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과 같은 심각한 사건이 드러났을 때 대중의 관심은 가해자에게 집중된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가해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가해자에게 어떤 수위의 처벌이 내려지는지 등등. 사법 체계 자체가 가해자의 범죄를 특정하고 그에 알맞은 형벌을 내리는 과정이고, 언론 보도 또한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해자가 징벌을 받은 것이, 혹은 받지 않은 것이 이슈가 되고 그 일이 지나가면 사건은 잊힌다. 물론 가해자가 적절한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피해자의 피해 회복이 소외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일이다.

<뉴스앤조이>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기반해, 교회 혹은 신학교에서 목사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 5명을 인터뷰했다. 자신이 입은 피해를 공론화한 후 수개월에서 수년이 지난 현재, 이들은 어떤 일상을 살고 있을까. 그들이 원하는 '피해 회복'이란 무엇이며, 그 회복이 삶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지, 회복에 도움이 혹은 방해가 된 것은 무엇이었는지 들어 봤다. 이들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은 기억을 기꺼이 다시 끄집어낸 이유 중 하나는 '교회를 위해서'다. 이들이 교회를 향해 던지는 말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 기자 주

*'교회 성폭력 생존자의 오늘' 전편 보기(클릭)

[뉴스앤조이-구권효 기자] 강소영 씨(가명·26)는 중학교 3학년 때 다니던 광주 ㅁ교회에서 중·고등부를 담당하던 전도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 가해자는 교회 일에 열심이던 소영 씨를 기독교적인 언어로 그루밍하며 1년 넘게 강제 추행과 강간을 지속했다. 그가 다른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면서 가해는 끊어졌지만, 이후 중·고등부 교사였던 청년이 소영 씨에게 접근했다. 그 역시 소영 씨에게 성적인 관계를 요구했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이라고 인지하기 어려운 때였다. 소영 씨는 가해자들보다 자신을 탓했다. 가해자들이 한 말들이 오랫동안 소영 씨를 괴롭혔다. 소영 씨는 정말로 자신이 문란함을 타고난 사람인 줄 알았다. 너무 혼란스러운 나머지, 고등학교 3학년 때 이 아무개 담임목사를 찾아가 용기를 내 모든 사실을 털어 놨다. 하지만 돌아온 말은 "그건 다 죄고 위험한 거다. 여자는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였다. 이후 소영 씨는 더욱 자신을 경멸하게 됐다.

자신의 경험이 '그루밍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2018년, 스물세 살 때였다. 사회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새롭게 다니던 교회 사람들이 소영 씨를 지지해 주었다. 피해를 당한 지 7년 만에 소영 씨는 전도사였던 가해자를 고소했다. 2019년 5월, 가해자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가해자는 성폭력이 아닌 소영 씨가 동의한 성관계라고 주장하며 항소했으나, 2심 재판부 또한 그의 유죄를 인정했다. 이후 소영 씨와 가족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가해자가 총 9000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뒤늦게 ㅁ교회 담임 이 목사가 소영 씨에게 했던 부적절한 말들도 문제가 됐다. 소영 씨 가족이 문제를 제기하자, 이 목사는 오히려 소영 씨가 문란했다는 식으로 2차 피해를 입혔다. 이 때문에 이 목사는 명예훼손죄로 100만 원 벌금형을 받았고, 소영 씨에게 손해배상금 1000만 원을 지불하게 됐다. 이 목사의 부적절한 처신이 알려지자, 교회는 이 목사 지지 측과 반대 측으로 분열했다. 교회는 이 목사를 빨리 내보내려, 5억 원 상당의 기도원 건물을 그에게 주고 사임시켰다.

노회는 전도사였던 가해자와 이 목사에 대한 징계에 미적지근하게 대응했다. 소영 씨 가족은 가해자가 검찰 조사를 받을 때부터 노회에 징계를 요구했는데, 노회는 결국 1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 후 가해자를 면직했다. 이 목사를 징계해 달라는 요구에는 "그러려면 고소를 해야 한다", "이 목사가 성폭력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왜 그러느냐", "노회는 목사를 보호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 목사가 기도원 건물을 받고 나간 것도 노회가 '중재'했기 때문이다. 소영 씨는 교회와 교단에 크게 실망했다.

2019년 말까지 가해자 재판과 이 목사에 대한 문제 제기가 모두 마무리됐고, 소영 씨는 스스로도 사건이 모두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잘 살아 보자'고 의지를 북돋았지만 마음처럼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괜찮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소영 씨를 억눌렀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2년이 지난 지금, 소영 씨는 여전히 자신을 붙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교회 성폭력 피해를 뚫고 생존한 사람에게 '회복'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청소년 시절 그루밍 성폭력을 당한 소영 씨는 수년이 지난 후 가해자를 고소하며 사건을 공론화했다. 공론화 전과 공론화 진행 중 그리고 공론화 후까지,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청소년 시절 그루밍 성폭력을 당한 소영 씨는 수년이 지난 후 가해자를 고소하며 사건을 공론화했다. 공론화 전과 공론화 진행 중 그리고 공론화 후까지,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제 자신이 경멸스러웠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담당 전도사에게 처음 성폭력을 당하고, 피해가 1년 넘게 지속됐어요. 가해자는 저에게 계속 기독교적인 언어로 가스라이팅을 했어요. 제가 척추측만증이 심해서 허리가 자주 아팠는데 "허리 아픈 건 하나님이 성적으로 타락한 사람에게 내리는 벌"이라고 얘기했어요. 제가 보라색을 좋아한다고 하면 "보라색은 성을 뜻하는 색"이라고 하고요. 제 눈을 뚫어져라 보면서 "너한테는 성적인 뭔가가 있다. 나같이 예민한 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다"고 하기도 했죠.

