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교차 게양된 성조기와 태극기(1)'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 편집자 주
한인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태극기·성조기
: 상생과 생존을 위한 표지

'디아스포라(Diaspora)'는 '씨앗이 뿌려진다'는 뜻으로, '흩어짐', '흩어져 사는 자', '흩어진 곳'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약성서 야고보서 1장 1절과 베드로전서 1장 1절에는 각지에 "흩어진 자들(Diaspora)"에게 서신을 보낸다는 언급이 나온다. 이는 대개 이스라엘 밖으로 흩어져 이방 세계에 정착해 사는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근대 이전에는 종교적 귀속 의식을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의미가 강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같은 혈통·소속을 기반으로 한 특정 인종(ethnic) 집단이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현상을 의미하게 됐다.

한국 근현대사 최초의 해외 이주는 1860년대 전후 압록강·두만강 너머 서간도·북간도를 비롯한 남만주·북만주·연해주에서 이뤄졌다. 한반도 인접 지역 외의 해외 이민이 정부 승인하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02~1907년 하와이·멕시코 농업 이민이었다. 이는 최초의 공식 이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민자들 중에는 순수한 농민 외에도, 도시 노동자, 구한국 군대 군인, 정치적 망명객, 유학을 염두에 둔 학생, 망국의 전환기에 해외에서 새로운 민족운동·독립운동을 모색했던 이들이 두루 포함돼 있었다. 농업 이민, 망명 이민, 유학 이민은 하와이 이민 시기와 겹쳐 중국·러시아로의 활발한 이민 행렬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사이, 한반도 내에서는 태극기의 제작·게양이 일제에 의해 철저히 금지됐다. 태극기가 적극적으로 보급되고 게양된 곳은 오히려 해외 이주민의 삶의 자리였다. 대한제국 국민 자격으로 미주 지역에 정착한 한국인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에 미처 적응하기도 전에 '국가를 상실한 디아스포라' 처지에 놓였다. 초기 해외 이주 한인들은 이주 지역 주민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 사이에서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중간자적 존재로서 큰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콘텍스트(context)는 그들로 하여금 공동체성에 대한 더욱 강한 애착과 지향을 갖게 했고, 태극기는 이를 시각적으로 강화해 주는 매개물로 자연스럽게 그들의 의식과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태극기는 다인종·다문화 사회인 미국에서 다른 인종과 한국인을 구분해 주는 표지였으며, 나라 잃은 민족 공동체이면서도 미국 사회 내 실재하는 민족 집단으로서 한인들의 존재감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을 결속하는 상징물로 작용했다. 

1905년 윤치호 외부협판이 하와이 한인감리교회를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 윤치호와 하와이 교민들 위로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사진 제공 <크리스천헤럴드>
고종 황제 탄신 기념식을 마친 직후의 하와이 한인들. 태극기를 게양해 민족 공동체의 동질성을 표현했다(1907년). 사진 제공 로베르타 장
고종 황제 탄신 기념식을 마친 직후의 하와이 한인들. 태극기를 게양해 민족 공동체의 동질성을 표현했다(1907년). 사진 제공 로베르타 장

미주 지역 한인 사회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게양하는 것이었다. 태극기·성조기가 공동 게양된 가장 오래된 장면으로 1904년 하와이에 먼저 도착한 초기 이민자들이 새 이민선이 들어왔을 때 부두에 나가 환영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다. 당시 주간에 남성들은 노동 현장에 투입된 터라, 사진 속 환영단 대부분이 여성·아동으로만 구성된 점이 눈에 띈다. 마중을 나간 여성들은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이민단을 맞았다. 1909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하와이 지방 총회 당시 기념사진에도 국민회 간부들 배후에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 게양돼 있으며, 대한인부인구제회 엠블럼, 하와이한인기독교회 3·1절 기념 야외 예배 사진에서도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 게양된 모습이 확인된다.

하와이 초기 이민자들이 부두에서 새 이민선을 맞아 환영하는 모습. 여성·아동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다(1904년). 사진 제공 이덕희
하와이 초기 이민자들이 부두에서 새 이민선을 맞아 환영하는 모습. 여성·아동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게양하고 있다(1904년). 사진 제공 이덕희
대한부인구제회의 황마리아. 황마리아는 첩을 두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남편을 피해 세 아이와 함께 하와이로 이주해 1913년 대한인부인회 창설 회장을 역임했다. 대한인부인구제회 엠블럼에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태극기·성조기가 교차 게양돼 있다(1919년 경). 오성진 소장. 사진 제공 로베르타 장
대한인국민회 1909년 하와이 총회에서 태극기·성조기가 교차 게양됐다.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대한인국민회 1909년 하와이 총회에서 태극기·성조기가 교차 게양됐다.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하와이 한인 기독교인들이 3·1절 기념 야외 예배를 마치고 찍은 사진.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했다(1936년). 사진 제공 이덕희
하와이 한인 기독교인들이 3·1절 기념 야외 예배를 마치고 찍은 사진.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게양했다(1936년). 사진 제공 이덕희

