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나수진 기자] 동서울터미널이 위치한 서울 광진구 구의동은 쓰레기 매립지 위에 흙을 덮어 생겨난 땅이다. 1970년대 서울시가 잠실 일대를 개발하면서 구의지구 1만 1000평도 쓰레기로 매립됐다. 한때 연약한 지반과 가스폭발로 인한 위험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1989년 한진중공업(당시 한일개발)은 그 위에 지하 3층부터 지상 7층에 이르는 동서울터미널을 세웠다.

동서울터미널은 한진그룹이 자본금을 끌어모을 수 있는 알짜 회사였다. 터미널에는 빵집·식당·매점·미용실 등 상가 60여 개가 입주했다. 상인들은 터미널이 개장하던 당시 잠실 아파트 한 채 값이었던 7000만 원에서 2억 원을 내고 자리를 잡았다. 터미널 1층에서 편의점을 운영해 온 동서울터미널임차상인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고희동 위원장은 "한진그룹 고 조중훈 사장이 터미널에 집무실을 만들고 상인들의 가게를 찾아 '권리를 보장해 주겠다', '반은 네 가게다'라는 말을 종종 했다"고 전했다.

IMF 시기에는 한진중공업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상인들은 임차 보증금을 올리면서까지 힘을 모았다. 고 위원장은 "그런 일을 겪고 나니까 관계가 더 긴밀해졌다. 회사(한진중공업)랑 우리는 완전히 특수 관계였다. 회사는 '이 가게는 형식적인 임대다', 우리는 '앞으로 100년은 더 임대하게 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말이 서로 오가는 사이였다"고 말했다.

1989년 개장한 서울시 광진구 동서울터미널은 시설 노후화 등을 이유로 재건축 수순에 들어갔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1989년 개장한 서울시 광진구 동서울터미널은 시설 노후화 등을 이유로 재건축 수순에 들어갔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2017년 시설 노후화 등을 이유로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한진중공업은, 자회사인 필리핀 수빅발전소 경영 부진 등을 겪으며 2019년 10월 신세계동서울PFV에 사업 지분 일부를 매각했다. 신세계동서울PFV는 신세계 부동산 부문 계열사인 신세계프라퍼티의 자회사다. 신세계동서울PFV는 향후 3만 6704㎡에 달하는 이곳 부지에 45층 오피스 3개 동을 아우르는 '서울 최초 스타필드'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소문만 무성하던 동서울터미널 재개발 계획이 2019년 말 현실화하자 30여 년 상권을 형성하며 터미널을 일궈 온 상인들은 하루아침에 가게를 잃고 내쫓겼다. 언제까지나 장사를 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재벌 기업들의 건축 협상 속에서 상인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끝까지 버티던 상가 15곳은 올해 2월 10일과 3월 3일 두 차례에 걸친 강제집행에 모두 철거됐다.

상인들은 명도 소송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했지만, '상생' 방안을 요구하며 동서울터미널 1층 상가 앞에서 매일 집회를 열고 있다. 대부분 60세 이상의 고령인데도 오후 4시쯤이면 나무판자로 봉쇄된 가게 앞에 피켓을 들고 선다. 터미널과 강변역을 오가는 사람들로 분주한 거리에서 홍보물을 건네고, 북을 두드리며 투쟁가를 부른다. 6월 22일 동서울터미널 지하 1층 비상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만난 상인들은 집회를 마치고 땀에 젖은 모자를 벗으며 인터뷰에 임했다.

동서울터미널 상인들은 3월 25일부터 매일 동서울 터미널 앞에서 강제집행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는 동서울터미널임차상인문제해결을위한개신교대책위가 주최하는 기도회가 열린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동서울터미널 상인들은 3월 25일부터 매일 터미널 앞에서 강제집행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에는 동서울터미널임차상인문제해결을위한개신교대책위가 주최하는 기도회가 열린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설날 앞둔 새벽 강제집행
회사 요구에 리모델링까지 했는데…

터미널이 개장한 31년 전부터 프랜차이즈 빵집을 열고 장사해 온 선윤자(67)·오광수(70) 부부는 2월 10일 새벽, 눈앞에서 자신들의 가게가 철거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19로 영업이 부진했지만, 설 대목을 맞아 매출을 조금 기대해 볼 수 있겠다며 각을 맞춰 정리해 둔 상품들이 순식간에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전날도 평상시와 똑같이 영업하고, 마감하고, 집에 들어와 씻고 자려고 누웠어요. 다음 날은 설 전날이니까 바쁠 걸 예상하고 선물류도 갖춰 놓고 포스터도 붙여 놨어요. 근데 밤 12시 10분쯤 됐을 때 강제집행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급히 달려가 보니 용역들이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문을 전부 잠그고 있었어요. 제 가게가 털리고 있었지만 아우성만 칠 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용역들이 빵을 까서 먹으며 우리를 비웃었어요. 물건들은 쓰레기 담듯이 다 쓸어버렸어요."