제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가해자는 교회를 옮겼고 그렇게 관계가 끝났어요. 근데 곧바로 당시 20대 후반의 중·고등부 교사로 있던 사람이 저한테 접근하더라고요. "네가 전도사님을 많이 의지했던 거 알고 있다", "전도사님이 떠나서 힘들지 않느냐"면서요. 그래서 마음을 열고 금방 친해졌죠. 그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또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는 거예요. 

안 그래도 '전도사님이 하는 말이니까 맞겠지' 생각했는데,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니까 정말 믿게 되더라고요. 나에게는 남자를 넘어뜨릴 수 있는 무언가가 있고, 태생적으로 음란하고, 성적으로 문란하고, 훌륭한 사람도 나만 만나면 망가질 수 있고, 그러니까 늘 조심해야 한다고…. 교회에서는 '순결'을 강조하는데 저는 그걸 지키지 못했으니 이미 망가졌고, 누구라도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실망하고 비난할 거고, 그러니까 숨겨야 한다고요.

스스로를 경멸하는 마음이 컸어요. 어렴풋이 내가 피해자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러다가도 나는 강압적으로 당한 게 아니니까,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으니까­ 일반적인 성폭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피해자도 아니면서 피해자 코스프레하려는 것 같았고, 그런 과거를 가지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사는 스스로가 너무 가증스럽다고 느꼈어요. 교회에서 저는 되게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였으니까….

괴리감이 너무 심해서 차라리 막 엇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소위 몸을 판다고 하는 사람들이랑 내가 뭐가 다르지', '차라리 길에서 아무나 나를 납치해서 강간해 줬으면 좋겠다'…. 왜냐면 그 전도사·교사와의 관계가 굉장히 비정상적이었던 것 같고 분명 피해를 당한 것 같은데, 피해를 피해라고 말을 못 하겠으니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피해가 나한테 일어나서 내가 성폭력 피해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정말 너무 혼란스러워서 담임목사를 찾아갔어요. 그때 저는 이 경험이 뭔지 정의를 못 하겠으니까, 이게 성폭력이면 성폭력이라고 아니면 뭐라고 누가 정의를 내려 줬으면 했어요. 그때 담임목사를 굉장히 신뢰했거든요. 근데 돌아보면, 제가 그를 신뢰한 이유는 그냥 '자기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였어요. 설교 때 '목사의 권위' 이런 걸 강조했으니까. 또 맨날 기도한다고 하니까 뭔가 굉장히 영적으로 탁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이런 분이면 잘 말해 주겠지' 하는 생각에 용기 내서 찾아갔어요.

가서 "전도사님과 이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했더니 그거에 대해서 더 묻기보다, "너 그 뒤로도 또 그런 일 있었지?"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그 선생님이랑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담임목사가 "너 그거 다 죄이고 아주 위험한 일이니까, 항상 몸 조심해야 하고 남자들이랑 그렇게 다니면 안 된다"고 엄청 혼을 내더라고요. 그 뒤로 자기 경멸이 더 심해졌어요. 나는 되게 더러운데 깨끗한 척하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실수한 목회자' 아닌 그냥 '성범죄자'

스무 살 때 서울로 대학을 가서 혼자 살게 됐는데, 한 1년 정도 교회를 안 갔어요. 나는 사실 검정색인데 겉에 흰색 페인트를 칠하고 다니는 사람 같아서 너무 답답했거든요. 새로 사귄 대학 친구들이랑 맨날 술만 마시고 살았어요. 맨 정신으로 있으면 생각이 많아지고, 교회에 가면 또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았거든요. 계속 교회로부터 도망친 것 같아요. 근데 도망은 치지만 뭔가 하나님이 계속 저를 찾으시고 부르시고 그런 느낌은 있어서 완전히 도망가지는 못했어요. 학교 근처에 큰 교회가 있었는데 거기 과 선배 언니들이 다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교회에 가게 됐어요.