미주 지역 한인들은 국권이 피탈된 1910년 이후 매년 8월 29일 '국치 기념일' 행사를 개최했다. 국치 기념일國恥記念日 식순에는 항상 식장 전면에 게양된 태극기를 내렸다가 다시 올리는 "국기 부활 예식"[<신한민보>, 1917년 8월 30일 자]이 포함됐다. 이 예식 직전에는 '국치 기념가'를 불렀으며, "국기가 주벽에 걸리면 국기의 게양이 마치 광복을 이룬 것처럼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국치 기념일 행사는 1919년 3·1운동 이후부터는 '3·1절 기념행사'로 명칭과 형식이 바뀌었다. 3·1절 기념행사는 국치 기념일 행사보다 훨씬 더 가볍고 활기찬 분위기에서 진행됐으며, 1931년 대한인국민회 LA 지역회 주최로 열린 3·1절 12주년 기념식에서는 200여 명의 학생이 애국가를 부르고, 기도, 축사, 국기 게양식 등을 거쳐 '국기가國旗歌'를 제창했다[<신한민보>, 1931년 3월 12일 자]. 미주 지역 한인 사회 초기 국치 기념일의 '국기 부활 예식'에서 민족사적 치욕·고난을 극복하기 위한 유효한 상징적 레토릭으로 기독교 '부활 신앙'이 활용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일제강점기 미주 지역 한인 사회의 역사 인식이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자연스럽게 결합해 조화를 이룬 형태로 발전했다는 하나의 사례로 볼 수 있다.

'국기가' [<신한민보>, 1914년 6월 18일](사진 위)와 '국치 기념가' [<신한민보>, 1915년 9월 30일](사진 아래).

3·1운동 이후 미주 대륙 한인 교회에서 거행된 3·1절 기념행사를 찍은 대부분의 사진 자료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게양하고 있다는 점은 눈에 띄는 사실이다. 미주 지역 한인 교회의 태극기·성조기 교차 게양 문화는 미국 내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선택이자 결과였다. 미주 지역 한인들은 내부적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고 결속을 다지기 위해 태극기를 내걸었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삶의 터전인 미국에 대한 소속감과 애국심도 동시에 표현해야 하는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두 국기를 동시에 게양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다시 말해, 민족 정체성과 국가 정체성이 분리되고 한편으론 교차하는 현실 속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교차 게양의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미 중부 캘리포니아 다뉴바한인장로교회, 1920년).
다뉴바한인장로교회의 3·1절 1주년 기념 예배 당시 예배당 내부 모습(1920년).
다뉴바한인장로교회의 성조기·태극기 교차 게양(1940년대).
중부 캘리포니아 리들리한인장로교회 헌당식 겸 3·1절 기념식을 마치고(1939년). 1919년 설립된 남감리교회로 시작한 이 교회는 1936년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신사참배 실시를 결정하자 이에 반발해 장로교로 교파를 변경했다.
중부 캘리포니아 리들리한인장로교회 헌당식 겸 3·1절 기념식을 마치고(1939년). 1919년 설립된 남감리교회로 시작한 이 교회는 1936년 기독교조선감리회가 신사참배 실시를 결정하자 이에 반발해 장로교로 교파를 변경했다.

