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0월 27일 허성식 교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을 정리한 것입니다. - 편집자 주

최근 한국교회 안에서, 목회자·신학생·성도들 가운데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영향력을 키우는 운동이 하나 있다. 영성 일기 쓰기 운동이다. 유기성 목사님이 이 운동의 중심에서 이 운동을 확산하는 데 열심으로 애쓰고 계신다. 참 좋은 운동이다. 요즘처럼 사람들의 심령이 메말라지고 피폐해지는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돌봐야 한다. 잠언 말씀처럼 "사람의 생명이 마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마음이 병들면 생명 고갈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 사회에는 이런 생명 고갈 현상이 가정, 교회, 일터, 삶의 모든 영역에 팽배해 있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다. 영성 일기를 쓰면서 우리 마음을 돌아보고,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 되시며, 우리 마음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고, 그분의 임재를 기다리며, 그분의 임재로 충만한 시간을 보내는 이런 영성 일기 쓰기 운동은 적극 장려할 만한 운동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목회자들과 특히 신학도들에게 인기가 많고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최고로 인기 있는 강사이기도 하신 유 목사님이 주장하는 영성 운동에 심히 우려할 만한 점들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려 한다. 참 좋은 목사님이신 것을 알기에, 비판을 위한 비판이 절대 아님을 우선 밝힌다. 나 자신도 섬기던 교회에서 유 목사님이 저술하신 책을 제자 훈련 교재로 사용할 정도로 목사님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런 얘기를 굳이 하는 이유는, 목사님의 페이스북 칼럼에 올라오는 댓글을 볼 때 목사님을 지나칠 정도로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것처럼 보이는 페친들이 많아서 그분들이 저를 오해하지 않으시면 하는 노파심에서다. 물론 페이스북에서는 이렇게 약간 오버하는 것이 애교스럽고 친근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므로 그걸 뭐라 하는 것은 아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페이스북에서 유 목사님 칼럼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별나라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목사님은 요즘 계속해서 24시간 주님만을 바라볼 것을 주문하시고 주장하신다. 어렵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렇게 24시간 주님만을 묵상하고 바라보는 것을 과연 주님이 원하실까? 이 점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신앙인의 경험, 그리고 교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주장의 문제점들을 진술하고자 한다.

하나님은 과연 24시간 교제를 원하실까

먼저, 아주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너무나 사랑해서 항상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고, 대화하고 싶고,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항상 같이 있고 싶다고 하자. 그래서 작은 소소한 일도 전부 남김 없이 서로 나누길 원한다고 하자. 과연 이 두 사람 사이에 진정한 사랑이 형성될 수 있을까? 24시간 붙어 있고, 쳐다보고 있고, 말하고 듣고 있고, 관심을 서로 주고, 사랑한다 계속 고백하고, 밥도 둘만 붙어서 먹고.

이렇게 서로를 24시간 쳐다보고 관심 갖고자 하는 관계는 병적인 사랑의 관계이지 건강한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고 본다. 과연 이렇게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것이 참된 사랑의 모습일까? 내 경험으로는 아니라고 본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함께 있어 기쁜 시간도 있지만, 어쩌면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을까?

혼자서 생각하고 느끼고 혼자서 울고 웃을 수 있는 시간. 혼자서 밥도 먹고, 혼자서 책도 읽고, 혼자서 자기도 하고. 혼자 있는 시간, 어떻게 보면 이런 시간은 외로운 시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좀 어리석게 보여도 혼자서 중요한 결정도 좀 해 보고. 혼자서 위험한 일도 해 보게 하고. 24시간 주님만 바라보는 영성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하는 것이 어쩌면 주님의 임재가 없는, 주님의 임재를 충분히 느낄 수 없는 그런 세상적인 시간이라고 정죄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질문해 보겠다. 두 가지 질문인데 첫 번째는 "솔직히 당신은 하루 24시간 아니, 자는 시간 빼고 남은 시간 동안 하나님의 임재를 얼마나 느끼는가?", "24시간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이고, 두 번째 질문은 "이렇게 주님의 임재를 느끼는 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가?"이다.

