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여운송 기자] 기독교가 '윤리'를 말하는 순간 비웃음을 사는 시대가 된 지 오래다. 얼토당토않게 구호만 남은 '기독교적 어쩌고 성경적 어쩌고'가 하도 많아서인지, 심지어 윤리 앞에도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윤리적으로 보인다. 교회학교 아이들이 십계명을 열심히 외우는 것과 별개로 '기독교윤리', '성경적 윤리'는 설 자리를 잃은 것 같다.

누군가는 곧바로 반박할 것이다. 기독교만큼 이웃에게 '나눔'을 많이 하는 윤리적인 종교가 어디에 있느냐고, 이 모든 나눔이 '이웃 사랑'이라는 '기독교윤리'에 입각한 것 아니냐고 말이다. 일면 맞는 말이다. 누군가를 도와주고도 욕을 얻어먹는 것만큼 억울한 일도 없으니, 교회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향한 세간의 윤리적 비판이 괘씸하기도 할 터. 그러나 현실이 그렇다. 기독교는 누구보다 나눔을 많이 하는 종교인데, 나눔을 하고도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왜일까.

'나눔윤리학'을 연구해 온 기독교윤리학자 김혜령 교수(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는 한국교회의 '나눔'과 사랑이 실패한 원인이 '나누기'와 정의의 실패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들의 나눔이 실상은 철저히 자본주의와 그 핵심인 능력주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나눔은 왜 시혜적이라는 비판을 받을까. '이웃 사랑'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가치를 어떻게 실천해야 할까. 자선과 사회보장제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현대사회의 여러 윤리적 이슈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김 교수가 2020년부터 1년 반 동안 <복음과상황>에 연재한 글을 엮어 최근 출간한 <기독 시민 교양을 위한 나눔윤리학 - 사랑은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잉클링즈)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다시 한번 '기독교윤리', '성경적 윤리'에 희망을 걸어 볼 참이라면 말이다.

이화여대 축제가 한창이던 9월 15일 오후, 학교 내 연구실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어쩌면 "윤리학이 무능할 수밖에 없는 시대", 기독교윤리학자인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스스로가 "애처로운" 이때에, 김 교수가 "이런 시대일수록 (나눔)윤리학의 담론, 기독교 신앙이 꼭 필요하다"(24쪽)고 말하는 이유를 들어 봤다. 2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나눴으나 인터뷰에서 모든 내용을 다룰 수는 없었으니, 궁금한 분들은 책을 들어 읽어 볼 것. 물론 인터뷰부터.

<기독 시민 교양을 위한 나눔윤리학> 저자 김혜령 교수(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를 학교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처음 보는 특이한 건물 구조 때문에 길을 헤맸다는 후일담. 뉴스앤조이 여운송
<기독 시민 교양을 위한 나눔윤리학> 저자 김혜령 교수(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를 학교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처음 보는 특이한 건물 구조 때문에 길을 헤맸다는 후일담. 뉴스앤조이 여운송

 -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교수고요. 인성 교육 파트를 담당하면서 '나눔 리더십'이라는 기본 교양과목을 가르쳐 왔어요. 한편으로는 나눔 관련 이론을 정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해 왔고, 최근에는 여성 신학자로서 여성신학을 둘러싼 광범위한 주제들, 이를테면 페미니즘·성소수자·차별금지법 이슈에 관해서도 연구·발언하고 있어요.

- 신학을 전공하셨는데, 여러 분과 중 '윤리학'을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사실 아주 오랫동안 제가 조직신학을 공부한다고 생각했지, 윤리학을 공부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제가 석사 논문을 이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으로 쓰기도 했고, 에마뉘엘 레비나스, 폴 리쾨르, 자크 데리다처럼 윤리 문제를 고민하는 철학자들을 공부했는데요. 당시에는 이걸 윤리학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철학·기독교철학 내지 기독교와 연관된 철학이라고 생각했어요. 프랑스로 유학을 가서 쓴 논문에도 윤리적 관점이 담겨 있지만, 그게 고유한 '윤리학'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고요.

