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현지의 경건한 청음'은 교회음악·예배학 전공자 김현지 교회음악가(정의의느티나무숲교회)가 교회력 '공동 성서 정과(RCL)'에 맞춰 신자들의 묵상과 영성 생활을 돕는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연재는 매주 금요일 발행합니다. - 편집자 주

*2024년 3월 24일, 종려·고난주일 공동 성서 정과 본문(클릭)
시편 118:1-2, 19-29 / 요한복음 12:12-16 / 이사야 50:4-9a / 시편 31:9-16 / 빌립보서 2:5-11 / 마가복음 14:1-15:47

별과 십자가를 함께 바라보기

프랑스 작곡가 올리비에 메시앙(1908~1992)의 곡 '아기 예수를 향한 스무개의 시선 Vingt Regards sur l'enfant-Jésus'(1944)은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의 광경을 묘사하고 있는 피아노 곡입니다. 이 곡은 아기 예수를 둘러싼 다양한 존재의 응시를 하나하나 노래하고 있지요. 두 시간에 이르는 이 곡에는 성탄에 대한 복음서의 말씀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의 글에서 영감을 받은 작곡가의 유리알 같은 묵상이 눈부시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의 첫 말씀을 가지고, 성부 하나님의 시선으로부터 음악은 시작됩니다. 스무개의 시선은 성부 하나님, 별, 성모, 높은 하늘, 기쁨의 성령, 천사들, 예언자, 양치기, 동방박사 등 다양한 존재가 바라보는 심상을 메시앙의 고유한 음악적 기법들로 곡을 입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메시앙은 아기 예수를 직접 표현하는 것 대신에 그를 둘러싼 타자의 시선을 통해서 보여지는 각기 다른 응시를 통해 오히려 한곳으로 시선을 모으는 음악적 전략을 택한 것이지요. 다양한 존재의 등장은 아기 예수가 태어난 첫날의 시간과 장소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게 해 주고, 여러 빛을 받으며 서서히 드러나는 아기 예수는 어떤 퍼즐 조각에 의해 형상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한 존재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길은 메시앙만의 고유한 색채적 화성에 의해 표현되고, 그것은 크게 네 개의 주제(하나님, 신비적 사랑, 별과 십자가, 화음)를 가지고 구성해 나갑니다. 특히 메시앙은 별의 주제와 십자가의 주제를 동일하게 사용하는데요. 예수 탄생의 첫 시작은 빛으로 드러난 ‘별’이었고, 그것을 사람들(동방박사, 목동들)이 목격함으로 시작되죠. 그리고 예수의 존재를 마지막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십자가'에서 같은 주제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메시앙은 예수의 처음과 끝을 한가지 주제로 표현하며 그분의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도록 장치하였고, 듣는 이들은 제2곡 '별의 시선'과 제7곡 '십자가의 시선'에서 기시감을 갖게 됩니다. 

별과 십자가의 주제.
별과 십자가의 주제.

대상을 둘러싼 둘레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메시앙은 '주변'으로부터 발견한 음악적 소재를 자신의 곡에 옮겨 놓는 것을 즐겨 했습니다. 그가 숲속에 들어가 새소리를 녹음하고, 채보하였던 것도, 주변에 대한 극진한 관찰을 통해 대상을 사랑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던 거죠. 그리고 긴 시선이 집중된 그곳에서 신을 발견했고요. '무언가를 바라보는 힘'은 내면의 신을 만나게 해 주는 통로를 만들어 내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었죠. 아기 예수를 보는 별의 시선과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십자가의 시선은 어찌 보면 메시앙의 기나긴 '시선의 힘' 즉 '무언가를 끝까지 바라보는 힘'으로부터 형성된 순전한 신앙고백인 것이죠. 그것은 대상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긴 시선은 시간과 공간을 얼어붙게 만들고, 나와 타자의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며, 하늘과 땅의 전복이 일어나게 하니까요. 

멀리서 바라본 여자들
Emil Nolde, '그리스도의 생애'. 사진 출처 spectatio.wordpress.com
Emil Nolde, '그리스도의 생애'. 사진 출처 spectatio.wordpress.com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온 많은 여자는 예루살렘까지 예수와 함께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멀리서, 저 끝에서부터 여기까지 주위를 흐트리는 법 없이 예수를 따라왔던 여인들이었죠. 이는 십자가의 처형이 일어나는 그날 밤까지 이어집니다. 예수가 탄생하던 날 기진맥진한 얼굴로 아기를 바라보던 어머니 마리아의 시선은 그의 아들이 죽기까지 거두지 않습니다. 자고 있는 아기의 이마와 눈썹, 콧망울, 붉은 뺨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던 눈동자에는 이제 다른 상(像)이 맺힙니다. 어떻게 생긴지 헤아리기도 어려운 수많은 상처들과 피와 고름을 헤치고 바라본 예수의 슬픈 얼굴에는, 시므온 선지자를 만났던 날의 천진무구함이 서려 있고, 성전에서 며칠 만에 발견했던 어떤 날의 떳떳함이 서려 있습니다. 아기를 안고 내려다 보았던 지난날과 달리, 그저 저 높은 나무 십자가 위를 올려다보는 아들의 어머니는, 결코 그 시선을 거둘 생각이 없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울음으로 이미 엉망이 된 다른 여인들도 함께 서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는데 그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막 15:40)

