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분단'과 '반공'의 상징으로

"곳곳에서 30년 40년 동안 광야는 아닌 궤짝 농짝 밑에서 잠을 자던 태극기가 나왔습니다. 열아홉 살에 삼일운동 만세를 부르던 날 이후 27년 만에 처음 시원한 날을 보았습니다. 가슴 밑바닥에 쌓였던 묵은 시름의 가스가 다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보니 사람은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내가 고랑을 차고 거리를 지나가도 모르는 척 지나가던 그 사람들 그대로, 내가 애써 친구가 되려 해도 곁을 주지 않던 그 사람들 그대로인데, 이제 나는 나와 그들 사이에 아무 어색함도 막힘도 없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다 훨훨 벗고 한 바다에 들어 뛰노는 것이었습니다. 그만 아니라 저기 저 언덕에 있는 일본 사람, 어제까지 밉고 무섭던 그들이 도리어 어떻게 잘못되어 다치기나 할까 걱정스러웠습니다. 단번에 우리는 새 시대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함석헌, '내가 맞은 8·15', <씨알의소리>, 1973년 8월 호.) 

해방은 농짝 구석 깊숙한 곳에서 잠자던 태극기를 다시 거리로 소환했다. 펄럭이는 태극의 물결은 어제의 적과 동지의 경계를 무색하게 했으며, 그토록 증오스럽던 일본인들에게까지도 연민과 동정을 베풀 수 있는 넉넉한 관용을 허락해 줬다. 이처럼 태극기는 해방의 기쁨과 환희 속에 새로운 시대의 희망을 다시금 증명해 보이는 푯대로 하늘 높이 게양됐다.

해방 소식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온 군중의 모습(1945년).
해방 소식에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온 군중의 모습(1945년).
한일 협정 반대 시위 중 연행되는 함석헌 선생(1965년).
한일 협정 반대 시위 중 연행되는 함석헌 선생(1965년).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강연하는 함석헌 선생. 그는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평화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
대형 태극기를 배경으로 강연하는 함석헌 선생. 그는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평화 사상가이자 운동가였다.

역설적이게도 태극기는 해방 직후에는 남북 두 정권 모두에서 선호받았다. 북한에서도 김일성은 각종 군중 집회·행사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1946년에는 해방 1주년을 맞아 태극기·무궁화를 배경으로 한 김일성의 얼굴을 도안으로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으며,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평양 합동 회의와 1948년 평양 남북 정치 협상 회의에서도 태극기를 사용하고 애국가를 제창했다. 이처럼 북한의 좌익 세력들도 해방 공간 초기에 태극기를 별 거부감 없이 수용하고 대표적 상징물로 채택한 것을 보면, 당시까지만 해도 태극기는 좌우 이념 차이를 초월한 민족 공동체의 상징으로서 보편성·대표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 후 평양 군중대회에 소련군 장성들과 함께 등장한 김일성. 배후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1945년 10월 14일).
해방 후 평양 군중대회에 소련군 장성들과 함께 등장한 김일성. 배후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1945년 10월 14일).
소련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1946년 2월 8일). 위원회 발족식에는 김일성의 사진과 태극기가 게양됐다.
소련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직전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했다(1946년 2월 8일). 위원회 발족식에는 김일성의 사진과 태극기가 게양됐다.
해방 1주년을 맞아 북한에서 발행한 기념우표(1946년 8월 15일). 중앙에 김일성 초상이 배치됐으며, 그 뒤로 태극기, 상단에 무궁화가 장식돼 있다.
해방 1주년을 맞아 북한에서 발행한 기념우표(1946년 8월 15일). 중앙에 김일성 초상이 배치됐으며, 그 뒤로 태극기, 상단에 무궁화가 장식돼 있다.
평양에서 열린 5·1절 기념행사의 무대 장식.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 좌우로 태극기와 소련기가 게양돼 있다(1947년 5월 1일).
평양에서 열린 5·1절 기념행사의 무대 장식.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 좌우로 태극기와 소련기가 게양돼 있다(1947년 5월 1일).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서 김일성이 연설하는 모습. 뒷편에 한반도 이미지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1948년 4월 19일).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서 김일성이 연설하는 모습. 뒷편에 한반도 이미지와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1948년 4월 19일).

하지만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화하자 김일성은 7월 8일 제5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인공기를 처음 게양했다. 당시 북조선인민회의 정재용을 비롯한 일부 대의원들은 "태극기는 지난날 우리 인민의 희망의 표징"이었다는 이유로 새로운 국기(인공기) 채택에 반대했지만 결국 이를 막지는 못했다. 당시 헌법제정위원장이이었던 김두봉은 "(태극기가) 1) 비민주적이고 동양 봉건국가 전 통치 계급의 사상을 대표하며, 2) 근거가 되는 주역의 학설이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이며, 3) 제정 당시부터 일정한 의의와 표준이 없었으며, 4) 그 의미가 쓸데없이 어렵다는 점"(김혜수, '해방 후 통일국가 수립 운동과 국가 상징의 제정 과정', 119~120쪽 참조) 등을 들어 태극기 폐지를 추진했다.