거기서 사람들을 사귀면서 혼란스러운 마음이 더 심해졌어요. 이 사람들이 나를 좋게 평가할 때 오히려 괴로웠고… 특히 목회자들과 친해지는 걸 경계하게 되더라고요. 근데 어쩔 수 없이 친해지게 되잖아요. 제가 또 성경 공부 이런 거 되게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거든요. 그 과정에서 계속 또 목회자와 그런 일이 생길까 봐 너무 무섭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마음이 계속 불편해서 결국 담당 교역자한테 말을 했어요. 이걸 말하지 않고 더 친해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청년부를 총괄하시는 목사님께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그분이 "이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고 명백한 성폭력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상담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제가 괜찮으면 부모님께도 알리고 신고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 말을 그때 처음 들었어요. 제가 이해를 못 하니까 관련 기사나 자료 같은 걸 계속 보내 주셨어요. 또 아는 변호사한테 부탁해서 법적으로 봐도 제가 피해자라는 걸 확인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분 덕분에 제가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죠. 제가 ㅁ교회 담임목사를 찾아갔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면, 지난 몇 년을 버리지 않아도 됐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온전히 스스로 피해자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부분이 있었어요. 그러다 2018년 사회적으로 '미투 운동'이 일어난 거예요.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더불어 '권력형 성폭력', '그루밍 성폭력' 등에 대한 개념을 접하면서 저에게 있었던 일을 비로소 '목회자 그루밍 성폭력'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게 됐어요. 거기다 제가 대학에서 사회학을 같이 공부했거든요. 여성학 시간에 배운 것들이 종합돼서, 점차 제 경험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런 복합적인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피해를 당한 지 7년이 지났지만 가해자를 고소할 수 있었어요. 스스로 피해자라는 확신 없이 성폭력 사건을 고소하는 건 어려운 일이거든요. 유죄판결이 나오지 않으면 더 큰 피해를 입게 될 수 있으니까요. 확실히 해야 했어요, 제 경험이 무엇인지. 고소하기 전 최대한 여기저기 연결해서 변호사분들에게 많이 물어보기도 했죠. 제가 정말 법적으로도 피해자가 맞는지 여러 번 확인했어요. 당시 청년부 담당 전도사님과 목사님, 친구들의 지지가 큰 도움이 됐어요. 고소를 결심하고 실제로 고소하기까지 6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제 경험을 글로 정리해서 지인들에게 조금씩 알리기 시작했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보다 더 분노하고 걱정하며 지지해 주었던 이들 덕분에 용기 낼 수 있었죠.

가해자를 고소한다는 건 제 사건을 공적인 문제로 만들겠다는 거잖아요. 미투 운동 덕분에 제가 깨달았듯이, 제 사건을 보고 누가 또 용기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컸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까 교회 문화도 좀 바꾸고 싶더라고요. 또 하나는 상담받을 때 선생님들이 하신 말씀 때문인데요. 가해자가 법을 통해서 유죄를 받는 게 피해자 회복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고 많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일단 그 전도사였던 가해자를 고소했어요.

1심 결과로 징역 4년이 나왔을 때는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어요. 지금은 의제 강간 연령이 만 16세로 올라갔잖아요. 제가 소송할 때는 청소년이라도 성관계에 동의한 경우 가해자에게 무죄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어요. 목회자의 그루밍 성폭력이라는 특수성을 사법부에서 이해하지 못해 유죄판결이 나오지 않는다면, 가해자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죠. 며칠 뒤 판결문을 받아 읽고 엄청 위로를 받았어요. 지금까지 그 판결문을 10번도 넘게 읽었어요. 제가 진술한 것들을 사법부에서 모두 인정했고,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짚어 가며 가해자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왜 잘못했는지 논리 정연하게 적어 주셨거든요. 그때야 비로소 가해자를 '타락한 목회자', '실수한 목회자'가 아닌 그냥 '성범죄자'라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미투 운동을 통해 수많은 여성이 '그것은 성폭력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소영 씨는 자신의 미투도 다른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미투 운동을 통해 수많은 여성이 '그것은 성폭력이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소영 씨는 자신의 미투도 다른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반성한다던 가해자, 고소하니 돌변

불면증은 늘 있었어요. 그게 불면증인지 몰랐을 뿐이지. 힘들게 잠이 들면 간헐적으로 강간당하는 꿈을 꿨어요. 성폭력을 당하고 난 후부터 그랬고, 스무 살 때는 진짜 심했어요. 정신과는 스물세 살 때 처음 갔는데…. 어느 날 현관문으로 누가 들어와서 저를 죽이는 꿈을 꿨어요. 꿈에서 깼는데 진짜 숨을 못 쉬겠고, 꿈에서 본 운동화가 너무 선명해서 밖을 못 나가겠는 거예요. 학교를 가야 하는데 집 현관문도 못 열겠어서 침대에서 아예 못 움직이고 벌벌 떨고 있었거든요. 그때 겨우 병원에 가서 처음으로 제 상태를 알게 됐어요. 그게 일종의 공황장애였다는 거랑 제가 불면증을 오래 앓았다는 걸 알게 됐죠. 이후로 약을 오래, 많이도 먹었어요.

공황 증상은 꽤 자주 왔어요. 갑자기 강의실이나 길에서 오기도 하고…. 불면증이 한참 심할 때는 좀 무섭더라고요. 잠을 못 자다가 잠들면 현실에 기반한 꿈을 꿨어요. 그랬더니 뭐가 꿈이고 뭐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지더라고요. 제가 얘한테 분명히 이 말을 한 줄 알았는데 그 친구는 들은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게 되게 실제적이라서 엄청 무섭거든요. 기억을 잘 못하게 됐을 때도 있었어요. 한때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제가 어디 서 있는 건지, 뭘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서,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10분 간격으로 메모를 하기도 했죠.

저는 사실 고소하고 나서 상태가 훨씬 안 좋아졌어요. 가해자의 태도가 돌변한 게 큰 충격이었어요. 제가 고소하기 전에 가해자를 직접 만났어요. 그때는 "반성하고 있다", "미안하다", "나도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런 말을 했거든요. 제가 녹음한다고 해도 다 그렇게 인정했어요. 근데 소송이 시작되니까, 정말 돌변하더라고요. 성폭력이 아니라 성관계였다고, 제가 동의했다고 주장하더군요.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살겠다고 악을 쓰는 것 같았어요.