그런데 귀국해서 저를 어느 학회에 소개해야 할까 고민했을 때, 조직신학보다는 현대사회 이슈들을 같이 고민할 수 있는 윤리학 쪽에 더 흥미를 느끼게 되더라고요. 물론 조직신학도 중요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윤리학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서구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다루기보다 시대적·상황적으로 다른 한국의 상황에 맞도록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저희 시대 임무인 것 같고요. 저는 그런 게 재밌더라고요.

- 책을 펴내게 된 경위가 궁금합니다.

10여 년을 '나눔'이라는 주제로 수업하다 보니까 이걸 글로 써 보고 싶더라고요. 그때 월간 <복음과상황>에 나눔의 관점에서 성소수자 이슈에 관한 글을 기고하게 됐어요. 당시 옥명호 편집장님이 그 글을 보시고 다른 아이디어가 있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마침 잘 됐다. 이런저런 걸 써 보고 싶다 말씀드렸죠. 그렇게 1년 반을 넘게 쓴 원고가 다듬어져서 이번에 책으로 나왔네요. 사실 저는 책이 되게 두껍게 나올 줄 알았어요. 진짜 많이 쓴 것 같은데, 남들은 대체 얼마나 많이 쓰는 건지.(웃음)

<기독 시민 교양을 위한 나눔윤리학 - 사랑은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 김혜령 지음 / 잉클링즈 펴냄 / 294쪽 / 1만 6500원
<기독 시민 교양을 위한 나눔윤리학 - 사랑은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다> / 김혜령 지음 / 잉클링즈 펴냄 / 294쪽 / 1만 6500원. 뉴스앤조이 여운송

- 책 제목이 '기독 시민 교양을 위한 나눔윤리학'인데요. 나눔윤리학은 무엇이고, 어떤 의미에서 기독 시민 교양인가요?

윤리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다루는 학문이니, 행위의 종류에 따라 의료윤리학·생명윤리학·경제윤리학·정치윤리학 등으로 다양하게 나뉘어요. '나눔'도 하나의 행위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나눔윤리학은 '나눔'을 윤리학적으로 다루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어요.

기독교적으로 보자면, '이웃 사랑'은 기독교의 핵심 가치잖아요. 철학적 윤리학에서 말하는 '환대'의 경우,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영역에 머물러요. '나는 타인에게 이 정도만 베풀 거야' 혹은 '베풀지 않을 거야'라고 말해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비난하지 않아요. 하지만 기독교인에게 나눔과 이웃 사랑은 자유이면서 동시에 '의무'거든요. 신앙의 핵심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기독교윤리학은 '나눔'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여기에 '기독 시민 교양'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나라와 인간 나라 양쪽에 걸쳐 있는 시민으로서 이 책에 나와 있는 나눔에 대한 윤리적 논의 정도는 기본 교양으로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나눔윤리학은 적어도 기독교인에게는 하위 분야의 하나일 수 없으며, 오히려 다른 모든 윤리학 하위 분야의 근원이 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진리 진술'은 그 자체로 기독교 하나님에 관한 존재론적 정의다. 이 진리 진술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기독교인들의 '고백 진술'로 해석되어 이해되고, 실제 삶 속에서 구현된다. 이 두 진술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를 통해 절정을 이룬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하나님 사랑'은 자기 비움과 헌신(희생)을 뜻하는 하강下降 기독론을 통해서만 설명된다." (7~8쪽)

- 기독교윤리학만이 지닌 특징이 있나요?

기독교윤리학은 다른 철학적 윤리학과 분명 접점이 있지만,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생각해요. 철학적 윤리학은 이성이든 경험이든 인간의 능력 안에서 윤리 실천의 보편타당성을 찾아내고 설득하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기독교윤리는 보편타당하지 않아요. 앞서 말했듯이,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 요구하는 윤리잖아요. 오히려 일반 사회의 보편타당함을 넘어서는 윤리예요.

