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살아오면서 여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한국의 페미니즘은 양성평등보다 여성 우월주의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페미니즘이 '허버허버'와 같은 남성 혐오 용어를 계속 생성하며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과천시 양성평등 기금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우리들의 숙제, 양성평등'에 출연한 이들이 한 말이다. 양성평등 장려를 위해 만든 다큐멘터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여성 차별은 해소됐다"거나 "여성 지위가 많이 올라왔는데 옛날 기준으로 이야기하니까 젠더 갈등이 조장된다"는 엉뚱한 주장들이 군데군데 튀어나왔다. 7월 28일 유튜브를 통해 처음 공개된 46분짜리 영상에는 청년 12명의 인터뷰가 담겨 있다.

이 영상은 과천시의 '양성평등 기금'을 지원받아 제작됐다. 양성평등 기금은 양성평등진흥법 제42조에 따라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지자체가 설치해 둔 기금이다. 과천시는 올해 2월, 총 3000만 원 규모의 '2021 양성평등 기금 지원 사업'을 공모했다. 여기에 해당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과천 청년 모임 '청년사이다' 등 4개 단체가 선정됐다.

과천시 '양성평등 기금 지원 사업'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에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우리들의 숙제, 양성평등' 다큐멘터리 갈무리
과천시 '양성평등 기금 지원 사업'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에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우리들의 숙제, 양성평등' 다큐멘터리 갈무리

영상을 보면 "양성평등, 젠더 갈등, 남성·여성 혐오 등의 이슈를 잘 알지 못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토론, 역사 탐방, 강의, 남녀 관계 코칭 프로그램, 인터뷰 등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참석자들의) 생각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다큐멘터리에 담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청년사이다' 관계자는 9월 1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영상에 등장하는 청년 12중 11명은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천이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성을 분리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름을 존중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영상을 만들었다"고 제작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에는 양성평등에 관한 실질적인 내용보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주로 담겼다. 뿐만 아니라 교계에서 반동성애 운동에 앞장서 온 김지연 약사(한국가족보건협회)도 출연해 역시 페미니즘을 비난한다. 김 약사는 페미니즘 탓에 남성들이 역차별에 시달리고 있다며, 여성 우월주의 대신 진정한 '양성평등'을 실현해야 한다고 했다. 김 약사는 남성·여성은 태생적으로 뇌 구조가 달라, 잘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다는 등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는 "성별로 반반 나누는 게 아니라 공평하게 능력껏 해야 된다. 불 잘 끄는 사람이 소방관이 되고,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잘 교육하는 사람이 교사가 되고, 일을 잘 하는 사람이 CEO가 돼야 한다"며 여성 할당제 반대 주장을 펼쳤다.

김지연 약사의 강연을 들은 청년들은 "성별이라는 것은 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확신을 가지게 됐다", "성별은 남성과 여성뿐이고, 동등한 두 가지 성이 상호 보완하는 사회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게 됐다"며 소감을 나눴다.

김지연 약사는 반동성애 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리들의 숙제, 양성평등' 다큐멘터리 갈무리
김지연 약사는 반동성애 진영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리들의 숙제, 양성평등' 다큐멘터리 갈무리

양성평등의 목적은 남자와 여자의 역할을 고정하고 모든 영역에서 남녀 동수를 단순하게 맞추는 데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을 해소하고, 여성 인권을 함양하는 데 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지자체의 공적 기금이 투여됐는데도, 취지와 달리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차별의 현실을 부정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기자가 '청년사이다' 관계자에게 해당 영상이 양성평등에 기여한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그는 "사람들은 지금의 페미니즘이 너무 극단적이고 귀를 막고 있다고 인식한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려면 현실에 적용 가능한 정도로 지혜롭게 요구해야 한다. 여성만 사는 세상이 아니지 않나. 다 같이 사는 세상인데 한쪽 편만 강요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는 남성과 여성은 태생적으로 다르고 실질적 평등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양성평등'보다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양성 존중'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다소 뜬금없는 말도 했다.

다큐멘터리에는 '양성평등'과 무관한 내용도 포함됐다. '우리들의 숙제, 양성평등' 다큐멘터리 갈무리
다큐멘터리에는 '양성평등'과 무관한 내용도 포함됐다. '우리들의 숙제, 양성평등' 다큐멘터리 갈무리

과천시는 '청년사이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사업을 진행한 시 관계자는 9월 15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보는 사람마다 시각은 다양할 수 있다. (젠더 갈등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시각이 있을 수 있지만,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모인 청년들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했다. 청년들의 다양한 의견을 담아낸 것으로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김지연 약사 출연과 관련해서는 양성평등 관련 기관 등 컨설팅 과정을 충분히 거쳤다며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 애당초 '청년사이다' 측이 제시한 강연자 후보에 반페미니즘 성향을 지닌 오세라비 작가가 포함돼 있어 한 차례 강사 수정 권고를 내렸고, 그 결과 김 약사로 교체가 됐다는 것이다. 시 관계자는 "일부 사회 현안에 대한 강사의 성향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영상에는 일반 대중이 보편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내용만 담겼다. 청년들이 특정 입장을 드러내기 위해 강사를 선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엔딩 크레딧에서도 '양성평등' 전문가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숙제, 양성평등' 다큐멘터리 갈무리
엔딩 크레딧에서도 '양성평등' 전문가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숙제, 양성평등' 다큐멘터리 갈무리

하지만 전문가의 생각은 달랐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조혜련 부장은 9월 17일 <뉴스앤조이>와의 통화에서 "매우 참담하고 속상하다. 성평등은 제도·인식·환경 등 사회적 맥락이 존재하는 문제인데, 개인적 수준에서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노력해 왔던 것들에 대해 '이미 사회는 좋아졌다'고 말하는 점이나, '성차별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갈등을 야기한다'는 주장은 근거도 없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이러한 일방적인 주장을 공공 영역에서 공모 사업으로 선정했다는 것이 의아할 따름"라고 지적했다.

강사로 등장한 김지연 약사에 대해서도 "양성평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조혜련 부장은 "과천시가 이 다큐멘터리를 지원했다는 것은 그 내용에 동의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과연 과천시는 성평등한가. 정말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면 이렇게 교조적인 방식이 아니라 논의의 장을 적극적으로 열어야 했다. 전혀 증명되지 않은 한쪽 입장을 공공 영역에서 승인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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