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기독교방송에서 서울의 유명한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께서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하시는 것을 보았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그분은 성철 스님의 고백을 존중한다고 하셨다. 그 고백은 다름 아닌 그렇게 수양을 많이 하고도 유언으로 남긴 말씀에서 자기가 수많은 사람들을 속였다는 자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 책이 1998년에 처음 출판된 이후로 이 책의 내용은 목사님들의 설교에서 아마 수도 없이 인용되었을 것이다. 내가 들은 것만도 수차례이고, 요즘도 아주 가끔씩 이 책의 내용을 언급하시는 분들을 볼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난감했다. "그게 아닌데..."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게 사실일까? 정말로 성철 스님이 천추의 한을 안고 떠나셨을까? 저자인 류범상 목사님은 성철 스님의 다음과 같은 말을 문제 삼고 있다.

"내 말에 속지 말라, 나는 거짓말 하는 사람이여!" (1983년 하안거 결제에서의 말씀)

"한평생 남녀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으로 떨어지니 한이 만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성철 스님의 열반송)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로 부처님입니다!" (1987년 부처님 오신 날 법어)

류범상 목사님은 이 말들을 근거로 성철 스님이 사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했느니, 죽어 가면서 결국 천추의 한을 안고 지옥으로 갔느니 하는 말을 서슴지 않으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다. 그건 류범상 목사님이 책의 앞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학승이요 선승이셨던 성철 스님이 그런 의도로 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불가의 가르침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만 있어도 그런 막무가내 해석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성철 스님은 대단한 학문적 소양이 있었던 학승이시면서도 선승(禪僧)이셨다. 당대의 선불교 학자들과 나란히 토론하시면서 돈오돈수(頓悟頓修)에 대해서 설파하실 정도로 탄탄한 이론적 바탕을 이루신 분이셨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장좌불와, 면벽 수도 등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수행의 고난으로 다듬으신 분이셨다. 성철 스님의 이러한 모습들은 그분의 시봉 스님이 저술하신 성철 스님 시봉기에 보면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성철 스님은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불가의 가르침 중에는 '분별지'(分別智)를 넘어서라는 가르침이 있다. 분별지란 너와 나의 다름, 이것과 저것의 다름을 통해서 세상을 이해하는 인식을 말한다. 불가에서는 이 분별지를 넘어서야 비로소 참다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연기의 법이 이것과 관련이 있다. 연기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간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 없으며, 서로 간에 무관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다 이 연기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연기법에 비추어 볼 때 남과 나의 다름이 아무것도 아니며,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결국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물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타인에게도 무한한 자비심을 느낄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것이다. 결국 나의 업보와 타인의 업보가 만나서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내고, 내 전생과 타인의 전생이 얽히고 얽혀서 현세의 모든 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누가 누구를 탓하고, 누가 누구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서로서로 자신의 업을 감당하고, 그 악업을 끊기 위해서 노력하고, 참다운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할 뿐인 것이다.

심지어 불가에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부처를 미워하고 저주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서 무엇이든 집착하는 것은 다 미망이고 허상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눈에 보이는 객관적 실체, 그것이 사람이 되었든, 어떤 절대적인 가르침이나 권위가 되었든, 그것에 붙들리는 순간, 허상에 빠진다는 것이 불가의 가르침이다.

부처마저 넘어서야 하고, 부처마저 집착의 대상이 아닌데, 성철 스님이 자신의 가르침인들 소중하게 생각했겠는가? 자신을 거짓말장이로 표현하고, 자기의 죄업이 수미산보다 높다고 한 그 말, 한 평생 남녀의 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다는 그 말은 자신의 말과 가르침을 심지어는 성철이라는 인간 자체를 존경할 것도, 절대화할 것도 없다는 철저한 자기 비움의 말씀인 것이다. 그분은 살아생전에 생불이라는 존경을 받았지만, 그걸 그분이 기뻐하고 즐겼겠는가?

성철 스님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 중에 누구든지 성철 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3천 배인지 1천 배인지 절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다고 했다. 왜 그랬겠는가? 숭배를 받고 싶어서? 아무나 만나 주지 않기 위해서? 아닐 것이다. 성철이라는 유명세를 타는 스님을 찾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3천 배든 1천 배를 하면서 성철을 만나기를 포기하고 돌아가든지, 아니면 자기 속에 있는 부처를 스스로 만나서 깨우치라는 의미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얼마 전에 입적하신 법정 스님도 자신의 모든 저술을 다 불태우라고 유언하셨다. 그리고 자신의 저서를 절판하라고도 하셨다. 법정 스님의 이러한 유언도 성철 스님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같은 맥락인 것이다. 이것 가지고 스스로가 회개했다느니, 사탄을 숭배했다느니 하는 것은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책 말미에 있는 신문 기사 스크랩을 보면 성철 스님이 사탄과 관련해서 하신 말씀이 좀 더 자세하게 실려 있다. 성철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탄과 부처는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 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 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부처인 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마음 고운 마음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이 법어에서도 성철 스님은 분별지의 허망함을 설파하고 계신다. 부연하자면, 결국 이 말씀은 '무엇이 사탄인가? 무엇이 부처인가? 무엇이 악한 생각인가? 무엇이 선한 생각인가? 그것도 다 사람의 생각의 차이가 아닌가? 이 사람이 볼 때는 악한 행위가 저 사람이 볼 때는 선한 행위가 되기도 하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나누겠는가?'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이라고 보인다.

이러한 불가의 가르침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불가의 맥락에서 보고 이해를 해야지,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분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성경 말씀 중에 어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선하신 선생님이여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 하느냐, 선하신 이는 한 분 하나님 외에는 없다고 하셨는데(눅 18:18), 불가의 누군가가 이 말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은 자신이 선하지 않다고 하셨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건 성경의 문맥에 맞지 않고, 당시의 어법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다. 성철 스님의 말씀들도 불가의 맥락에서 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배타성은 남들보다 더 철저하게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진리를 사랑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에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가장 뛰어난 사랑의 실천. 가장 탁월한 진리 사랑. 그 배타성을 나는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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