 1922년 5월, 캘리포니아주 다뉴바와 리들리 지역 한인들의 한미 수교 40주년 기념 퍼레이드 사진을 보면 "Americo-Korean"이라는 플래카드를 게시하고, 전통 한복과 양복을 입은 두 명의 한인을 선두에 세워 한미 양국 정체성을 공유하는 이민 공동체의 성격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기념 퍼레이드 차량 사방으로 태극기·성조기를 장식해 두 국가·민족 정체성이 미주 지역에서 공존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적극 표현하고 있다. 태극기와 성조기 교차 게양한 한인 퍼레이드 사례는 다양하게 확인된다. 이처럼 미국 사회에 대한 한인들의 적극적인 소속감 표현과 우호적 관계 형성을 위한 노력은 미국 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한인 이민 사회를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는 일종의 자치 정부로서 미국 정부의 승인하에 미주 지역 한인들의 자치권과 위상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행사에서의 한국인 퍼레이드. 한인 여성들이 태극기를 들고 앞서가고 있고, 뒤따르는 퍼레이드 차량에는 성조기가 게양돼 있다(1921년 11월).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기념행사에서의 한국인 퍼레이드. 한인 여성들이 태극기를 들고 앞서가고 있고, 뒤따르는 퍼레이드 차량에는 성조기가 게양돼 있다(1921년 11월). 사진 제공 독립기념관
캘리포니아 다뉴바와 리들리 지역의 한미 수교 40주년 기념 퍼레이드. 퍼레이드 차량에 "Americo-Korean"이라고 쓰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장식했다(1922년 5월). <코리아헤럴드> 제공
캘리포니아 다뉴바와 리들리 지역의 한미 수교 40주년 기념 퍼레이드. 퍼레이드 차량에 "Americo-Korean"이라고 쓰고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장식했다(1922년 5월). <코리아헤럴드> 제공
태평양전쟁 시기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전 미국인 퍼레이드. 한인들의 퍼레이드 차량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함께 게양돼 있고, "한국의 승리는 민주주의의 승리입니다(Victory for Korea is Victory for Democracy)"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이는 한국이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지하고 함께 가겠다는 정치적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사진 제공 정한경
태평양전쟁 시기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전 미국인 퍼레이드. 한인들의 퍼레이드 차량에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함께 게양돼 있고, "한국의 승리는 민주주의의 승리입니다(Victory for Korea is Victory for Democracy)"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이는 한국이 미국이 추구하는 가치를 지지하고 함께 가겠다는 정치적 의사 표시이기도 했다. 사진 제공 정한경
도산 안창호 선생 추모 예배(1938년). 사진 제공 <크리스천헤럴드>
도산 안창호 선생 추모 예배(1938년). 사진 제공 <크리스천헤럴드>

미주 한인 사회에서의 태극기·성조기 교차 게양 문화는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단순한 우호와 공존의 차원을 넘어선 한인의 생존과 결부된 상징으로 심화됐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르며 적국敵國이 되자, 미주 지역 일본인들의 신변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아울러 1910년 일제강점 이후에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들은 일본인 여권을 소지했기에, 전시 상황 속에서 일본인으로 오해받아 정치적·외교적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에 대한인국민회는 태극기·성조기가 교차 게양된 모양의 배지에 일련번호를 부여해 한인들에게 패용佩用하게 했으며, 이 배지는 일인과 한인을 구분해 주는 일종의 신분증 역할을 하게 됐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미주 한인들에게 태극기와 성조기를 통한 신변의 안전과 민족적·국가적 충성도를 강화하는 상징물로 그 위상과 무게가 신장돼 갔다.

대한인국민회에서 한인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제작한 태극기와 성조기 배지(1941)와 미국에서 발행된 한국 독립 기원 피침국被侵國 태극기 우표(1943~1944년 발행). 사진 제공 한국이민사박물관
대한인국민회에서 한인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제작한 태극기와 성조기 배지(1941)와 미국에서 발행된 한국 독립 기원 피침국被侵國 태극기 우표(1943~1944년 발행). 사진 제공 한국이민사박물관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우표(2003). 사진 제공 우정사업본부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우표(2003). 사진 제공 우정사업본부

한국 근대미술사학자인 목수현은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미주 지역 한인 디아스포라의 현실에서 태극기와 성조기가 교차 게양된 역사적 흐름과 현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본국을 떠나 흩어져 사는 존재인 디아스포라, 그리고 그 본국이 현실적으로 지켜 주지 못하는 존재인 미주 한인들에게는 태극기라는 상징은 현실적인 국가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집착하게 되는 표상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표상은 그 자체로서 힘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거주하는 곳의 국기가 받쳐 줌으로서만 힘을 지닐 수 있었다. 나란히 게양된 태극기와 성조기는 그 두 나라 사이에 불안하게 유동하고 있던 그들 삶의 존재 양태이기도 했다." (목수현, '디아스포라의 정체성과 태극기', <사회와역사>, No.86, 2010, 72쪽)

해방과 전쟁, '친미주의'의 내재화
: 욕망과 숭배의 심벌 

"1945년 9월 9일 일요일 서울의 거리는 가장 엄숙한 빛 속에 잠겨 있었다. 높고 푸르게 개인 첫 가을 하늘에 찬란한 아침 해가 오르자 명치정明治町(현재의 명동 - 필자 주) 교회당에 평화의 종소리는 은은하게 들려왔다. 푸른 가로수 사이로 태극기가 휘날리고 성조기, 유니온재크 또는 소비에트연방 국기, 중화민국 국기 등 4국 국기가 나란히 세워 있었다. (중략) 한편 거리에는 점점 사람의 홍수가 범람하기 시작했다. 각 단체에서는 혹은 행렬을 지어 나오기도 하고 혹은 트럭과 자동차를 장식하여 깃발을 휘날리며 나오기도 했다. 도처에 군악대가 웅장한 행진곡을 울리고 지나갔다. 벌써 어느 가게에서도 기를 만들어 팔기에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거리에 진주군이나 미국의 통신기자들이 지날 때 마다 군중의 박수와 환호성이 끊일 새 없이 맑은 하늘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거리는 정연한 질서 아래 움직이었다." ('하지 중장 휘하의 진주군進駐軍이 인천으로부터 입경入京', <매일신보>, 1945년 9월 9일 자)

