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아픈 자들 곁에 서자 연대하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현선 대표(공간엘리사벳)는 처음에 하나로만 보였던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이야기가, 미수습자 가족들 곁에 섰을 때 304가지 이야기로 선명해졌다고 고백했다. 어설픈 충고, 서투른 위로, 과장된 배려 없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 그대로 곁에 함께 있는 것이 슬픔에 잠긴 사람들과 동행하고 연대하는 길임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혐오는 무지와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이다"고 말하는 오현선 대표는, 난민·이슬람·동성애 등을 향한 한국교회 혐오 현상도 당사자들 곁에 서서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풀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대화를 나누면 그들이 처한 아픈 삶터를 알게 될 것이고, 지금처럼 혐오를 '사랑'으로 포장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일부 남성만 남기고 모든 존재를 서열화해 온 철저한 가부장 문화가 오늘날 한국교회를 만들었다며, 강고한 교권주의가 해체돼야 진정한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목회자·신학자로서 활동해 온 오현선 대표는, 미국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은 후 귀국해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다문화교회 담임목사로 이주민 사역을 도왔다. 이후 호남신학대학교 교수로 10년여간 일하다가 '교권 침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사임했다. 지금은 공간엘리사벳 대표이자 여울교회 담임목사로 일하고 있다.

전 호남신학대학교 교수 오현선 대표(공간엘리사벳)에게 여성·노동자·이주민·세월호·성소수자 등 여러 이슈에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면서 들었던 생각에 대해 들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전 호남신학대학교 교수 오현선 대표(공간엘리사벳)를 인터뷰했다. 그에게서 여성·노동자·이주민·세월호·성소수자 등 여러 이슈에 목소리를 내고 연대하면서 들었던 생각에 대해 들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오현선 대표를 7월 20일 신촌 한 카페에서 인터뷰한 내용을 두 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이전 글에서는 가난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다문화교회 목사가 되기까지 여정을 다뤘다. 이번 글에는 다문화교회 목사로 사역하면서 느낀 점, 호남신대 교수로 일하면서 성찰한 지역성(Locality)에 대한 이야기, 세월호 가족과의 동행 등을 담는다.

- 한국에 돌아와 이주민 사역을 하는 다문화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어떤 사역을 해 왔나.

안산 다문화교회에 부임한 2004년은 아직 다문화 담론이 사회적으로 익숙하지 않을 때였다. 산업 연수생 제도를 고용 허가제로 바꿔야 하는 등 공동 과제가 있었고, 이주 노동자 인권에 관한 다양한 문제를 현장에서 대응하며 풀어 가는 노력을 목회자, 선주민 교우들이 함께 맡아서 했다. 미등록 부모와 그 자녀의 정주권·영주권 문제가 교우의 일이기도 했기에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함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당시 안산에서는 지자체장·학교장 허락을 받으면 이주민 자녀도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마을 병원과 협력해 자체 의료보험 카드도 발행했던 기억이 난다. 주일마다 100명 넘는 이주 노동자가 와서 상담을 받았다. 상담 후 교우로 남는 이도 있었다.

이주 여성이 겪는 성폭력 문제를 두고 피해자 시각에서 같이 싸웠다. 노동환경이 열악해 발병한 여성 이주 노동자 케이스를 사회화해 관련 법률이 개정되기도 했다. 이주 노동과 여성 노동의 이중고에 주목하는 연구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주 가정 청소년·어린이를 향한 차별 문제는 다수자의 인식 변화 없이 불가능하기에 '소수자 정체성 발달 모델'을 논문으로 소개하는 등, 현장에서 새로운 과제를 만나며 학자이자 목사로서 대응해 갔다. '우리는 다르지만 비슷한 존재다', '다름을 만나면 새로운 관점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어린이·청소년과 함께 나눴다.

- 사역하는 가운데 맞닥뜨린 한국 사회와 교회 모습은 어땠나.

'삶을 나누려는 마음이 없는 사역자/봉사자 중심의 안전하고 이기적인 연대'로 표현할 수 있겠다. 미담도 많지만, 당시 경험을 통해 내 눈에 비친 모습은 대동소이했다. 영화·다큐멘터리 관계자, 소설가, 교육가, 종교인, 대학원생, 학교장, 단체장, 예술계 종사자, 교회, 선교 단체, 대입을 위해 경력을 쌓으러 온 학생, 중소·대기업 봉사 단체, 자영업자 등, 선한 얼굴로 찾아온 많은 사람이 각자 필요한 것을 얻어 갔다.

