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여호수아서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사람 이름을 따서 그 제목이 붙여진 책이다. 출애굽기에 처음 등장하는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족속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모세로부터 하나님의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대적들과 마주 싸우라는 명을 받는다. 그 당시 여호수아는 젊은 청년으로 모세의 수종드는 자였다.

또한 여호수아는 모세가 여호와로부터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으로 올라갔을 때 모세와 동행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이 이스라엘의 칠십 인 장로들에게 임했을 때에도 모세와 함께 있었다. 그 당시 여호수아는 회막에 나아가지 않고 진중에 있던 두 장로에게도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하게 된 일이 모세에게 전해졌을 때, 내가 가서 저들을 금할까요 할 정도로 의기투합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종 모세의 뒤를 이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장이 되었다.

성경적 예표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 4:8)."

흥미롭게도 여호수아서를 보면 여러 가지 아름다운 성경적 예표들이 등장한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의 역사와 광야 생활을 언급하면서 이 일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거울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그들이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 생활을 거쳐 약속의 땅으로 들어섰던 모든 과정들은 바로 우리들의 삶을 예시해 주는 예표적 역사임을 증거하였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오늘날 우리가 받은 세례에 해당되는 성경적 역사로서 새 생활 곧 새 생명의 시작을 뜻하며, 기나긴 광야 생활은 우리가 믿음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힘쓰면서도 온전히 이루어 내지 못한 연약한 우리의 믿음을 예표한다.

바울은 이와 같은 예표론을 정리하여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 증거하였다.

여호수아기에서 우리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접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약속의 땅이 하늘나라 곧 천국에 해당되는 예표이며 요단강은 바로 육신의 죽음을 뜻하는 예표라고 말하는데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에도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노래가 있다. 그러나 그 찬송대로라면 요단강이 죽음이요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이 믿는 우리들이 들어갈 천국이라 할 때 심각한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서자마자 겪었던 첫 경험은 천국이 아니라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에서의 안식의 땅이란 그 무엇인가를 예표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말하여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 4:8,9)" 기록하였고 다시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증거하였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증거하였다. 이는 우리 믿는 자들은 요단강을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 성장 과정에 있어서 옛 사람 곧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옛 죄성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시점으로 보게 함이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하는 육신의 율법적 노력에 대한 절망에 대하여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늪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탄식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곧 바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고 증거하였다. 이는 믿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도라 해도 승리하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는 방법밖에는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는 탄식이 왜 필요한가 하면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내 안의 썩어질 육신 밖으로 눈을 돌려, 외부 곧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능력이 가진 한계점에 서서 이 곤고한 육신으로부터 해방되고자 외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참된 승리를 이루어 내시는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나의 연약함을 괴롭히던 아말렉을 몰살하고 육신 안에 도사리고 있던 견고한 진들을 정복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론들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높은 성벽을 쌓아 놓은 가나안을 파하며 그 땅을 지배하던 네피림 거인들을 넘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때에 당신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영화로운 체험들을 하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승리를 이루어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영광은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허락하신 지극히 풍성한 은혜 곧 하나님의 선물을 얻음으로 시작된다. 우리가 육신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김으로써 얻는 영적 승리의 순간,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가졌던 나쁜 성정들은 죽고 더러운 욕망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던 아름다운 열매들을 맺게 되어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사는 거룩한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적인 일들의 아름다운 예표가 바로 여호수아기 속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책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적이 과연 무엇이며 그와 싸워 이길 성경적 원리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호수아기는 바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영적 원리의 지침서가 되어 당신이 지금까지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고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하는 놀라운 체험의 시간이 될 것이다.

구원의 정의 여호수아(호세아, 예수)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수 1:1)."

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은 '호세아'이다. 그의 멘토인 모세가 호세아라는 이름에다 여호와의 이름을 더하여 '여호수아'라고 칭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수아'란 원래 구원이라는 뜻이므로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바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는 의미가 된다.

신약에서는 여호수아를 예수라고 부르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바로 사도행전 7장 45절과 히브리서 4장 8절이다(KJV). 이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는 헬라어 표기로 예수가 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히브리서에는 여호수아가 사람들을 안식으로 인도하지 못했다는 개념의 얘기가 등장한다. 이는 바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 그 땅을 정복하기는 했어도 안식을 줄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안식을 여호수아는 줄 수가 없었으므로 참된 의미로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안식을 이루어 놓으셨으니 이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안식 속에서 자기 일을 쉬게 된다고 증거한 것이다(참조 히 4:9~10).

