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과 같은 심각한 사건이 드러났을 때 대중의 관심은 가해자에게 집중된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가해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가해자에게 어떤 수위의 처벌이 내려지는지 등등. 사법 체계 자체가 가해자의 범죄를 특정하고 그에 알맞은 형벌을 내리는 과정이고, 언론 보도 또한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해자가 징벌을 받은 것이, 혹은 받지 않은 것이 이슈가 되고 그 일이 지나가면 사건은 잊힌다. 물론 가해자가 적절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 소외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뉴스앤조이>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해, 교회 혹은 신학교에서 목사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 5명을 인터뷰했다. 자신이 입은 피해를 공론화한 후 수개월에서 수년이 지난 현재, 이들은 어떤 일상을 살고 있을까. 그들이 원하는 '피해 회복'이란 무엇이며, 그 회복이 삶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지, 회복에 도움이 혹은 방해가 된 것은 무엇이었는지 들어 봤다. 이들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기억을 기꺼이 다시 끄집어낸 이유 중 하나는 '교회를 위해서'다. 이들이 교회를 향해 던지는 말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 기자 주
*'교회 성폭력 생존자의 오늘' 전편 보기(클릭)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폭력은 위계가 있는 관계에서 일어나기 쉽다.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 사이에는 명확한 권력 관계가 존재한다. 신학교도 예외는 아니다. 이민아 씨(가명·40)는 2019년 1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재학 중일 때 교수이자 목사였던 박 아무개 씨에게 강간을 당했다. 여러 학생과 박 씨 집에서 1박 2일 모임을 했는데, 밤중에 박 씨가 범행을 저지른 것이다.

민아 씨는 비교적 빠르게 대처했다. 새벽에 박 씨 집을 빠져나와 교회에 잠깐 들른 뒤, 해바라기센터에 가서 증거를 채취하는 검사를 받았다. 약 열흘 뒤 박 씨를 경찰에 고소하고 <뉴스앤조이>에 제보했다. 사건이 공론화하자 박 씨가 속한 한신대와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도 조사에 착수했다. 민아 씨가 일하던 H교회를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대책위 차원에서 박 씨 징계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대응했다.

교단은 박 씨를 2019년 6월 면직했다. 학교도 11월 박 씨를 파면했다. 고소 사건도 진행되어 박 씨는 12월 구속 기소됐다. 박 씨는 2020년 1월 열린 첫 공판에서 범죄를 시인했다. 결국 그는 강제추행죄 및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로 그해 5월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검찰과 박 씨 쌍방에서 항소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 판결을 유지했다. 박 씨가 상소하지 않아 판결은 2020년 9월 확정됐다.

교단·학교와 사회 법 처벌 결과만 보면 '잘 해결됐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언론 기사로만 사건을 접하는 사람들은 '피해자는 용감했고, 가해자도 반성했으며, 교단·학교는 마땅한 결과를 냈다'고 평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마땅한 결과'를 내기 위해 피해자는 몇 번의 고비를 넘어야 했고, 대책위도 보이게 때로는 보이지 않게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우리 선입견과는 달리 피해자는 무척 두려워했고, 가해자는 진정한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형이 확정된 지 1년이 지났지만 사건이 미치는 영향은 계속되고 있다. 기장은 올해 9월 총회에서 성폭력 처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일부 개정했다. 이 사건에 대응하며 기존 법의 여러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제도 개선까지 이뤄 낸 지금, 민아 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사건이 처리되는 경험은 그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뉴스앤조이>는 최초 보도부터 박 씨에 대한 형이 확정될 때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이 사건을 보도했지만, 사건 보도라는 형식상 한계로 피해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담지 못했다. 이 기사에서는 그간 드러나지 않았던 피해자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다.

성폭력 피해가 발생한 지 3년이 되어 가고 있는 지금, 민아 씨는 어떤 일상을 살고 있을까. 
성폭력 피해가 발생한 지 3년이 되어 가고 있는 지금, 민아 씨는 어떤 일상을 살고 있을까.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상태에서

피해를 당하고 아직 그 공간에 있었을 때 저에게 도움을 준 친구가 있었어요. 평상시에도 굉장히 의지하는 친구예요. 제가 무슨 일을 당한 건지 모를 정도로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어요. 내가 지금 이런 일에 처했는데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어떡해야 하냐고. 그랬더니 그 친구가 차분하게 일단 해바라기센터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옷 갈아입지 말고, 씻지 말고, 속옷 같은 것도 다 챙기고. 그런 기본적인 매뉴얼을 잘 안내해 줬어요. 머리가 하얗게 됐었는데 그 친구 덕분에 '아 이렇게 대처해야 하는구나'라고 일단 지식적으로 알게 된 거죠.

