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 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 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막 10:13~16)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마음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사실 어린아이라면 보통 천진무구한 순수함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천진무구란 눈과 같이 희고 한 점의 때도 없는 순진함을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일 것으로 보입니다. 어른이 되면서 험악한 세상살이 하다 보니 세상의 때가 많이 묻게 되고 속을 일도 많다 보니 쉽게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 어른들에겐 본문이 순수하고 단순하게 그저 가르쳐 주는 대로 믿는 어린아이로 돌아가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교훈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 초등학생들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나라의 치열한 교육 현실 속에서 아이들의 삶이 어른만큼이나 경쟁적이고 사회의 개인주의로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게 이기적이 되어 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사회가 척박해도 대체로 아이는 아이입니다.

가끔 어린아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지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세상에 찌들지 않아 티 없이 맑고 고운 아이들의 미소와 눈빛을 바라보면 내 맘도 맑아지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예수의 사람이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더욱이 한 발짝도 부모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보면 나도 저렇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겠구나 하는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어린아이는 이런 순수함, 가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일까요? 학자들 사이에서 60년대까지는 이 어린아이에 관한 내용을 "아이의 수용력"에 대한 이야기로 보았습니다(예를 들어 Vincent Taylor,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London: Macmillan & Co. 1955, 412-422). 어린이의 특성이 모든 것을 순수히 선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믿음이란 분명히 선물을 받기 위해 벌린 어린아이의 빈손과 같습니다. 본문처럼 예수님의 팔에 안겨서 어떠한 계산 없이 축복을 순수하게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믿음인 것은 틀림없지요. 그래서 어린아이가 의미하는 비교의 중점이 어린아이의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순수한 "수용적인 자세", 그리고 타인들의 보살핌과 도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절대 의존 상태"로 보았습니다(D. E. Nineham, Saint Mark, Baltimore: Penguin, 1963, 268).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성품인 것이 틀림없음에도, 본문이 진정 말하려는 바는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의 의도는 어린아이의 "무력하고 천한 사회적 위치"로 보입니다.

당시의 어린아이는 어떤 사회적 의미가 있었을까요? 어린아이는 당시 여성의 천함, 가난한 자 부정한 자와 같은 무력함과 소외됨과 같은 계층의 사람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오늘날 선진국의 어린아이 말고 제3세계의 아이들의 상황을 보십시오. 부유한 집 아이들이 아니고는 비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경우들이 허다하고 어떤 아이들은 일부 어른들의 범죄에 가까운 행동, 혹은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합니다.

특히 역사 속에서 빈곤과 기아로 시달리는 시절일 때 어린아이들은 자주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어른들의 범죄에 이용당하거나 영양실조로 아사하기 일쑤였습니다. 서양에서도 "올리버 트위스트"나 "성냥팔이 소녀" 같은 이야기가 그런 상황을 반영하지요. 어린아이는 당시 가정에서 사회에서 가장 작은 자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른에게 종속되었기에 쉽게 군림당하고 착취당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아이가 대접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님은 당시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 분개하셨습니다. 그분이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십시오!"라고 호소하고 다니신 것만 보아도 우리나라 사람들도 얼마나 어린아이들을 하대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많은 노력으로 말미암아 당시 어린이를 부르던 보편적이었던 '아 새끼'란 표현이 점차 사라지고 어린이란 표현이 사회에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지요.

당시의 어린아이는 부유층이나 귀족 같은 특권계층이 아닌 다음에는 현대사회와 같은 위치와 권리를 누리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부모는 신생아를 버려 노출에 죽게 내버릴 법적 권리가 있었습니다. 때론 낯선 사람이 신생아를 데려갔는데, 대부분 그런 아이들은 노예가 되었답니다. 이방 문화에서 어린아이들에 대한 성적 학대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당시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체벌은 심했다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폭력적이었던 스파르타 문화에서는 사내아이들을 강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사내아이들이 7세가 넘으면 모두 막사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 하면서 때론 이유 없이 정기적인 채찍질과 폭력을 가했습니다. 의도적으로 음식을 부족하게 제공해 훔치는 기술을 터득하게 했고 아이들의 모든 잘못에 대하여는 심한 채찍질로 다스리기도 했습니다. 스파르타처럼은 아니더라도 로마의 학교교육도 꽤 엄격했는데 주로 그리스출신 노예들로 이루어진 선생들은 학생들을 심한 체벌로 다스렸습니다.