아울러 남한에서는 1948년 9월 북한을 추종하는 세력이 독립문과 중앙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 인공기를 게양하는 소위 '인공기 게양 사건'이 발생했고, 10월 발생한 여순 사건을 거치면서 인공기 소지자를 처벌하고 태극기 게양을 강제하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당시 여수·순천에서는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을 경우 총살하겠다는 포고문까지 나올 정도로 태극기는 자발적이고 순수한 애국심의 상징이기보다는 좌우익을 감별하고 애국심을 시험하는 리트머스종이로 그 역할이 변질됐다. 이렇듯 한반도 남북 분단 이후 태극기에 대한 긍정·부정 여부에 따라 피아가 구분되고 생사의 기로에서 운명이 결정됐으며, 민족 보편의 상징이었던 태극은 이제 남한 정부와 반공 이념을 표상하는 상징으로 그 의미가 협소해지고 말았다.

제5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처음으로 인공기를 게양하는 모습(1948년 7월 8일).
제5차 북조선인민회의에서 처음으로 인공기를 게양하는 모습(1948년 7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최고인민회의 광경. 뒷편에 인공기가 장식돼 있다(1948년 9월 2~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1차 최고인민회의 광경. 뒷편에 인공기가 장식돼 있다(1948년 9월 2~10일).
여순 사건 진압 작전 당시 태극기를 게양한 거리 모습. 이때부터 태극기는 좌익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며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그 역사적 역할과 기능이 전환되기 시작했다(1948년 10월).
여순 사건 진압 작전 당시 태극기를 게양한 거리 모습. 이때부터 태극기는 좌익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며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는 수단으로 그 역사적 역할과 기능이 전환되기 시작했다(1948년 10월).

해방 직후 그리스도인들이 개진한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건국론은 반공의 기치를 내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됐다. 대한민국 헌법은 정교분리 원칙을 근본정신으로 채택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쳐 4·19혁명을 맞이하기까지의 세월은 사실상 기독교와 정부가 '반공·친미'라는 공통분모 아래 더욱 공고한 제휴·유착 관계를 형성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철저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남한 사회는 전후 재건과 북한과의 체제 경쟁, 국민 통합 과정에서 '민주화·산업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애국심은 악당들의 최후 피난처가 될 수 있다"고 한 사무엘 존슨의 말처럼, 해방 이후 청산되지 않은 친일 세력은 '반공'으로 포장된 애국의 선봉에서 태극기를 들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순국열사에 대한 숭배·현양과 국가 의례가 강화하는 분위기 속에서 태극기는 각종 의전·이벤트의 중심에 놓였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이르는 독재 권력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 '산업화의 주역'이라는 이름으로 적극 옹호됐다. 이렇게 남한 사회는 '반공'에만 충실하다면 '민주주의'를 일부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쯤은 '미덕'으로 여기는 왜곡된 길을 걷게 됐다.

태극기, 민주주의와 인권의 표상

"기독교인의 최고 이상理想은 하나님나라가 인간 사회에 여실히 건설되는 그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나라'라는 것을 초세간적超世間的 미래적인 소위 '천당'이라는 말로서 그 전부를 의미한 것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전 생활에 군림하여 성령의 감화가 생활의 전 부문을 지배하는 때 그에게는 하나님나라가 임한 것이며, 이것이 전 사회에 삼투滲透되며 사선死線을 넘어 미래 세계에까지 생생生生 발전하여 우주적 태극太極의 대낙원大樂園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곧 하나님나라의 전모全貌일 것이다." [김재준, '기독교의 건국이념: 국가 구성의 최고 이성과 그 현실성', 선린형제단 집회에서의 강연 요지(1945년 8월) 중에서]

해방의 날이 도적같이 찾아오자, 그동안 억눌려 온 기독교 지성들은 자신들의 '하나님나라 이상'과 새롭게 출범할 '신생 정부의 이념'을 합치해 나가고자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김재준 목사는 비상한 대전환의 시기에 기독교의 이상이 온전히 구현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수립하길 염원했고, 이는 "우주적 태극의 대낙원"이라는 상징적 언어로 표현됐다. 한경직도 해방 정국을 맞아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민주주의국가' 건설을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자 전제로 삼았다.

기독교 건국 운동을 주도한 김재준 목사(사진 왼쪽)와 한경직 목사.
기독교 건국 운동을 주도한 김재준 목사(사진 왼쪽)와 한경직 목사.