해방이 도적같이 찾아왔다. 1945년 9월 8일 하지 장군이 이끄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거리에는 태극기와 연합국 깃발들이 휘날렸고, 10월 20일 구 조선총독부(중앙청) 앞에서는 연합군 환영 시민대회가 개최됐다. 하지만 연합군 깃발들 사이에서 위태롭게 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태극기는 오히려 포위된 듯 그 운신이 협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누가 우리 편인지 더 강한 나라인지 분별하기에 혼란스러웠고, 얼마 전까지도 대동아공영권의 기치 아래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맹세했던 서양국 특히 미국 군대와의 낯선 조우와 동거에 당황해하기도 했다.

'핫지 중장 휘하 미군, 8일 오후 인천 상륙', <매일신보>, 1945년 9월 8일 자.
'핫지 중장 휘하 미군, 8일 오후 인천 상륙', <매일신보>, 1945년 9월 8일 자.
동대문에서 거행된 연합군 환영 대회. 보이스카우트의 환영 현수막에(사진 위)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으며, 환영 퍼레이드(사진 아래) 선두에는 태극기를 중심으로 연합국기가 주변에 게양돼 있다(1945년 9월 9일).
동대문에서 거행된 연합군 환영 대회. 보이스카우트의 환영 현수막에(사진 위)는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으며, 환영 퍼레이드(사진 아래) 선두에는 태극기를 중심으로 연합국기가 주변에 게양돼 있다(1945년 9월 9일).
서울에 입경하는 미군들을 향해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환영하는 시민들(사진 위)과 성조기를 들고 환영 퍼레이드를 하는 부녀자들(사진 아래,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입경하는 미군들을 향해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환영하는 시민들(사진 위)과 성조기를 들고 환영 퍼레이드를 하는 부녀자들(사진 아래, 1945년 9월 9일).
중앙청 앞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 시민대회(1945년 10월 20일).

 종교사회학자 강인철은 "해방 당시 반일 성향이 강했던 일부 한국인들은 일본의 적국이었던 미국을 '해방자'로 환영한 반면, 갑자기 미군정 치하에 놓인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여전히 '멀리 떨어진 강대국'일 뿐이었으며 미군은 '점령자'에 불과"했다고 분석했다. 반면 일제의 "반미적 옥시덴탈리즘"에 철저히 경도돼 있던 식민지 엘리트 세력(친일파 다수)들에게 '친미'는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생존의 길"이 됐다. 이들은 미군정에 협조해야 하는 새로운 현실에 순응하면서도 거북함과 불안의 감정이 뒤섞인 채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친일파 청산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전환기의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압도돼 형식적으로는 "친미적 오리엔탈리즘"의 어색한 협력자로 해방 공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낯선 진주군인 미군 앞에서 한국인들의 친미적 행보는 한편으로는 과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1946년 미국의 국경일인 독립 기념일을 맞이한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사진 8 - '미국의 전도를 축복 : 가가호호마다 성조기', <독립신보>, 1946년 7월 5일 자.

"뜻깊은 4일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이해 미 주둔군에서는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 대구 광주 등 주요 도시에서 진주 후 처음 보는 대열병 분열식을 거행 1776년 7월 4일의 독립선언의 감격을 새로이 하였다. 이날 조선 민중은 각 집마다 성조기를 게양하여 조선을 해방하여 준 미국에 뜨거운 감사를 바치는 동시에 미국 독립일을 경축하였다. 이외에도 민전을 비롯하여 각 단체에서는 미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다채한 행사를 거행하여 위대한 미국의 영웅적 투쟁을 찬양하였던 것이다. ('미국의 전도를 축복: 가가호호마다 성조기', <독립신보>, 1946년 7월 5일 자)

해방 직후 첫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은 한국 거리는 가가호호 성조기를 게양한 낯선 풍경이었다. 이는 새로운 힘의 세력인 미군정에 최선을 다해 우호적 신호을 보냄으로써 생존과 안위를 모색하려 했던 식민지 엘리트들의 자구책이었다. 이러한 식민지 엘리트들의 낯 뜨거운 친미적 행보 이면에 가려진 불안과 불편함을 일거에 해소해 준 전환적 사건이 있었다. 바로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회에서 제정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관한 특별 법률 조례'에 대해 미군정장관이 거부권을 행사해 무효화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의 친일파에 대한 관용적·포용적 태도와 정책을 눈으로 확인한 식민지 엘리트들은 그동안 외형적으로만 견지해 오던 친미적 태도를 '친미주의(pro-Americanism)'라는 이데올로기로 적극 내면화하기에 이르렀다. 식민지 엘리트 친일 부역자들은 미국이 지닌 힘과 관용의 그림자에 숨어 자신들의 흑역사를 은폐하고, 미국이 수호하는 가치들(반공·민주주의·자본주의)을 함께 옹호하며 일제강점기 동안 누려 온 기득권을 유지하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 가고자 했다. 해방 이후 한국 종교 내의 강고한 지배 이데올로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새로운 형태의 '친미주의'는 바로 이 시점부터 파종되고 발아하기 시작했다.

