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6일,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성 바로 아래 위치한 스코틀랜드국교회 총회 대강당(Church of Scotland Assembly Hall)에서 1910년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World Missionary Conference) 100주년을 기념하는 대회가 열렸다. 당시 에든버러대학교 신학부 세계기독교연구소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필자도 초청을 받았다. 대회 장소인 총회 대강당은 오늘날 에든버러대 신학부 건물인 뉴칼리지(New College)에 속해 있었고, 평소 문이 잠겨 있어 늘 그 앞을 지나다닌 필자도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100년 전 세계 교회 지도자들에게 문을 연 바로 그 공간에 필자도 그 후손들과 함께 자리하는 영광을 얻었다. 100년 전 대회가 '세계'라는 이름을 썼지만 실제로는 '서양이 일방적으로 주도한 세계'였던 것과 달리, 2010년 대회의 '세계' 기독교는 문자 그대로 '전 세계'의 기독교였다. 참석한 이들 중 백인·서양인이 아닌 이들의 비율은 절반을 훌쩍 넘어 보였다.1)

그날 행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는 출구에서 아프리카에서 온 한 젊은 기독교인을 만났다. 그는 필자가 한국에서 온 것을 알고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조용기 목사를 아세요?"라고 물었다. 필자는 당연히 "알죠"라고 답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처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외국인, 특히 다른 세계에 대한 지식이 상대적으로 풍성한 중심부 국가 출신의 백인이 아닌 제3세계 유색인종을 만나면, 그들이 서로간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우리에게 처음 던질 질문의 소재가 오늘날에는 상당히 다양해졌다. 한류韓流 덕에 영화·드라마·음악 등 한국 대중문화가 널리 퍼져 있고, 한국 음식, 한국어,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다. 전자 제품, IT, 자동차 등 한국의 첨단 기술에 관심을 가진 이도 적지 않다. 따라서 오늘날엔 대화의 첫 물꼬를 드는 소재로, BTS, 블랙핑크, 봉준호, 홍상수, 박찬욱, 이영애, 손흥민, 문재인 같은 이들의 이름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21세기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처음 만난 외국인이 가장 먼저 언급하는 한국인은 배용준도, 박찬호도, 박지성도, 김대중도 아닌 조용기(1936~2021)였다. 그가 기독교인이라면, 여기에는 거의 예외가 없었다. 20세기 당시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인은 조용기 목사였다.

조용기 목사(1936~2021).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조용기 목사(1936~2021).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20세기 기독교는 '세계' 기독교였다.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예일대 기독교 역사가 케네스 스코트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는 19세기를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 칭했다.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개신교 해외 선교 운동을 통해 기독교가 드디어 서양과 백인의 경계를 넘어 세계화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든버러대 역사가 브라이언 스탠리는 이 평가를 교정한다. 19세기 마지막 10년까지도 아프리카 대부분에는 아직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고, 아시아 일부, 예컨대 한국 같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도 1880년대 이후에야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실제로 기독교의 세계화가 성취된 시기는 20세기다. 따라서 진정한 '위대한 세기'는 20세기였다.2)

20세기가 진정한 '세계' 기독교의 위대한 세기로 평가받는 것은 그저 이 시기에 복음이 전 세계로 확산돼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사람들이 기독교로 많이 개종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수적으로 많아져서 이미 1945년 이후 비서양인 기독교인의 수가 서양인 기독교인의 수를 넘은 사실도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독교 영향력의 흐름이 이전처럼 서양에서 비서양으로, 북반구에서 남반구로 가는 일방성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페루 출신으로 복음주의 선교 대회인 1974년 로잔 대회의 방향을 뒤바꾼 것으로 평가받으며, 대회 이후 미국·스페인 등 서양 중심부에서 활동한 제3세계 선교신학자 사무엘 에스코바르(Samuel Escobar)의 생애와 활동이 그 사례 중 하나다. 그가 2003년에 선교학에서의 관점 변화를 간략하게 설명한 <벽을 넘어 열방으로 The New Global Mission(미국), A Time for Mission(영국)>의 미국판 부제도 "모든 곳에서 모든 이에게로 가는 복음(The Gospel from Everywhere to Everyone)"이었다.3) '일방성一方性'이 아닌 '전방성全方性'이 20세기 세계 기독교의 핵심 특징이다. 오늘날 서양 교회, 선교 단체, 신학교, 기독교 기관은 지도자가 백인이 아닌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 단체가 비서양 기독교인의 인적·물적 후원을 받거나, 그들에게 지식과 경영법, 지도력, 영성 등을 배우는 경우도 많다.

