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올해 87세인데, 돈이라도 좀 있으면 손주들 용돈도 주고 할 텐데. 돈이 없으니까 며느리 보기 미안해서 나왔어. 날이 춥긴 한데, 젊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자면 잘 만해."

[뉴스앤조이-이은혜 기자] 영등포역 지하상가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얇은 항공 점퍼를 입고 귀퉁이가 헤진 종이 쇼핑백을 들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날에도 길에서 밤을 보낸 그의 손은 빨갛게 땡땡 부어 있었다. 그는 요즘 수원역과 영등포역을 오가며 잠을 청한다고 했다.

잠깐 나눈 대화만으로는 그가 거리에 나오기까지 과정을 다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 봉사 단체 '프레이포유' 대표 손은식 목사가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느낀 바도 비슷하다. 노숙인이 되기까지 사연은 제각각이다. 거리낌 없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 문을 꽁꽁 닫고 절대 언급하지 않는 이도 있다.

손은식 목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프레이포유 활동가들은 매주 월·화·수 서울 곳곳으로 아웃리치를 나간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 기도하는 활동가들. 뉴스앤조이 이은혜
손은식 목사(뒷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와 프레이포유 활동가들은 매주 월·화·수 서울 곳곳으로 아웃리치를 나간다. 사역을 시작하기 전 기도하는 활동가들. 뉴스앤조이 이은혜

사정이 어떠하든 지금 중요한 건 이들이 무사히 밤을 보내고, 최대한 배를 곯지 않는 것이다. 손은식 목사와 프레이포유 활동가들은 거리에 내몰린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일을 2013년부터 해 오고 있다. 매주 월·화·수 팀을 꾸려 서울역, 종로·을지로 일대, 영등포역, 청량리역, 용산역, 시청역 및 서울 시내 쪽방촌을 돈다.

서울 기온이 영하 13도를 찍던 12월 15일, 손 목사와 활동가·자원봉사자 10여 명은 영등포역 지하상가에 모였다. 5개로 팀을 나눠 준비해 온 김밥과 빵을 가방에 꾹꾹 눌러 담았다. 프레이포유가 화요일 오전 영등포역에 오는 걸 아는 이들이 벌써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는 말에 꾸러미를 담는 손길이 바빠졌다.

손은식 목사와 자원봉사자가 김밥과 빵을 가지고 영등포역 광장으로 올라왔다. 광장 한편에 노인들이 2명씩 짝지어 서 있었다. 손 목사와 반갑게 인사 나누는 이도 있었다. 그는 물건을 나눠 주며 그들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평소 친분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아픈 곳을 붙잡고 기도했다. 기도 제목이 있느냐는 손 목사의 질문에, 할머니들 대부분은 "건강한 거"라고 답했다.

손은식 목사는 만나는 이들에게 필요한 바를 묻고 함께 기도한다. 자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 '기도가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손은식 목사는 만나는 이들에게 필요한 바를 묻고 함께 기도한다. 자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 '기도가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 기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단순히 먹을 것을 주는 행위를 일각에서는 비판하기도 한다. 손은식 목사는 개의치 않는다. 그는 "우리는 일회성으로 접근하지 않아요.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매주 만나는 이들과 최대한 관계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때문에 매주 같은 자리로 돌아와야 해요. 코로나19 이후, 사역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급식소 대부분이 문을 닫았는데, 거리에 있는 이들이 어떤 상황에 놓일지 뻔하지 않나요.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기도가 필요한 이들에게 다가가 함께 기도하는 게 프레이포유 단체의 첫 번째 정체성이다. 싫다고 하면 강요하지 않는다. 손 목사는 "처음에는 멋모르고 큰 소리로 '하나님 이분들이 다시 집에 돌아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어요. 사람마다 사연이 다 다르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그렇게 기도한 거죠.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 손잡고 기도하는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이 알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7년을 한결같이 기도하며 거리에서 보냈다. 그사이 거리에서 만난 형제들이 프레이포유 활동가가 되어 함께하고 있다. 이들은 프레이포유 활동을 하면서 청소 업체를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손 목사는 이를 "사역의 열매"라고 표현했다. 매주 방문하는 프레이포유를 만나면서, 자신도 다른 노숙인을 돕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결심한 이들만 9명이다. 얼마 전에도 청량리역에서 지내던 청년이 합류했다.