여호수아, 여호와는 구원이시라, 이 이름이야말로 구세주를 칭하는 합당한 이름이 아닌가? 요셉이 정혼녀 마리아와의 임신 사실을 알고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면서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속에 나타나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여호수아, 예슈아)'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 곧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라,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를 뜻한다. 이와 같은 위대한 이름을 가졌던 모세의 종 여호수아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예표가 되기도 하였다..

원문으로 보면 여호수아서는 '베엑'이라는 단어로 시작되는데 이는 히브리어로 '그리고'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여호수아기는 모세오경의 연속이다.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1~3)."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내리신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친히 받고 율법을 상징했던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의로운 삶을 위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우리를 인도할 수 없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율법이나 규칙이나 어떤 기준 등을 사용하여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또한 교회들이 교회 규정 등을 만들어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무엇은 하지 말라 말한다.

나는 서른 살에 예수를 믿어 삼십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호를 얻었으나 온전한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 동안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적으로 나의 문제를 다루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어 나가려 하였다. 그때마다 육신에 각인된 죄 된 성질들은 고통스러웠고 나의 구원은 항상 죄의식 속에서 불안했었다. 내가 과연 구원을 받은 것인가 하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것은 내 생활이 의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율법이 항상 나를 정죄하였다.

날마다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고 때로는 어떤 집회에 참여하여 눈물로 회개하고 성결 서약서에 서명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것으로 내가 의롭다고 여길 수는 없었다. 나는 여전히 죄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나는 나의 죄의 문제로 하나님과 율법적인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어느 날 한순간에 죄의 두려움으로부터 나를 해방시키셨다는 것이다. 내가 십여 년간 할 수 없었던 것을 단 한순간에 해결하신 것이다. 할렐루야! 그로서 나는 하나님과의 율법적 관계를 벗고 은혜와 사랑의 관계를 갖게 되었다. 더 이상 죄로 인한 두려움이나 고통을 갖지 않아도 되었고 하나님의 평안과 기쁨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로부터 나의 안식의 날은 시작된 것이다. 아멘!

믿는 자에게 있어 문제는 바로 율법주의이다. 크리스천의 삶 속에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믿는 자들은 그의 이름을 영접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였을 것이다. 그의 평안과 기쁨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 기쁨과 평안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그것은 주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율법적인 방법으로 다가가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믿음의 상실이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율법의 종이 되어 또 다른 고통을 갖게 된다. 그러나 율법의 멍에를 벗어 버리면 하나님과 영원한 사랑의 관계가 설정되어 온전한 승리의 삶을 체험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영을 좇아 행하는 영적인 삶의 승리와 그 승리가 가져다주는 기쁨의 부요를 율법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직 여호수아 곧 예수아 예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이며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율법으로는 죄의 권세를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명령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여호수아야, 네가 사람들을 이끌고 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수 1:2~3)."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저 요단강을 건너 옛사람의 옛 삶을 죽은 것으로 여기며 등 뒤에 두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향하여 새 땅으로 들어가라 하신 것이다. 이제 그곳에서는 더 이상 불 기둥도 구름 기둥도 없을 것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도, 반석에서 솟아나는 생수도 없을 것이나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강이요, 넉넉히 물이 대어진 옥토이므로 그 땅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땅들을 이미 다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 하신 것이다. 우리는 그저 들어가서 차지하기만 하면 된다. 이미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차지하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성령의 이름으로 내가 다시는 이런 짓들은 하지 않으리라" 선언하고 나를 가르치신 성경의 모든 말씀 앞에 순종하면 스스로 돌아설 수 없는 수많은 옛 버릇들을 간단히 풀어 버릴 수 있을 것인데 아직도 우리는 육신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믿는 자들에게 육신의 소욕들을 이길 수 있는 약속과 능력을 주셨고 친히 승리를 해 놓으셨으므로 우리는 그냥 그것들을 차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가서 발바닥으로 밟고 지나가기만 하면 우리는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라" 하셨으므로 이미 모두 다 우리의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우리에게 주셨다 해도 우리가 그것들을 차지해서 우리 손에 갖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 소용도 없지 않은가? 그러면 우리에게 주신 땅은 얼마나 넓은 것일까?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곧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1:4)."

