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39~40절

믿음은 완성되어 가는 것

히브리서 11장은 노아·에녹·아브라함·야곱·모세·라합 같은 믿음의 조상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나 훌륭해서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발자취를 따르기에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끝부분 39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좋은 증언을 받았지만,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다.”(히 11:39)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그 약속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말이 좀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고 한참 후대에 내려가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 그는 그 땅을 바라보기만 할 뿐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앞의 13절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그것을 멀리 바라보고 즐거워하였으며, 땅 위에서는 손과 나그네로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히 11:13)

이것은 크리스천의 실존을 한마디로 잘 정의해 주고 있다. 그들은 자기 대에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가 약속 받은 것이 다음 대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즐거워하는 길손이요, 나그네라는 것이다. 그들의 기쁨은 도상의 기쁨이지 정상에 기를 꽂은 자의 환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39절에 이어서 40절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계획을 미리 세워 두셨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히 11:40)

상반절에서 히브리서 기자의 역사관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위한 것보다 더 좋은 계획을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셨다는 것이다. 그 위대한 분들이 시작한 일이 오늘날 우리의 일과 연관이 되고 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사람인 오늘의 나에 대하여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의식이다.

하반절에 나오는 ‘우리가 없이는’(choris hemon)이라는 구절은 이런 의식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훌륭한 분들이 하신 일들도 ‘우리가 없이는’, ‘우리가 아니면’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초대 교회가 그 적은 무리가 이루려고 하는 일들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이 해온 것을 이어서 하는 것이요, 오늘에 완성해 가는 위대한 일이라는 의식이다.

이것이 초대 교회가 가진 믿음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니면 믿음의 조상들이 약속 받은 것도 완성에 이를 수 없다는, 매우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갖고 있었다. 자신들이 구원사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위대하고 큰 하나님의 집을 완성해 가는 센터라는 의식으로 가득했다.

대개 초대 교회들은 30명 안팎의 작은 공동체였으며, 사회적으로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중심부에 있지 못했고 주변부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의식만은 주변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작기 때문에, 나는 못 배웠기 때문에, 그저 훌륭한 분을 따라 하기나 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주변부 공동체이지만 ‘우리가 아니면’, ‘내가 아니면’ 믿음의 조상들이 꾸어온 꿈이 완성될 수 없다는 충만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계승해야 할 역사의식이요, 사명감이다. 

대형 교회가 생긴 이유

오늘날도 전체 교회의 1%도 안 되는 극소수의 대형 교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100명 미만의 작은 교회들이다. 그 작은 교회들은 농촌 지역 사회는 물론이고 도시의 주변부에 자리 잡고 자기 몫을 다하고 있다. 우리 교회도 그런 작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다. 문제는 교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 작은 교회들이 이 초대 교회와 같은 역사의식과 충만한 사명감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자꾸만 대형 교회와 비교하여 건물의 크기나 화려함, 수천 명에 이르는 교인 수에 압도되어, 작은 교회들은 자신들이 뭔가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며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다.

대형 교회가 생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산업화되면서, 도시 주변에 와서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와 직장에서 많은 상처를 받게 되었다. 그들은 거의 다 경제적으로 잘 살고 싶은 꿈을 갖고 있다. 대형 교회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대형 교회는 일단 사람 수가 많다. 각자 군중 속에 파묻혀 교회가 제공하는 오케스트라 같은 음악과 감성적인데다가 오락성까지 가미한 요란한 기도와 설교 속에서 사회에서 입은 상처가 치유 받고 위로 받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주입하는 설교는 그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 무엇을 주도하거나 책임을 지는 데 부담을 느끼는데, 대형 교회는 그런 부담을 주지 않는다.

산업화 과정에서 서울의 몇 곳과 신도시 등이 잘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부각되었는데, 대형 교회는 거의 예외 없이 그런 곳에 자리 잡았다. 이는 대형 교회의 물적 토대가 이른바 강남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안정을 추구하는 세력들이다. 그래서 대형 교회들은 거의가 보수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안정을 추구하며, 심하다 싶을 정도로 미국을 찬양하거나, 미국을 예수 믿어 축복받은 대표적인 국가로 내세운다.

대형 교회에 사람들이 집중하는 현상은 일시적 사회 현상일 수도 있고 기형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최선의 목회 모델이나 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더욱이 대형 교회의 규모나 교인 수에 비하여 작은 교회를 평가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기드온이 300명의 용사 뽑은 것을 보라. 처음 선발된 3만 2000명은 너무 많았다. 첫 번째 심사에서 2만 2000명이 떨어지고 1만 명만 남았지만 하나님은 그것도 너무 많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거기서 뽑은 정예 300명으로 전쟁을 승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그들과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초대 교회 때부터 존재해 온 가장 건강한 교회 모델은 큰 교회가 아니라 작은 교회이다. 초대 교회들은 30~50명 규모의 작은 가정 교회들이었다.