강인철은 현대 대한민국 시민종교의 5대 신념 체계를 "민족주의", "반공주의", "발전주의", "민주주의", "친미주의"로 꼽았다. 민족주의는 "해방 직후 의심과 이론의 여지없이 즉각 수용"된 가치이며, 반공주의는 "미군정 치하에서 식민지 엘리트(친일파)들이 격렬한 과거 청산의 운동으로부터 자신과 가족,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기 위한 생존 수단"이었다. 발전주의는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키워지고 응축된 근대화에 대한 열망의 결과"였으며, 민주주의는 "주권재민, 삼권분립, 대의제, 평등, 자유, 인권 등의 가치를 표방하며 반공주의의 중요한 명분과 필수 요소로 그 우월성을 재강조하기 위해 적극 수용"됐다. 한국의 현대 시민종교 특히 기독교 내에서 바로 이러한 민족·반공·발전·민주주의의 가치는 최근에 이르는 현대사 속에서 항구적 지배 신념 체계로 작동해 왔다.

강인철은 민족, 반공, 발전, 민주주의라는 네 가지 신념 체계 외에 '친미'라는 특정 국가에 대한 외적 태도가 이데올로기적 독자성과 내면화를 형성하게 된 과정과 매커니즘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다.

"친미주의는 간혹 그 자체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지만, 끊임없이 발전주의, 반공주의, 민주주의 담론과 융합되는 경향을 보였다. 친미주의 자체가 독립적인 시민종교 교리로 정립되기보다는 반공주의, 발전주의, 민주주의의 효과가 함께 어우러져 결과적으로 '친미적인'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에 대한 직접적인 찬양이나 숭배보다는, 반공 자유 진영의 지도 국가,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롭고 잘사는 나라 등의 상징과 이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친미적 효과가 발휘된다는 점에서 친미주의는 '숨은 혹은 은폐된 지배 이념'이기도 했다." [강인철, <경합하는 시민종교들 : 대한민국의 종교학>(지의회랑, 2019) 64쪽]

강인철은 이러한 "친미주의의 다면성과 비가시성이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자부심과 자존심에 상처를 내지 않으면서도 친미주의가 시민종교 신념 체계 내에 순조롭게 스며들 수 있었던 신비스런 비결"이었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미국은 "반공주의, 발전주의, 민주주의 교리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현현"함으로써 일제를 대체해 민족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숙원을 성취해 줄 모델 국가이자 새로운 선망의 대상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식민지 엘리트들의 '친미주의'로의 전환은 1948년 남한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친미적 단독정부가 수립된 이후 더욱 노골화했다. 아울러 1949년 6월, 주한미군의 철수는 남한 정부의 불안감을 더욱 가중하며 미국에 대한 의존적 태도를 심화해 나갔다. 1949년 여름, 미 해병 친선 함대가 부산에 입항할 당시 환영 포스터에 그려진 성조기에 오류가 있었는데, 이를 비판한 언론의 보도 내용은 당시 미국을 향한 한국 사회의 태도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우방 미국에 대한 실례 : 포스터 성조기에 오류', <민주중보>, 1949년 7월 13일 자.

"한미 친선 함대를 맞이하여 항도 부산에서는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열렬한 환영의 행사가 벌어졌고 이 함대의 입항과 함께 미 해병은 이채롭게 항도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역전 모처에 붙어 있는 '환영 미국 친선 함대'라는 포스터 앞에 그들은 운집하고 손가락질하며 일소一笑하고 돌아가고 또 모여들고 한 바 있어 일반의 의아를 품게 했는데 그 포스터를 보면 우편에 태극기와 나란히 좌편에 성조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성조기는 원래 48주를 의미하여 별 48개로 국기를 표현한 것인데 이 환영 포스터에 그려진 성조기의 별 수는 42개로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우방 미국기에 대한 실례라 아니할 수 없는데, 그러기에 그들 해병들은 부내 각처에 붙은 이 포스터를 보고 조소하고 있으니 한국인의 무지를 여실히 말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에 당국은 이와 같은 무성의한 미국기 포스터 제작자의 맹성猛省을 촉구하여 앞으로 이러한 일이 없도록 바라는 소리가 높다." ('우방 미국에 대한 실례: 포스터 성조기에 오류', <민주중보>, 1949년 7월 13일 자 2면)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미국에 대한 절대적 의존성은 해방 공간에 발생한 국내 미국인들의 사망 사건에 대한 대응에서도 비상한 풍경으로 나타났다. 언론인 오소백이 "암살의 해"라고 표현한 1949년에는 김구 선생의 서거 외에도 당시 연희대학 영문과 교수였던 언더우드 부인이 자택에서 제자들에게 저격당하는 사건(3월 17일)이 발생해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아직까지도 사건의 구체적 진상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는 언더우드(원한경) 부인의 죽음은 국내에서 발생한 한국인의 미국인을 대상으로 한 첫 살해 사건으로, 당시 친미적 신생 정부의 수립 직후 빚어진 예기치 않은 참극이었다. 동시에 한국의 근대화와 기독교 선교에 헌신한 내한선교사 언더우드 부인에 대한 폭거였기에 당시 남한 사회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홍이표, '언더우드부인 저격사건의 진상과 의미', <한국기독교와 역사>(2011) 참조]