여기서 '해지는 편 대해'란 다름 아닌 지중해를 말한다. 그리고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이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까지 한 번도 차지해 본 적이 없는 땅까지를 그들에게 주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들을 다 차지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다 차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준 것도 차지하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땅들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으므로 우리를 향하여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축복을 받아 성령의 온전한 충만과 온전히 영을 좇아 행하는 삶을 차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또 이미 주신 모든 영역에서 성령의 승리를 주장해야 하겠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여호수아에게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 1:5)" 말씀하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언약인가? "아무도 능히 너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 아무도 내가 너에게 준 승리를 가로챌 자가 없으리라. 내가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며 너를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바로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약속이다. 예수님도 그의 제자들에게 지상 명령을 하시며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b)"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예표인 것이다.

하나님의 권면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 1:6~7)."

앞에서 먼저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이 여호수아와 함께하리라는 약속이었고 이번에 하신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 하신 말씀은 권면의 말씀이다. 또한 여기서 모세가 명한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하신 명령이 나오고 있는데 이로써 우리는 이때 벌써 모세의 오경이 다 저술되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겠다.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의 경우가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원칙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자기 자신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이므로 예외가 적용된다고들 합니다.

하나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율법을 즐거워하며 다 지켜 행하는 사람에게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범사에 형통할 것임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정하셨을 때는 예외를 두시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만일 네가 정녕 형통하고자 하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빠져나갈 구멍이나 찾는 일 따위는 하지 말아라 하신 것이다. 이 구절은 시편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을 묘사한 구절과 매우 흡사하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1~3)."

"이 율법 책을…"이란 기록을 통해 우리는 율법이 이미 책으로 성문화되었고 법전의 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시편 기자는 아마 이 여호수아 구절을 생각하면서 시편 1편을 쓴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1:8)."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길이 평탄하고 우리의 범사를 형통케 하실 하나님의 방침이 율법 속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1:9)."

두려움과 초조한 마음을 없애는 데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의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좋은 치료제이다. 역시 시편 23편에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할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고 노래하였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알고 나면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모든 공포가 사라진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데 두려울 것이 무언가? 내가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 하셨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거듭거듭 '강하고 담대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6절에서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였고 7절에서는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 하셨으며, 다시 9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다. 이는 그가 강하지 못하고 담대하지 못하고 또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거듭거듭 권고하신 것이다. 이는 모두 외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 마음의 문제를 언급하신 것이다.

아마 여호수아도 이 시점에서 인간 모세의 시종에 머물렀던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 3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야 할 매우 막중한 책임감으로 인해 두려움이 생겼을지도 모르고, 이를 아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격려하고 그를 고무하시기 위해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성경에서 우리는 종종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며 나 여호와가 너의 해야 할 일을 행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일들을 맡기실 때 하신 말씀이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 주시는 일을 하기에 앞서서 그 일의 어려움을 우리 자신들의 능력과 비교해 보고는 낙심하거나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서도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맡겨 주실 때 그것을 우리의 능력과 달란트로 해결해야만 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행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무엇을 맡기시면 반드시 그에 맡는 합당한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공급해 주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곧 하나님의 준비시키심과 능력 주심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시키실 때 우리 인간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 예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임하시어 예레미야를 열왕들에게 보내는 선지자로 세웠다 말씀하셨을 때 예레미야는 "내 나이 고작 십칠 세인데 왕이 내 말을 듣겠나이까" 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심으로써 예레미야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셨다.

여호수아의 순종

"이에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진중에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1:10~11)."

이제 바야흐로 진군 명령이 온 이스라엘 진중에 떨어졌다. "사흘 안에 이 요단강을 건너가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셨던 저 땅을 차지할 것인즉 준비를 서두르라" 명하였다.여기서 여호수아는 먼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들을 향하여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너희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고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편 해 돋는 편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 지니라(1:12~15)" 명하였다.

이에 그 지파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당신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우리가 범사에 모세를 청종한 것같이 당신을 청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1:16~18)" 답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앞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 번씩 여호수아에게 되풀이했던 그 말을 이 세 지파 사람들이 그대로 여호수아에게 다시 들려주는 것을 보게 된다.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 이는 일종의 확증이라 하겠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을 인간의 입을 통하여 다시 들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과연 그 말을 하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만 할 것이다.

사랑하는 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사오니 주여 이제 나로 여호수아(예수)에게 허락하신 구원의 능력을 허락하소서. 주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어 나로 강하게 하시고 담대케 하시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그리하오면 종이 주께서 명하신 일들을 성실히 행하겠나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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