당시는 상인 9명이 제기한 두 번째 명도 소송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었다. 앞선 2월 4일 상인 10명이 제기한 첫 번째 명도 소송 재판에서 이미 기각 판결이 나왔지만, 상인들은 내심 뒤집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적어도 두 번째 소송 항소심 판결이 나오는 2월 17일 전까지는 강제집행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진중공업은 2월 10일 용역을 동원해 상가 10곳을 강제집행했다. 두 번째 소송 항소심마저 기각되자 3월 3일에는 상가 5곳이 강제집행당했다.

터미널 1층에서 프랜차이즈 빵집을 운영해 온 선윤자(사진 오른쪽)·오광수(사진 가운데) 부부는 인터뷰 내내 "너무너무 억울하다",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이 닥칠 줄은 몰랐다"며 한탄했다. 선 씨는 강제집행 이후 약을 먹어야 잠에 들 수 있을 정도로 힘들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터미널 1층에서 프랜차이즈 빵집을 운영해 온 선윤자(사진 오른쪽)·오광수(사진 가운데) 부부는 인터뷰 내내 "너무너무 억울하다", "내 인생에서 이런 일이 닥칠 줄은 몰랐다"며 한탄했다. 선 씨는 강제집행 이후 약을 먹어야 잠에 들 수 있을 정도로 힘들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상인들은 2016년 한진중공업 요구에 따라 가게 '리뉴얼'도 한 상태였다. 선윤자·오광수 부부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3억 원가량을 들여 지하까지 매장을 확장했다. 상인들은 회사 한마디에 장사를 접어야 할 수도 있는 '을'이기 때문에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이듬해 계약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몇 해 전부터 재개발 소문이 들려 왔지만, 리모델링을 하라고 하니 당장 닥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기가 어렵고 공실이 많으니까 저희한테 지하를 뚫어서 덤웨이터(식품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고 했어요. 원래는 1층 매장만 운영하면서 공장도 같이 두고 그랬는데, 공장을 지하로 내리면서 제품을 생산해서 바로 위로 올리게 됐어요. 비싼 돈 들여서 했죠. 그렇게 하면 저는 오래도록 장사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근데 뒤에서는 회사가 매각 협상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건물값을 더 비싸게 받기 위해서 모든 점포들에 리모델링을 하라고 한 거죠."

명도 소송 2심서도 패소
'제소 전 화해조서'가 쟁점

리모델링 후 3년이 지난 2019년 10월 25일, 우려는 현실이 됐다. 상인들은 이날 한진중공업에서 "'제소 전 화해조서'를 근거로 계약 기간 연장이 불가하니 퇴거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때 처음으로 화해조서가 작성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진중공업이 근거로 든 화해조서는 2018년 말 재계약 당시 상인들의 위임장을 받은 대리인 이 아무개 변호사가 작성한 문서다. 조서에는 "임대차 계약 기간 중 건물에 대한 개발 사업이 진행될 경우 임차인은 임대인의 건물 인도 요청을 받는 즉시 기간의 이익을 포기하고 임대인에게 건물을 인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제소 전 화해조서를 작성할 경우, 임대인은 별도 소송 없이 퇴거를 거부하는 상가에 대해 강제집행을 할 수 있게 된다.

상인들은 위임장 작성이 제소 전 화해조서 작성으로 이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매년 11~12월이 되면 상인들은 재계약을 하기 위해 터미널 내 위치한 관리사무소로 올라가 신분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인감도장을 건넸다. 계약 제반 서류들은 한진중공업의 결재를 거쳐 이듬해 1월 상인들의 손에 돌아왔다. 고희동 위원장은 "위임장은 20년 동안 거의 매년 받아 왔다. 2018년 말 재계약에서도 상인들은 관행적으로 임대차계약서와 위임장을 작성했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임대차계약을 하더라도 세입자는 계약서에 대해 말을 못 하잖아요. 집이 없어서 방을 구하러 간 입장인데 내용이 합당하지 않아도 그냥 이름을 쓰는 거예요. 도장도 요즘에는 중개사가 찍어요. 그게 관행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매년 계약서를 쓰면서도 내용은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어요. 봐 봤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까요. 내년에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문서 내용을 살펴보기보다 도장 먼저 찍고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서울터미널임차상인비상대책위원회 고희동 위원장은 매년 재계약이 관행적으로 이뤄졌고, 상인들이 계약 서류를 바로 살필 수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동서울터미널임차상인비상대책위원회 고희동 위원장은 매년 재계약이 관행적으로 이뤄졌고, 상인들이 계약 서류를 바로 살필 수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제소 전 화해조서를 작성한 이 변호사는 2020년 12월 11일 서울동부지방법원에서 열린 명도 소송 2차 변론에서 증인으로 나와 "임차인들로부터 (화해조서 작성에 관해) 연락받은 적도 없고, 연락처를 몰라 연락한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는 화해조서 내용을 한진중공업으로부터 받아 작성하고 수임료도 한진중공업에서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상인들은 이 변호사가 임차인의 대리인인데도 임대인에게 유리하게 조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명도 소송 재판에 영향을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화해조서 조항은 임대차계약 내용 중 주요 사항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새로운 내용이나 임차인인 피신청인의 의무를 가중시키는 사항이 전혀 없다"며 소송을 기각했다. 2심까지 이어진 명도 소송에서 모두 패소한 상인들은 2월 21일 대법원에 "제소 전 화해조서는 불법"이라며 상고한 상태다.