언더우드 부인의 장례식(3월 22일)을 직접 목격한 배민수 목사는 "그녀(원한경 부인)를 아는 모든 한국인, 기독교인들, 수 천명의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 교통과 통신은 장례식으로 차단이 됐고, 많은 이들이 곳곳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마치 국장을 치르는 듯했다"라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대한민국 초대 정부도 언더우드 부인의 장례식 외에 헐버트(1949년 8월)와 앨리스 아펜젤러(1950년 2월) 등 개신교 선교사들의 죽음과 장례식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정부 차원에서 적극 대응했다.

제자들에게 저격당한 언더우드 부인의 관이 연희동 사택에서 운구되는 모습(사진 위)과 영결식 관련 기사 (사진 아래) '애끓는 각계 조사 고 원한경 부인 장의 엄수', <동아일보>, 1949년 3월 23일 자.
제자들에게 저격당한 언더우드 부인의 관이 연희동 사택에서 운구되는 모습(사진 위)과 영결식 관련 기사 (사진 아래) '애끓는 각계 조사 고 원한경 부인 장의 엄수', <동아일보>, 1949년 3월 23일 자.

특히 헐버트(H. B. Hulbert)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대응 과정에서 우리는 다시금 태극기와 성조기의 조우를 목격하게 된다. 한국 감리교의 초대 내한 선교사 중 한 명이며, 대표적인 친한파 선교사로서 한국 근대 교육과 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헤이그에 파견돼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던 헐버트 선교사가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1949년 7월 29일 40년 만에 귀환한 바 있다. 그러나 7월 29일 인천항에 도착한 직후 오랜 여행의 피로로 인해 헐버트 박사는 서울 도착 즉시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하고, 8월 5일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 속에 결국 임종을 맞았다. 헐버트 박사의 영결식은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8월 11일 오후 태평로 부민관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삼부 요인, 사회 각계 인사들의 참여 속에 엄숙히 치러졌다.

미군의 한반도 철수. 미군 기지 내 성조기와 태극기의 하기식을 거행하는 모습(1949년 6월). 사진 제공 <LIFE>

당시 부민관 내부의 영결식장에도 전면에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게양됐으며, 외부에도 헐버트 박사의 초상화 좌우로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시됐다. 이는 헐버트의 장례식이 단순히 한국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한 개인 선교사를 추모하는 차원을 넘어, 한미 간의 군사적·외교적 관계 전환을 모색하고자 한 정치적 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6월 30일 이후 미군은 한반도에서 500명 규모의 군사고문단(KMAG)만을 잔류시킨 채 대부분의 장비와 병력을 철수한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미군 철수가 시작되자 1949년 1월부터 38선을 냉전의 전초로서 부각시키고자 시도했다. 이곳에서는 미군 철수 이후 1년여의 짧은 시기에 400~500여 회의 충돌로 양측에 각각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전쟁사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도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1949년부터 사실상 한국전쟁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당시 38선에서 충돌이 가장 격화했던 시기가 7~8월이었으며, 10월 북한의 공세로 다시 격화된 전투는 11월까지 지속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제주 4·3 사건과 여순 사건 등으로 한 차례 위기를 맞았고, 1948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받자 이에 다시 자신감을 얻은 이승만 대통령은 실지회복론失地回復論을 내세우며 1949년 초부터 38선 대북 공세를 통해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한국사학자 정병준은 당시 이승만 정권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북진, 북벌, 실지회복론의 기대와 목적을 과장하여 미국의 더 많은 경제·군사 원조를 얻어냄과 동시에 국내를 단속하려는 노회한 이승만의 '책략'이자 '허풍 전략(bluffing strategy)'이었다." (정병준, <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돌베개, 2006), 276~277쪽)

헐버트의 영결식은 이렇게 38선에 실제적인 전투가 빈번히 발생하며 남북관계가 극도로 불안정한 상황에서 성대히 거행됐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은 한편에서는 남북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헐버트 박사의 영결식을 통해 한미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미국을 향한 구애와 원조의 신호를 적극적으로 보낸 것이다. 영결식이 끝난 후 거리에서는 100대가 넘는 자동차와 1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영구차 뒤를 따라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듬해인 1950년 3월 1일 헐버트 박사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했다.