"코로나19 이후 젊은이들의 노숙이 확실히 늘어났어요. 새롭게 저희 팀에 합류한 청년도 길에서 만났거든요. 보육원에 있다가 나이가 차서 정착비만 들고 나왔는데 대학교 학비 버는 중에 코로나19가 온 거예요. 일자리는 없어지고, 목돈 있던 걸 고시원비로 다 쓰고 나니까 말 그대로 갈 곳이 없어진 거죠. 사실 코로나19 때문에 안정적인 가정에 있다가 길에 내몰린 사람은 많이 없고요. 위태로운 상황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이들이 길로 쫓겨나는 상황입니다."

손은식 목사는 각 교회가 지역의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손은식 목사는 각 교회가 지역의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날이 오길 바란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손은식 목사는 한국교회가 이런 약자들에게 좀 더 관심을 보이면 좋겠다고 했다. 교인들끼리만 교제하고 기도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했다. 손 목사는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가난한 이웃의 구제에 힘써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가난한 이웃 찾아가는 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각 교회가 그 지역의 가난한 이웃을 전적으로 돌보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노숙인이 제 발로 찾아올 수 있게
문턱 낮추고 문 활짝 연 교회

서울역 13번 출구 앞에 있는 드림씨티선교교회(우연식 목사)는 노숙인을 위한 교회다. 우연식 목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5년간 홈리스 전문 사역을 하다가 2011년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역에 드림씨티선교교회를 세웠다.

드림씨티선교교회는 누구나 와서 쉬고 갈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코로나19 확산 전에는 당연히 주일예배도 했다. 매주 약 130명이 참여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하지만 올해 2월 코로나19 확산 이후 전면 중단했다. 거리에 머무는 이들에게 온라인 예배는 의미가 없을뿐더러, 혹시라도 확진자가 나오면 가뜩이나 차별에 시달리는 노숙인들이 더 큰 혐오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3층 빌딩에 자리 잡은 교회는 오전 5시 50분부터 오후 7시까지 각종 편의를 제공한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11년 발표한 '노숙인 인권 실태 조사'에서, 드림씨티선교교회를 노숙인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기초 단위 이용 시설로 평가했다.

드림씨티선교교회 1층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제일 안쪽에서는 이발이 한창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드림씨티선교교회 1층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제일 안쪽에서는 이발이 한창이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뉴스앤조이>가 방문한 12월 14일에도 1층 130석은 이미 2/3 이상 차 있었다. 이발 봉사하는 미용사가 안쪽에서 한 남성의 머리를 다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TV를 보거나 몸을 기대 쉬고 있었다. 코로나19 이후 대화는 지양하고 있기 때문에 TV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하에는 옷가지 등을 세탁하고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다. 1층 안쪽에서는 증명사진을 찍고, 문서를 만드는 등 각자가 필요한 서류를 구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2층에서는 컵라면 등 간단한 식사가 가능하고, 3층은 드림씨티선교교회 회원으로 등록된 이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잠자리를 갖췄다. 모두 무료로 이용 가능한 시설이다.

우연식 목사는 모든 사역을 '교회' 이름으로 한다. 찾는 이들에게 예배나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시설을 이용하기 위한 한 가지 원칙은 있다. '서로 존중'이다. 우 목사는 "노숙인도 저마다 성격도 사연도 제각각입니다. 그걸 아우를 수 있는 게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태도죠. 이걸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우리 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고 미리 고지합니다"라고 말했다.

