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사단법인 한국회복적정의협회(이재영 이사장)가 5월 24일 '국가 폭력과 회복적 정의'를 주제로 세미나를 열어, 과거사를 회복적 정의 관점으로 어떻게 풀어 갈 것인지 논했다.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열린 세미나에는 이재영 이사장이 '과거사에 대한 회복적 정의 접근'을, 강혁민 박사(회복적정의연구소 객원 연구원)가 '국가 폭력 이후 사회적 회복을 위한 시민사회의 역할'을 강의했다.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4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됐다. 

회복적 정의란, 어떤 사건에서 발생한 피해와 피해 회복에 집중하는 정의의 한 패러다임이다. 가해 상황 및 가해자에 대한 처벌에 집중하는 응보적 정의와 비교된다. 한국 현대사에는 많은 국가 폭력 사건이 있었다. 진실은 묻힌 채 시간이 흘렀고, 사건들은 '과거사'가 되어 뒤늦게 진실 규명 작업이 이루어졌다. 5·18민주화운동의 경우, 김영삼 정부 시절부터 수차례 조사돼 왔지만 여전히 많은 진실이 묻혀 있고 책임자 처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5·18 진상 규명 작업은 4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5·18 진상 규명 작업은 4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뉴스앤조이 최승현

한국에 회복적 정의 패러다임을 소개한 이재영 이사장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과거사 영역 또한 회복적 정의가 적용돼야 한다고 꾸준히 이야기해 왔다. 그 일환으로 2019년 5월, 5·18 당시 계엄군이었던 최영신 씨와 주남마을 학살 현장의 유일한 생존자 홍금숙 씨가 함께 참여하는 대화 모임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최 씨는 1988년 기자회견을 통해 양심선언을 했다. 그의 증언으로 주남마을 학살 사건이 드러났다. 

이재영 이사장은 과거사를 회복적 정의 관점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피해 측과 가해 측의 '정의 필요(Justice Needs)'가 무엇인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피해 측의 정의 필요를 △진실이 밝혀지는 것 △감정의 표출과 경청 △책임자의 사과와 배상 △존중과 정당성의 회복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으로 정리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가해 측의 정의 필요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맥락과 상황에 대한 이해 △반성과 성찰 △사과와 책임을 통한 죄책감의 탈피 △공정성 △지지와 도움 △새로운 출발을 가해 측의 정의 필요라고 정리했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정의 필요가 충족될 때 비로소 회복적 정의 관점에서 과거사가 다뤄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 세계 역사에서 국가 폭력 사건을 이렇게 다룬 예는 별로 없다. 그나마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화해위원회(TRC·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 취임 후 국민통합과화해증진법을 제정해 TRC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성공회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맡았다. TRC는 백인이 흑인을 차별했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으로 발생한 인권침해를 조사하는 한편, '진실을 말하는 가해자는 사면한다'는 대원칙을 세웠다. 

역사적 진실과 국민 통합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고자 했으나, 역시 완벽하지는 않았다. '진실은 밝혔으나 정의는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으며, 경제적으로 불균형한 사회구조를 바로잡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재영 이사장은 TRC 사례가 가해자 색출과 처벌이라는 응보적 정의 관점을 넘어 피해 회복을 중점에 둔 과거사 청산의 새로운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했다. 이로써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었다고도 했다. 

이재영 이사장은 피해 측의 정의 필요 중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을 설명하며,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말을 소개했다. 
이재영 이사장은 피해 측의 정의 필요 중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을 설명하며, 일본군 '위안부' 김학순 할머니의 말을 소개했다. 

강혁민 박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돼 1998년 벨파스트 협정으로 마무리된 북아일랜드 분쟁 사례를 들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민족과 종교 등이 원인이 돼 수차례 유혈 사태를 불러온 사건이다. 강 박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소개했다. 1992년 1월, 국가가 아닌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어 시민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내용이었다. 노르웨이 인권학자 토르켈 옵살(Torkel Opsahl)이 위원장을 맡은 옵살위원회(The Opsahl Commission)는 19일간 약 3000명의 증언을 청취해 기록으로 남겼다. 

강 박사는 "물론 옵살위원회 이후로도 몇 번의 유혈 충돌이 있었다. 그래도 옵살위원회가 만든 프레임들이 1998년 벨파스트 평화협정에 많이 반영됐다. 옵살위원회는 시민사회 영역에서도 과거사에 대한 의미 있는 작업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도 한국전쟁이나 5·18민주화운동 등 여러 과거사에 대한 국가 중심의 위원회가 생기고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물론 국가 중심의 진실 규명도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국가 중심 위원회는 과연 국가가 '국가 폭력'을 조사하는 데 중립적일 수 있는지, 과연 그 활동이 개인과 사회 회복에 도움이 되는지 등 여러 한계가 있다. 시민사회 영역에서 회복적 정의 관점으로 접근하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활동 중이고, 이달 말부터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지금 5·18 진실 규명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계엄군들의 증언이다. 1980년 계엄군은 2만여 명, 광주에 투입된 병력은 1만 4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양심선언을 한 사람은 4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손에 꼽힌다.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여러 캠페인을 통해 계엄군들의 증언을 독려하고 있다. 

이재영 이사장은 "계엄군들을 접촉해 나가는 조사 방법을 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 많은 진상 규명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발포 책임자, 즉 우두머리를 잡아내서 처단하겠다는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개인의 트라우마, 그들이 알고 있는 진실, 내려놓고 싶어 하는 필요들은 다뤄지지 못했다. 이번에 진상규명조사위가 이런 상향식 조사 방법을 택했다는 것은, 개개인의 정의 필요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계엄군들이 가해자이자 시대의 피해자라는 점을 인지하고, TRC처럼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사면' 선언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이 이사장은 "사회적 사면은 국가 위원회가 시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가 위원회가 큰 우산 역할을 하고, 종교계와 시민사회계가 나서서 가해자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 증언들을 토대로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회복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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