먼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 아시겠지만 "불가능하다"이다. 이것은 유목사님의 칼럼에서도 본인 자신이 고백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목사님이 일관되게 주장하시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애써야 한다는 것인 것 같다.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니까. 그런데 과연 그럴까? 주님의 임재를 24시간 의식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고, 신앙이 성숙하는 길이고, 제자도의 정도일까? 

과연 그럴까? 이 두 번째 질문을 다룰 때 우리는 언제나 성경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이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물음이니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살펴보면 의외로 답이 쉽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은 어떨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혼자서 생각하도록, 혼자서 고민하도록, 혼자서 잘못된 결정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혼자서 끙끙 앓는 것을 알지만 참견하지 않으셨다. 주님이 이 땅에 육신으로 계실 때만 그러셨을까?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임하신 다음에는 더욱 더 우리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하지 않으셨을까?

사도행전에 나오는 재미난 장면이 하나 있다. 바울이 마가로 인해 바나바와 대판 싸우면서 바울이 성질 부리는 모습이다. 성경은 왜 이런 바울의 이런 고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일까? 주님만 24시간 바라보는 제자는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인가?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사실 바울이 이 한 번만 그렇게 성질 부렸을까? 아마 성질 부린 적이 많을 것이다. 성경에 한 번 기록된 것은 그냥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 알게 하기 위한 배려인 것 같다.

내 생각은 이렇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계실 때나 영으로 우리 가운데 계실 때에도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 좌충우돌하는 이런 모습을 귀엽게 봐주시면서 그런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주님을 24시간 바라보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니까 주님이 우리를 24시간 봐주시는. 그런데 주님은 봐도 못 본 척하시는 것 같다. 어쩌면 눈을 감고 계실지도 모른다.

그거 아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 가장 재미 있는 놀이가 무엇일까? "숨바꼭질"이다. 우리 집 여섯 살 난 꼬마 아가씨와 내가 가장 재미 있게 노는 놀이 중 하나가 뭘까? 바로 "숨바꼭질"이다. 아가서에서 사랑하는 두 연인이 하는 낯간지러운 놀이가 무엇인가? 바로 "숨바꼭질" 아니었나? 이런 것을 보면, 사랑은 24시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서로에게 무한한 자유를 허락하면서, 마치 춤추듯이 이렇게 사랑의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24시간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우리 편에서 먼저 예수님 안에 거하기 위해, 예수님을 닮기 위해,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애쓰는 어떤 행위나 몸부림이 된다면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복음 안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자유와 기쁨을 교묘하게 제한하는 또 다른 율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우려를 하게 된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책을 남기지도 않으셨고, 일기장을 쓰라고 가르치시지도 않았다. 영성일기를 쓰는 것은 좋은 것이고, 유익한 것이며, 권장할 만한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좋고, 유익하고 권장할 만한 일이라고 해도 이것이 그리스인들이 제자로 사는 것의 규범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생각한다.

이 운동을 주창하시고 주도하시는 목사님에게서 이런 영성 일기로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변화되었는지, 이런 변화된 사람들이 들려주는 넘치는 간증을 들으시면서 이 영성 일기가 마치 옥한흠표 제자 훈련를 잇는 다음 제자 훈련 코스인 양 일기 쓰기 운동을 이끄시는 모습이 엿보인다.

사실 나도 옥 목사님 교재의 한계를 보고 이 목사님의 책을 교재로 쓰기도 했으니, 제자 훈련의 부족한 점을 영성 운동이 채워 주고 있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 점에서 칭찬해 드리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을 캠페인 하듯이 확산시키는 일은 그만하셨으면 좋겠다. 신학생들 불러다 세미나 하고, 목회자들 불러다가 세미나 하고 이런 운동은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하는 것은 이미 이전에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오르고, 인기 강사 (특히 코스타 단골 강사)에 오르고, 덩달아 교회도 성장 가도에 오를 때 소위 잘나가던 목사님들이 했던 방식을 답습하는 것이다. 물론 목사님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 특히 영성 일기 쓰기를 나누고자 하는 선한 의도에서 시작하셨겠지만 이제는 이 운동을 하나의 프로그램처럼 확산하려는 시도를 중단하시면 좋겠다.

