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단체라고 소개하면 저쪽(혐오 세력)인 줄 알고 놀라요. '우리는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한다'고 말하니까, 그제야 (스티커를) 받더라고요."

[뉴스앤조이-나수진·엄태빈 기자] 개신교 부스 앞에서 스티커를 나눠 주던 박승렬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9월 9일 열린 제6회 인천 퀴어 문화 축제에서 개신교 성소수자 인권 단체 큐앤에이가 제작한 스티커를 나눠 줬다. 스티커에는 '새 계명을 예수께서 주시니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예수께서 발의하신 차별금지법 제정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박 목사는 타 지역에서 온 한 고등학생에게 기도를 요청받기도 했다. "내게 다가와 '목사님이시냐'고 묻더니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더라. 자세히 묻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이 기독교인이고 미션스쿨을 다녔다고 했다. 혼자 여기까지 찾아온 걸 보면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싶어 마음이 아팠다. 함께 기도를 하는데 펑펑 울더라"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친구가 되어 준다는 건 별게 아니다. 교회가 '하나님은 누구든 사랑하신다', '괜찮다'고 말해 주면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이렇게까지 마음고생을 하지 않아도 될 거다. '성소수자가 옳다, 그르다'라는 논리 이전에 한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가진다면 저렇게까지 야멸차게 반대하지 않을 텐데…." 

박승렬 목사는 퀴어 문화 축제 참가자 한 명 한 명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적힌 스티커를 건넸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시장로 일대에서 열린 인천 퀴어 문화 축제에는 약 700명(경찰 추산)이 참석했다. '차별을 넘어 퀴어해'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축제는 시종일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앞서 인천 퀴어 문화 축제는 보수 교계의 방해로 장소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인천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부평역 북광장에서 축제를 열고자 했지만, 부평구청은 부평구기독교연합회(부기연)가 먼저 광장 사용을 신청했다며 불허했다. 이 과정에서 부기연이 퀴어 문화 축제를 막기 위해 무더기로 광장 사용 신청을 낸 사실이 드러났다. 인천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부평구청이 부기연에 사용을 수리한 날짜가 규정보다 앞선다며 항의했지만, 부평구는 끝내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이에 인천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법원은 기각했다. 축제 하루 전인 9월 8일 인천지방법원은 "신청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거나 이를 예방하기 위하여 그 집행을 정지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했다. 결국 인천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축제 장소를 광장 맞은편인 부평시장로 일대로 변경했다.  

제6회 인천 퀴어 문화 축제가 인천시 부평시장로에서 열렸다. 당초 축제는 맞은편 부평역 북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보수 교계가 무더기로 광장 사용 신청을 하면서 급히 장소를 변경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제6회 인천 퀴어 문화 축제가 인천시 부평시장로에서 열렸다. 당초 축제는 맞은편 부평역 북광장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보수 교계가 무더기로 광장 사용 신청을 하면서 급히 장소를 변경했다. 뉴스앤조이 나수진 

이날 오전 11시부터 부평시장로에는 부스 20여 개가 자리 잡았다. 단체·정당들은 각종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해 참가자들을 맞았다. 사람들은 부스를 둘러보고 인증샷을 남기며 즐거워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참여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물감으로 무지개 깃발을 칠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아 비눗방울을 만드는 등 활동에 참여하며 해맑게 웃었다. 

큐앤에이도 부스를 차렸다. 부스 안에서는 큐앤에이 사무국장 이동환 목사의 축복식이 진행됐다. 한 참가자는 자신이 신학교를 다니는 성소수자라며 "동성애를 죄라고 바라보는 입장은 신앙의 다양성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표출하는지는 다른 문제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똑같은 분인데 너무도 다른 양상을 띠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대학 성소수자 모임에서 나왔다는 한 참가자는 "이전에는 기독교 신앙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됐다. 예수님은 약한 자와 함께하셨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계획하여 만드셨다고 하는데, 그것을 부정하면서 왜 그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개신교 부스를 찾은 참가자들에게 축복기도를 하고 있는 이동환 목사. 뉴스앤조이 나수진 
개신교 부스를 찾은 참가자들에게 축복기도를 하고 있는 이동환 목사. 뉴스앤조이 나수진 

2019년 제2회 인천 퀴어 문화 축제에서 고 임보라 목사, 김돈회 사제와 축복식을 진행했다가 교단에서 징계를 받은 이동환 목사(영광제일교회)는 "혐오 세력의 주장만이 기독교의 목소리는 아니"라고 했다. 이날 연대 발언에 나선 이 목사는 "성소수자를 차별·혐오·정죄하는 교회를 바꾸려 한다. 이것은 사회 인권 진전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에 속한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자 목사로서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이라면서 "모두의 사랑이 무지갯빛처럼 찬란하게, 어떠한 벽에도 부딪침 없이 곧게 나아가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이곳에 함께하겠다"고 말했다. 