당시 제가 자는 방에 가해자가 두 번 들어왔어요. 또 들어올지 모르니까 일단 여기서 나가야겠다 생각했죠. 근데 그 집이 강원도 산골이었어요. 그때는 이른 새벽이었고…. 그 시간에 달려와 줄 수 있을 만한 또 다른 친구한테 SOS를 쳤어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간단하게 "내가 지금 성폭력을 당했는데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만 했어요. 그랬더니 더 물어보지 않고 차를 가지고 저를 데리러 와 줬어요. 친구들 도움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게 되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죠.

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저에게 해바라기센터를 알려 준 친구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 줬어요. 일단 해바라기센터에 전화를 하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지식적으로 알게 된 거랑 행동하는 건 또 다른 일이잖아요. 제가 솔직히 얘기했어요. 자신 없다고…. 앞으로 목회를 해야 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거죠. 이렇게 해 봤자 여자 쪽이 훨씬 더 리스크가 클 거라고, 미래에도 분명 타격이 있을 거라고, 이런 생각이 들어서 용기를 못 내고 있었어요.

이 친구가 제 마음에 잘 공감해 주더라고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 자기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그래도 일단 검사만 해 보자고. 그건 고소랑은 다른 일이니까. 언제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센터는 꼭 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이 저한테 위안이 됐어요. "당연히 센터 가고 고소해야지"가 아니라 "나중에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검사받는다고 절대 신원이 드러날 일 없으니까 검사만 해 보자"고 안심을 시켜 줬어요.

그래서 일단 해바라기센터에 전화를 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내를 받았는데, 그래도 마음을 못 잡겠더라고요.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사실 제 마음속에는 '그냥 내가 한번 참으면 돼'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저는 청소년 때도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는데, 그때 그냥 넘어갔거든요.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그냥 나만 조용히 있으면 더 이상 어떤 이슈도 생기지 않을 거야'라는 마음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그렇게 고민하다가, 제가 출근하는 날이라 그냥 교회로 출근을 했죠.

근데 제 얼굴이 너무 안 좋았던 거예요. 당시 같이 일하던 여자 전도사님과 목사님이 있었는데, 전도사님은 성폭력 상담원 교육을 받고 상담 기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분이었어요. 그분이 저에게 "무슨 일 있어요?"라고 물어보셨는데 거기에서 제가 눈물이 터진 거예요. 그래서 얘기를 했어요. 이런 일을 당했는데 솔직히 (센터에) 가고 싶지 않다고, 그냥 넘어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근데 전도사님도 매뉴얼대로 정확히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꼭 고소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근데 검사는 48시간 안에 받아야 하고 빠를수록 좋으니 일단 검사받아 놓고 고민은 나중에 하자고.

또 하나는… 굉장히 부담되는 말이기도 했는데요. 거기 계셨던 목사님이 저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가해자가 교수인데 그냥 넘어가서야 되겠냐고. 제가 그냥 넘어가면 그 교수가 이래도 된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한테 그럴 수도 있는데 그걸 감당할 수 있겠냐고요. 일단 그 말을 듣고 검사를 받아야겠다고 결심하기는 했는데요. 너무 부담스럽고 마음이 어려워지는 말이기도 했어요. 그런 책임감에 대한 자각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이뤄졌으면 좋았을 텐데…. 그 목사님은 정의감에 화가 나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거겠죠.

일단 검사를 받고 나니까, 어쨌든 한 단계 나아가니까 마음이 조금 진정되고 그다음이 생각나더라고요. 저는 전도사니까 아무래도 교단에서는 '을'이잖아요. 교단에서도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성폭력 사건에 대한 전문성이 있는 분한테 SOS를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임보라 목사님(섬돌향린교회)께 전화를 했죠. 그때까지 임 목사님과는 인사만 하는 관계였어요. 친분이 거의 없었는데 임 목사님이 그간 하신 일들을 아니까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마 개인적으로 통화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거예요.

