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최승현 기자]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가영 씨(21)는 신실했다. 아빠 박계순 집사로부터는 3대째, 엄마 최선미 집사로부터는 2대째 그리스도인으로 자랐다. 돌잔치를 교회에서 했고,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삶에 교회와 집밖에 없는" 엄마처럼 교회를 섬겼다. 교회와 사람을 사랑했다. 중고등부 때는 심야 예배를 빼놓지 않고 다녔고, 대학에서는 찬양 동아리 활동을 했다.

가영 씨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고 싶어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목원대 패션디자인학과의 길거리 퍼포먼스를 TV로 보고 패션디자인과 진학을 꿈꿨다. 언젠가 가영 씨는 엄마 최선미 집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장애인이나 노인, 그늘에 있는 아이들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옷을 만들어 주고 싶어.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아."

그러나 가영 씨는 미술에 소질이 없었다. 엄마와 학원 선생님은 가영 씨의 미대 진학을 회의적으로 봤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목원대라는 감동을 주신 뜻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포기하지 않았다. 남들이 3시간 연습할 때, 6시간, 9시간을 노력했다. 기도도 빠뜨리지 않았다. 결국 가영 씨는 원하는 학교에 합격했다.

대학 진학 전, 가영 씨는 엄마에게 "내가 만일 부산으로 대학을 간다 하더라도 매주 집이 있는 홍성에 와서 우리 교회에서 헌신할 거야"라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가영 씨는 학교가 있는 대전에서 주말마다 집으로 와 교회를 섬겼다.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던 딸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근처에 사는 친구와 전시회를 보고 오겠다"고 말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 가영 씨의 부모는 10월 30일 오후가 되어서야 참사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서울 강동구 강동성심병원에서 딸을 찾을 수 있었다. 부부가 딸을 발인하고 떠나보낸 11월 1일은 가영 씨의 생일이었다.

'믿음의 가정'이었던 박계순·최선미 집사의 삶은 이태원 참사를 겪은 후 달라졌다. 정비사였던 박계순 집사와 사회복지사였던 최선미 집사는 참사 이후 생업을 포기하고, 딸이 왜·어떻게 죽었는지 진상을 밝히기 위해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녹사평 분향소를 수시로 오간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인터뷰에 임하고, 참사 진상 규명에 관심 가져 달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한다.

10·29 이태원 참사 3차 시민 추모제가 열린 1월 14일, 박계순·최선미 집사 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매일 분향소를 찾아 딸의 영정을 쓰다듬으며 기도한다. 이태원 참사로 숨진 가영 씨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참사 이후 부부의 신앙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들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가영 씨의 부모, 박계순·최선미 집사를 만났다. 부부는 누구보다 신실했던 딸 가영 씨를 떠올리며, 참사 후 신앙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말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태원 참사 희생자 박가영 씨의 부모, 박계순·최선미 집사를 만났다. 부부는 누구보다 신실했던 딸 가영 씨를 떠올리며, 참사 후 신앙관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말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왜 갔느냐'가 아니라,
'왜 못 돌아왔느냐'고 물어야'"

일부 기독교인은 핼러윈을 '귀신 축제'로 규정하면서, 이태원 현장에 간 희생자들과 참가자들을 비난하기도 했다. 모욕적이고 무례한 말에 유가족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귀신이라는 말에 가장 예민한 곳이 교회잖아요. 안 믿는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믿는 사람들은 오죽 그렇게 생각할까 두려움도 있었고, 실제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왜 귀신 축제에 보냈느냐'고. 그런데 저도 '왜 거기 가는 걸 몰랐을까', '왜 거기 가는 걸 말리지 못했을까', '가영이가 뭐에 홀려서 거기를 갔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저도 그 프레임에 갇혔던 거죠. 처음에는 '그러게요. 저희가 신앙 교육을 잘못했네요. 내가 좀 더 잘했으면 아이가 도로에서 그렇게 허망하게 가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했죠."