시간이 오래된 데다가 증거가 제 진술밖에 없으니까 진술하는 데 부담도 생각보다 컸고요. 주워들은 건 있어서 '진술의 일관성이 중요하다'는 건 알았는데, 제가 겪은 일이 사실인데도 뭔가 억울한 상황이 생길까 봐, 조금만 실수해도 꼬투리 잡힐까 봐 되게 부담스러웠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경찰·검찰 진술 때도 변호인을 대동할 수 있더라고요. 그런 게 안내가 잘 됐다면 좀 더 편하게 진술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재판 시작하고 나서 증인신문 때도 힘들었죠. 가해자 측 변호인이 너무 나쁘게 질문을 하더라고요. 뭐 하나라도 꼬투리 잡으려고.

경찰·검찰 조사나 증인신문 다 힘들었지만, 그런 건 당연히 힘들다고 생각하고 각오도 하고 응원도 받으면서 잘 넘겼거든요. 근데 가해자의 태도 변화에서 오는 실망감은 정말 감당하기 힘들더라고요. 가장 힘들었던 건 오히려 1심 판결이 나온 후였어요. 재판에서 유죄가 나오면 가해자가 죄를 인정하고 반성할 줄 알았는데… 곧바로 항소하더라고요. 심지어 1심에서는 국선변호인을 썼는데 항소심 때는 변호사까지 샀어요. 정말 사람이기를 포기했구나 싶더라고요. 실낱같은 희망마저 짓밟혀 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때 깨달았어요. 진정한 회개 같은 걸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냥 지옥 불에 떨어지겠구나….

소송을 진행하는 중에는 그냥 하루를 채우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그러는 것 자체가… 그래서 학교도 못 다녔어요. 어떻게 꾸역꾸역 버텼는데, 가해자가 항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확 나빠졌어요. 그전까지는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한 적은 없었는데, 그때는 진짜 이렇게 기도했어요. '하나님, 이 정도면 나는 할 만큼 한 것 같다. 이걸 버티라는 건… 당신이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교회는 자살이 죄라고 하잖아요. 근데 그때는 '하나님은 나를 다 아실 텐데, 내가 여기까지 버텼는데,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하고 가면 고생했다고 안아 주시겠지, 내치지는 않으실 거야….' 이 생각을 거의 매일 했던 것 같아요.

2019년 10월에는 결심하고 한강에 간 적도 있어요. 거기서 녹음을 했어요. 나를 죽음까지 내몬 사람들의 이름과 교회, 이런 것들을 녹음하고 한참 서 있다가 온 날도 있었어요. 그런 날은 밤을 새고 해가 뜨자마자 병원에 달려갔어요. 약을 먹어야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길 수 것 같아서요. 그때는 정말 일주일에 두 번씩 병원에 갔어요. 학교 화장실에서도 갑자기 죽을 것 같아서 겨우 빠져나와 119에 신고한 적도 있어요. 구급차 타고 실려 갔는데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거예요. 정신적인 문제였던 거죠.

항소심이 그해 12월 선고됐고 유죄가 확정됐어요. 사실 다음으로 제가 고등학생 때 중·고등부 교사였던 가해자도 고소하려고 했어요. 그 사람한테도 연락해서 사과하라고 했는데, 그때 엄청 싹싹 빌었거든요. 비는 것도 되게 거룩하게 빌어요. 교회 용어를 쓰면서 제 앞에서 막 회개를 하더라고요. 근데 제가 고소할 것처럼 이야기하니까, '성폭력'은 아니라고 나오더군요.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성폭력은 아니라는 거예요.

물리적 폭행과 강압이 동반돼야만 성폭력인가요? 당시 저는 전도사에게 그루밍 성폭력을 겪은 직후였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태였어요. 그런 때 미성년자인 저에게 접근해 성적인 접촉을 시도한 게 성폭력이 아닌가요? 그 사람은 전도사와 저와의 관계도 다 알고 있었어요. 알고도 그랬으니 오히려 더 나쁜 거 아닌가요? 정말 저를 걱정했다면 제가 전도사에게 당한 게 성폭력이라고 알려 주고 신고할 수 있도록 도왔어야죠.

지금 제가 그 당시 그 사람보다 한두 살 정도 어린데, 그렇게 대입해서 생각해 봐도 그건 성폭력이에요. 어떻게 목회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학생에게 또다시 성적인 접촉을 할 수 있는지… 이게 성폭력이 아니라면 뭐라고 제가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폭력은 '성적 학대'예요. 그는 제가 성적 학대에서 벗어난 직후, 아직 그 경험이 성적 학대라는 걸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저를 같은 방식으로 학대했어요. 이래도 성폭력이 아닌가요?

근데 제가 이미 그 전도사였던 가해자와의 소송으로 너무 지친 거예요. 그 교사였던 사람의 2차 가해에 대응하기가 힘들더라고요. 또 그는 목회자가 아니라 교사였기 때문에 뭔가 더 결과를 장담할 수 없겠다는 생각도 있었어요. 그래서 고소를 못 했어요. 무죄가 나오면 오히려 면죄부를 주는 거잖아요. 그렇게 제 가슴에 묻었죠.