'믿음'은 우리가 여태까지 맞다고 생각했던 사회 관습과 도덕규범을 벗어나고 넘어서면서까지 타자를 환대하라고 요구해요. 예수께서도 당시 종교법으로나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취급받은 사람들을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맞이하셨잖아요? 또 그렇게 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셨고요. 믿음은 우리의 합리적·경험적 이성을 토대로 한 사회규범으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선을 넘어서게 하는 거죠. 레비나스 식으로 말하자면, '윤리 밖의 윤리', '윤리를 초월한 윤리'인 거예요. 기독교윤리에서는 '그리스도의 선을 가지고 사회가 규정한 선을 넘는 것'이 중요한 거죠.

그렇다고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게, 기독교윤리라고 해서 사회규범이나 법질서에 위반하는 불의한 것들을 무조건 다 덮고 용서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다만 법적 정상성보다도 앞서서 작동하는 '공감'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예외적인 행동을 낳는 거죠. 사회가 '저 사람은 저런 대우를 받아 마땅해'라고 당연시하는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고 가치 규범을 재구성해 내는 힘, 우선 환대하고 그 이후를 얘기하게 하는 힘이 기독교윤리학이 지닌 매력이자 핵심이라고 생각해요.

김혜령 교수는 사회가 당연시하는 가치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재구성해 내는 상상력이야말로 기독교윤리학이 지닌 매력이자 힘이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김혜령 교수는 사회가 당연시하는 가치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재구성해 내는 상상력이야말로 기독교윤리학이 지닌 매력이자 힘이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 책에서 한국교회의 나눔이 실패한 이유에 관해 설명해 주셨어요.

사실 한국교회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눔'을 제일 많이 하는 종교예요. 그런데 나눔을 하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나눔을 하는데도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어요. 이건 한국교회가 '나누기'에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봐요. 어떤 분들은 '나눔'과 '나누기'가 뭐가 다르냐고 물을 수 있는데요. 나눔이 무조건적인 사랑의 영역이라면, 나누기는 재분배와 정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둘이 대립하거나 양자택일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에요. '나눔'과 '나누기', '사랑'과 '정의'는 같이 가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겉으로는 이웃 사랑과 나눔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낮은 수준의 자본주의식·능력주의식 나누기 정의를 작동해 왔어요. 그러니 사회적 신뢰가 추락한 거죠.

나누기의 관점을 결여한 나눔은 부패하기 쉽고, 권위적인 위계질서를 만들기 쉬워요. 도움을 받는 당사자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도움을 받게 되면서 인간 존엄성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되고요. 선의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컸을지 몰라도, 정작 당사자는 도움을 받기보다는 시민이자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직접 찾고 싶어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양명수 교수님(이화여대 명예)이 말씀하신 "남을 위하는 것보다는 남을 대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시대"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나눔과 사랑으로 이웃을 만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들의 인간다움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이 되면 안 된다는 거죠. '주는 사람의 기쁨'이 작동하는 시혜적 사회 논리에서는, 주는 사람이 거만한 마음을 갖지 않아도 나눔의 구조 자체가 위계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가 '받는 사람의 슬픔'도 조심히 배려해야 한다고 봐요.

또 한 가지 문제는 한국교회가 나눔의 대상을 선별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여전히 '고아·과부·이방인'이라는 성서 시대의 시각으로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일용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는 전혀 빈곤으로 보이지 않는 거죠. 사회문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사회구조에 따라 "내가 정말 고통받는 자입니다"라며 스스로를 드러내는 이들도 달라져요. 우리 이웃이 단지 '이방인'이 아니라 '난민'이 될 수 있고, 그냥 난민이 아니라 '기후 난민'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여성과 성소수자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여전히 성서 시대의 시각으로 이웃을 바라보면서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야'라고 규정하고 있어요. 결과적으로 돕고 싶은 자만 선별해서 돕는 거예요.