한번은 같은 교회 교인이 박계순 집사를 붙잡고 공개적으로 꾸짖듯 물은 적도 있다. 부부는 딸을 욕보이는 것 같아 자제했지만, 큰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박 집사는 "왜 이태원에 갔다는 이유만으로 딸이 비난받아야 하느냐"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핼러윈 축제가 이태원에서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단지 이태원에 외국인이 많이 살다 보니 사람이 더 몰렸던 거고요. 그 지역은 다양한 문화를 볼 수 있어서 가영이처럼 디자인 전시 같은 걸 보러 간 사람도 많아요. '왜 거길 갔느냐'가 아니라 '왜 못 돌아왔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교인들이 그런 점을 생각하며 기도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폭력으로 다가온 위로
가영 씨가 입교식(만 18세 이상 성인 교인이 되는 예식)을 마치고 엄마 최선미 집사와 함께 기뻐하는 모습. 사진 제공 최선미
가영 씨가 입교식(만 18세 이상 성인 교인이 되는 예식)을 마치고 엄마 최선미 집사와 함께 기뻐하는 모습. 사진 제공 최선미

참사로 딸을 떠나보낸 후, 많은 교인이 가영 씨 부모를 위로했다. 장례 후 부부 집 앞에는 음식과 손 편지, 신앙 서적, 꽃이 매일 놓였다. 박계순·최선미 집사 부부는 교인들이 건네고 간 것들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들 역시 이웃이 어려울 때 같은 방식으로 위로했기 때문이다.

부부는 교인들의 따뜻한 위로가 자신들을 다시 일으키는 힘이 됐다고 고마워했다. 그렇지만 때로는 의례적인 위로의 말이 얼마나 잔인하고 상처로 남는지 깨닫기도 했다고 최선미 집사는 말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섭리' 같은 말은 딸을 잃은 가영 씨 부모에게 폭력으로 다가왔다.

"신앙인에게는 공식이 있잖아요.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은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너에게 더 큰일을 주시려고 한 것이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말들. 결국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다'라고 말하는 게 우리의 공식이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 왔고, 누군가 슬픔을 겪을 때 그렇게 위로했어요.

 

그런데 그게 너무너무 잔인한 '칼'이더라고요. 나를 크게 쓰시려고 우리 가영이를 데려가셨다고요? 왜 내 새끼를 희생시켜서 내가 크게 돼야 하나요? 나를 희생시켜서 우리 딸을 크게 만드셔야지. 그 위로가 정말 잔인하게, 어떤 욕보다 더 힘들게 다가오는데, 그때서야 '내가 정말 신앙생활을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나님이 준 지혜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신앙생활을 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예요."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최선미 집사는 희생자와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박계순 집사의 멀지 않은 친척 중에도 세월호 참사 희생자가 있었다. 사회적 참사를 직간접적으로 겪고 나니,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저 '저들을 위로해 주세요'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최 집사는 말했다.

"저는 세월호 때도 그 엄마들을 위해서 정말 기도 열심히 했어요. '저들을 위로해 주세요. 저들을 통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 건지 그 계획을 엄마들에게 알려 주시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게 인도해 주세요'라고요. 난 그게 다인 줄 알았어요. 그 사람들 위해서 중보 기도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우리는 그렇게 배웠잖아요. 그때 (세월호 가족들을 위해) 같이 분노하지 못한 걸 회개했어요. 하나님이 '우는 자를 위해 같이 울라'고 하셨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같이 분노하고 싸우라'는 뜻이었어요. 울면서 참으라는 게 아니더라고요."

