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 본 적 있으세요?
"♬디 띠리리~디띠, 띠리리띠리리~디~,
디 띠리리~디띠, 띠리리띠리리~디~♬"
이게 뭔 소리냐고요? 저희 집 세탁기가 제 할 일을 마쳤을 때 부르는 노랫소리입니다. 재택근무 중이던 어느 여름날 오후였어요. 점심 먹고 돌려 놓은 세탁기가 임무를 완수했다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의자에 질척하게 붙어 있던 엉덩이를 떼고 세탁기가 놓인 보일러실로 향했죠. 건조기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는데 아뿔사, 보일러실 문이 안 열립니다. '헉, 내가 언제 이 문을 닫았지? 보일러실 문은 안에서만 열 수 있는데….'
올해 초 이사한 저희 집 보일러실 문은 집 내부에서만 열 수 있는 미닫이문이에요. 그걸 깜빡하고 습관처럼 문을 닫은 모양입니다. 휴대폰도 방에 두고 왔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지기 시작합니다. 어떻게든 문을 열어 보려고 끙끙대며 당겨도 보고 들어도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세탁기 옆에 널브러져 있던 옷걸이를 잠금장치 쪽으로 요리조리 쑤셔 넣어 보려 해도 들어가질 않아요.
갈수록 마음이 불안해지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릅니다.☔ 심호흡을 하며 아내가 퇴근할 때까지만 버티면 되니, 죽을 일은 아니라고 안위해 봤습니다. 그런데, 서너 시간을 버티기에는 보일러실이 너무 비좁았어요. 그리고 너무 더웠습니다. 실외 온도가 30도를 훨씬 웃도는 한여름이었으니까요. 이놈의 문은 저편에서 '열일하는' 에어컨과 제 사이를 너무도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네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보일러실 창밖으로 얼굴을 삐죽 내밀었지요. 1분, 2분, 3분…. 이런 된장. 날이 더워서인지 행인이 안 나타납니다. 저녁이면 시끄럽게 동네를 휘젓는 배달의 기수들도 안 보이고요. 온몸에 땀이 송글송글 맺힙니다. 부끄럽지만, 멀리라도 누가 지나가는 게 보이면 소리를 질러 보기로 했어요. 어? 보인다! 살짝 위태롭게 몸을 창밖으로 내밀어 내다보니 20~30m 떨어진 곳을 여성 두어 명이 지나가는 게 보입니다.
"저기요~ 저기요~ 저 좀 도와주세요~"
흑. ㅠㅠ 저희 집 쪽을 힐끗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시 제 갈 길을 갑니다. 절망적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이미 온몸은 땀범벅입니다. 엄습하는 고립감·무력감과 싸우며 다시 고개를 창밖으로 내밀었습니다. 오! 오! 저 멀리 행인 한 명이 보입니다.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저기요~ 저기요~ 저 좀 도와주세요~ 제가 지금 보일러실에 갇혔어요!"
와! 제 목소리를 들었나 봅니다. 저희 집 쪽으로 다가오네요.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눈을 마주칠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보일러실에 갇혔는데요.
죄송하지만 제 아내에게 전화 한 통만 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귀인을 만나 저는 구조(?)될 수 있었습니다. 상황을 모른 채 멀리서 보고 들으면 '쟤 왜 저러는 거야?' 하며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는데, 제 구조 신호에 귀 기울이고 다가와 준 그분께 너무 감사했습니다.
한 시간 반쯤 갇혔던 것 같아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듯한 고립감과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듯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멘탈 붙잡기 쉽지 않더군요. 살면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만나 오랜 시간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까 생각했어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관심을 보이고, 귀 기울이며, 한 걸음 다가가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곱씹게 된 날이었습니다.
사역기획국 은석
| 처치독 리포트 |
교회는 평등, 성별 역할은 불평등?
기독교반성폭력센터(기반센)가 11월 19일 흥미로운 여론조사 결과[자료집]를 발표했어요. 개신교 목회자·교인 1000여 명을 상대로 '성 인지 감수성'을 파악한 자료입니다.
그동안 교회 내 성별 불평등이나 목회자 성범죄 관련 문제 제기는 계속 있어 왔어요. 하지만 실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았죠. 혹시 독자님께서 '개신교가 한국 사회에서 성 인지 감수성이 낮은 집단으로 여겨지는데 과연 그러한지', '교회 안팎 여성들은 왜 교회를 성차별적인 공간으로 인식하는지' 궁금했다면 이번 조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성 인지 감수성은 '젠더 감수성'이라고도 불러요. 일상에서 성별 차이로 발생하는 차별과 불균형을 감지해 내는 '민감성'이라고 할 수 있죠. 성 인지 감수성은 현대사회에서 공동체가 얼마나 안전하고 건강한지 알려 주는 지표로 사용되기도 해요.