그런 사이인데 제가 갑자기 전화를 했고 개인적인 일 때문이라고 하니까, 목사님은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긴 걸 눈치채시더라고요. 지금 통화하기 편한 상태인지 물어봐 주셨고, 괜찮다면 편안하게 말씀하셔도 된다고, 하실 수 있는 말씀만 하시라고 해 주셨어요. 제 상황을 먼저 캐치하셔서 제가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거죠. 그래서 통화로 다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지금 가해자를 만나는 건 위험하다고, 나중에 어떤 약점이 될지 모르니 연락 오면 반응하지 말라고 가이드를 해 주셨어요. 그리고 일단 자기와 만나자고 하시더라고요. 돌아보면 이게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죠.

임보라 목사님이 피해자 중심적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시고 저에게 전문 기관을 소개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해 주셨어요. 본인도 이런 문제를 많이 다뤄 봤지만 어쨌든 주 업무는 아니잖아요. 여러 반성폭력 단체를 소개해 주시고 각각 장단점도 설명해 주셨어요. 정보가 없었을 때는 막연했는데, 정확한 정보와 선택지를 주시니까 부담감이 훨씬 덜어지더라고요.

피해를 당한 후에는 머릿속이 정말 백지장이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엄격한 가부장제 속에서 자라서 선입견이 강해요. 청소년기 성폭력을 당했을 때, 부모조차도 성폭력은 네 탓이라고, 네가 잘못한 거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피해 사실을 말하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라는 생각부터 드는 거예요. 해바라기센터에 갈 때도 '나를 이상하게 보면 어떡하지. 나한테 이상한 질문을 하면 어떡하지' 걱정했어요. 근데 실제로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해 주시더라고요. 제가 피해 사실을 처음 이야기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저를 지지해 주는 경험을 한 거예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가해자 아내의 사과를 들었을 때

가해자를 고소하고 언론에 제보하기까지는 며칠이 더 걸렸어요. 결정을 못 하겠는 거예요. 언론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법적으로만 진행할까도 생각해 봤는데, 그랬을 때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온갖 행보가 눈에 보였어요. 또 법적 절차가 오래 걸리잖아요. 그동안 이 사람을 학교에 그냥 둘 수 없었던 거죠. 고소를 하자면 언론에도 제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근데 언론에 나가면 아무리 익명으로 해도 제 주변 사람들, 학교 사람들은 피해자가 저라는 걸 다 알게 되는 거였어요. 당시 가해자 집에 갔던 사람 중 여자가 저 하나였기 때문에, 공론화하면 무조건 제 신상이 오픈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학부 때부터 전도사 생활을 워낙 길게 했어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 공론화하는 순간 목사가 되는 길이 아예 끝나 버릴 것 같았어요. 아무리 피해자여도, 성폭력 사건에 연루됐던 사람을 교회에서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에게 리스크가 너무 큰 거예요. 그리고 솔직히 공론화해도 가해자는 절대 반성하지 않을 거라는 점도 너무 잘 알고 있었죠. 내가 너무 불리하다, 위험성이 크다, 마음속으로도 현실적으로도 그랬죠.

근데… 가해자의 아내에게 문자메시지가 온 거예요. 그 사람이 저한테 사과를 하더라고요. 제가 피해를 당하고 나서도 그때까지 한 번도 화를 안 냈어요. 제가 원래 제 감정을 잘 못 읽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그 문자를 받고 처음으로 너무 화가 나서… 길을 가다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요.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살았길래 아내가 사과를 하게 해?' 한국 남자, 공고한 가부장제에서 살아온 한 남자가 그간 어떻게 했을지 너무 보이는 거예요. 그때까지 가해자는 저한테 단 한마디 사과도 없이 온갖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오히려 아내가 사과를 해? 거기서 분노가 폭발했어요.

가해자는 제 약점이 뭔지 알고 움직이더라고요. 교내 정치적인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제 입을 막으려고 하지 않나, 가족을 이용해서 동정을 사려 하지 않나…. 그렇게 하면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상정해 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런 메시지들에 좀 흔들린 것도 사실이에요. 근데 아내가 보낸 사과 메시지에 제가 딱 버튼이 눌린 거죠. 제가 피해를 당할 때 아내가 옆 방에 있었어요. 옆 방에서 성폭력을 저지른 남편 일을 수습한다? 아내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잖아요. 자기도 자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고, 어떻게든 남편을 이해해 보려고 온갖 생각을 했을 것이고…. 아내가 그런 입장이 될 걸 알면서도 가해자가 이 얘기를 했다는 게, 아내를 통해 수습하려 한 그 뻔뻔함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더라고요.