이런 역전을 주도한 한국인으로는 조용기가 가장 대표적이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명성에서나, 영향력에서나, 파급력에서나, 논란에서나, 20세기에 조용기를 앞선 한국 기독교인은 없었다. 따라서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인물 중 하나로 그를 다루는 것은 마땅하다. '성장', '3박자 축복', '영욕榮辱'이 그를 설명하는 세 가지 키워드다.

성장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3년 세계 최대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교인 수는 1992년 70만 명을 넘어섰다. 1970년대부터 외국 주요 언론과 기독교 언론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 비결을 소개하는 기사를 발행하며 다양한 사회적·신앙적·행정적·기술적 요인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장 요인의 중심에는 카리스마적 창립자이자 담임목사인 조용기 개인이 있다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4)

1936년 울산 울주군에서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조용기의 가문은 한학과 동양 종교에 익숙하고 부유한 천석꾼 집안이었다. 그러나 혼란한 해방 정국이 이어지던 1950년 5월 30일 열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아버지 조두천이 입후보했다가 낙선하면서, 재산을 거의 잃었다. 더구나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터진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한 후, 그 시대 많은 이들이 그랬듯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다행히 장남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부모의 열망과, 공부를 좋아하고 성적이 뛰어났던 본인의 실력을 힘입어 그는 부산공고에 입학했다. 여러 나라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진 조용기의 외국어 실력은 당시 부산공고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부대에서 미군과 영어로 대화하면서 길러졌다. 학교장과 미군부대장 사이의 통역을 맡을 정도였다.

기독교 집안 출신이 아니었던 조용기가 기독교인이 된 계기는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조용기는 당시에는 치료가 어려웠던 폐결핵 증상을 보였다. 부산과 서울의 여러 의사를 만났으나 차도가 없던 차에, 그를 회심으로 이끈 1단계 만남이 시작됐다. 그의 세 살 위 누나의 친구이자 당시 동래여고 3학년이었던 한 여학생이 3개월 안에 사망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누워 있던 그에게 복음을 전하며 성경과 성경 공부 교재를 선물로 줬다. 성경을 꾸준히 공부하면서 기도를 포함한 몇 가지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1단계 회심이었다.

2단계는 부산에서 미국 오순절교단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켄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를 만나면서 경험한 과정이었다. 조용기는 아직 기독교를 잘 알지 못했고, 회심하지도 않았지만, 영어 통역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타이스의 집회에서 통역을 맡았다. 기독교가 인생을 바칠 가치가 있는 종교인지 알고자 그는 금식을 하게 되는데, 금식 중에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병을 치유해 주시면 목회자로 일생을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실제 회심에도, 병 고침에도 이르지 못한 그는 1년 후 루이스 리처즈(Louis Richards) 선교사를 만나 대화하면서 신학교에 가겠다고 최종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지적 회심을 넘어서는 체험적 회심을 했고, 폐병이 치유되는 신유도 경험했다. 이것이 최종 3단계 회심이었다.5)

최종 회심한 조용기는 1956년 9월 20세의 나이로 당시 서대문에 있던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에서 오순절 신앙은 해방 이전 영국 선교사들이 처음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선교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 선교사들이 내한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오순절 신앙을 가졌던 이들이 하나님의성회라는 우산 아래 규합됐다. 1953년에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정식 출범했는데, 서대문 신학교는 이 교단이 운영하던 신학교였다.6)