"이 새 나라의 정신적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가 되어야 하겠고, 또 필연적으로 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확호한 신념입니다. 그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 새 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상의 핵심은 (1)개인 인격의 존중 사상, (2)개인의 자유사상, (3)만인의 평등사상 등일 것입니다. 이 사상의 근본은 신구약 성경입니다." (한경직, '기독교와 건국', <기독교와 건국>(기문사, 1956) 153~154쪽)

초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었던 개신교는 '반공'에도 투철했지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공산 독재 사회인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4·19 이후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에 전향적으로 저항한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반공과 민주주의 중 어느 것을 더 우위에 놓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1960년대 이후 한국교회가 설정한 대정부 관계의 두 노선을 가르는 주요 화두였다.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 항쟁 등 민주화의 역사적 분기점이 된 매 순간에도 시민들과 청년·학생들은 태극기를 게양했다. 민주화에 대한 시민사회의 열망은 분단의 아픔과 상처를 딛고 수호해 낸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켜 내기 위한 애국심과 충정의 결과였다. 군사독재 정권은 민주화를 향한 노력과 열망에 '폭도'와 '좌익 용공'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매도·탄압했지만, 이들의 무도한 폭력 앞에서도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지켜 내기 위해 광장에 모여 애국가를 제창했고, 태극기를 손에 쥐고 펄럭였다. 

"(전략) 시민들은 '애국가'와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이 금남로 바닥을 타고 퍼지면서 일대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중략) 광주는 공수부대에 맞서 싸우며 한 몸뚱이처럼 됐다. 스크럼을 짠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곤봉에 피범벅이 되어 가면서도 스크럼을 풀지 않았다. (중략) 이날 저녁 수천 개의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도청을 향해 나아갔다. 그때 상황을 <동아일보> 기자 김충근은 이렇게 전했다. '나는 우리 민요 아리랑의 그토록 피 끓는 전율을 광주에서 처음 느꼈다. 단전·단수로 광주 전역이 암흑천지로 변하고 (중략) 도청 앞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모여드는 군중들이 부르는 아리랑 가락을 깜깜한 도청 옥상에서 혼자 들으며 바라보는 순간, 나는 내 핏속에서 무엇인가 격렬히 움직이는 것을 느끼며 얼마나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4회, "80년 5월 20일 고립무원 '광주'는 밤새 공수부대와 싸웠다", <한겨레>, 2016년 1월 4일 자 19면)

5·18민주화운동 당시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의 식순에는 빠짐없이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었으며, 항쟁 기간 내내 애국가와 함께 태극기가 '애국심·저항·민주주의의 상징'으로 활용됐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서도 청년·학생, 시민 시위대는 명동성당 앞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태극기를 들고 4·19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사진 제공 <조선일보>
태극기를 들고 4·19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 사진 제공 <조선일보>
4·19혁명 당시 태극기를 들고 시위하는 청년의 모습. 사진 제공 <한국일보>
4·19혁명 당시 태극기를 들고 시위하는 청년의 모습. 사진 제공 <한국일보>
5·18 당시 평화적 시위를 주도했던 전남대의 교내 시위. 학생들이 선봉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1980년 5월 13일).
5·18 당시 평화적 시위를 주도했던 전남대의 교내 시위. 학생들이 선봉에서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고 있다(1980년 5월 13일).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사망자 유족이 태극기로 덮인 관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일보>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사망자 유족이 태극기로 덮인 관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다. 사진 제공 <한국일보>
6월 민주 항쟁 당시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는 한 시위 참가자의 절규. 1987년 민주 항쟁의 상징적 사진에도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6월 민주 항쟁 당시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는 한 시위 참가자의 절규. 1987년 민주 항쟁의 상징적 사진에도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6월 민주 항쟁 당시 태극기를 게양하고 명동성당 앞으로 행진하는 학생들(1987).
6월 민주 항쟁 당시 태극기를 게양하고 명동성당 앞으로 행진하는 학생들(1987).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노정 외에도, 산업화와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인권과 근무 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기독 청년 전태일의 죽음 이후 청계피복노동조합지부가 처음으로 결성됐을 때도 이소선 여사(전태일 모친)의 등 뒤에는 태극기가 게양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신 독재의 서슬 퍼런 사법 살인이 자행된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고 이를 비판한 조지 오글 목사의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회 활동에도 태극기는 그 자리를 함께했다. 이처럼 태극기는 해방 이후 분단의 비극과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 '반공'이라는 레드 콤플렉스에 함몰돼 가는 듯했지만, 한편으로는 '반독재·민주주의·인권'의 가치를 수호하려는 시민사회와 종교 지도자들의 결단과 헌신 속에서 마침내 '민주화의 상징'으로 한국 현대사 속 자리를 새롭게 확보해 나갈 수 있게 됐다.