목사님 자신을 위해서 책도 그만 쓰시고, 외부 세미나도 그만 다니시고, 영성 운동하시는 분답게 정말 한 사람의 지극히 작은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수도자의 영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면 어떨까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본다.

개인 영성 훈련, 자칫하면 신앙 사유화할 수 있어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를 언급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런 영성 운동이 갖는 치명적인 약점 말이다. 이는 이 운동을 주도하시는 유 목사님이 페북에 올리시는 최근 칼럼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지금 온 나라와 백성들은 한국 사회의 불의한 정권이 범한 온갖 죄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목사님이 올린 칼럼을 보면 참 놀랍다. 역시 딴 세상에서 사는 분 같다.

몇 일 전 대통령 사과문이 발표되고 온 나라가 분노하던 날 올리신 칼럼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자", "24시간 주님만 생각하자" 같은 내용의 반복이었다. 너무 공허하고 공허한 얘기이다. 어떤 진공상태에서 쓰고 있는 얘기 같았다.

이날 댓글에 어떤 감리교 여성도님이 정말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그리고 정말 공손하게 목사님께 댓글을 올렸다. "목사님 그런데 우리 한국 사회가 지금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이런 것에 대해서도 묵상하면 어떨까요" 뭐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목사님은 댓글에 잘 답하지 않는 듯했다. 대신 목사님을 적극 옹호하는 어떤 페친 한 분이 나서서 아주 영성신학적 주장(나에게는 무슨 교리처럼 들렸다)을 가지고 이 여성도님을 나무라셨다. 이 여성도님은 참 겸손하게 또박또박 자신의 생각을 댓글로 다셨다. 그런데 상대방은 계속 약간 고압적인 자세로 반박했다. 목사님의 영성신학을 옹호하면서.

지금 이 글은 사실 <뉴스앤조이>에서 기고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몸 글을 조금 수정하는 가운데 쓰고 있는 것이다. 수정하면서 <뉴스앤조이>의 유 목사님 전화 인터뷰가 실린 기사를 보았다. 댓글 가운데는 목사님께 실망한 글들도 꽤 보인다. 그런데 칼럼을 읽으면서 한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거슬릴 정도로 반복된다. "영성 일기", "일기"라는 단어이다.

이 한 칼럼에 무려 대략 17번이나 일기란 단어가 나오고 이에 대한 강조가 반복되었다. 이 나라 백성들은 최순실과 불의한 정권이라는 "악한 정사와 권세들"과 큰 전쟁을 앞두고 있는데 말이다. 난 이 정도 되면 "영성 일기 중독"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용은 역시 "주님만 바라보자", 이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는 주장의 지루한 반복이다. 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

"눈을 들어 세상에서 신음하는 내 백성을 보라. 그곳에 가면 그곳은 너무 어둡고 슬퍼서 너는 나를 의식하지도 못할지 모른다. 그곳에서는 나를 24시간 찾으려 하지 말고 나를 24시간 묵상하려 하지 말고 어둠 속에 신음하는 세상 사람들, 나를 발견할 수 없고 느낄 수 없어서 고통 가운데 있는 그들에게 가서 그들이 당하는 아픔에 동참하라. 하루 24시간 중 나와는 한 시간만, 더 짧은 시간만 같이해도 좋다. 어차피 너와 나는 하나이고, 난 네가 날 사랑하는 것 알고 있다. 너도 내가 널 사랑하는 것 알고 있지. 세상에서 너가 나의 임재를 느끼던 느끼지 않던 그런 느낌에 마음을 두지 말아라. 내가 너와 늘 함께하겠다는 내 말이 곧 진리이다. 이 진리만 믿고 나의 임재를 너가 못 느낀다 해도 관계하지 말고 신경 쓰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는 느낌이 안 들고 너가 죽도록 외롭다고 부르짖을 때에 사실 난 네 옆에 있을 것이다. 네가 느끼든 안 느끼든 언제나 네 곁에 있단다. 그리고 영성 일기에 목숨 걸지 말아라. 너의 매일매일의 순간을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하는 일에 집중하라. 난 네 일기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적힌 생명책을 보고 너를 반갑게 맞을 것이다."