위로받으려 설교 방송 틀었는데
"사탄이 틈타니 그만 슬퍼하고 잊으라"
가영 씨(사진 가운데)는 10월 29일, 이태원에 사는 친구와 전시회를 보러 가겠다고 연락한 후 돌아오지 못했다. 가영 씨 부모는 10월 30일 오후가 되어서야 서울 강동구 강동성심병원에서 딸을 만날 수 있었다. 가영 씨는 생일이었던 11월 1일 발인을 마쳤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가영 씨(사진 가운데)는 10월 29일, 이태원에 사는 친구와 전시회를 보러 가겠다고 연락한 후 돌아오지 못했다. 가영 씨 부모는 10월 30일 오후가 되어서야 서울 강동구 강동성심병원에서 딸을 만날 수 있었다. 가영 씨는 생일이었던 11월 1일 발인을 마쳤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최선미 집사는 딸의 죽음 앞에서, 먼저 떠나간 두 명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다.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믿음 좋은 장로님이었다. 임종을 앞둔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내가 죽으면 울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산 자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 따라 살아가라." 최 집사는 유언을 받들어 상중에 울지 않았다. 그러나 부모와 달리,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상황에서는 울지 않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앞으로 자신은 평생 울며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죽음은 신앙의 친구이자 멘토, 동반자였던 교회 권사였다. 대장암으로 투병한 그의 곁을 2년간 지켰다. 임종이 머지 않았을 때, 최 집사는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는데 억울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 권사는 "내가 하나님 앞에 빨리 가는 건 괜찮아. 내 새끼가 아니잖아. 하나님이 나를 아프게 해서 나를 데리고 가시는 게 감사하지. 만약에 내 자녀가 아파서 먼저 갔으면 그 슬픔을 어떻게 하겠어. 나는 너무 감사해"라고 했다. 최 집사는 그 말을 들으며 기쁜 마음으로 가시라고, 당신의 자녀들은 하나님이 잘 지켜 주실 것이라고 축복했다.

가영 씨를 떠나보낸 이후, 최선미 집사는 그 권사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자기보다 더 슬픈 사람이 어디 있을까 생각했다. 평생 신앙인으로 살아온 최 집사는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자 했다. 하지만 유명 목회자의 설교를 찾아 들었다가 상처를 받았다.

"사고 이후에 잠을 못 잤어요. 그래도 우리가 찾아야 할 건 말씀이라고 생각해서 대형 교회 목사님들 설교를 밤새 틀었어요. 그런데 한 목사님이 '슬픔이 오래가면 사탄이 틈타니까 그만 잊자'는 취지로 설교를 하시더라고요. 굉장히 유명한 목사님이에요.

 

녹사평 분향소 주변에 있는 극우 단체들 하는 말이 그거예요. '그만 울라'고. '언제까지 울 거냐'고. 자식을 잃었는데 열흘을 울까요, 한 달을 울까요? 저는 이제 아이에게 용돈도 못 주고, 밥도 못 차려 주고, 격려도 못 해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평생 우는 것밖에 해 줄 게 없어요.

 

자면서도 울어야 하고, 일상에서도 울어야 하고, 우는 게 제 일인데 어떻게 그 목사님은 그렇게 말할 수 있죠? 그분이 낮은 곳을 한 번이라도 쳐다보기나 했을까요? 교회에 찾아가서 항의하고 싶더라고요."

분향소를 지키는 중에도 슬픔은 더해만 갔다. 타 종교에서는 주기적으로 분향소를 찾아 유가족을 위로했다. 그럴 때마다 가영 씨 가족들은 부럽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했다. 누구보다 찬양을 좋아했던 딸, 대학에 가서도 찬양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딸을 위해 찬양을 불러 주는 이도, 기도해 주는 이도 없었다.

"분향소가 세워진 이후로 매주 수녀님들이 와서 미사를 드려요. 스님들은 49재를 지내 줬고요. 교회는요. 한 번도 안 왔어요. 물론 저희를 도와주시는 목사님이 계시긴 해요. 그렇지만 대형 교회 목사님들, 교회 단체들, 한 번도 녹사평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어요. 목회자들이 이런 낮은 곳에 와서 위로하고 손잡아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가영이가 살아생전 말씀 듣고 찬양 집회 가는 것 좋아했는데, 지금은 찬양도 말씀도 못 듣고 있어요. 교회는 현 정부 눈치를 보거나, 이태원 참사를 정치적으로 생각해서 안 오는 것 같아요."