전태일 열사의 장례를 치른 후 청계피복노동조합 창립 총회에서 발언하는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 그의 뒤에는 노조기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돼 있었다(1970년).
전태일 열사의 장례를 치른 후 청계피복노동조합 창립 총회에서 발언하는 전태일의 모친 이소선 여사. 그의 뒤에는 노조기와 함께 태극기가 게양돼 있었다(1970년).
시국 선언을 위해 종로 YMCA에 모인 재야인사들(함석헌, 김재준, 지학순 주교, 이호철 소설가, 김지하, 계훈제, 법정, 천관우 등, 1973년 11월 5일). 사진 제공 <동아일보>
시국 선언을 위해 종로 YMCA에 모인 재야인사들(함석헌, 김재준, 지학순 주교, 이호철 소설가, 김지하, 계훈제, 법정, 천관우 등, 1973년 11월 5일). 사진 제공 <동아일보>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의 진실과 부당성에 대해 연설하고 있는 조지 오글 목사(1974). 사진 제공 MBC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에서 인혁당 사건의 진실과 부당성에 대해 연설하고 있는 조지 오글 목사(1974). 사진 제공 MBC
태극기, 민족 화해와 통일의 근본원리

한국 사회와 기독교계의 민주화 운동은 어디까지나 북한과의 체제 경쟁 과정에서 '승공론'의 관점으로 시작한 측면이 있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교회협)은 한국 사회의 모든 불평등, 독재, 비민주적 모순이 결국 굴절된 분단의 역사에서 비롯됐다는 각성·반성의 1985년 '한국교회 평화통일 선언'을 채택했다. 1988년에는 "분단은 한국교회의 책임이며, 이러한 분단 역사에 일조한 것은 우리의 죄책"이라고 고백하는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1988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선언을 선포하면서 분단 체제 안에서 상대방에 대하여 깊고 오랜 증오와 적개심을 품고 왔던 일이 우리의 죄임을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백한다.

 

1) 한국 민족의 분단은 세계 초강대국들의 동서 냉전 체제의 대립이 빚은 구조적 죄악의 결과이며, 남북한 사회 내부의 구조악의 원인이 되어 왔다. 분단으로 인하여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마 22:37~40)을 어기는 죄를 범해 왔다.

 

우리는 갈라진 조국 때문에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을 미워하고 속이고 살인하였고, 그 죄악을 정치와 이념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당화하는 이중의 죄를 범하여 왔다. 분단은 전쟁을 낳았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쟁 방지의 명목으로 최강 최신의 무기로 재무장하고 병력과 군비를 강화하는 것을 찬동하는 죄(시 33:1; 6~20, 44:6~7)를 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반도는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각 분야에서 외세에 의존하게 되었고, 동서 냉전 체제에 편입되고 예속되게 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민족 예속화 과정에서 민족적 자존심을 포기하고, 자주독립 정신을 상실하는 반민족적 죄악(롬 9:3)을 범하여 온 죄책을 고백한다.

 

2) 우리는 한국교회가 민족 분단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 침묵하였으며, 면면히 이어져 온 자주적 민족 통일 운동의 흐름을 외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단을 정당화하기까지 한 죄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남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체제가 강요하는 이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우상화하여 왔다.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반역죄(출 20:3~5)이며, 하나님의 뜻을 지켜야 하는 교회가 정권의 뜻에 따른 죄(행 4:19)이다.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인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 정권을 적개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요 1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이것은 계명을 어긴 죄이며, 분단에 의하여 고통받았고 또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죄이며, 그들의 아픔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치유하지 못한 죄(요 13:17)이다. [3.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 고백,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1988) 중에서]

교회협은 이 선언을 통해 교회가 '자주', '평화', '사상·이념·제도 초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최대한 보장'하고 '민족 구성원 전체의 민주적 참여'한다는 다섯 원칙하에 종교와 민간 차원에서 온전한 통일 운동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그동안 누구도 비판·침해할 수 없었던 기독교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죄책 고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관점과 실천신학을 제시한 '88선언'은, 이후 한국교회의 통일 운동과 대북 교류 사업에 역사적 전환을 가능케 해 줬다. 이 선언은 이후 해외 교회에서 그 신학적·신앙적 가치를 크게 인정받았으며, 특별히 후대에 이르러 '6·15 공동선언'에 반영돼 남과 북이 상생하는 통일 정책의 근간이 됐다.

한편, 88선언 이후 분단 현실에 대한 역사 인식 차이와 이념 갈등으로 더욱 뚜렷해진 한국교회의 분화 현상은 1990년대를 거치며 더욱 심화·첨예화했다. 교회협 등 에큐메니칼 진영의 사회운동과 통일 운동을 거부하는 반공적 보수교회를 중심으로,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창설돼 한국교회의 양극화가 더욱 분명해졌다.