유대의 어린아이도, 당시 주변 문화처럼 대체로 천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방어 능력도 없고 생산능력이 없던 어린이들은 어른들에게 복종해야 할 뿐 그 어떤 높임의 대상도 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1960년대 이후 학자들은 마가복음 10:15절을 어린아이의 "낮은 위치"를 말하는 마가복음 9:23~27절을 통해 읽어나감으로 아이의 성품이 아니라 당시 어린아이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5~37)

마가복음 10:13~16절의 본문이 위치한 큰 문맥인 8:22~10:52절에서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하여지고 낮아져야 함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이는 제자들이 따라야 할 예수님의 삶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십자가를 언급하며, 그리고 그 이후에야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막 9:31)

사회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높아지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제자들은 그러나 비천하게 낮아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십자가에 사형당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공포를 느끼기만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막 9:32)

예수님께서 자신이 곧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는 심각한 상황에서도 제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에만 관심을 보이며 한심한 논쟁을 벌입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막 9:33~34)

9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답답해하시며 진정 높아지기 위해 세상의 가치관과 정반대로 가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당시 낮고 보잘것없는 약자였던 어린아이를 예로 드신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낮은 자가 되어야 높은 자가 될 수 있다, 또한 이처럼 천한 자를 영접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가장 낮은 자를 영접하는 것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라는 역설적 진리입니다(막 9:35~37). 예수님은 어린이의 예를 통해 천한 자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무력하고 천한 자의 자리까지 낮아짐이 진정 높아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어린아이가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신분과 소외된 자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특히 37절 말씀은 마태복음 25:40절을 연상시키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어린아이란 표현 대신 직접 "작은 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가복음 10장 13~16절에서 사용된 어린아이의 의미라 생각됩니다.

마가복음 10장 13~16절은 세 단락의 순서로 전개됩니다.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사람들이 데리고 예수께로 나옵니다. 예수님이 아마 그들을 만져주시며 축복해 주시길 원하기 때문입니다(16). 제자들은 그러나 그들을 꾸짖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그러하듯 그들도 어린아이를 하찮고 귀찮은 존재로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와 같이 낮은 자리에 서라고 바로 전에 하신 말씀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막 9:30~37).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적 신분상승의 욕망을 채우는 곳으로 엉뚱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꾸짖음을 당할 때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막 8:33).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 모두 여전히 영적으로 장님인 상태입니다(비교 막 8:17~2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화를 내시면서 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사회적으로 낮은 자와 소외된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도 그런 모습이 되어야겠지요.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막 10:14~16).

본문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아니하면"은 낮아짐에 대한 요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무력하여 공격당하기 쉽고 천한 자세로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나가는 말

마가복음 10장 14~16절에서 어린아이의 의미는 결코 이상적인 순수함이 아닙니다. 고대사회에서 어린아이는 그리 존중받지 못했는데 본문은 당시 어린아이의 낮은 사회적 위치를 예로 든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의 의미는 전체 문맥인 8:22~10:52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올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낮아짐의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신분상승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무력하고 공격당하기 쉬운 천한 자의 위치로 낮아지는 자세가 오히려 높아지는 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낮고 천한 자의 겸손과 섬김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천한 자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15~16절은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제자들은 무력하고 사회에서 소외된 자의 자세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는 의도를 지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진정 자신을 천하게 낮추는 겸손한 자에게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의 어린아이들을 만져주시기를 원했고, 제자들을 그들을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꾸짖으시며(13, 14) 어린아이를 안아 주시고 안수하시고 축복까지 해 주시십니다(16). 이는 세상에서 천하고 낮은 자인 어린아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고귀하고 축복의 대상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행동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낮고 천한 자로 자신을 낮추고 그런 위치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떠받드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높이는 사람에겐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를 떠받드는 우리 사회에서 이 표현은 이제 새로운 문화 번역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들어갈 자격으로 어린아이는 무력하고 천한 자의 의미입니다.

이민규 /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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