그때 마음먹었어요.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보여 주겠다'고. 이렇게 하면 모든 걸 네 멋대로 다 덮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본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절대 하지 말았어야 하는 짓이었다는 걸 보여 줘야겠다는 마음이 그때 들었어요. 한번 마음이 잡히니까 그다음부터는 더 이상 고민되지 않더라고요. 언론에 제보할 때도, 제가 익명으로 하면 중간에 힘들 때마다 그만두고 싶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실명으로 보도해 달라고 했어요. 어차피 이제 싸울 거…. 근데 그때 임보라 목사님이랑 <뉴스앤조이> 기자님이 걱정하시면서, 나중에 밝히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아닌 거 같다고 보호 장치를 만들어 주셨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첫 반응

저는 청소년 때 성폭력을 당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피해 자체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을 때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았던 것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요. 이번 일도 기사가 나온 후, 제가 엄마한테 얘기를 했어요. 얘기를 듣고 저희 엄마가 한 첫마디가 "그 집 와이프를 생각해"였어요. 저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어요. 근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제 피해를 아주 적극적으로 다루게 됐잖아요. 이건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느냐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첫 반응이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이번에는 제가 처음 얘기한 그 친구가 저에게 "언니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 준 게 정말 도움이 됐어요. 제 탓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내가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라고…. 사건 전에도 가해자가 저를 두 번 강제 추행한 적이 있어요. 근데 제가 조교니까 가해자를 만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때부터 내가 좀 더 단호하게 밀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계속 들었어요. 제가 사회생활을 좀 오래 하다 보니까, 그렇게 예민하게 가시 돋친 듯 살면 사회생활 못한다는 식으로 학습이 돼 있었던 거예요.

그날도 가해자 집에서 모인다고 하니 위험하다고 느꼈죠. 처음에는 안 가겠다고 했는데, 당시 중요한 이슈가 있어서 제가 안 갈 수가 없었어요. 근데 가해자의 아내가 집에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내가 집에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하고 간 거죠. 피해를 당하고 나서는 이런 생각들이 올라왔어요. '분명 가지 말까 생각했는데, 나는 왜 갔을까….' 자기 검열로 들어갔던 거죠.

그리고 제가 청소년기 성폭력 트라우마 때문에 성적인 접촉이 있으면 그냥 얼어 버려요. 그때도 가해자가 접촉해 오니까 그냥 얼어 버린 거예요. 아무 저항도 못한 거죠. 아무것도 못한 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어요. '그렇게 열심히 학내 투쟁하면 뭐 하나. 정작 나 자신을 보호해야 할 땐 아무것도 못 했는데….' 이런 생각들을 처음 그 친구한테 이야기할 때 다 써서 보냈어요. 나 아무것도 못 했다고, 정말 바보 같다고….

근데 걔가 이러는 거예요. "언니, 그 상황에서 언니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언니 잘못이 아니야." 첫 번째 반응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오니까, 그게 저한테 큰 위로가 되더라고요. 내 잘못이 아니고 나는 지금 전적으로 피해를 당한 상황이라고 제3자에게 인정을 받은 거죠. 이후에도 임보라 목사님이나 <뉴스앤조이> 기자님이나 기독교반성폭력센터 분들 모두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계속 확인해 주셨어요.

이분들이 전문가였던 거예요. 교회 성폭력의 특성을 잘 알고 정확한 정보를 줄 수 있는 사람들. 저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도 몰랐는데, 이분들은 착착착 선택지를 주셨어요. "고소 말고 다른 방법도 있다", "피해자마다 자기 회복을 위한 방법은 다르다",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고소하지 않아도 된다" 등등 선택지를 주셨어요. 그게 저에게 안정감을 주더라고요.

주변에 정의감이 넘치는 분들은 "그래도 고소해야지", "가만두면 안 돼", "쳐내야지"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어요. 주로 목사님들이었는데, 본인들이 생각하기에도 제가 전도사니까 힘이 없잖아요. 근데 본인들은 교단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니까, 본인들의 방법으로 직접 나서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 놈이 우리 교단에 있다는 걸 용서할 수 없어', '가해자를 만나서라도 해결하겠어'라고 생각하신 거죠. 그 때문에 언론 기사가 나오기 전에 사건이 오픈될 위기도 있었어요. 목사님들께 전화도 많이 왔는데, 위로해 주겠다면서 오히려 본인들의 감정을 저한테 쏟아 내시더라고요. 본인들도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에게 전화하신 거죠. 역으로 제가 그 분노를 들어 드렸어요. 그게 참 힘들었어요.