신학교 입학은 조용기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기가 됐다. 여기에서 후에 그의 장모가 되는 최자실(1915~1989)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조용기보다 나이가 21살 많았던 최자실은 조용기와 신학교 입학 동기였다. 이북 출신으로, 성결교 부흥사 이성봉의 집회에서 신앙을 갖게 된 최자실은 신학교 시절 두 가지 중요한 사건으로 조용기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조용기가 오순절 운동이 강조하는 성령세례의 증거로서의 방언을 받을 수 있게 도운 것이었다. 최자실은 노방전도와 공부에 열심을 보인 조용기에게 삼각산 산 기도를 권해, 조용기가 방언을 하는 '표준' 오순절 신자가 되도록 도왔다. 간호사 출신이던 최자실이 급성폐렴으로 신음하던 조용기의 치료와 회복을 도와준 사건은 조용기가 그를 '믿음의 어머니'로 삼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실제로 조용기는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4년 뒤인 1962년 최자실의 둘째 딸 김성혜를 아내로 맞이해, 최자실을 '믿음의 어머니'에 더하여 '법률상의 어머니'로 모시게 된다.7)

조용기 목사의 장모인 고 최자실 목사(1915~1989). 사진 출처 나무위키
조용기 목사의 장모인 고 최자실 목사(1915~1989). 사진 출처 나무위키

신학교 시절 선교사 교수들 및 해외에서 온 부흥사의 통역을 도맡고, 학생회장에 성적까지 우수했던 조용기가 선교사들 도움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함께 졸업한 최자실은 은평구(당시는 서대문구) 대조동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다가 이를 교회로 확장했다. 이것이 1958년 5월 18일 세워진 대조동 천막 교회였다. 이 교회 개척 예배 설교자로 초청받은 조용기는 얼마 후 유학을 포기하고 최자실과 함께 전임 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여기서부터 조용기 목회의 '신화'가 시작됐다. 천막 교회가 세워진 대조동 달동네 무당촌은 해방 및 전쟁 직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던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반영하는 전형적인 빈민촌이었다. 여기서 조용기는 방언과 함께 오순절(순복음) 운동이 성령세례의 또 다른 증거라고 주장하는 '축사'와 '신유' 의식을 자주 시행했다. 마을 전체가 집단 개종하고, 병원에 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가난한 병자들과 소외된 외지인들이 몰려들면서, 3년 만에 교인수가 300명 이상으로 늘었다.8)

1961년 1월 입대 후 병에 걸려 7개월 만에 의병제대한 조용기는 10월부터 최자실, 존 허스턴 (John Horston)선교사와 함께 서대문에 두 번째 교회를 개척했다. 당시 허스턴 선교사는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부흥회관을 서대문에 건축 중이었는데, 자신에 이어 이 예배당을 맡을 목회자로 조용기를 지목했다. 1962년 2월 18일 봉헌된 이 부흥회관(5월 13일부터 서대문중앙교회)도 3년 후 재적 교인 3000명이 됐고, 다시 3년 후인 1968년에는 8000명을 돌파했다.9)

서대문으로 이동한 지 2년 후인 1964년은 조용기가 국제 유명 인사로 부상하게 된 상징적인 전기를 마련한 해였다. 1962년 4월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964년 2월부터 존 허스턴 선교사를 대신해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이때부터 그는 미국 하나님의성회 관계자들로부터 한국 하나님의성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인식된 것 같다. 미국 교단의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한국 대표로 초대받은 것이다. 그의 첫 번째 해외 부흥사 경험이었다. 1966년 4월 30세 나이로 위임목사가 된 그는 5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으로 선출된 후, 10년 동안 총회장직을 연임했다. 7월 동아시아 13개국 330여 지도자들이 모인 하나님의성회 동북아시아 대회를 서대문교회에서 주최하면서, 처음으로 한국 순복음교회가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변화된 위상을 실감했다.10) 1969년 명명되고 1970년부터 시행된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이 조용기가 박정희에게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해 보자'는 긍정의 메시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마음의 운동'을 제안해 시작됐다는 주장도 있다.11)