현행법으론 재건축 임차 상인 보호 못 해
계속 장사권 및 우선 임차권 보장 요구

30년 동안 지역 상권을 형성하고 건물 가치를 올려 온 상인들이지만 강제집행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들은 현행 상가임대차보호법 적용 대상도 아니다. 상인들 대부분 임차 기간이 10년을 넘어 법이 보장하는 계약 갱신 요구권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제10조 1항 7호에 따라 "재건축 계획을 임차인에게 구체적으로 고지하고 그 계획에 따르는 경우"나 "건물이 노후·훼손 또는 일부 멸실되는 등 안전사고의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는 계약 갱신 요구권이 작동하지 않는다.

한진중공업은 2019년 말 계약 종료 이후로 상인들과 어떠한 상생 방안도 합의하지 않은 채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터미널을 인수한 신세계프라퍼티도 계약상 임차인 승계 조항이 없다며 선을 그었다. 서울시는 재건축 인허가 조건으로 임차인과의 합의를 내걸었지만, 명도 소송 대법원 판결이 나오게 되면 이마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퇴거를 마친 동서울터미널 내부 상가 모습. 뉴스앤조이 나수진
퇴거를 마친 동서울터미널 내부 상가 모습. 뉴스앤조이 나수진

상인들의 요구는 재건축 기간 동안 임시 상가에서 장사할 수 있는 '계속 장사권'과 신축 터미널 상가에 먼저 입주할 수 있는 '우선 임차권' 보장이다. 비대위는 6월 3일 기자회견을 열고 "재건축 이후 신축 터미널 상가에서 우선 임차권을 보장받고 합리적인 임대료를 내며 영업하기를 요구한다"며 "서울시와 신세계프라퍼티, 산업은행은 동서울터미널 재건축 인허가 시 임차 상인의 생존권과 기본권을 반영한 상생의 사전 협의를 진행하라"고 했다.

강제집행 후 터미널 앞에서 집회를 시작한 지 3개월을 맞은 상인들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했다. 2층에서 식당을 운영해 온 김경백 사장은 "우리가 생활비도 벌지 않고 매일 와서 투쟁을 하는 이유는 세력을 키우거나 합의금을 받으려는 게 아니다. 우리 요구 사항은 처음이나 끝이나 동일하다. 계속 장사할 수 있는 가게를 달라는 것이다. 그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투쟁할 각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2층에서 식당을 운영해 온 김경백 사장은 "우리는 합의금을 바라는 게 아니다. 처음의 요구가 이뤄질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2층에서 식당을 운영해 온 김경백 사장은 "우리는 합의금을 바라는 게 아니다. 처음의 요구가 이뤄질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정신적·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이지만 계속 투쟁에 나서는 이유는 "우리와 같이 쫓겨나는 사람들을 두 번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이를 위해서는 상가 임대차계약에서 관행처럼 이뤄지는 제소 전 화해조서 제도를 폐지하고, 재건축 사전 협의 시 임차 상인들이 당사자로 반영돼야 한다고 목소리 높였다.

"지금 시점에서 모든 것을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뭘 고치자고 할 만큼 당당한 삶을 살아오지도 않았고요. 딱 하나 바라는 것은 잘못된 관행에 의해 사람이 쫓겨났으니까 두 번 다시 이런 피해자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거예요. 재개발사업에서 기업들이 이윤을 추구하다 보니 상인들은 죽으나 사나 관심이 없어요. 서울시 공무원들도 재벌 기업이 와서 쪼니까 우리에게 돈 좀 몇 푼 받고 나가라고 해요. 하지만 그런 인식이 바뀌어야 다음에 피해자가 생기더라도 믿는 구석이 있을 거라고 봐요."

상인들의 요구는 단 하나다. 30년 동안 일궈 온 '집'과 같은 가게에서 계속 장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이들은 서울 노원구 인덕마을 등 철거 현장과도 연대의 끊을 놓지 않으며 재개발·재건축 문제 해결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상인들의 요구는 단 하나다. 30년 동안 일궈 온 '집'과 같은 가게에서 계속 장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이들은 서울 노원구 인덕마을 등 철거 현장과도 연대의 끊을 놓지 않으며 재개발·재건축 문제 해결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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