기보다는 능 앞에 설치된 석상에 올라타 기념 촬영을 하기에 급급했다. 이러한 앨리스의 행태는 대한제국 관료들과 수행원들을 경악케 했다. 이러한 행적은 이후로도 미국과 서구 언론에서 큰 논쟁과 논란을 야기했다. 그는 대한제국 정부와의 어떠한 외교적 대화에도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으며 수행원들과 파티와 유람만을 즐기고 일본으로 떠났다.

앨리스 루즈벨트는 순방 당시 명성황후의 능 앞에 있는 석상에 올라타 기념 촬영을 하는 무례를 저질렀다.
앨리스 루즈벨트는 순방 당시 명성황후의 능 앞에 있는 석상에 올라타 기념 촬영을 하는 무례를 저질렀다.

앨리스의 이러한 행동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한편으로 그의 행동은 대한제국의 운명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앨리스 일행이 방한하기 두 달 전인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이 서로 필리핀과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승인한 '가츠라·태프트협정'이 체결됐으며, 2주 전인 9월 5일엔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미국·영국·러시아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권을 승인한 사실 등을 모두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남겼다.

"'여하튼 좀 슬프고 애처로웠다. (중략) 나라가 일본의 손에 넘어가기 시작했고, 내가 본 일본군 장교들은 대단히 민첩하고 유능해 보였다.' - 앨리스 루즈벨트

 

'이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있었고 그들은 앨리스 루즈벨트 일행을 마치 생명 줄이나 되는 것처럼 붙잡고 매달렸다.' -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가 친구 파머에게 보낸 편지, 1905년 10월 3일." [제임스 브래들리 지음, 송정애 옮김, <임페리얼 크루즈>(프리뷰, 2010), 305~315쪽]

황실과 순방단의 웃지 못할 만남과 현실을 목도하고 있던 헐버트 선교사는 앨리스의 방한 일정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9일 도착, 20일 황제 알현 및 연회, 21일 궁중 연회 및 공사관 연회, 22일 창덕궁 파티 및 미국 선교사 접견, 23일 전차 시승, 25일 승마 여행, 27일 전차 탑승해 왕비 민 씨 왕릉 구경, 28일 환송 만찬, 30일 부산행 출발'. 축제와 만찬과 야외 파티와 여행이 전부였다. 한국인들은 이번 방문이 정치적으로 무슨 뜻이 있어서 미국 정부가 한국을 도와 위태로운 상황에서 꺼내 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사실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Homer B. Hulbert, <The Korea Review vol.5: 1905>(경인문화사, 1984), 332쪽]

이렇게 1882년 이래 '동경과 우호'의 깃발을 교차해 게양했던 한국과 미국의 외교 관계는 냉혹한 국제 질서와 양육강식의 야만적 제국주의 논리 속에서 한국만의 일방적 짝사랑으로 결론 나고 말았다. 미국은 야멸차게 한국을 배신했지만, 그럼에도 한국은 여전히 미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안창호는 망국의 암운에 풀이 죽어 있을 서울의 청년 학생들을 향해 미국을 본받아 국기에 절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국기 예배'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에서와 같은 애국주의적 국가 의례를 한국에서도 시행해 꺼져 가는 국운을 어떻게든 되살려 보겠다는 안간힘이었다. 

"서서西署 만리현 의무균명학교義務均明學校에서 지난해去年 귀국하였던 미국 유학생 안창호 씨가 생도에게 대하여 권면한 내개內開(봉투에 넣어 봉하여진 편지 내용)에 '미국 각종 학교에서는 애국 사상으로 매일 수업上學 전에 국기國旗에 예배禮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것을 보았은즉, 그 개명開明 모범模範은 사람으로 하여금今人 감격感昻케 한다. 그러므로然則 우리나라凡吾 학교들도 이제부터 시행하자從今施行' 함으로 그 학교該校에서 지난 달去月 일주일曜日로 위시爲始하여 배기창가례拜旗唱歌例를 행한다더라." ['국기 예배',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 자 2면]

*이 글은 다음 회차 게재 예정인 '교차 게양된 성조기와 태극기(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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