피해를 당한 뒤 찾아온 것은 '자기 검열'이었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받아들이기까지 주변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피해를 당한 뒤 찾아온 것은 '자기 검열'이었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받아들이기까지 주변인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피해자'들' 병들게 한 학교의 침묵

정말 힘들었던 건… 신대원의 침묵이었어요. 언론 기사가 나온 후 그 난리통에도 말이죠. 아니 학교에서 일어난 사건인데, 그러면 최소한 저에게 '지금 어떻게 조치하고 있느냐. 학교가 뭘 지원해 줘야 하느냐' 이렇게 살펴야 하잖아요. 저는 원우회 간부도 했기 때문에 저를 모를 수가 없어요. 그날 저랑 같이 가해자 집에 갔던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서 전화가 왔는데 저한테만 안 왔더라고요. 그게 저를 굉장히 힘들게 했어요. 제가 그간 학교에 쏟아부은 에너지가 있는데… 그래도 저는 학교에 대한 믿음이 좀 있었거든요.

제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도 조금 공부했는데요. 그 관점으로 보면, 저만 피해자가 아니라 그날 가해자 집에 같이 갔던 친구들은 물론 대학원 학생들 전체가 피해자인 거예요. 그들이 받은 충격도 엄청났거든요. 몇 달 지나니 학생들에게 미친 영향이 드러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갑자기 휴학을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다들 저한테 말은 못 해도, 알아보니까 다 이 사건 때문이었던 거예요. 다들 내상을 입었던 거죠.

제가 일했던 H교회를 중심으로 이 사건 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서, 대책위 차원에서 학교에 공문도 보냈어요. 저는 일단 해바라기센터에서 지원받고 있으니까 학교는 최소한의 지원만 해 주면 되고, 저뿐 아니라 신대원생 모두를 피해자로 보고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접근해 주기를 바랐어요. 아는 목사님 중에서 그런 것을 하시는 분이 있어서, 학교랑 연결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부탁도 드렸어요. 근데 학교는 완전히 무반응인 거예요.

사건 후 공론화까지 하고 몇 달 잘 버티다가 결국 정신과에 입원했어요. 쌓였던 스트레스가 공황장애 등으로 나타나더라고요. 상담을 계속 받고 있었는데 상담 선생님도 입원을 권하셔서요. 일주일 정도 두 번 입원했어요. 근데 제가 처음 입원한 그날, 학교에서 바로 전화가 오더라고요. 면회 오겠다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 거절했어요. 그전에 그렇게 얘기했을 때는 단 한 번도 연락 없더니…. 제가 지금까지도 상담받으면서 학교 반응에 대해 오래 다루고 있어요. 저를 너무 힘들게 했거든요.

게다가 학교가 뒤늦게 사건을 조사한다면서 저한테 출석해서 소명하라는 거예요. 가해자도 불렀다면서. 너무 기가 막혔죠. 제가 경찰에서 진술한 내용을 서면으로 내겠다고 했더니, 굳이 본인들이 단독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거예요. 대책위가 요구해서 겨우 서면조사로 돌렸어요. 근데 어쨌든 서면으로 하더라도, 이걸 작성할 때마다 계속 피해 사실을 상기해야 하는 거잖아요. 교단 조사도 따로 했어요. 저는 경찰 조사 끝나고 검찰 가서 진술하고, 학교에 교단까지 다 따로 진술해야 했어요. 그게 정말 힘든 일이더라고요.

대책위가 없었으면 견디기 힘들었을 거예요. 먼저 제가 꾸준히 상담받을 수 있도록 대책위가 상담 비용을 미리 결제해 주셨어요. 제가 전도사라서 상담 비용도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아신 거죠. 나중에 가해자와 학교에 청구하더라도 일단 선지급하는 방식으로 상담 비용을 지원해 주셔서 제가 안정적으로 상담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됐어요. 교회에서는 6개월 유급휴가도 주셨죠.

개인적으로 '상담'과 '약'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정신과에서 '과각성 기억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는데요. 과각성, 말 그대로 너무 예민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순간순간 기억이 나지 않는 거래요. 어느 순간 인지능력이 확 떨어져서, 매번 다니던 길인데도 갑자기 '여기가 어디지?' 하게 되고요. 10년 넘게 왔던 장소인데도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게 반복되니까 공포로 연결되더라고요. 약간 치매 증상 같잖아요. 무섭고 막 식은땀 나고…. 그래서 공황장애까지 연결된 것 같아요. 이건 상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아서 입원하고 약 먹으면서 치료했어요. 약에 적응하느라 좀 힘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도움이 됐죠.