이들은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않고 숨은 곳에서 도왔던 여인들이죠. 십자가의 처형이 있던 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이 여인들은 두려움 가운데서도 끝까지 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응시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무 십자가를 바라보는 여인들은 예수를 바라보지만 동시에 죽음도 함께 바라봅니다. 예수의 삶을 곁에서 속속들이 누구보다 잘 알았던 여인들은 십자가 나무 위에서 죽음과 함께 펼쳐지는 삶의 파노라마를 동시에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 밑에 있는 로마 병사들은 전리품이랍시고 그저 옷가지를 나누어 가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제비뽑기를 하며 십자가에 달린 자를 조롱할 뿐이지만,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 여인들은 그 옷을 꿰매고 입혔던 자들이기에 그 옷과 함께 걸었던 길과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오래 보는 사람들은 그런 은총을 얻습니다. 이면을 넘어선 것을 보는 심연의 것을 보는 존재들이란 그렇습니다.

보라 십자가 나무를

눈을 드는 행위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사건과 주변을 닫는 것입니다. '보는 행위'에서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소멸되고 주변은 문이 닫힙니다. 눈길을 모으는 곳에 내면이 똑바로 정렬됩니다. 성금요일 '십자가 경배' 전례의 시간은 예수의 십자가를 향해 일제히 바라보는 시간을 허락합니다. 보라색 천으로 덮힌 십자가의 천이 세 번에 걸쳐 좌, 우, 아래로 벗겨지는 것을 예배에 참여한 이들은 동시에 바라보는 시간이죠. 그리고 오래된 노래 '보라, 십자가 나무를 Ecce Lignum Crucis' 부릅니다.

1000년이 넘은 노래를 여전히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의 시선을 지속하는 것이겠죠. 신앙의 선배들이 불러왔던 노래가 나의 노래가 되며 '바라보는 것을 멈추지 않는 행위'는 계속되는 것이지요. 2000년이 된 나무와 1000년이 된 노래가 겹쳐집니다. 예수의 죽음 위에 그분의 행적과 삶이 포개어져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다 보면, 부스스 예수 주변의 사람들이 살아나고 소리들도 점점 다가옵니다. 망치의 둔탁한 소리, 제자들이 헐레벌떡 도망가는 소리, 비명이 들리고, 울음이 들리는 현장이 펼쳐집니다.

오스트리아 작곡가 안톤 하일러(Anton Heiller, 1923~1979)는 오래된 그레고리안 찬트 '보라, 십자가 나무를 Ecce Lignum Crucis'에 새로운 심상을 입힙니다. 오르간 곡으로 연주되는 이 곡은 양손의 옥타브가 조용하고 천천히 상승하며 시작합니다. 십자가 나무를 향하여 응시하며 움직이는 시선은 서서히 위로 올라가죠. 그러는 동안 페달에서 찬트의 노래가 시작됩니다. 1부는 응시하는 시선의 움직임과 함께 찬트의 익숙한 노래가 들려옵니다. 익숙하다는 것은 오래 부른 노래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오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사람들의 유익이기도 하죠.

Ecce Lignum Crucis 1-2마디.
Ecce Lignum Crucis 1-2마디.

느리고 정적으로 움직이는 시선의 진행은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고요한 내면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십자가의 예수가 내려다보는 듯한 처연함도 느껴집니다.

그리고 2부의 예수 수난 장면으로 이동하게 되죠. 불협화음의 등장과 불규칙한 페달의 두터운 소리가 등장하여 나무에 못 박는 소리를 암시합니다. 예측 불가능함이 주는 불안과 두려움은 현대음악이 가지는 무조성, 무박, 무질서의 형식을 가감 없이 사용하죠. 십자가 나무의 거친 질감이나 못질을 하는 망치의 둔탁함은 음색으로 표현되고요. 소리와 질감의 공명은 그 공간으로 데리고 가지요. 듣는 이들은 예수를 못 박는 소리를 지켜보기도 하지만 곧장 박해하는 존재로 이입되기도 하죠.

Ecce Lignum Crucis 24-27마디.
Ecce Lignum Crucis 24-27마디.

바라보는 이들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뜁니다. 자신도 어쩌면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숨어서 지켜보던 이들의 흐느낌과 불안은 극에 달합니다. 2부의 말미 찬트는 고음에서 들려요. 여전히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가사는 저 높이 달려 계신 이의 시선처럼 느껴집니다.

3부는 '세 천사가 노래하고 있었다 Es sungen drei Engel'는 오래된 노래가 들립니다. 달콤한 노래를 부르며 하늘에 울려 퍼지는 깃털 같은 소리는 십자가 주변을 떠다닙니다. 급박했던 2부의 수난 이후에 찾아오는 모처럼의 평화에 예수의 죽음은 엄숙하게 다가오지요. 그리고 마지막 마디에서는 구원자의 핏방울들이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가늘게 들리며 곡을 맺습니다.

오늘의 경건한 청음은 안톤 하일러가 1967년 작곡한 '보라, 십자가 나무를 Ecce Lignum Crucis'입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숨이 끝까지 남아 있는 순간까지 작아지는 마지막 종지는 결코 해결되지 않은 채 전위된 상태(근음이 위로 올라간 미해결 상태의 화성)로 끝맺음을 합니다. 완전한 승리와 해결은 유보된 상태로 나무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성금요일 우리의 시선일 테니까요. 고난의 주간, 성금요일에 듣는 오래된 노래를 멀리서 오랫동안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여인들과 함께 들어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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