바울이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성경에 능하고 학식 있는 아볼로가 열심히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때 교인수가 모두 12사람에 불과했다. 성경은 교회를 말할 때 어디서도 교인 수의 적고 많음이나, 큰 교회나 작은 교회라는 개념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

작은 교회는 가족 같은 교회이다. 본래 초대 교회는 가족 교회였다. 바울 사도는 교회를 부를 때 “○○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라고 하였다. 그런 가정이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확대된 가족이 바로 교회이다. 우리 교회도 가족들이 나오는 교우들이 많고, 또 전체가 교회 가족이 되었다. 대형 교회에서는 이런 친밀한 가족 관계가 가능하지 않다.

대형 교회 예배에서는 목사와 성가대는 연주자이고 회중은 관객이 된다. 그러나 작은 교회 예배에서는 목사와 성가대는 이끄는 이이고 회중은 함께 합창을 하는 공연자이며, 하나님이 청중이 되신다.

대형 교회는 인재가 워낙 많아서 전문가가 아니고는 참여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성가대원이 되려면 적어도 음대 교수이거나 성악을 전공하는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늘 관객으로 남지 주체로 참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작은 교회는 사람 수가 적기 때문에 개개인이 은사를 활용할 수 있고 언제나 교회 일에 참여할 수 있다. 지도자로서 훈련을 받는 데서도 큰 교회보다는 작은 교회가 더 좋다.

작은 교회의 또 다른 장점은 유연성이다. 작은 교회는 어떤 상황에 대해 대형 교회보다 빨리 반응할 수 있다. 골리앗이 힘이 약해서 다윗에게 진 것이 아니다. 골리앗은 너무 커서 몸이 둔했다. 작은 몸집의 다윗이 사울이 준 갑옷과 투구를 걸쳤다면 그는 실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가벼운 복장으로 나아갔기에 날렵하게 움직여서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다.

행복한 교회

대형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 없듯이, 작은 교회라고 해서 무조건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교회가 오늘의 역사 속에서 어떤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교회에 속한 사람 하나, 하나가 진정으로 건강하고 행복한가가 가장 중요하다.

어떤 목사가 시골 교회를 섬겼는데 교회 문은 열어놓았으나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전망도 매우 어두웠다.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는 자기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그는 가장 내밀한 슬픔과 패배감에 대해서 적었고, 지난주 예배에 겨우 다섯 명만 참석했다는 것도 적었다. 즉시 아버지로부터 답장이 왔다. 거기에는 그 목사의 가슴을 찌르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

“예배에 몇 명이 참석했는지가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질문하거라.”

오늘날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숫자에 민감하다. “오늘은 30명밖에 안 왔어”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그렇게 수를 세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온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헤아리는 것이다. 몇 명이 예배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했느냐가 중요하다.

오늘날 구성원들 모두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것은 신자 개개인이 익명의 관객이 되고, 개개인이 빈자리를 메우는 숫자가 되는 교회는 아닐 것이다. 나 한 사람이야 가도 모르고 안 가도 그만인 교회, 각자가 알아서 낼 것 내고 받을 것 받는 슈퍼마켓 형 교회도 아닐 것이다.

내가 안 가면 성가대 베이스 파트가 안 된다고 걱정하면서 무리를 해서라도 꼭 나와야 하는 교회, 자리 한 곳이 비면 수를 카운트 하는 것이 아니라 빈자리 주인공의 이름을 부르면서 염려해 주는 교회, 목사와 언제라도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교회, 나 한 사람이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이 아니라, 꼭 내가 나가야만 되는 그런 교회가 행복한 교회일 것이다. ‘내가 아니면’ 성가대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주일 학교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청년회도 안 되고, ‘내가 아니면’ 재정도 부족할 것이라는, 그런 사명감으로 가득 찬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일 것이다.

비록 적은 수가 모인 공동체이지만,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의 꿈과 그들이 받은 약속에 잇대어 살고 있으며, 그들과 서로 의존하고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아니면’(choris hemon) 믿음의 조상들이 꿈꾸어온 것도 완성되지 않고, 우리가 아니면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성취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사명감과 역사의식으로 충만한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이다.

우리가 이룩한 것이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우리 역시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길손이요, 나그네임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교회, 그리하여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에게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다”고 말해주고, “너희가 아니면 우리 꿈이 완성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교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교회일 것이다.

김재성 / 낙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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