1942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2차 한인 자유 대회에서 참석한 이승만과 헐버트 박사. 그들의 배후에 태극기가 게양된 것이 보인다. 헐버트 박사는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1942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2차 한인 자유 대회에서 참석한 이승만과 헐버트 박사. 그들의 배후에 태극기가 게양된 것이 보인다. 헐버트 박사는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1949년 7월 29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헐버트 박사.
1949년 7월 29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한 헐버트 박사.
헐버트 박사의 영결식이 사회장으로 거행된 부민관의 모습. 행사장의 내·외부에는 헐버트 박사의 초상과 함께 좌우에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시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언더우드 부인, 헐버트 선교사, 앨리스 아펜젤러 선교사 등의 서거에 정부 차원에서 적극 관심을 표명하고 지원했다.
헐버트 박사의 영결식이 사회장으로 거행된 부민관의 모습. 행사장의 내·외부에는 헐버트 박사의 초상과 함께 좌우에 대형 태극기와 성조기가 게시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언더우드 부인, 헐버트 선교사, 앨리스 아펜젤러 선교사 등의 서거에 정부 차원에서 적극 관심을 표명하고 지원했다.
헐버트 박사 영결식 관련 기사. '삼천만의 애끓는 통곡 : 어제 '헐벝' 박사 영결식', <동아일보>, 1949년 8월 12일 자.
헐버트 박사 영결식 관련 기사. '삼천만의 애끓는 통곡 : 어제 '헐벝' 박사 영결식', <동아일보>, 1949년 8월 12일 자.

헐버트 사후 1년도 되지 않아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맞게 되고, 한반도는 3년간 참혹한 전쟁의 광기에 철저히 파괴됐다. 이 전쟁은 일제 말기 "반미적 옥시덴탈리즘"의 세례를 받았던 식민지 엘리트에게는 '친미주의'를 더욱 교조화·체계화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 대한 긍정적·선망적 인식이 보편적이지 않았던 식민지 대중에게 미군의 영웅적 승리와 구원의 전공들을 보여 줌으로써, 의심·경계 대신 숭배·맹신을 가져다 줬다. 한국 민중은 전쟁의 공포와 트라우마 속에서 '성조기는 태극기와 함께 생명과 안전을 보존해 주는 희망의 상징'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으며, '반공'과 '자유 대한'이라는 구호를 철저히 이념적으로 내면화해 나갔다. 전쟁이라는 비극은 그렇게 한 국가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채택하고 고착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연합군과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 그동안 인민군 점령지에 나부끼던 인공기는 삽시간 태극기와 성조기, 또는 유엔기로 바뀌었다. 그와 함께 세상 인심도 돌변했다. 경인가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유엔군의 서울 수복을 환영하는 주민들(1950년 9월 27일). 사진 제공 NARA
연합군과 국군의 서울 수복 이후 그동안 인민군 점령지에 나부끼던 인공기는 삽시간 태극기와 성조기, 또는 유엔기로 바뀌었다. 그와 함께 세상 인심도 돌변했다. 경인가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유엔군의 서울 수복을 환영하는 주민들(1950년 9월 27일). 사진 제공 NARA
1950년 9월 29일 서울 중앙청 로비에서 열린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맥아더 장군이 기도하고 있다. 행사장 좌우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앞줄 왼쪽부터 버나네 아프리카 유엔대표, 무초 주한 미대사, 맥아더 장군,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 신성모 국방장관. 사진 제공 NARA
1950년 9월 29일 서울 중앙청 로비에서 열린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맥아더 장군이 기도하고 있다. 행사장 좌우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앞줄 왼쪽부터 버나네 아프리카 유엔대표, 무초 주한 미대사, 맥아더 장군,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 신성모 국방장관. 사진 제공 NARA
서울 수복 직후(1950년 9월 27일) 미 해병대는 중앙청 국기 게양대에 성조기를 게양했다(사진 위). 국기 게양대의 성조기는 서울 수복 기념식(9월 29일) 이후에는 유엔 깃발로 교체됐다(사진 아래).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박정모 소위의 중앙청 태극기 게양 사진은 1954년 서울 수복 4주년 기념식에서 재현한 모습이다. 사진 제공 NARA
서울 수복 직후 유엔기와 태극기, 성조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는 연합군과 국군(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직후 유엔기와 태극기, 성조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하는 연합군과 국군(1950년 9월 28일).