고 임보라 목사를 추모하는 시간도 있었다. 행사 사회를 맡은 소주(활동명)와 조서울 공동조직위원장은 "신앙을 가진 퀴어들에게도, 신앙을 가지지 않은 퀴어들에게도 등불과 같은 분이었다. 많은 성소수자 친구의 버팀목이 되어 줬다"며 함께 임 목사를 추모하자고 했다. 김하나 목사(섬돌향린교회)는 "인천 퀴어 문화 축제가 한국교회의 폭력적인 행위로 힘들고 아픈 시간을 보내 왔기 때문에, 임보라 목사와 섬돌향린교회는 더욱 송구한 마음으로 연대해 왔다"며 추모사를 읽어 내려갔다. 

"보라색 가발을 쓰고 무지개 스톨을 한 초록나무를 우리가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추억으로 이곳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록나무의 인천 퀴어 문화 축제를 향한 애정이 지금 이 순간까지 연결되어 이곳에 담겨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는 마땅히 성소수자들에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네 편이 되어 줄게'라는 임보라 목사의 컬러링처럼, 섬돌향린교회는 앞으로도 오롯이 여러분의 편이 되겠습니다. 모두가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디딤돌이 되겠습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세상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 그 누구보다 반짝이는 당신을 초록나무의 기운으로,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이동환 목사(사진 위)와 김하나 목사(사진 아래) 등 축제에 참가한 개신교 목회자들은 보수 교계의 주장이 기독교 전체의 목소리는 아니라고 외쳤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이동환 목사(사진 위)와 김하나 목사(사진 아래) 등 축제에 참가한 개신교 목회자들은 보수 교계의 주장이 기독교 전체의 목소리는 아니라고 외쳤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축제 하이라이트인 퍼레이드가 시작하기 전에는 개신교·가톨릭 성직자들의 축복식이 있었다. 선두에 선 이동환·김하나·김수산나 목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와 박상훈 사제(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는 축복기도문을 읽으며 무지개색 꽃잎을 참가자들을 향해 뿌렸다. 참가자들은 부평시장역, 부흥 오거리, 굴다리 오거리 등 부평 시내 일대를 행진했다. 출발 지점에 서 있던 몇몇 보수 개신교인이 "예수 천당 동성애 지옥"이라고 소리치자, 참가자들은 "회개하라 평등이 왔다", "퀴어 천국 차별 지옥"이라고 외쳤다. 

행진 중에는 "동성애 반대"를 외치며 따라오던 한 남성이 갑자기 선두 행렬을 향해 몸을 던지는 일도 벌어졌다. 경찰이 곧바로 그를 끌어냈지만, 이혜연 공동조직위원장은 다리를 다치는 등 피해를 입었다. 그는 행진을 마친 뒤 소셜미디어에 "(가해자가) 1회 축제에서 날 폭행하려 했고, 작년에는 물병을 던진 사람과 동일 인물인 것 같다. 차라리 내가 당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참가자였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보수 개신교인들의 방해에도 축제는 평화롭게 마무리됐다. 약 1시간 동안 행진을 하고 돌아온 참가자들은 안도하며 흥겨운 음악 속에서 축제를 마쳤다. 

개신교·가톨릭 성직자들은 퍼레이드 행렬에 무지개색 꽃잎을 뿌리며 축복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하나 목사, 박상훈 사제, 이동환 목사, 김수산나 목사. 뉴스앤조이 엄태빈
개신교·가톨릭 성직자들은 퍼레이드 행렬에 무지개색 꽃잎을 뿌리며 축복했다. 사진 왼쪽부터 김하나 목사, 박상훈 사제, 이동환 목사, 김수산나 목사. 뉴스앤조이 엄태빈
몇몇 보수 개신교인들의 위협이 있었지만, 참가자들은 부평 시내 일대를 평화롭게 행진한 뒤 축제를 마무리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몇몇 보수 개신교인들의 위협이 있었지만, 참가자들은 부평 시내 일대를 평화롭게 행진했다. 뉴스앤조이 엄태빈

한편, 이날 도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부평역 북광장에서는 보수 교계의 대규모 반대 집회가 열렸다. 부평역 북광장에서는 '인천 퀴어 집회 반대 2023 인천 시민 대회'라는 이름으로 맞불 집회가 진행됐다. 경찰 추산 1500명(13시 30분 기준)이 참석했다. 당초 부기연은 '인천 성시화 운동'이라는 문화 행사로 집회 신고를 했지만, 실상은 퀴어 문화 축제를 반대하기 위한 집회였던 것이다. 일부 부스에서는 낙태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이동환 목사가 기독교대한감리회를 상대로 건 징계 무효 소송 관련 탄원 서명을 받았다. 

집회에서는 성소수자를 왜곡하고 혐오를 조장하는 발언이 난무했다. 사회자는 퀴어 문화 축제는 인천의 도덕과 윤리를 무너뜨린다며 "이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축제다. 덥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건 하나님이 알아주신다. 우리의 예배와 연합을 통해 저들에게 동성애는 옳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자"고 말했다. 인천시기독교총연합회 상임회장 주승중 목사(주안장로교회)는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동성애에 빠진 소수자들을 차별 없이 사랑하지만, 동성애는 죄이고 잘못된 것이며 사회적으로나 전통적으로도 용인될 수 없는 것임을 천명한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손에 든 흰 깃발을 세차게 흔들며 '아멘'이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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