우연식 목사는 드림씨티선교교회가 계속해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우연식 목사는 드림씨티선교교회가 계속해서 세상이 필요로 하는 교회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시민단체들은 노숙인의 자활·재활 없이 현상 유지를 위한 구제 활동은 노숙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그동안 수많은 노숙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소통해 온 우 목사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어요. 정부가 운영하는 시설의 노숙인 자활률은 최고 10%를 넘지 못합니다. 무조건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해서 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노숙인마다 병력도 다르고 의지도 다릅니다. 노숙인이 나빠서 일을 안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해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배려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그렇지 못합니다.
 

모두가 자활에 성공하는 게 당연히 좋죠. 하지만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도 분명 존재하는데, 이들은 어떻게 하나요. 그대로 방치하면 병들거나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를 확률이 높아져요. 거기에 따라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체는 그 부분에서 최선을 다하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드림씨티선교교회는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는 교회 △24시간 운영하는 교회 △구제 선교가 중심인 교회 △잘 떠나보내는 교회 △재정 운영이 투명한 교회를 표방한다. 노숙인을 돕는 사회복지 기관으로 등록해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할 법도 한데, 우 목사는 교회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선교라고 생각해요. 교회가 선한 일을 하면서 그 일을 통해 세상에 빛을 드러내야죠. 교회가 선한 일을 하는데 손해를 안 볼 수는 없어요. 우리 교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 빛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겁니다.
 

코로나19 이후 교회 패러다임이 바뀌었다고 하는데요.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마음에 드는 '좋은 교회'를 찾아다녔잖아요. 그런데 그게 세상에서 볼 때도 좋은 교회인지는 모르겠어요. 지금은 사회에 필요한 교회, 세상의 어려움을 건드려 주는 교회가 더 필요한 시대가 아닌가 싶어요. 물론 우리가 절대적 기준이라고 할 수는 없죠. 하지만 각 교회가 주변을 돌아보고, 도움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고민하면 좋겠어요." 

노숙인 권리 빼앗는 코로나19
지난해 대비 무연고 사망자 약 2배 증가
동짓날 열리는 '홈리스 추모제'
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은 12월 14일 연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이후 노숙인의 인권이 다방면에서 침해받고 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은 12월 14일 연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이후 노숙인의 인권이 다방면에서 침해받고 있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매해 동짓날 즈음이면 무연고 노숙인 사망자들을 기억하는 '홈리스 추모제'가 열린다. 홈리스 인권 단체 홈리스행동 및 42개 단체로 구성된 홈리스추모제공동기획단(추모제기획단)은 12월 14일부터 21일까지를 '홈리스 추모 주간'으로 선포했다. 추모 문화제는 동짓날인 21일 오후 7시부터 서울역·용산역, 동자동 새꿈공원에서 비대면 영상 중계로 진행한다.

추모제기획단은 12월 14일 기자회견에서, 코로나19 이후 노숙인의 권리가 다방면에서 침해받고 있다고 했다. 민간이나 종교 기관에서 운영해 온 급식소가 문을 닫아 노숙인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장소가 현저하게 줄었으며, 공공 의료 시설이 코로나19 전담 병원이 되면서 노숙인이 진료받을 곳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주최 측은 무연고 사망자를 위한 공영 장례 지원 체계가 전국적으로 구축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지금은 지방자치단체별로 무연고 사망자에 따른 조례를 갖춘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차이가 나는데, 정부 차원에서 무연고 사망자 역시 제대로 된 애도를 받고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시스템을 일원화해야 한다고 했다.

추모제기획단은 서울역 광장 계단 위로 빨간 카펫을 깔고 그 위에 무연고 사망자의 이름을 적은 책 255권을 나란히 놓았다. 책 형태로 엮은 한 사람의 생애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한 노숙인은 자신이 알고 지내던 이의 이름 앞에서 장미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는 기자에게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죽음을 이렇게라도 기억해 주는 이들이 있어 정말 고맙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추모제기획단은 무연고 사망자들 이름을 인쇄해 이를 책처럼 만들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추모제기획단은 무연고 사망자들 이름을 인쇄해 이를 책처럼 만들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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