늘어나는 인원을 서대문 교회당이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69년부터 당시 '여의도 백사장'으로 불리던 황량한 땅에 1만 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교회당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1973년 8월 건물이 완공된 후 서대문 교인 8000명이 이동하면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시대가 시작됐다. 여의도 교회당을 짓고 있던 기간에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도 지어졌다. 조용기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1973년 9월에는 제10차 세계 오순절 대회를 주최했는데, 아시아 국가가 주최한 첫 오순절 세계 대회였다. 여의도 이전 후 교회는 더 급속하게 성장했다. 교인 수는 1979년 10월 10만 명, 1981년 20만 명을 넘어섰다. 이 시기부터 조용기는 전 세계 무대를 호령하는 세계적인 오순절 운동 대표 부흥사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는 독일 카를스루에·함부르크, 일본, 미국, 러시아를 포함해 1975년부터 2005년까지 30년간 72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전경.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여의도순복음교회 전경.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신학·신앙 성향은 서로 많이 다르지만, 그는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2018)을 자신의 모델로 삼을 만큼 존경했다. 1973년 서울에서 열린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에서 그레이엄의 통역자로 최초 지목됐을 때, 조용기는 특히 기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조용기의 신학에 의혹을 가진 이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통역자는 수원중앙침례교회 김장환으로 교체됐다. 조용기는 그레이엄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983년 빌리그레이엄전도협회(BGEA)가 주최한 암스테르담 전도 대회에 초청받은 조용기를, 오순절 신앙을 좋아하지 않았던 한 협회 직원이 비난하자, 그레이엄이 개인적으로 사과한 일도 있었다. 1984년 개신교 한국 선교 100주년 대회에서도 그레이엄과 조용기가 나란히 강사로 섰다. 그레이엄과의 교제를 통해 조용기뿐만 아니라 한국 오순절 운동이 세계 복음주의권 전반에서 인정받는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12)

이미 언급했듯, 1993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재적 교인 70만 명으로,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의 교회로 등재됐다. 조용기는 1992년 세계 하나님의성회 교단의 수장이 됐고, 2008년 은퇴해 이영훈을 후임으로 세우고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 됐다.13)

조용기가 교회를 기하급수적으로 성장시킨 요인에는 방언·신유·축사·예언 등 성령세례의 표적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오순절 신앙 외에도 '교회론적 요소'와 '사회학적 요소'를 추가할 수 있다. 교회론적 요소로는 '평신도 구역 조직(Cell Groups)'의 활성화가 중요했다. 오늘날 한국 대부분 교회가 차용한 '구역(혹은 셀, 동아리, 조, 목장 등)'의 원조는 조용기의 순복음교회였다. 교회사적으로 17세기 루터파 경건주의 '교회 안의 교회'나 18세기 영국 감리교 '밴드'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이 조직은, 오순절 운동 특유의 유연한 평신도신학이 목회에 적용된 결과였다. 조용기는 1976년 국제교회성장연구원(Church Growth International)을 창설해 세계 교회와 교회 성장 비결을 공유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가 밝힌 교회 성장 비밀에는 △희망의 설교 △성령과의 교제 △하늘 문을 여는 열쇠로서의 기도 △하나님의 음성 듣기 △믿음의 활용 △살아 있는 세포 구역 조직 등이 있다. 앞의 다섯은 오순절 성령론에서 파생된 세계 오순절 교회 공통의 실천적 요소다. 마지막 요소는 조용기가 발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자기 교회에서 실험적으로 적용한 후 한국의 타 교단·교회와 세계 교회에 보급한 가장 대표적인 브랜드라 할 만하다.14)