개인이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어쨌든 가해자를 교단에서는 면직하고 학교에서는 파면했기 때문에 밖에서 보시는 분들은 '그래도 잘 대처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사실은 그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대책위가 엄청 노력한 거죠. 대책위가 교단·학교 징계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 만한 걸 미리미리 요청하고 대처해 주셨어요. 진짜 대책위가 없었으면 저는 못 했을 거예요. 아마 중간에 학교 그만뒀을 거 같아요. 성폭력 사건 대응이라는 게 도저히 개인이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더라고요.

면직과 파면이라는 결과를 들었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은… 너무 당연하고 마땅한 결과인데 너무 어렵게 얻었다는 느낌이었어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다른 교단들 상황이 어떤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솔직히 이거 누가 돈 주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대처해 주신 분들께 너무 감사하니까, 이걸 마땅한 거라고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배부른 소리 같은 거죠. 실제로 "기장이니까 이 정도 한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게 참 꼴 보기 싫더라고요. 기장이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했어야지, 이 결과를 내기 위해 고생한 사람들에게 미안해할 줄 알아야지….

올해 9월 기장 총회 때 헌법을 많이 고쳤잖아요. 특히 재판할 때 무조건 거쳐야 하는 화해 권고 절차를 성폭력 사건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했죠. 기장은 교단 재판할 때 무조건 한 번은 피해자와 가해자를 대면시켜서 화해를 종용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재판하기보다 화해해야 한다는 거죠. 문제는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도 대면시킨다는 거예요. 제 사건도 그랬어요. 처음에는 거부할 수 없는지 물었죠. 서면으로 하면 안 되겠냐고. 그랬더니 교단 쪽에서는 거부하면 나중에 꼬투리 잡혀서 재판이 엎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대책위 입장에서는 저한테 이걸 나가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근데 제 성격이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냥 하는 타입이거든요. 나중에 후폭풍이 와서 공황장애가 올지언정 그 순간에는 그냥 부딪히는 타입이에요. 그래서 제가 그냥 화해 권고 자리에 나가겠다고 했어요. 걱정했던 건 딱 하나였어요.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와 대면하는 게 선례가 될까 봐. 다른 사건에서 "그 사람은 출석했는데 왜 너는 안 된다는 거야?"라는 식으로 피해자를 추궁할까 봐요. 그게 걱정되기는 했는데 일단 출석했어요. 가해자가 그 자리에 안 나와서 대면이 성사되지는 않았죠.

누가 평소에 헌법을 꼼꼼하게 보지는 않잖아요. 이번에 제 사건을 진행해 나가면서 교단에 피해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부족하다는 게 여실히 드러난 거죠. 대책위 중에는 총대인 분들도 계셨기 때문에, 이 규정을 꼭 바꿔야 한다는 걸 깨닫고 법 개정까지 추진하신 거예요. 대책위 하셨던 분들이 진짜 교단에서 큰 변화를 만드는 역할을 해 주셨어요.

가해자의 사과는 재판부를 향했다

교단과 학교에서 결정이 난 후에 검찰이 가해자를 구속 기소했어요. 재판이 시작되니 첫 공판에서 가해자가 죄를 다 인정한다고 했다더라고요. 언론 보도만 보면 마치 가해자가 그간 가만히 있다가 순순히 회개한 것처럼 보이잖아요. 아니에요. 가해자는 가만있지도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어요. 가해자를 추종하는 일종의 '사단'이 있었어요. 저도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사건 후 가해자가 그 사단에 속한 사람들과 여러 번 접촉해서 다 설득했다고 하더라고요.

가해자 집에 같이 갔던 친구 중 가해자 수제자로 불리던 친구가 있었어요. 이 친구가 경찰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을 때 위증을 했더라고요. 제가 가해자의 조교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사실 저희 학교는 원칙적으로 교수가 조교 1명을 쓸 수 있어요. 근데 일이 많기 때문에 관행적으로 조교를 2명으로 하고, 나중에 1명에게 돈이 나오면 그걸 나눠 가졌거든요. 근데 이 친구가 경찰에서 저는 조교가 아니라고, 가해자와 상관없이 자기가 개인적으로 고용한 사람이라고 증언했다는 거예요. 제가 형편이 어려워 보여서 장학금 조로 그랬다나? 말이 안 되는 게 저는 전액 장학금을 받았거든요.