"우리는 선진先陣의 영광을 입고 일발의 교전도 없이 다시금 정든 수도의 땅(서울)을 디디게 됐다. 보병 척후대 지휘관은 중위 존 하우젠이다. 가로街路라는 가로는 황량의 극에 달했으며 하우젠 중위의 분대는 조심성 있게 교외로부터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입성의 소식은 어느 틈에 거리에 퍼졌다. 시민들은 처처에 떼를 지어 어디다 감추어 두었었는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이것은 승리를 의미하는 한국말이다). 아이들은 문짝을 박차고 마치 줄달음치듯이 이 골목에서 뛰어나와 고함을 지르면서 우리의 손에 매달리고자 서로 다투었다. 노인들과 등에다 어린아이를 업은 여인까지도 거리로 몰려나왔다. 우리들의 앞길에 몸을 던지고 땅을 치며 흐느껴 우는 여인도 있었다. 이네들의 남루한 의복은 그동안其間의 고생을 여실히 말하고 있었다. (중략) 백아白亞의 중앙청, 춘색春色이 충만한 창공에는 태극기가 마치 태양처럼 휘날리고 있다. 이 태극기를 올린 것은 14일 밤 7시 15분 한국 국군 척후대이다." (서울에서 15일발 AP 특파원 짐 베커, '서울 재탈환 풍경', <대구매일>, 1951년 3월 17일 자)

한국전쟁을 겪으며 사람들은 양손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며 만세를 외치는 경험을 반복해 공유했다. 이렇게 미국은 한국을 "북조선 괴뢰 정권"의 적화 야욕으로부터 "반공"과 "자유 민주" 진영의 숨통을 트여 준 구세주가 됐다. 류대영은 한국 개신교에게 있어 "미국은 이중적 의미에서의 '구원자'"라고 분석했다. "'한국의 구원자'로서의 미국은 감사와 보은의 대상이며, '세계의 구원자'로서의 미국은 추종과 협력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세계를 구원할 섭리적 사명(providential mission, 언더우드가 1896년 연설에서 말한 '앵글로색슨'의 선교적 사명" - 필자 주)을 지닌 '기독교 국가'이므로, 한국 개신교는 미국의 충직한 파트너이자 조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류대영, '2000년대 한국 개신교 보수주의자들의 친미·반공주의 이해', <경제와사회>, 62, 2004. 참조) 

강인철은 한국전쟁을 통해 "친미주의의 '대중화'가 급진전되고, 식민지 엘리트층의 반쪽 친미주의가 '온전한 친미주의'로 바뀌"었으며, "미국에 부착된 반공주의-발전주의-민주주의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는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강고"해졌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이후의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한국교회도 이러한 친미적 종교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고 내면화해 나갔다.

이때부터 미국의 대통령은 온 국민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들고 거리에서 성대히 맞이해야 할 "자유 대한민국"의 수호신이자 흠모의 대상으로 격상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 김포공항에 마련된 환영식장(사진 위)과 김포 거리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환영하기 위해 도열한 시민들(사진 아래). 시민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환영! 자유 진영의 영도자, 좋아합니다"라고 적혀 있다(1960년), 사진 제공 Bill Smothers 

"손꼽아 기다리던 미국 차기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원수의 환영 서울 시민대회는 드디어 4일 상오 10시 10분 중앙청 앞 광장에서 성대히 개막됐다. 급작스럽게 습격해 온 초겨울 추위를 박차고 너도나도 길가로 흘러나온 남녀노소 십수 만은 이른 아침부터 '아이젠하워 원수 내한 환영', '자유 대한민국하에 남북통일', '중공 오랑캐를 축출하라' 등등 표어가 뚜렷이 쓰여진 각종 플래카드와 태극기 및 성조기를 손에 손에 누구 할 것 없이 들고 회장인 중앙청 앞 광장으로 모여들어 넓은 동 광장도 삽시간에 입추의 여지가 없이 꽉 차 중앙청 앞으로부터 광화문 그리고 시청 앞과 을지로 입구까지 흘려내려 글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아이젠하워 방한 환영 서울 시민대회 개최', <조선일보> 1952년 12월 6일 자)

최근 십수 년간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광장에 쏟아져 나온 소위 보수(극우) 기독교인들의 정신 세계는 대체적으로 △트라우마 △소외감 △선민의식 △증오(혐오) 등의 심리로 분석된다. 트라우마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는 전쟁 공포에 기초한 것이며, 소외감은 장기간 유지해 온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득권 상실이 반영됐을 것이다.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소외를 극복하고 재기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욕망의 표상이자 모델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일 것이다. 태극기 집회에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는 것은 태극기와 이스라엘기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선민의식'의 발로다. 집회 참석자들은 공포와 상실을 상쇄하고 정당화할 증오의 대상을 상정한다. 오늘 태극기는 이러한 욕망과 증오가 뒤엉킨 분단과 냉전의 표상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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