사회학적 요소는 순복음교회가 설립되고 고속 성장한 1950년대 말~1990년대가, 한국 사회의 개발독재 산업화 및 급속한 경제성장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분단과 산업화 과정에서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났고, 전통적인 시골 공동체를 떠나 도시에 정착한 빈민들에게는 대화와 우정, 사랑을 나눌 새로운 소속 공동체가 필요했다. 도시에 세워진 종교 시설들은 종파에 상관없이 공간을 상실한 이들이 머물 새로운 터전이 돼 줬다.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성공·풍요·번영·형통이라는 물질적 복을 약속·정당화하는 종교에 더 급속히 몰려들었다. 도시의 한국 개신교회 전반이 이런 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공간이 됐지만, 그중에서도 조용기의 순복음교회가 가장 적응력이 뛰어난 교회였다고 평가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15)

3박자 축복

△3박자 축복 △5중 복음 △적극적 사고방식 △희망의 설교 △4차원 영성 등은 조용기의 모든 책·설교·강연에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레퍼토리이자, 실제로 그의 신앙·신학·목회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신유·방언·축사·예언 등이 오순절 성령세례론의 열매이자 결과이듯, 위에 언급한 요소들은 오순절 신앙·실천·세계관의 핵심 요소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출신이지만 엄밀하고 포괄적인 학문 배경을 가진 해외 대학에서 신약을 전공한 김동수는 조용기의 신학 전반을 △축복론 △방언론 △기도론 △교회론 △4차원 영성론 △해한解恨신학이라는 틀로 분석한다. 조용기의 신학과 실천은 그가 한국 교계에 등장한 초기부터 한국 전통 불교·유교·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비판받았다. 서양 학자들도 이런 비판을 대체로 추가 분석 없이 수용했다. 그러나 김동수는 최근 연구들이 조용기의 신학이 한국이라는 특별한 상황과 토양에서 '상황화', '토착화', 혹은 '한국화'된 측면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20세기 시작과 함께 등장한 서양과 비서양의 오순절신학을 계승했음을 보여 줬다고 주장한다.16)

3박자 축복은 요한3서 1장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구절에서 비롯했다. 조용기 이전에도, 또 한국 바깥 오순절 번영신학 설교자들도 이 구절을 '영혼 구원', '범사 형통(물질 축복)', '육체 강건'의 삼중 구원·축복을 강조하는 구절로 생각했다. 예컨대, 한국에서 오순절 운동에 속한 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주로 '순복음교회'로 알려진 이유는 조용기를 신학교로 이끈 루이스 리처즈 선교사 때문이었다. 이는 서양의 오순절 교회들이 영혼 구원만 강조하는 대다수 개신교회와는 달리, 물질 구원과 육체 구원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을 전인적이고(whole) 충만하고(full) 순전하게(pure) 회복시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순복음(Full Gospel)'이라는 단어가 이 교단의 대표적인 이름이 됐다.17) 조용기는 대조동과 서대문에서 목회하면서부터 평생 밝고 희망적인 '3박자 축복' 메시지가 자기 설교의 중심이 됐다고 말한다.18)

조용기 목사의 주요 저서들. 사진 제공 박두진
조용기 목사의 주요 저서들. 사진 제공 박두진

오늘날 세계 오순절 운동의 역사와 현상을 종교학·선교학 관점으로 가장 탁월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인정받는 앨런 앤더슨(Allen Anderson)도 최근 저술에 '조용기의 5중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섹션 하나를 통째로 할애했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요소들이 모두 하나로 연결된 그물망과도 같다고 분석한다. 김동수가 평가했듯, 조용기 안에 있는 이 모든 요소는 전통적인 오순절 운동의 강조점을 대체로 공유하지만, 한국 상황에서 독특하게 현지화한 면도 분명히 있다. 조용기는 전 세계 오순절주의자가 강조하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똑같이 강조한다. 역동성·자발성·열정·영성은 모든 오순절주의자의 특징이고, 질병·가난·실업·고독·악령·주술을 조용기와 한국 순복음교회 신자들이 다루는 태도 역시 타국 오순절 신자들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한국적이고도 창조적인 혁신이자 선택적인 변혁으로는 '산 기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한국인의 오랜 전통적 영성의 반영일 수 있다. 그러나 앤더슨은 이를 기독교의 샤머니즘화로 볼 것이 아니라, 한국 샤머니즘과 상호작용하는 오순절 운동 특유의 능력으로 파악한다. 오순절 신자들만큼 강하게 샤머니즘 및 샤먼(무당)을 대적·거부하는 기독교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조용기도 마찬가지였다.19)