이 사건 핵심은 가해자와 저 사이에 '위계'가 존재하는지였어요. 이 친구가 한신대 분위기상 교수와 학생 사이에 위계가 없다는 식으로 증언했다더라고요. 이것도 참 우스운 게, 그 친구가 그 위계 때문에 엄청 고생했거든요. 가해자가 전화하면 언제든지 불려 나가고 그랬어요. 사건 전에도 신대원생들은 걔를 보면서 "저게 무슨 수제자야. 진짜 너무한다" 그랬거든요. 학교에서 유명했어요. 그런데도 말도 안 되는 위증을 한 거예요. 가해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 거죠.

가해자도 위계가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제가 조교인지도 몰랐고 자신은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학교 내규랑 뭐 이것저것 다 내 가며 주장했어요. 근데 저는 채팅방에서 조교로서 가해자와 회의했던 내용을 안 지우고 다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걸 다 캡처해서 검찰에 제출했어요. 검사도 보더니 놀라더라고요. 금세 들통날 거짓말을 한 거죠. 가해자는 아마 제가 증거로 뭘 냈는지 몰랐을 거예요. 재판 시작되고 봤거나 변호인에게 들었겠죠. 그러니까 전략을 바꾼 거 같아요. 형량을 낮추기 위해서 죄를 인정하는 걸로.

1심 판결 나오기 전에 저한테 사과문을 보냈어요. 근데 사과한다는 말은 하나도 없고 '난 네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 했는데, 여기 와서 네가 낸 진술서를 보니까 네가 청소년 때 그런 일이 있었던 걸 알게 됐고, 내가 착각했다는 것도 알게 됐다'는 내용이었어요. 여전히 교수의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용도 다 거짓말이에요. 제가 청소년기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도 가해자는 다 알고 있었거든요. 그걸 안 다음부터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어요. 강제 추행도 있었고요. 제가 아마 그 사과문을 보고 입원했을 거예요. 정말 너무 화가 나서….

결국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이 나왔죠. 양가감정이 들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볼 때는 너무 짧아요. 벌써 내년이면 출소예요. '벌써'라고 할 정도로 짧게 느껴져요. 그런데 그간 한국 사회 관례로 보면 형이 엄격하게 나온 거더라고요. 저는 만족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만족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됐어요. 그때마다 스스로 이렇게 안심시켰어요. '이게 첫걸음이다.' 처음부터 이 사람 하나 처벌하자고 한 일 아니고, 누구나 성폭력을 당할 수 있는 이 구조에 화가 나서 시작한 거니까, 구조에 균열을 낸 건 확실하니까 그걸로 위안을 받자고 생각했어요.

항소심 선고 전에는 가해자가 통장에 2700만 원을 넣어 놓고, 제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빼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합의하자는 거죠. 제 원칙은 하나였어요. '꼼수에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 그때까지도 저한테 직접 사과 한 번 안 했거든요. 말도 안 되는 반성문이나 보내고. 그러면서 재판 진행되는 내내 가해자 측 사람들이 제가 일하는 교회 담임목사님께 찾아오고 그랬어요. 그런 걸 보는데 가해자가 반성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겠어요? 저는 오히려 '엄벌 탄원서'를 제출했어요. 이 사람은 지금 제가 아니라 재판장님한테 사과하는 거라고. 자기 형량을 움직일 수 있는 판사님한테 잘못했다고 하는 거지, 나한테는 한 번도 사과한 적 없다고.

가해자의 사과가 피해자가 아닌 재판부를 향한다는 문제는 응보적 사법 시스템의 한계로 지적돼 왔다. 
가해자의 사과가 피해자가 아닌 재판부를 향한다는 문제는 응보적 사법 시스템의 한계로 지적돼 왔다. 
이 전쟁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지

형이 확정되고 1년이 좀 지났는데, 지금도 과각성이 조금 남아 있어요. 소리나 냄새 이런 것들에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게 돼요. 약이 그런 걸 좀 눌러 줘서 지금도 계속 약을 먹어요. 처음 약을 먹기 시작한 건 잠을 잘 수가 없어서였어요. 잠을 자면 계속 악몽을 꿨거든요. 잠을 잘 수가 없고 불안이 계속 올라오니까 약을 먹었던 거예요. 지금은 아침에만 먹고 저녁에는 안 먹어요. 악몽에 시달리는 빈도도 확실히 줄었어요.