이보다 더 안타깝고 괴로운 일은 모든 사안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달려드는 극우 개신교인들을 마주할 때다.

"전광훈 목사 집회 끝나면 흥분이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사람들이 (분향소 앞에) 와서, '마귀들과 싸울지라'를 불러요. 그러면서 우리 보고 '사탄의 자식들'이라고. 같은 교인들에게 그렇게 공격을 당할 때면 두 배, 세 배로 (원망스러워요)."

고3 입시 후 가영 씨가 그린 그림. 최선미 집사는 가영 씨가 입시 과정에서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렸을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제공 최선미
고3 입시 후 가영 씨가 그린 그림. 최선미 집사는 가영 씨가 입시 과정에서 함께 슬퍼하며 눈물 흘렸을 예수님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사진 제공 최선미

참사를 겪으며 최선미 집사의 신앙관은 크게 바뀌었다. 그는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자신의 신앙생활을 뒤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저는 오랫동안 중고등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어떻게 하면 교회에 많이 오게 할까, 어떤 프로그램을 해야 아이들이 재밌어 할까,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성경 구절 하나라도 외우게 할까를 고민했어요. 그런데 하나님 말씀이 어떤 진리를 포함하고 있는지, 이 진리가 틀어졌을 때 어떻게 목소리를 내야 하는지는 가르치지 않았던 거예요. 그동안 해 왔던 건 성경 학습이었어요. 공의의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을 가르친 게 아니라 교회 출석 잘하는 학생을 만들려고 했던 거죠. 인원이 많고 주차장이 넓어지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이번 참사를 겪으면서 그게 너무 슬펐고,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후회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시련을 마주하고서 신앙 자체에 대한 회의감은 들지 않았을까. 최선미 집사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천국에 가서 사랑하는 딸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만 하다가는 신앙을 저버릴 것 같고, 그러면 천국에서 딸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아서 신앙을 단단히 부여잡고 있다고 말했다.

"엊그제 큰아이(가영이)가 하늘나라 갔는데 오늘 둘째를 놓고 기도해요. 우리 아들 만수무강하게 해 달라고요. 다른 거 다 필요 없으니, 아들이 목숨 다할 때까지 신앙생활 잘하고 하나님 일 열심히 하다가 천국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이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달라고. 그 외의 기도는 할 수가 없습니다."

가영 씨 아버지 박계순 집사가 1월 14일 녹사평역 분향소에서 딸의 영정을 어루만지고 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가영 씨 아버지 박계순 집사가 1월 14일 녹사평역 분향소에서 딸의 영정을 어루만지고 있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이태원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은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가영 씨의 부모는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해 독립된 전문가들이 제대로 된 원인을 밝혀 주기를 원한다.

"전문가들이 모여서 진상 규명할 수 있는 특별조사위원회가 있어야 해요. 정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원인이 어디 있는지 밝히고 사후 대책을 마련해야죠. 159명의 죽음은 하나하나 개별 사건인데, 정부가 하나의 사건으로 뭉개려고 하는 게 너무 화가 납니다." 

가영 씨의 부모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일에 함께 분노하고 목소리 내 달라고, 남은 가족을 위로하며 함께 기도해 달라고 호소했다.

"유가족 중에는 우리처럼 신앙인이 있는데, 그 유가족들 붙잡고 '기도하자', '하나님께 매달리자' 이런 말을 못 해요. 저도 그 마음을 아니까요. 누군가 나서서 믿는 가족들을 다독여 주시는 분이 계시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잖아요. 여러분이 저희를 사랑해 주는 방법은 함께 '분노'해 주시는 것입니다. 정부를 향해 함께 목소리를 높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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