한편 앤더슨은 빈곤과 억압에 반응해 형통과 번영을 강조하는 신학이나, 중생과 구별된 성령세례, 방언, 신유, 축사 등의 가르침 모두가 고전적 오순절주의와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예수를 4중 복음의 주창자, 즉 구원자, 치유자, 성령세례자, 다시 오실 왕으로 이해하는 교단인 복음교회(Four Square Church)의 이해에 조용기가 3박자 축복을 가미해 확장한 신학이 5중 복음(구원 혹은 갱신, 성령 충만, 신유, 다른 이들과 나눠 쓰기에 충분한 풍성한 축복, 그리스도의 재림)이다.20)

적극적 사고방식과 희망의 설교도 조용기가 만든 것은 아니다. 이는 미국 수정교회 목사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1926~2015)에게 배운 것이다. 4차원 영성론의 핵심 요소인 △믿음 △기도 △꿈 △말 역시 '기록된 말씀(성경)'이 '선포된 말씀'이 되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런 수단을 통해 죽은 글자가 살아나 기적이 된다는 것이다. 오순절 신자들은 이 요소들이 사도행전에서 기원했으며,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역사하는 원리라고 믿는다. 기도와 생각과 상상을 동원한다는 아이디어는 로버트 슐러와 함께 '적극적(긍정적) 사고방식' 개념의 전파자라고 할 수 있는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1898~1993)에게서도 차용했다.21)

영욕榮辱

미국·싱가포르·남미·아프리카 등지의 유명한 오순절 부흥사와 목회자들이 그랬듯, 조용기의 삶에도 영광과 치욕, 즉 '영욕'이 함께했다. 세계 최대 교회의 담임목사이자, 제3세계 출신 기독교 부흥사의 대표 주자로서 전 세계 교회에 초청받아 많은 이의 생각과 삶을 뒤흔들어 놓았던 그도, 은퇴 후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물론 한국교회 전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던 전성기에도 그는 여러 이단 시비에 휩싸였는데, 이는 한국 개신교회 주류가 기록된 계시의 종결성과 은사 중지론의 입장에 확고하게 서 있는 장로교회였기 때문이다. 1983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에서 '사이비 사건들(조상숭배 문제, 부활 처녀 소동, 치병 안수 사건, 목사 안수 남발 등)' 및 '축복과 구원(3박자 구원)' 문제로 사이비로 규정된 일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1996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회원 교단으로 가입한 일에서 알 수 있듯, 1990년대 중반부터 순복음교회는 한국교회 주류로 편입됐다.22)

조용기 목사의 노년은 각종 범죄 의혹으로 얼룩졌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조용기 목사의 노년은 각종 범죄 의혹으로 얼룩졌다. 뉴스앤조이 자료 사진