결국 일상으로 돌아가는 게 회복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일상을 놓은 적은 없어요. 입원했을 때 빼고. 6개월 유급휴가를 얻었을 때도 좀 쉬었어야 했는데, 그 기간 성폭력 상담원 교육 100시간이랑 가정 폭력 상담원 교육 100시간을 이수했어요. 주변에서 다 말렸는데 제가 고집부렸어요. 정말 울면서 했죠.(웃음) 이 사건을 겪으면서 제 안에 있는 가부장적 인식들이 끊임없이 저를 괴롭힌다는 걸 발견했거든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페미니즘을 공부한 적이 없었어요. 상담원 교육을 받으면서 제 인식이 뭐가 잘못됐는지 알게 됐죠. 그렇다고 뭔가 확 바뀌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 내 탓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이건 학습된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일상을 멈추는 게 싫었어요.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마음도 있어요. '가해자 너 때문에 내 인생 1분 1초도 허비하지 않겠어.' 약간… 전쟁? 전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거의 1년 정도는 전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계속 전략을 짜고 긴장한 상태로 보낸 거 같아요. 그렇게 억지로 끌고 나가다 보면 몸에 탁 타격이 오는 순간이 있어요. 인지능력이 확 떨어지는 거예요. 제가 유명한 워커홀릭이었거든요.(웃음) 원래 머리가 타다닥 돌아가는 타입인데 버벅거리게 되는 거죠. 너무 답답해요. 화도 나고. 근데 어떻게 보면 좀 느리게 살아가는 기회를 얻은 것 같기도 해요. 예전에는 일하는 데만 포커스를 맞췄는데, 지금은 저를 더 돌보는 기회를 갖게 됐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가 있어요. 주목해야 할 것과 주목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분별하는 기도예요. 자극이 오면 거기 주목하게 되잖아요. 성폭력 피해자들은, 피해 자체도 그렇지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2차 가해에 주목하다 보면 그 경험이 일상 전체를 차지해 버려요. 그럴 때 거기에 주목하지 않는 방법들, 주목하지 않고 흘려보내고, 정말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에 주목하는 연습을 했어요. 지금도 잘 안 되기는 하지만 계속 연습해요. 그게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6개월 쉴 때 200시간 공부했던 것처럼, 뭔가 계속 노력을 많이 해요. 요가·명상도 하고 판소리도 해 봤어요. 판소리가 한을 다루잖아요. 저처럼 화가 날 때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좋더라고요. 소리를 크게 내니까 막 분노가 발산되는 느낌이랄까.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하니까 오히려 일상이 풍성해졌어요. 워커홀릭으로 지낼 때보다 저 자신을 더 돌보게 되고 더 건강해진 것 같아요. 몸도 마음도.

자조 모임 같은 게 있다면 참여하고 싶기도 해요. 피해자들이 같이 모여서 이야기할 때 일어나는 역동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아직 여러 명과 하는 모임은 경험하지 못했는데요. 1대 1로는 해 봤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서 기도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과 이야기 나눌 때 어떤 에너지가 올라오더라고요. 동일한 경험은 아니더라도 여성은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성폭력을 경험하거든요. 그런 걸 말할 수 있는 공간들, 모임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 저에게 회복이란… 의미를 찾는 거예요. 솔직히 제가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저를 너무 보호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었거든요. 물론 보호해 주지 않는 사람들도 힘들었지만, 마치 병에 걸려서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꼼짝도 못 하는 사람처럼 너무 불쌍하게만 여기는 것도 저는 힘들었어요. 제가 피해를 당한 건 맞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 이런 구조 안에서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이 피해는 제 인생에서 도려낼 수 없거든요. 일상으로의 회복이라는 게, 이걸 도려내서 처음부터 없던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이 피해도 내 일상에 유의미한 일이 돼야 하는 거죠. 이 상처를 아주 특별하게 빨리 다뤄서 해결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나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받아들이고, 이 피해가 내 일상에서 유의미한 일로 전환될 수 있게 하는 게 저에게는 회복의 과정이에요. 지금도 그 과정을 걷고 있고요. 이 인터뷰도 그런 걸음 중 하나겠죠. 그러지 않으면 이 피해는 계속해서 그냥 상흔으로만 남게 되잖아요. 상흔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 상흔이 불쌍하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아요.

구조를 바꾸는 데 목소리를 보탤 수 있는 거, 저에게는 그게 중요했어요. 저는 아직 총회에 나설 수 있는 여건도 자리도 안 되지만, 어쨌든 함께 기운 모아 가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그럴 때 회복됨을 느끼죠. 제도가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바뀌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거기에 내가 실제로 참여했을 때. 그런 경험이 일상으로의 회복에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걸 같이할 수 있는 동지들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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