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기독여민회(기여민·조보성 회장)가 11월 2일 '성폭력의 실태와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주제로 24회 종교개혁제를 열었다. 교회 현장을 넘어 사회 전반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모색하기 위한 자리였다. 기여민 정혜진 연구실장은 "교회 성폭력의 뿌리를 근절하고 대안적인 성평등 문화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이 주제를 선정했다"고 했다.

정혜선 변호사(법무법인 이산)는 성폭력이 일부 비정상인이 일으키는 병리적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불균형할 때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는 폭력의 문제라고 했다. 정 변호사는 "교회 내 성폭력 사례를 찾아보면, 시기와 장소만 다를 뿐 수법과 양상이 비슷하다. 결국 담임목사 등 종교 지도자들이 교회 내에서 가진 권위와 힘, 명예,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저지르는 폭력"이라고 말했다.

교회 내 성폭력은 주로 물리적 폭력보다는 가스라이팅·그루밍 등의 방식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정혜선 변호사는 "가해자들은 성서의 메시지나 신앙의 언어, 성에 대한 보수적인 분위기를 악용해 피해자들의 심리를 지배하고 범행을 저지른다. 나중에 자신의 행위가 들통나면 피해자가 했던 말과 행동을 나열하면서 피해자를 굉장히 음란한 사람인 것처럼 매도하는 경우도 있다. 무력감과 죄의식에 빠진 피해자는 지속적인 피해에 시달리고, 피해를 쉽게 고발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위와 같은 특징이 교회 내 성폭력을 처벌하기 어렵게 만든다고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피해자가 성행위에 응한 것처럼 보이고, 현행 강간죄는 폭행·협박 등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강제적 힘을 사용해야 성립하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그루밍을 이용한 성범죄가 처벌 대상으로 명문화돼 있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는 피해 사실을 입증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정 변호사는 "법은 그루밍을 불법적인 행위로 범죄화하고 있지 않다. 개별 사례에서 죄를 인정할 때 피해자가 심리적 항거 불능 상태였다는 정도로만 폭넓게 언급하는 식이다. 이렇다 보니 피해자가 아동·청소년인지 성인 여성인지 등 상황에 따라 재판관마다 판단 기준이 달라진다"고 지적했다.

한선영 대표(심리상담센터 치유공간느낌)는 그리스도인들이 목회자 성범죄에 취약한 교회 문화를 성찰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해 연대해야 한다고 했다. 한 박사는 "신학자 폴 틸리히는 '사람을 대상화·물질화하는 것은 죄'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이 피해 경험을 말할 때 목회자나 주변 교인들은 많은 경우 '공동체를 지켜야 한다'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잠재운다. 하지만 성폭력은 그 자체로 사람을 성적 도구화하고 착취하는 '죄'다. 교회 공동체가 신앙 혹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피해자를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당사자 간의 관계만 파괴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관계망이 깨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 대표는 목회자·성도 모두가 권위주의적 종속성을 경계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는 "목회자를 너무 대단하게 볼 필요도, 반대로 저평가할 필요도 없다. 목회자는 성서를 연구하고 전하는 고유의 일을 담당하는 직업인일 뿐이다. 목회자들도 자신이 가진 힘을 분석하고 악용하지 않기 위한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나 온 김혜정 소장(한국성폭력상담소)은 '변화를 염원하는 목소리들, 권력의 반격에 맞서기'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김 소장은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의 외침이 사회를 바꿔 오면서 가해자를 처벌하는 법 조항은 강화됐지만, 성차별을 기반으로 한 강간 문화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복잡한 쟁점들 또한 새롭게 생겨났다고 했다. 특히 엄벌주의를 바탕으로 한 형법 개정, 성범죄자의 화학적 거세 허용 등은 성폭력을 특정 가해자들만의 문제로 축소시켰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가해자를 변호하는 성범죄 전문 로펌 산업이 성행하면서 '피해자다움'을 강화하는 '백래시(backlash)'가 나타나고 있다고도 했다. 최근 "성범죄 무고죄를 엄벌하겠다"는 대선 후보들의 발언 또한 통계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있으며, 이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위축시킨다고 했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피해자들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자는 것이 아니라, 성범죄 수사·재판 과정에서 삭제됐던 피해자의 위치를 확보하자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날 행사에는 기독교반성폭력센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여성위원회 등 교계 여성 단체 활동가들도 참여해 참석자들과 소통했다. "교회 내 성폭력 가해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처벌을 받은 후 공동체로 회복된 사례가 있느냐"는 한 참석자의 질문에 박신원 상담팀장(기독교반성폭력센터)은 "2018년 이후 250여 건의 교회 성폭력 사건을 접수했지만 그런 경우는 보지 못했다. 초반에는 사건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태도를 보이는 가해자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럴 수밖에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자신의 서사로 이야기를 구성한다. 가해자 입장에서 죄과를 치르고 어떻게 훌륭한 신앙인이 됐는지 어필하며 또 다른 성공 담론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고 말했다.

"교회 내 성폭력 사건으로 파괴된 공동체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정혜선 변호사는 "결국 연대하는 힘밖에 없다. 교회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느 편에 서야 할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피해자가 혼자 외롭지 않게 하는 것, 그리고 피해자를 지지한다고 목소리를 내 주는 것이 공동체를 지키는 연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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