개발독재 시절, 인권을 억압하는 정권에 예언자적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민족의 중흥'과 보조를 맞춘 '민족의 복음화'를 외치고, '기독교인의 총화 안보와 반공 궐기'를 이끌고, '해방신학·혁명신학·흑인신학'을 '악마적 공산주의의 앞잡이'로 보았고, 유신 독재를 지지하며 반공 담론 대중화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비난도 있다.23) 물론 이 비난은 소수의 진보 교회들을 제외한 한국교회 전반에 적용된 비판이다. 그러나 조용기가 새마을운동의 시발자가 자신이라고 주장한 것과, 그의 설교에 자주 반공주의가 등장한 데서 확인할 수 있듯,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정권에 별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은퇴를 얼마 남겨 놓지 않은 2004년 어간부터 조용기와 그의 가족이 여의도순복음교회, 한세대학교, 미국 베데스다대학교, <국민일보>를 포함한 여러 기관의 공금을 사적으로 유용하고, 이들 조직을 사유화하고, 가족·친지들을 낙하산 고용하는 등 비리의 온상이 됐다는 제보와 언론 보도가 자주 등장했다. 일부는 사실로 밝혀져 법정 판결이 내려졌고, 일부는 사실관계가 불분명하다. 한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이들에게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거인의 '영광'은 노년의 '치욕'에 가려졌다. 조용기의 아내 김성혜 한세대 총장은 올해 2월 11일 7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24) 조용기는 2020년 7월에 뇌출혈 증상을 보여 수술을 받고 현재까지 병원에 있다.25)

* 조용기는 2021년 9월 14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6세.

1) 대회 관련 정보는 다음을 보라. http://www.edinburgh2010.org/.
2) Brian Stanley, "10 Historical Myths About World Christianity" (16 September 2014). http://www.cswc.div.ed.ac.uk/2014/09/10-historical-myths-about-world-christianity/.
3) 이 책에 대한 다음 서평을 보라. 김용주, "사무엘 에스코바가 새롭게 일깨워주는 선교 모델: <벽을 넘어 열방으로>…로잔대회 이후 정립된 복음주의의 유산 계승, 발전," <뉴스앤조이>(2005.05.07.).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1741.
4) 그는 1973년에 이미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 <Time>의 주목을 받았다. "Religion: The Spirit in Asia," Time (Oct. 08, 1973). http://content.time.com/time/subscriber/article/0,33009,908022-1,00.html.
5)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용인: 킹덤북스, 2010), 25-75.
6)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해방 이후 20세기 말까지>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109f.
7)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79-98.
8)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101-122.
9)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122-132, 161.
10)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131, 153-156.
11)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156-158. 조용기 스스로도 설교, 언론에서 새마을운동이 자신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는 발언을 했고, 성인전聖人傳이나 위인전偉人傳류 전기에도 자주 언급된다. "사회 문제 해결 위해 기독교계가 나선다: 새마음국민운동중앙협의회 창립총회 개최," <교회연합신문>(2013.04.25.). http://www.ecumenicalpress.co.kr/m/page/detail.html?no=32684. "'기독교 역사상 가장 큰 교회 목사 이야기' 만화로," <크리스천투데이> (2011.09.26.).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50250.
12)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170-172, 219-223.
13)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161-233.
14) 조용기, <나의 교회 성장 이야기> (서울: 서울말씀사, 2005), 116-160.
15)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해방 이후 20세기 말까지>, 121-126.
16)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264-268.
17)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101.
18) 조용기, <나의 교회 성장 이야기>, 26-28.
19) 앨런 히튼 앤더슨, <땅끝까지: 오순절주의와 세계 기독교의 변화>, 손승진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9), 305-308.
20) 앤더슨, <땅끝까지>, 309-317.
21) 조용기, <나의 교회성장 이야기>, 22-24, 김동수, 류동희, <영산 조용기 목사의 삶과 사상>, 224-227, 343-352.
22)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편, <한국 기독교의 역사 III: 해방 이후 20세기 말까지>, 110f.
23) 박노자, "교회, 장기적 보수화의 일등 공신," <한겨레21> (2007.05.23.). http://legacy.www.hani.co.kr/section-021109000/2007/05/021109000200705230661042.html.
24) "조용기 목사 아내 김성혜 한세대학교 총장 별세," <동아일보> (2021.02.11.). https://www.donga.com/news/Culture/article/all/20210211/105386333/1.
25) "조용기 목사, 경미한 뇌출혈로 입원…'수술 후 회복 중'" <연합뉴스> (2020.07.22.). https://www.yna.co.kr/view/AKR2020072215030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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