물론 모든 나눔이 현실적으로 '선택'이라는 점은 인정해요. 재화가 한정돼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기독교인들은 더 나누지 못하는 데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져야 해요. 그동안의 실패에 대해 성찰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잘 나눌 수 있을지 고민해야지, 나눔의 대상을 선별하면서 '도움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고 와라', '죄를 반성하고 삶의 태도를 바꾸고 와라', '전환 치료를 받고 와라' 하는 식의 조건을 내거는 건 기독교 정신에 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사랑은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니까요.

- "도움받는 자의 도움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113쪽)라고도 하셨는데요.

이것도 시혜적인 관점과 관계가 있어요. 간단히 보면, 내가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가 존재해야 하잖아요. 또 그분이 제게 많은 부분을 말씀해 주셔야 해요. '어떤 도움을 받고 싶다' 혹은 '받고 싶지 않다' 혹은 '오히려 내가 당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고 싶다' 하는 것들을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지금까지는 이런 부분을 무시한 일방적인 나눔이 주를 이뤘거든요. 거기서 위계가 발생했고요. 우리의 도움과 방식이 실제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었는지 고려하지 않았던 거죠. 나눔과 나누기가 균형 있게 발전하는 사회가 되려면, 여태까지 늘 '도움받는 자'로만 대상화됐던 사람들이 자기 필요와 의견을 낼 수 있는 자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필요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나 교회가 더 좋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도움받는 자의 도움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라고 표현한 거죠.

"선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자 하는 관점에서는 사소해 보이는 질문들을 놓고 서로 대화하는 일이 실제로 도움을 받는 이의 삶이나 자존감을 더 잘 지켜 주는 데에는 중요할 수 있다. 이미 세상은 '말 못 하는 타자'로 일반화되던 '약자들'을 자기 관점에서 스스로 말하게 하고, 그 말에 관심을 기울이며 의사 결정에 반영하는 다소 복잡한 의사소통 체계로 진화하고 있다. 교회도 이에 발맞춰 갈 때가 되었다." (109쪽)

- 나눔에 대한 한국교회의 근본 태도를 지적하면서 '자선'과 '제도'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어요.

한국교회는 대체로 나눔의 문제를 '자선'의 관점에서만 풀려고 해 왔어요. '레드 콤플렉스'가 심했기 때문에 제도적 사회정의·사회복지를 얘기하면 무조건 '공산주의'로 몰아갔죠. 나눔과 나누기에 대한 '냉전적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했던 거예요. 물론 자선은 필요하고 또 굉장히 중요해요. 이웃의 얼굴을 일대일로 맞대고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인격적인 방법이기도 하죠. 하지만 리쾨르에 따르면, 완전히 순수한 의미의 자선은 불가능해요. 자선도 여러 번 반복하면 일종의 제도가 되거든요. 자선은 결국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도를 요청하고 필요로 하게 돼 있어요.

물론 모든 것을 제도화할 수는 없어요. 제도는 늘 사회 관습과 법의 한계 내에 있기 때문에, 그 제도가 포함하지 못하는 예외가 생기게 마련이거든요. 정말 자기 몫이 없는 사람들이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요. 이럴 때는 예외적인 사람들에 대한 조건 없는 나눔(조건을 뛰어넘는 나눔)이 필요해요. 법과 제도가 보호해 주지 못하는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을 도우면서, 우리 사회가 쳐 놓은 경계선이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얼마나 제한적이고 불의한지 계속 고발해야겠죠. 여기에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있다고 봐요.

요즘 교회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돼서 문제인데, 사실 '문제적' 존재가 되기는 해야 해요. 사회가 자신들의 관습과 논리에 갇혀 있을 때, 예수가 그랬듯이 경계를 넘도록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필요하죠. 경계선 안팎에 있는 자들에게 끊임없는 관심을 갖고, 인간 사회의 경계선이 하나님나라의 선에 근접하도록 끊임없이 확장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어요.