한편,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방북한 문익환 목사는 자신의 통일 운동의 정신적 근거를 성서와 더불어 <주역>의 태극 사상에서 찾았다. 아래는 그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으로 활동하다 1986년 투옥됐을 당시 아내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문익환 목사.
문익환 목사.
큰아들 문호근 돌잔치 당시 모습(왼쪽부터 문익환, 박용길의 할아버지 박승희, 문재린, 김신묵, 박용길). 돌잔치 뒷배경을 태극기와 한반도 무궁화 자수로 장식한 것이 인상적이다(1947년경).
큰아들 문호근 돌잔치 당시 모습(왼쪽부터 문익환, 박용길의 할아버지 박승희, 문재린, 김신묵, 박용길). 돌잔치 뒷배경을 태극기와 한반도 무궁화 자수로 장식한 것이 인상적이다(1947년경).
도봉구 '통일의집'에 소장·전시돼 있는 한반도 무궁화 자수와 돌잔치 사진.
도봉구 '통일의집'에 소장·전시돼 있는 한반도 무궁화 자수와 돌잔치 사진.

"평화를 위한 평화의 싸움은 분열, 상극하자는 게 아니죠. 평화란 이지러짐 없는 완전, 이를테면 태극인 거죠. 음이 양을 배격하지 않고, 양이 음을 배격하지 않는 평화의 싸움은 넓고 크게 서로 끌어안는 경쟁이지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각기 그 가진 가치를 빛내면서 어울려 즐거운 큰 하나가 되는 몸짓이지요. 하나라도 이지러지면 그걸 채우지 않고는 숨이 턱에 닿아 안달하는 몸부림이지요. 사랑이지요. 싸움으로서는 복에 겨운 사랑싸움인 거고.

 

'너는 자유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그건 통일하지 말자는 게 아니냐? 공산주의는 자유와는 상극이니까.' 이게 내가 흔히 서양 사람들에게서 듣는 질문이었소. 서양 사람들의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논리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지요. 자유냐 평등이냐, 우리는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것이 서양의 논리지요. 자유를 택하면 평등을 버려야 하고, 평등을 택하면 자유는 희생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이 서양의 논리가 이 땅에 들어와서 일으킨 것이 6·25라는 민족상잔이었거든요. 6월 23일 진격 명령을 내린 김일성은 평등을 위해서는 자유를 때려 부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아니겠소?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북진 통일을 외친 이승만은 자유의 수호를 위해서는 평등을 때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고. 주역의 음양의 원리에서 보든, 기독교의 평화의 원리에서 보든, 이 둘은 결코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워야 할 것이 아니거든요. 평등과 표리일체가 될 때 자유는 만인의 자유가 되는 거고, 자유와 표리일체가 될 때라야 평등이 만인의 평등, 만인이 자유를 고르는 평등이 되는 거거든요. 우리의 국기(태극기)가 상징하는 음과 양이 하나인 태극을 이루는 거죠. 그러고 보니 민족 통일의 원리가 바로 우리 국기에 있군요. 자유를 양이라고 하면 평등은 음이니까요." (문익환, '음과 양이 하나인 태극기, 그 안에 있는 민족 통일의 원리', 문익환 목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1986년 11월 12일 중에서) 

이렇게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는 문익환 목사에게 분단 극복과 민주주의 성취를 향한 방향을 흔들림 없이 제시해 주는 이정표가 돼 주었다. 태극은 분단의 역사 속에서 반공의 상징으로 그 의미가 전락하기도 했지만, 태극 사상에 깃든 강력한 다이너미즘(dynamism)은 철옹성 같은 냉전 의식과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정면으로 돌진하게 하는 에너지원이 되기도 했다. 

태극기와 교회의 조건부 동행

태극기의 게양은 적어도 1990년대까지 한국교회의 교파와 진보·보수를 초월해 큰 거부감 없이 수용되는 분위기였다. 세계교회협의회(WCC)를 공격하며 분리주의적 태도를 보였던 맥킨타이어의 내한 행사장(1959년 11월 11일)에도 중앙에 태극기가 게양됐고, 1965년 8월 15일 한일 국교 비준 반대 기도회에 참여한 신자들과 청년들도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섰다. 한국교회는 교파를 초월해 8·15 광복절 감사 예배, 3·1절 기념 예배, 6·25 상기 예배 등을 개최하며 각종 교회 행사에 태극기를 적극 게양했다. 1970년대 연세대 김찬국 교수(신학과)는 교회 강단의 태극기 장식을 장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칼 매킨타이어의 방한과 WCC 비판 강연(1959년).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집회에서도 태극기 게양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사진 제공 김응호
칼 매킨타이어의 방한과 WCC 비판 강연(1959년). 이러한 근본주의적인 집회에서도 태극기 게양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사진 제공 김응호
박정희 정부의 한일 협정에 반대 집회를 마치고 거리로 나서다 사복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는 기독교 청년들.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쥐어져 있었다(1965년). 사진 제공 김응호
박정희 정부의 한일 협정에 반대 집회를 마치고 거리로 나서다 사복 경찰들과 몸싸움을 하는 기독교 청년들.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쥐어져 있었다(1965년). 사진 제공 김응호