그냥 잘못을 인정했으면…

ㅁ교회 이 목사의 경우는 사실 소송까지 갈 문제는 아니었어요. 제가 원한 건 단지 진심으로 자기 잘못을 알아차리는 거였어요. 당시 어른으로서 자신이 어떤 말과 조치를 해야 했는지, 그러지 못해서 얼마나 큰 피해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말했던 건지, 왜 그렇게 생각했던 건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이런 성찰이 있기를 바랐어요. 한편으로는 그런 기대가 헛되다는 것도 알고 있었죠. 이 목사는 나이도 너무 많고, 그 시골에서 자기가 제일 잘난 줄 알고 목회하던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 뭘 깨닫고 돌이키기는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 예상이 맞았죠.

제가 학창 시절 전도사와 교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이 목사가 알고 있었다는 것에 부모님이 화가 많이 나셨어요. 이 목사에게 몇 번 문제를 제기해도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ㅁ교회 예배 시간에 찾아간 거예요. 교인들 앞에서 "이 목사가 내 딸이 성폭력당한 걸 알면서도 부적절한 대처를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랬더니 이 목사가 외려 "소영이는 그때 그 교사와 사귀고 있었고 몸도 섞었고 결혼한다고 했다"면서 제가 원래 문란한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한 거죠. 이건 사실도 아닐뿐더러, 저와 상담하면서 알게 된 비밀까지 폭로한 거잖아요. 이런 2차 가해 때문에 기독교반성폭력센터를 통해 서명도 받고 이 목사를 고소하게 된 거죠.

늘 상처가 되는 건 이런 거예요. 잘못을 인정하는 게 어렵다는 건 아는데… 그래도 진정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면 저도 좋고 자기도 좋고 가장 깔끔하게 끝날 일이라는 거죠. 근데 자기가 살겠다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그 태도가 저를 난도질하는 거예요. 그럼 저는 당하고만 있을 수 없으니까, 거기에 대응하면서 진흙탕 싸움이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또 노회나 교단이 얼마나 이런 일에 대응을 잘못하는지 알게 되고…. 돌아보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가 일을 크게 키우는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 이 목사는 벌금 100만 원과 손해배상금 1000만 원을 내게 됐는데, ㅁ교회에서는 5억 원 상당의 기도원을 받는 조건으로 사임했죠.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참담했어요. 교회는 사건이 장기화할수록 교인들이 떠나니까 빨리 매듭짓고 싶어 했는데, 이 목사가 버티고 있으니 돈을 주고 사건을 일단락한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교회에 따져도 이미 너무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었어요. 노회에서도 "노회는 목사를 보호하기 위한 기관이다", "이 목사가 직접 성폭행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 목사에게 그러느냐"고 하지를 않나…. 성 인지 감수성이나 성폭력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으니까, 이 목사나 교회나 노회나 뭐가 잘못된 건지 아예 모르더라고요.

오히려 전도사였던 가해자를 고소할 때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이 목사와 싸우면서 교회가 정말 교회답지 못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교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심각한 2차 피해를 입힌 목사에게 5억 원을 주고 내보낸다? 이건 피해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거죠. 교회가 스스로 교회이기를 포기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저들이 믿는 '하나님'이란 누구일까, 저들이 말하는 '교회'란 뭘까…. 교회가 무너지면 안 된다고, 교회와 교인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막상 거기에서 피해자는 배제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그럼 나는 교회가 아닌가? 교인이 아닌가? 나도 하나님을 믿는데, 나는 교회에서 나가야 하나? 내가 달갑지 않은가? 저는 여전히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나 '교회'에 제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슬펐어요.

'애정 어린 지지'와 '애정 없는 관심'

돌아보면 저에게 도움이 됐던 건 '애정 어린 지지'였어요. 애정 어린 지지로 함께해 준 친구들, 여성민우회와 기독교반성폭력센터, 상담 선생님과 정신과 의사 선생님도 제가 이 과정을 이겨 낼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주셨어요. 애정 어린 지지는 제가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해 줬죠. 밖에서 상처받고 돌아왔을 때 이들이 아무 말 않고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났어요. 제가 덤덤하게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을 때, 무슨 말을 해 준다기보다 소리 내지 않고 울어 주고 손을 잡아 준 사람들이 있었어요. 제가 혼자 있는 게 힘들까 봐 같이 있어 주고…. 정말 무조건적인 지지, 사랑이었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제가 상처 받았던 일을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은 건 '애정 없는 관심'이었어요. 분명히 저에 대한 관심이기는 한데, 애정 어린 지지와는 달리 단순히 사건 자체에 대한 호기심, 궁금증, 관심이 앞섰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특히 ㅁ교회가 이 일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그런 걸 느꼈어요. 그들의 의도가 나쁜 건 아니었을 수 있지만, '자신들의 무엇'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저를 걱정한다고 말하지만 진심으로 와닿지 않는 느낌이랄까…. 이들의 말에서 저에 대한 배려를 느낄 수 없었거든요. 부모님이 그들과 연락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지 모르겠네'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목사 면직 청원 서명운동을 할 때도 좀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비고란에 "저런 목사 때문에 교회가 욕을 먹는다", "저런 악마 같은 목사는 퇴출해라" 이런 말들은 솔직히 좀 피하고 잘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분들 마음 자체가 잘못됐다거나 나빴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당연히 서명해 주셔서 감사했고요. 근데 그런 말을 볼 때마다 '과연 내용은 자세히 읽어 봤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피해자에게 그런 태도는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요. 자신의 분노, 자신의 호기심, 자신의 감정을 내세우며 다가오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은 확실히 달랐어요.