김 교수는 한국교회가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국가 제도의 재분배 기능을 긍정하면서도, 제도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을 넘어 '예외적인 나눔'을 창조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김 교수는 우리 사회의 법과 제도가 만들어 놓은 경계선이 하나님나라 관점에서 얼마나 제한적이고 불의한지 고발해야 할 의무가 기독교인들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뉴스앤조이 김은석

사실 이런 일은 비기독교인들도 열심히 해요. 인간적인 정의의 관점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랑으로도 가능한 영역이에요. 그런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심지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일을 하지 못한다면 부끄럽고 무능한 거죠. 저는 결국 자선과 제도 두 가지가 변증법적으로 상호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봐요. 기본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국가 제도의 재분배 기능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겠어요.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 경계를 계속 넘어서면서 예외적이고 인격적인 나눔의 자리를 창조해 가야겠죠.

"현대사회에서 국가는 하나의 조직이자 제도로서 모든 국민을 돌보며 모든 궂은일을 맡아 해야 할 광범위한 책임을 진다. 이러한 사회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집중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국가만이 아니라 교회를 비롯한 모든 조직이 현재 실행하고 있는 제도화된 나눔의 관습과 원칙을 끊임없이 위반하는 일이다. 예외적 나눔의 사건들이 계속 발생할 수 있도록 늘 새롭게 깨어 있어야 한다." (287~288쪽)

- "나눔 실천" 이전에 "정의로운 나누기 행정"이 교회의 임무라고 강조하셨는데요.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기 위해 가진 것을 '나눔' 해야 하죠. 하지만 그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현실적인 조직체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유지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려면 교회 내 '나누기'가 정의롭게 이뤄져야 해요. 그런데 현실은 정의의 원리가 사랑 혹은 은혜의 원리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고 있어요. 그 자리를 자본주의 시장 논리가 차지하고 있고요. 교회 내 재원 분배가 폐쇄적이고 불합리하게 이뤄지고 있어요. 목회지 부자 세습 문제, 부교역자에 대한 형편 없는 대우, 여성 안수 문제를 비롯한 성별 지위 문제나 임금격차는 말할 것도 없고요.

사실 큰 것도 필요 없어요. 적어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사회적 안전망에 준하는 정도로는 재분배해 줘야죠. 그런데 하고 싶어도 못 하게 교회법으로 막아 놨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목회자들은 한번 추락하면 희망이 없죠. 이렇게 안전망이 없는 상황에서는 개혁을 위한 인재들을 확보하기도 어렵고, 개혁도 일어나기가 어렵다고 봐요.

저는 이런 문제를 볼 때마다 한국교회가 미래를 전혀 내다보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요. 정말 미래를 생각한다면 정의로운 나누기 작업이 필요한데, 이걸 안 하고 있다는 것은 관심조차 없다는 거겠죠. 현재 주류 목사님들이 말로는 '미래 미래' 하지만, 정말 관심이 없다고 생각해요. 자기 세대, 자기 은퇴까지만을 교회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개교회와 교단 내부의 하위 주체들이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거나 정부가 교회에 조세를 부과하려 할 때마다,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는 일터가 아니고 목회자는 장사치가 아니라고 항변해 왔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말하는 많은 교회가 그 어떤 일터보다도, 그 어떤 장사치보다도 맘몬의 포악한 논리를 좇아 왔다. 목회자들 간의 심각한 사례비 격차를 정당화하는 문화에는 자본주의의 핵심인 능력주의가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폐쇄적인 재정 구조는 교회가 자본주의의 기본 덕목인 정직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비도덕적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나누기 행정 자체가 불의한 상황에서 교회의 나눔 실천은 사랑을 가장한 위선이며, 불의를 감추기 위한 위장일 확률이 크다." (276쪽)

- 이 책이 어떻게 쓰이길 원하시나요?

일단 인쇄된 건 다 팔렸으면 좋겠어요.(웃음) 인세 수익금 전액을 사회 경계선 안팎의 이웃과 함께하는 기독교 단체에 기부할 예정이거든요. 바라기는 이 책이 교회 안팎에서 대중 교육 및 토론 자료로 활용됐으면 좋겠어요. 이 논의에 대한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으니, 많은 분이 읽어 보시고 여러 방향으로 피드백도 해 주시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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