"서강교회 설립 70주년 기념 예배에서 장로로 취임하는 분들이 태극기와 감리교회기를 두 개 강단에 봉헌한 것을 보고 흐뭇했었다. 강단에 꽂아 둔 태극기가 강단의 권위를 더 높여 주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 교회들도 미국기를 강단에 꽂아 두고 있는지 오래이다. 3·1절 기념 예배 때에는 태극기와 감리교회기를 선두로 행진해 들어가 강단 옆에 세워 둔다." (김찬국, '강단의 권위 문제: 오늘의 설교 목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세계>, 1975년 11·12월 호, 5쪽)

김찬국은 같은 글에서 향후 "3·1절과 8·15 광복절은 한국교회가 예배 의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기념"하자고 권했으며, "국민 의례에 나오는 애국가, 독립선언서 낭독, 만세 삼창, 3·1절 노래, 광복절 노래 등을 기독교 예배 순서에 삽입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한국인의 신앙 주체성을 살리는 길"이며, "교단적으로도 자발적인 움직임을 권장하고 일반화할 필요가 있으며, 한국 기독교 전체가 이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기독교세계> 1981년 2월 호의 "3·1운동 기념 예배와 출애굽 운동: 3·1절을 교회 명절로 만들자"라는 글에서 반복됐다. 다만 눈에 띄는 점은 "'국기에 대한 경례'는 예배 순서에 넣지 않는다"(7쪽)고 강조한 점이다. 이는 앞서 한국교회가 국가권력과 큰 갈등을 빚은 1949년 국기배례 거부 사건의 경험이 수반된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찬국 교수(연세대 신학과).
김찬국 교수(연세대 신학과).

"금년 3월 1일 주일예배 때에는 각 교회가 강단에 태극기를 걸고 예배를 시작하기 바란다. 애국가, 찬송, 기도, 성경 봉독, 독립선언서 낭독, 3·1절 노래, 설교, 찬양(어린이들은 유관순 노래), 회고담(회고담을 할 수 있는 분을 모시는 경우), 찬송, 만세 삼창(태극기를 나누어 주거나 가져오도록 하여), 축도 이런 예배 순서로 짜면 된다. 또 기념 예배에는 지방 유지나 시민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에 참여케 하여도 좋다. 국기에 대한 경례는 예배 순서에는 넣지 않는다.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은 기도를 맡은 분에게 뜻을 알려서 기도하도록 하면 된다." (김찬국, '3·1운동 기념 예배와 출애굽 운동: 3·1절을 교회 명절로 만들자,' <기독교세계>, 1981년 2월 호, 7쪽.)

김찬국은 교회 내에 태극기를 설치하고 3·1절 기념 예배를 드림으로써, "3·1운동의 기본명제인 독재 배격, 군국주의 배격과 함께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나라의 독립과 민주주의의 성취를 오늘과 내일의 우리 역사에 실현하도록 힘써야 할 것"(7쪽)이라고도 강조했다. 한국 감리교회 사례만 살펴보더라도 다양한 교계 행사에 태극기를 게양하거나 대형 태극기 행진 퍼포먼스, 기념품·소품 제작 등 태극기 관련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보급한 사례를 다수 확인할 수 있다.

김찬국, '강단의 권위 문제: 오늘의 설교 목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세계>, 1975년 11·12월 호.
김찬국, '강단의 권위 문제: 오늘의 설교 목회를 중심으로,' <기독교세계>, 1975년 11·12월 호.
'탁상용, 교단기, 태극기 판매', <기독교세계>, 1985년 6월 호, 26쪽.
'탁상용, 교단기, 태극기 판매', <기독교세계>, 1985년 6월 호, 26쪽. 1980년대에는 교회 예배당과 목회자의 책상에 태극기·교단기가 장식되는 관행이 매우 일상적이었다.
교회당 강단을 떠나
광장에 운집한 태극기

하지만 1990년대까지 교회 내에 안착돼 가던 태극기 게양 문화는 뜻하지 않은 복병을 만났다. 1994년 이태원교회 김성일 장로가 한국교회 여러 예배당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는 것을 문제 삼았은 것이다. 그는 <크리스챤신문>·<현대종교> 등 신문·잡지에 '교회의 국기 게양은 성경적인가', '교회의 깃발은 그리스도'와 같은 글을 기고하며 교회 내 국기 게양 반대 운동을 전개해 감리교회 안에서 논쟁을 야기했다. [김성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홍성사, 1994), 24~33쪽 참조]