ㅁ교회와 노회의 대응은 도움이 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저를 벼랑 끝으로 내몰았죠. 정말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지금도 이 목사와 그를 감싸고 돈 인간들을 생각하면 손이 떨려요. 제가 신천지에 갔다는 말부터 시작해서 저를 흠집 내기 바빴거든요. 그런 모습이 우습기도 하면서 무섭기도 했어요. 왜 악의를 가지고 날 공격할까,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저는 교회 안에서 성폭력을 당했고, 미성년자였던 저를 제대로 상담해 주지 못한 이 목사에게 문제를 제기했을 뿐인데 말이죠.

노회는 무슨 일이든 미온적이었어요. 전도사였던 가해자를 징계하기 위해 제 부모님이 직접 검찰에서 조사받고 있다는 확인서를 떼서 노회장과 서기에게 전달했어요. 그랬는데도 1심 판결이 나오고 나서야 가해자를 면직했다더라고요. 노회에 ㅁ교회 이 목사도 징계해 달라고 청원했는데 "고소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노회에 고소하려면 예치금인지 뭔지를 내야 한대요. 이 목사가 물러나면서 5억 원짜리를 가져간 것도 노회가 중재한 거예요. 그 과정에서 들려온 말들이 "노회는 교회를, 목사를 보호해야 한다" 이런 거였어요.

한편으로는 가족들을 대하는 것도 힘들었어요. 제가 그간 말하지 않고 있다가 고소하기 전날 부모님께 말했거든요. 엄마가 너무 충격을 받으셨어요.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때는 저도 되게 힘들 때였거든요. 근데 엄마가 너무 걱정되니까 힘들다고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법정에서도 엄마가 막 쓰러지고 그러셨어요. 저를 너무 걱정하셔서 그런 거겠지만, 그렇다면 오히려 제가 엄마 걱정을 안 하게 해 주는 게 맞지 않나 싶더라고요. 지금도 제가 약을 먹거나 좀 더 치료를 받고 싶다는 말을 엄마한테 잘 못 해요.

법원 판결과 언론 보도는 정말 너무 감사한 일이었어요. 법원은 가해자를 단죄했고, 언론은 제 편에 서서 여러 차례 사건을 보도해 줬어요. 세상에서 권력이라고 말하는 곳들이 내 편이 돼 말해 주는 느낌이 들어서 든든하더라고요. 사법부가 가해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 게 회복의 큰 계기가 된다는 거, 실제로 경험해 보니 무슨 말인지 조금 알 것 같았어요.

근데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를 고소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물적증거가 없고 진술에 의존해야 하는 게 피해자에게 큰 부담이거든요. 제 경우는 가해자가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고소를 진행했던 제 친구는 유죄판결을 얻어 내지 못했어요. 그 친구는 목회자 성폭력 사건이 아니고 친밀한 사이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이었거든요. 제가 고소하는 걸 보고 용기 낸 친구인데, 성인이 된 후 일어난 일이어서 결국 가해자가 무혐의가 됐어요. 그래서 오히려 그전보다 더 힘든 상태가 됐죠….

제가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이후에 또 다른 성폭력 피해 생존자를 만났을 때도, 자기는 성인이 된 후 겪은 일이라 고소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제가 마음이 무겁고 무슨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하루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나는 어릴 때 그런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거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어떻게 이런 생각이 들게 하지!' 하면서 막 화가 나는 거예요. 법과 사회가 좀 더 피해자 중심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절차와 문화가 정착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제가 느꼈던 걸 더 많은 분이 느낄 수 있으면 해요.

흰색 페인트를 칠한 채 사는 것 같다고 느끼던 때가 있었다. 소영 씨는 자신을 탓하는 습관과 오랜 기간 싸워야 했다. 
흰색 페인트를 칠한 채 사는 것 같다고 느끼던 때가 있었다. 소영 씨는 자신을 탓하는 습관과 오랜 기간 싸워야 했다. 
다 끝났고 난 잘 지내야 하는데

2019년 12월 재판이 끝났어요. 그전에 ㅁ교회 이 목사도 사임하면서 제가 공론화했던 문제들이 다 마무리됐죠. 그때는 저 스스로도 '이제 다 끝났으니까 잘 지내 보자' 이런 파이팅이 넘쳤던 것 같아요. 그런 효과로 한두 달은 잘 지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2020년 3월 'n번방 사건'이 크게 불거졌어요. 그걸 보는 게 너무 힘들더라고요. 갑자기 뭔가 가라앉아 있던 게 확 일어나는 느낌…. 아무것도 못하고 일상이 무너져 버렸어요. 제가 자꾸 이런 일에 반응하는 것도 싫었고…. 대체 언제쯤이면 이런 자극에 조금 무디게 반응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내 삶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리고 탓하는 건 아니지만, 귀신같이 항소심 결과를 기점으로 저를 향한 모든 지지가 철회되는 느낌이었어요. 언론도 안녕, 센터도 안녕…. 공교롭게도 제가 그 시점에 다시 광주로 오게 돼서 친밀하게 지내던 친구들이랑도 멀어지게 됐어요. 전화를 자주 하면 되지만… 제가 먼저 연락을 못 하겠더라고요. 이 친구들은 이미 충분히 나에게 해 줄 바를 다했는데… 저도 좀 씩씩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힘들다고 전화하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광주에 산다는 것도 좀 무서웠어요. 저는 벌써 가해자의 출소가 두렵거든요. 꽤 자주 출소가 얼마 남았는지 세 봐요. 평소에는 잘 지내는데 그래도 늘 두려워요. 번화가로 나갈 때, 혹은 예전 동네 쪽을 방문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가해자 가족을 마주치지 않을까, ㅁ교회 사람들을 마주치지 않을까 여전히 심장이 벌렁거려요. 작년까지는 ㅁ교회 쪽에서 오는 버스를 타려면 약을 먹어야 했어요. 트라우마가 계속 남아 있는 거죠.