주님은 계속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다.

"난 제자들을 목자 없는 양들에게 보냈다. 내 제자들은 나의 부재를 길 잃은 양 무리를 가운데서 느껴야 했다. 어떤 경우는 너무 외롭게 홀로 죽어야 했다. 그들은 나를 24시간 가까이 하기 원했지만 나는 그들을 외롭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 사는 내 백성들이 그런 외로움과 두려움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의 임재의 순간보다 나의 부재의 순간을 그들에게 느끼게 한 것이다. 나도 나의 아버지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면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니? 내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하늘나라를 떠날 때, 나는 하나님 품을 떠나 외로운 길을 간 것이었다. 너희들도 그런 길을 가야 한다. 십자가의 길. 죽는 순간 너희들은 나의 부재를 느끼며 고통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데반 기억하지? 나는 그가 죽는 순간 그의 눈을 열어 내가 그를 보고 있다는 것을 그도 보게 해 주었지. 너희가 보지 못할 뿐이지 나는 너희들을 보고 있고, 너희와 함께 하고 있었단다. 그러니 너희 편에서 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난 늘 너희 곁에 있다. 그게 중요하지."

레슬리 뉴비긴 말을 빌려 설명하면, 24시간 주님만을 바라보는 영성신학과 영성 훈련에 의존하면 신앙이 게토화되고 사유화될 위험이 있다. 하나님나라 복음의 공적인 성격이 갖는 위력을 무력화하면서, 신앙을 지극히 개인적 신앙으로 사유화(privatization)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개인의 영성 훈련이 사회적 영성으로 확대되지 못하면, 신앙의 사유화로 많은 신앙의 병리 현상을 겪을 수 있다.

물론, 한편으로 이런 영성 훈련은 한국교회에 만연한 기복신앙을 극복하고, 옥한흠식 제자 훈련에 식상해 있는 한국교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선한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유익에도 이런 영성 훈련은 한국교회 전체를 보았을 때, 신앙의 본질, 곧 세상에 보냄받은 자, 보냄받은 그리스도인(missional Christians, missional Churches)의 선교적 소명, 교회의 선교적 본질(missional nature)을 흐리게 할 수 있는 위험 요소가 많다. 이런 영성 신앙은 아주 세련된 기복신앙의 수준에 머물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은 이론에 매이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시킬 수 있는 이런 영성 운동은 하나님나라 복음이 가진 공적인 성격과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하는 공적인 신앙으로부터 우리를 더 멀리 떨어지게 만들 수 있는 위험 요소가 있다. 한국교회는 천국과 세상, 교회와 세상, 교회와 가정, 교회와 일터 등에서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너무 많이 오래 해 왔다.

24시간 주님 바라보기 영성 운동이 이런 이원론적 신앙 양태를 더 고착화하는 운동으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영성 운동, 역사에 기억되는 영성 운동처럼 좀 더 덜 세속적이고, 덜 마케팅적이며, 덜 개인적이고, 덜 간증적이고, 덜 이원론적인 운동으로, 무엇보다 프로그램화되지 않고, 광적인 추종자를 가지지 않는 겨자씨 같은 운동이 되길 바란다.

성령의 역사는 "예기치 않게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교회 가운데, 역사 가운데 일어난다. 하나님의 신비를 사람의 경험으로 다 이해하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교만이며, 우리 한계를 넘어서는 위험한 일이다. 성령은 이론에 매이지 않으시며, 신학은 복음을 이해하는 데 유익하나, 신학으로 복음을 가두려 하면 복음이 그 신학을 무력화시킬 것이다. 영성신학도 그렇게 될 수 있다.

허성식 / 프린스턴신학교 Ph.D.(선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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