"각국의 교회들이 자기네 국기를 게양한다면 태양신을 그려 놓은 우루과이의 깃발, 아쇼카의 법륜을 그려 놓은 인도의 깃발, 무신론의 낫과 망치를 그려 놓은 공산국가의 깃발 아래서도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인가? 그대들은 저 사우디아라비아의 깃발 아래서도 예배드릴 수 있는가? 저들의 녹색 깃발에는 흰색의 아랍어 글자가 들어 있는데 그 뜻은 '알라신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모하메드만이 신의 유일한 예언자이다'라는 뜻이다." (김성일, '교회의 깃발은 그리스도,' <비느하스여 일어서라>(국민일보사, 1994), 205쪽)

이러한 분위기는 1992년 감리회의 '변선환·홍정수 교수 종교재판 사건' 등 종교다원주의·포스트모던신학에 대한 뜨거운 논쟁과 더불어 '서태지와 아이들', '뉴 에이지 운동' 등 새로운 대중문화의 출현에 대한 보수 개신교계의 강한 거부감으로부터 촉발된 측면이 있다. 태극기 게양에 대한 김성일 장로의 보수주의적 문제 제기는 '낮은울타리문화선교회'(1990년 창간) 같은 근본주의적인 문화 선교 언론 단체, 같은 해 사단법인으로 인가받은 '한국창조과학회' 등의 공격적인 활동과 연계됐다. 당시 세속적인 사회 문화에 강한 거부감과 경각심을 공유하고 있던 보수교회는 이에 크게 호응했고, 교회당 태극기 게양 문화도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췄다(1990년대 이후 교회 강단에 태극기를 게양하는 문화가 점진적으로 소멸하게 된 역사적 동인과 과정에 대해서는 향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한때 태극기가 근엄하게 게양돼 있던 교회당 강단은 현대적 공연·영상 예배의 수월성·실용성을 꾀하기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급격히 변모해 갔으며, 권위적인 공간들도 점차 단순화·해체되고 있다. 그렇게 태극기 게양은 과거의 추억이 돼 버렸다. 20세기 <통일찬송가>에 존재하던 교독문 '68.국가기념주일', '69.삼일절', '70.광복절'도 현재 <21세기 찬송가>에서는 "나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모두 대체됐다. 현대 한국교회는 외적으로는 교회 성장론 혹은 새로운 예배학적 실험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예배 공간을 빠르게 변형하고 상징물을 제거·신설하고 있으며, 내적으로는 민주적 가치와 기독교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자연스럽게 예배당 강단에서 배제하게 됐다.

극우 기독교 단체들의 서울시청 앞 집회 광경.
극우 기독교 단체들의 서울시청 앞 집회 광경.

현대 교회의 예배 문화와 신앙 양태 변화에도 불구하고, '극우적 신앙'과 '국가주의'가 결합한 극단적 보수 기독교 세력은 지난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2017년 문재인 정부의 수립 과정에서 광장에 게양된 태극기 아래로 재결집해 그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이들은 한국 개신교 전체를 대표하는 수준의 영향력 있는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사회와 언론은 이들의 행태에 주목하며 한국 개신교 전체에 대한 이미지·인식을 소비하고 있다. 또한 사회규범·상식을 파괴하는 이들의 과격한 발언과 폭력적 행동은 정치·사회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향후 한국교회가 선교를 이어 나가고 새로운 정체성 수립을 위해서는, 이러한 극단적 신앙 양태가 더 이상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그리스도인과 시민사회가 소통·연구하며 힘을 모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태극의 역사 앞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 