그때 써 놓은 일기를 보면 '어떻게 지내야 하지?' 물음표가 너무 컸어요. 살아남으라고 해서 살아남았는데… 그럼 나는 뭘 할 수 있는지,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굴 찾아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라고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과정에서 받은 도움에 빚진 마음이 들어 괴롭고, 트라우마는 여전히 지속되고…. 모두 떠나 버린 자리에서 어떻게 제 일상을 다시 꾸려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교회에 대한 고민도 날로 커져 가는데 상의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많지 않지만 제가 아는 생존자들은 거의 다 교회를 떠났거든요. 저는 교회에 남아 있고 싶은데, 막상 가려고 하면 잘 못 가겠더라고요.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서 다들 떠나게 된 건가' 싶더라고요.

그때 제가 결심을 했어요. 열심히 글을 써서 '어느 생존자의 기록'을 내놔야겠다고. 또 생존자들이 모여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알코올중독자 치료 모임처럼, 교회 성폭력 생존자 모임이 지역별로 만들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주변에 비슷한 일로 미투를 하고 살아가는 친구가 있어서, 괜히 소셜미디어로 그 친구 일상을 엿보기도 했어요. '이 친구는 잘 살고 있나' 하면서요.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은 갈망이 엄청 컸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2019년 한창 항소심 재판 중일 때, 기독교반성폭력센터에서 했던 교회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때 생존자들을 처음 만났는데 너무 신기한 거예요. 다들 되게 당차 보였어요. 솔직하게 말하고 교회나 목회자 욕도 하고. 그런 게 새롭고 시원했어요.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 뭔가 계속해서 나를 억누르고 묶었던 것에서 해방된 느낌? 근데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저를 사랑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그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제가 대단하고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근데 우연찮게 올해 9월부터 또 생존자 글쓰기 모임을 한다는 거예요. 2년 만에 다시 참여하면서 '내가 괜찮지 않구나'라는 거랑 '괜찮지 않아도 되는구나'라는 걸 알게 됐어요. 생존자 모임을 하면 제가 그리워했던 모든 게 있는 느낌이에요. 제가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저를 변명하지 않아도, 그냥 안전하고 이해받고 지지받는 느낌. 그렇게 지지해 주기 때문에 제가 저를 좀 더 편하게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는 느낌. 제가 다시 힘들어졌던 건, 청소년기에 그랬던 것처럼 다 제 탓을 하고 저를 미워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었어요. 모임을 하면서 내 입장, 내 편이 돼서 글을 쓰고 그 글이 지지받는 과정을 겪다 보니까 지금은 상태가 많이 괜찮아졌어요.

회복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회복이라는 게 있을까요? 이미 한번 깨어진 건데 어떻게 처음처럼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저는 완전한 회복이란 없고, 회복의 과정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이런 상처는 안 나는 게 더 중요하죠. 그래도 저에게 회복이란 뭘까 생각해 보면… '하나님과, 그리고 나 자신과 화해하는 거'예요. 가해자는 제가 저 자신과 하나님을 왜곡된 모습으로 보게 했어요. 그가 깨뜨려 놓은 나 자신과 하나님에 대한 무엇을 새롭게 해 나가는 게 저한테는 회복인 것 같아요.

공론화를 통해 이건 제 잘못이 아닌 가해자의 잘못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면서, 저는 평생 증오하던 저 자신에게 처음으로 미안해졌어요. 저를 아끼고 싶어졌고, 저에게 고마워졌어요. 그런데 사건이 모두 종결된 후 혼자 남은 삶을 버티며 금방 다시 저와의 관계가 비틀어지는 걸 느꼈어요. 그렇게 저 스스로나 누군가와의 관계가 틀어질 때, 무슨 일이 잘못될 때, 쉽게 저를 탓하고 비난하는 게 습관이 돼 있더라고요. 다 내 잘못이라는 생각을 쉽게 하는 것 같아요.

이번에 다시 생존자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면서, 온전히 내 편이 되어 주는 것을 오래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편에서 나를 알아가고 내 목소리를 들을 때, 하나님과도 연결되는 것 같더라고요.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나를 모르고,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을까….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하기 어려운 나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조금 더 친밀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게 회복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을 밟아 나가도록 애쓰고 있어요.

그것을 위해 필요한 건… 회복하지 못해도 괜찮다는, 회복이 아주 느려서 눈에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지지와 연대예요. 재판이 끝나고 센터의 도움과 언론의 관심만 사라진 게 아니라, 저 스스로도 '도움 받아도 괜찮다'는 마음을 접었어요. 이미 너무 많이 받았다는 생각에… 이제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아직 다 괜찮아지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왠지 이제 괜찮아져야 한다는 강박이 심했어요.