기반센은 이번 설문에 앞서 4가지 질문을 선정했는데요.
· 일반 사회와 비교했을 때 개신교 목회자·교인의 성 인지 감수성은 어느 정도일까?
· 교회 내 성폭력을 처벌하는 데 있어 목회자와 교인의 생각에는 차이가 있을까?
· 교회 내 '양성평등'에 대한 목회자와 교인의 인식에는 차이가 있을까?
· 교회 내 '양성평등'에 대한 목회자·교인의 인식과 실제 교회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까?
교인과 목회자의 엇갈린 시각
개인적으로 설문 결과를 보고 놀랐어요. 대다수 목회자·교인이 일반적인 수준의 성 인지 감수성을 갖춘 듯 보였거든요. 이를테면,
· "여자가 '싫다'고 말하는 것은 진심이 아닐 수 있다."
· "남자가 성 충동이 일어나면 이를 저항할 수 없다."
·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
와 같이 잘못된 성별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인식을 개신교인 10명 중 7명 이상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지만 눈여겨볼 만한 수치도 있어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을 묻는 항목이었는데요. "성희롱은 교회·학교·회사 등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말에, 10명 중 6명이 동의할 수 없다고 했어요.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어요.
· 하나는 성폭력이 힘(권력)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문제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 다른 하나는 교회·사회 영역에서 여성의 지위가 낮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에요.
어느 쪽이든 개신교인의 성 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 줘요. 교회 내 성폭력은 주로 권력관계에 기반한 가스라이팅·그루밍 양상으로 나타나거든요.
여러 통계 중 제 눈에 들어온 건 3년 이내 교회 안에서 성희롱·성폭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교인들의 비율이에요. 응답자 중 2~22.5%가 다양한 유형의 성희롱·성폭력을 보고 듣거나 직접 경험했다고 했어요. 생각보다 높은 수치죠?
그렇다면 이에 대한 예방 교육이나 처리는 적절하게 이뤄지고 있을까요? 목회자·교인 대부분은 교회 또는 관련 기관에서 성희롱·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고 답했어요. 교회에서 성범죄가 발생했을 때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춰져 있지 않다고 했고요.
가장 간극이 컸던 지점은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의 처리에 관한 부분이었어요. '영구적으로 제명해야 한다'는 응답에서 목회자와 교인의 동의율이 거의 2배나 벌어졌거든요.
· 교인 86.5% : "가해 목사를 가차 없이 영구 제명해야 한다"
· 목회자 49% : "일단 정직부터 시키고, 충분히 회개하면 복권할 수 있다"
성범죄에 관대한 목회자들의 인식이 교회를 성 인지 감수성이 낮은 집단으로 보이게 하는 근본 원인이 아닐까요?
우린 '양성평등'을 좀 더 이해해야
기사에는 모두 담지 못했지만 응답자들의 성별·연령·직분별 차이도 주목할 만해요.
* 목사가 금하거나 조심해야 할 사항이 뭔가요?(1순위, 2순위)
· 여성, 20대 교인: 성범죄 및 성적 스캔들(50.2%), 부정직한 재정 사용 및 돈 욕심(18.5%)
· 남성 교인: 성범죄 및 성적 스캔들(30.5%), 이념 편향적 설교 및 정치적 행위(22.4%)
* 우리 교회가 남녀평등한가요?
· 담임목사(68%): 남녀평등하다
· 부목사(51.7%): 여성에게 불평등
직분이 높아질수록 성 인지 감수성도 부족했어요. 교회에서 남녀 역할 구분을 묻는 질문에서, '여성과 남성이 맡아야 할 일은 어느 정도 구분하는 게 좋다'는 응답은 일반 성도보다 서리집사·중직자에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어요. 설교에서 남녀 차별적인 표현을 인식하는 비율도 직분이 낮을수록 높았고요.
조사 결과를 종합해 보면, 개신교인들은 교회에서 '양성평등'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구체적인 차별 사례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교회는 평등해야 하지만 여전히 여성과 남성의 역할이 구분돼야 한다는 응답이 높다는 건, '양성평등'에 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교회 내 성차별을 문제로 느끼지 못한다는 걸 보여 줘요.이 모습을 보니 "요즘 사회에 차별이 어디 있느냐", "차별은 안 되지만 성소수자는 반대한다"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분들이 떠오르네요.
이번 여론 조사를 계기로 남성 중심적인 교회 문화 속에서 '양성평등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이를 실현할지 논의했으면 좋겠어요.
편집국 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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