초기 한국 기독교에 태극기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희망의 상징이었다. 근대국가·자주독립을 성취한 대안적 시민사회를 꿈꾸게 하는 표상이었다. 그렇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동양적 세계관을 표현한 '태극'을 기독교 신앙 안에 녹여내 동서 조화를 모색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비극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태극기를 손수 제작해 만세 시위를 벌이면서 그러한 희망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일본제국의 확대 앞에 상실과 절망을 체험한 한국인들은 결국 일장기 숭배를 강요받거나 자발적 숭배의 길을 선택했다. 일장기 숭배의 길은 굴욕적이지만 달콤한 안전과 권력을 허용해 줬다. 사실 한국교회의 역사적·신앙적 타락과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교회는 일장기 앞에 고개 숙이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훼절의 길에 들어섰다. 그렇게 한국 기독교는 독재(파시즘)와 폭력에 순응한 대가로 물질적 번영과 정치적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예상치 못한 해방을 맞았다. 하지만 교회는 새 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국가와 충돌한 일부 기독교계 세력들은 태극기를 이용하거나 혹은 거부하며 여러 신흥 종교들을 형성했다. 그들은 태극기를 내걸고 민족의 메시야인양 행세했다. 일제에 부역한 기성 교회 또한 회개하지 않았다. 한국교회는 민족 분단이라는 위기 앞에서 '친일'을 은폐하기 위해 '반공'이라는 안전지대로 숨어들었으며, 결국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다. 남한 사회에서 기독교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을 거치며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물적·제도적 특혜를 누렸다. 일제 파시즘 시기보다도 더욱 강력한 물신숭배와 권력화에 경도돼 갔다. 분단과 냉전 체제는 일제강점기에 태극기 배례(경례)를 거부하며 순전한 신앙을 고수했던 보수 신앙마저도 용공, 공산주의, 반체제 인사로 왜곡해 나갔다. 이렇게 기독교 신앙과 국가주의가 결합된 국기 숭배의 메커니즘은 일제 파시즘 시기부터 본격화했고 오늘까지도 한국 사회와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더욱 확실해지는 점은, 최근 반세기 동안 벌어진 태극기의 가치 훼손·왜곡·굴절 과정에서도 여전히 태극기 본연의 정신과 가치를 온전히 인식해 온 건강한 시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4·19 직후, 한국교회 주요 신학대학의 학장을 맡고 있던 홍현설 박사(감신대)와 김재준 박사(한신대)는 <기독교사상>에 4·19에 대한 현실 인식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홍현설, '4·19에서 얻은 교훈', <기독교사상>, 1960년 6월 호.
홍현설, '4·19에서 얻은 교훈', <기독교사상>, 1960년 6월 호.

"4·19를 겪고 난 우리 낡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다만 부끄러움과 자책하는 마음에서 학생 제군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는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이제부터 우리는 좀 더 책임 있는 시민이 되기를 힘써야 하겠다. '책임 있는 시민이 된다'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가가 된다'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일이다. 지금까지의 우리의 무관심과 방관주의의 태도를 버리고 우리의 눈을 크게 뜨고 우리의 귀를 열어서 어디에 부정이 있으며, 불법이 있으며, 민의가 묵살되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살펴서 여론을 일으키고 자유로운 비판을 내려서 그러한 병폐가 축적되어 후일에 또 큰 불행을 가져오지 않도록 국민 한 사람 한 사람 민주주의의 감시병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홍현설, '4·19에서 얻은 교훈', <기독교사상>, 1960년 6월 호) 

"4·19는 암흑을 뚫고 터진 눈부신 전광이었다. (중략) 교회도 이 섬광에서 갑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하여 구정권의 악행에 교회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고 몸부림치는 교인까지 생겨났다. (중략) 교회가 대국가 관계에서 긴장을 풀었다는 것은 무서운 실수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중략) 신약에서 본다면, 로마서 13장과 베드로전서 2장에 국가를 적극적으로 긍정하였으며, (중략) 하나님이 그(국가) 안에서 그것(국가)을 통하여 섭리하신다고 하였고, 그렇기에 기독교인은 이 국가권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복종'이란 말은 현대 민주 사회에 있어서는 '책임적으로 참여 또는 동참'한다는 용어로 대체되는 것이다. (중략) 국가가 전체주의적으로 자기를 신화神化하는 때 이 선(정교분리의 선)은 사실상 도말塗抹되는 것이므로 신자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 (중략)

 

대략 이상과 같은 원칙에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선이 그어진다고 본다면 우리 교회가 이(승만) 정권 시절에 똑똑히 굴지 못했던 자화상이 드러날 것이다. 국가를 절대화하려는 독재 경향이 익어감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에 교회로서의 경고를 제대로 발언하지 못했다는 것, 교회가 멋없이 집권자와의 일치 의식에 자위소를 설정했다는 것, 교회가 대사회 건설 사업에 활발하지 못했다는 것 등등이 원칙적으로 반성될 수 있을 것이다." (김재준, '4·19 이후의 한국교회', <기독교사상>, 1961년 4월 호, 36~38쪽) 

이들이 4·19 이후를 준비해야 할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숙제로 내건 것은 '교회와 국가의 건강한 관계를 수립'하는 일이며, 단순 종교인으로서가 아닌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민주 사회 건설의 주체로 역사에 동참하라는 요청이었다. 홍현설이 말한 "책임 있는 시민이 되는 것"과 김재준이 말한 "책임적으로 참여 또는 동참"하는 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구체적 실천이자 소명이다. 그러나 60여 년 전 두 신학자의 교훈과 경계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고 절실하게 들리는 현실은 자못 씁쓸하고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국가 상징물인 태극기를 관용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이유에는 - 김찬국 교수가 강조했듯 - "독재와 군국주의를 배격하고 인권의 기본적인 자유와 민주주의의 성취를 오늘 우리의 역사에 실현하도록" 힘쓰겠다는 대전제와 공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잃고 권력과 물신의 노예가 되는 순간, 태극기는 언제든지 민족과 시민사회를 분열시키고 자신의 욕망만을 드러내는 추악한 깃발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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