근데 회복이 그렇게 쉽게 이뤄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그럴 때마다 저 자신에게 다시 실망했어요. 여전히 제 삶에는 트라우마가 지속되는데, 이제는 괜찮거나 적어도 나아지는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생각에, 말하지 못하고 티 내지 못하고 혼자가 되어 가는 것 같았어요. 괜찮은 척하는 데 굉장히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요.

그때 누군가 '아직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해 주거나, 우리가 아직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더라면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사실 고립감이 너무 심해져서 다시 생존자들과 연결되기 위해 글쓰기 모임을 찾았던 거고, 실제로 그들과 연결되어 글을 나누다 보니 조금씩 다시 회복되어 간다고 느꼈거든요.

공론화와 유죄판결이 큰 사건인 건 맞지만, 생존자의 회복 과정은 그보다 훨씬 길고 복잡한 여정인 것 같아요. 나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뒤로 가기도 하죠. 이런저런 시기들이 있다는 거, 그걸 알아주고, 있는 그대로에 대한 지속적인 지지와 연대가 이어진다면 생존자의 지난한 회복 과정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엄청난 걸 하기보다는 그냥 생존자의 삶에 함께 있어 주는 것, 편이 되어 주는 거요. 여전히 울컥하는 제가, 스스로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도록,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있어 주는 거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교회는 못 가겠어요

교회도 좀 바뀌었으면 해요. 저는 공론화 초반까지만 해도 제 사건과 교회는 별개라고 생각했어요. 가해자가 나쁜 놈이고 2차 가해한 목사가 이상한 인간인 거지, 교회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고요. 당시 출석하던 교회 교역자들과 간사님, 청년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그런데 ㅁ교회와 노회의 대응을 보면서 교단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다른 사건들이 처리되는 과정을 보면서 이건 기독교계의 문제라고 인식하게 됐어요. 계속 개교회와 교단을 분리해서 생각해 보려 했고, 또 교회와 교인을 분리해서 생각해 보려 했지만, 이제 정말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회 성폭력'이라는 건 목회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에게 성폭력을 가한 거잖아요. 성폭력이라는 사건 자체로 인격에 큰 해를 입은 것에 더해,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당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은 거예요. 이에 대해 교회가 너무 안일한 것 같아요. 한번 배신당하고 상처 입은 마음에도 단칼에 떠나지 못하고 교회 주변을 맴도는 우리에 대해 교회가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생존자를 만날 때 늘 놀라는 건,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얼굴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우리의 피해 양상이 너무 똑같다는 점이었어요. 가해자가 우리를 그루밍하며 한 말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경우도 봤어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가해자는 안일한 교회가 만든 범죄자예요. 교회는 수많은 목회자가 범죄자가 될 때까지 방치한 책임을 져야 해요. 그러려면 이런 문화 자체를 뜯어고쳐야 하는 거죠. 그런데 현실은 자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잖아요.

앞에서 얘기했듯이 이런 상처는 안 받는 게 중요해요. 회복보다 예방이 훨씬 중요하다는 거예요. 저는 만 15살에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만 25살인 지금, 그 나이 아이들을 보니 얼마나 어리고 보호가 필요한 시기인지 보여요. 제발 저와 같은 피해자가 다시는 없기를 바라요. 지금도 그런 가해가 일어나고 있을까 봐 두려워요. 저는 그때 단 한 명의 어른이 필요했어요. 이 지옥에서 꺼내 줄, 이 가해의 끈을 끊어 줄…. 하지만 그때 제가 만난 어른은 하나같이 그렇게 해 주지 못했어요.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어요. 이제 어떻게든 그 고리를 끊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 저는 공론화 과정에서 교회가 저를 밀치고 내몰고 거부하는 걸 많이 느꼈기 때문에, 교회가 어떤 존재를 거부하는 걸 보면 그때 느낌이 확 살아나요. 부모님이 다니는 교회에 다녀 볼까 생각도 했는데, 그 교회에 차별금지법 반대 플래카드가 걸린 걸 보고 발을 들이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차별금지법을 반대한다'는 말이 곧 저에 대한 배제로 연결되는 것 같았어요. 저는 교회가 '하나님'과 '성경' 운운하며 가해자 편에 서서 저를 공격하는 걸 경험했어요. 저들은 성경을 들이대며 성소수자를 배제하지만, 그 자리에는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A를 차별하는 사람은 B도 차별할 수 있는 거죠.

광주로 다시 오고 나서 교회를 안 다니고 있어요. 처음부터 안 다니려고 한 건 아니고, 여기저기 가 보기도 하고 영상으로 예배를 하기도 했죠. 계속 '안 좋은 교회도 있고 좋은 교회도 있다'고 생각해 보려 했는데, 단지 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는 곳을 찾으려다 보니, 교회가 그냥 다 똑같은 것 같더라고요. 지금은 어디도 다니고 싶지가 않아요. 그런 교회에 힘을 보태기 싫고 돈도 주고 싶지 않고 수도 늘려 주고 싶지 않아요.

이런 생각은 계속 해요. 교회에서 일어난 일이고 하나님에 대한 어떤 것이 손상된 경험인데, 교회 밖에서 온전히 회복할 수 있을까? 교회 안에서 다시 연대하고 지지받는 경험으로 회복되는 게 더 빠르고 확실하지 않을까? 제가 교회를 떠나게 된 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가 결코 아니에요.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사랑이 너무 감사한데도 교회에 가지 못하겠어요. 저와 같은 교회 성폭력 생존자들이 다닐 수 있는 교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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