그들이 싸 온 선물 보따리는 화려했지만, 감동적이지 않았다. 이주민을 만나고 서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우정을 만드는 일로부터 시작되지 않은 모든 일은 일회적으로 끝났다. 각자의 프로젝트를 실험하는 현장이 되는 모습을 보며 행복하지 않았다. 그들이 깊은 마음의 눈으로 이주민을 만나려는 관점 없이 다가올 때, 이주민은 더불어 사는 시민이 아니라 불우한 이웃으로 남아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중·대형 교회에서 다문화 이슈는 '선교'로 수렴된다. 해외까지 가서 하던 일이 안산에서 가능해지자, 탐방을 위해 많은 교회와 사회 각계각층 사람들이 찾아왔다. 선교 활동이 관계 확장 또는 상호 사역이 아닌 구호 활동으로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빈곤 여행(Poverty/Slum Tourism)에 머물러, 인간 존엄성을 내면화하지 않은 '성찰 없는 선교', '성찰 없는 봉사'는 국내 다문화 선교에 그대로 드러난다. 선한 얼굴로 자비를 베푸는 자본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봉사를 하기보다, 일상에서 이주민 임금 체불하지 말고, 그들에게 존댓말을 쓰고, 종교 강요하지 말고, 사람을 노동력으로만 보지 말라고 설교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한국교회가 노동자의 교회가 아닌 자본가의 교회라는 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재산 증식에 힘입어 만들어진 특권 때문에 묵과하는 교회의 차별을 들추어내 회개해야 한다. 성찰적 반성 없이, 평등과 해방의 신학으로부터 도움받지 않은 시혜적 선교론에 근거한 다문화 선교는 '선주민 중심의 이기적 선교'라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호남신대 교수로 지낼 때, 지역 교회 집회·모임에서 이런 내용을 전하면 목사들이 싫어했다. 한번은 지역 교회 연합회 강의를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선배 교수 연구실로 불려가 친절한(?) 경고를 들은 적도 있다.

오 대표는 어떤 이슈든지 '선교'로 수렴시키려는 교회를 비판했다. 시혜적 태도가 아니라,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삶의 자리를 나누려는 마음으로 이주민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했다.

- 다문화교회에서 사역하다가 호남신대 교수로 일하게 됐다. 어떤 부분에 주목해 학생들을 교육하고자 했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 모교 장신대에서 가르치길 소망했으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호남신대 교수가 장신대로 가면서 공석이 생겨 광주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중심에 둔 생각은 역사·사회·신학·자아(자기) 인식이 분리된 교회를 비판적으로 보고 개혁할 목회자를 양육하는 일이었다. 역사·사회·신학·자아 인식은 연결된 개념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회자가 신학적 설교를 할 수 있는 교육 주체로 서도록 해방신학, 여성신학, 다문화 담론, 비판 이론, 평화교육 관점에서 가르쳤다.

학생들이 지역 신학교 특성을 살려 자긍심을 품게 하고자 노력했다. 학교가 서울에 있는지, 학생과 교수 숫자가 몇 명인지에 가치가 있지 않다고 말했다. 지역 신학교를 다니는 신학생으로서, 비판적 사고를 통해 지역 역사 및 정체성을 이해하고 거기서 나오는 질문과 씨름하며 신학할 것을 강조했다.

호남신대는 광주에 있지 않나. 5·18 광주 민중 항쟁은 아픈 사건이지만 세계사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오늘날 교회와의 연결 지점을 신학화하고 그것을 토대로 성서 연구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준비하면 쓰임 받을 곳은 충분히 있다고 봤다. 교회 전도사는 늦게 할수록 좋고, 사회 현장에 가서 배우며 학문에 정진하라고 당부했다.

교단에 속한 신학교 학생들이 등록금을 내고 신학을 공부해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딛고 몇 년을 공부하더라도 삶을 바꾸는 신학적 사고가 중요하다. 그래서 다인종·다문화 등 실천 현장에 함께 갔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진도체육관과 팽목항 현장에서 봉사하고 도보 순례까지 결심한 것도, 학생들과 함께 내디딘 봉사의 발걸음이 끌어낸 일이었다. 순례에 참석한 제자들은 사회적 참사·위기 현장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현장 속 하나님을 만나야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한국은 서울 중심 사고가 강하다. 서울에서 오래 살다가 지역 신학교 학생들을 가르친 입장에서 여러 지점을 성찰했을 것 같다.

광주에 가기 전, 나 역시 서울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울 빼고 다 '시골'이라 불렀던 것 같다. 서울이든 어디든 '하나의 지역'이라는 사실을 광주에서 성찰할 수 있었다. 서울은 서울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야 하고, 다른 지역 역시 박탈감 없이 자긍심을 품도록 사회제도가 개선되고, 정부가 균형 발전 의지를 갖길 바란다. 주변/중앙을 나눌 필요 없이 내 삶의 자리가 하나님의 생명이 싹트는 현장이라는 인식이 교회에 자리 잡길 바란다.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각자의 삶터, 지역에서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졌으면 한다.

한편으로 지역에 가두려는 지역 중심주의 또한 극복해야 한다. 광주시민으로 12년 살며, 5·18 정신을 한국과 세계가 배워야 할 역사로 더 깊이 인식하게 됐다. 나도 198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역 항쟁에서 광주 이야기를 접했고, 사회 인식이 더 고양되면서 전두환이 지녀야 할 죄의식을 '광주'에 대한 소시민적 채무 의식으로 짊어졌다. 그것을 광주 정신으로 뭉뚱그려 소화했는데, 양림동·금남로를 거주지 삼아 살며 더 깊이 5·18과 만나면서 특정 지역 의식으로 5·18을 가두려 했던 마음을 보게 됐다.

서울을 떠나 광주에 살면서, 서울을 하나의 지역으로 보는 눈을 얻었고, 5·18 정신이 민중 지향, 인간 평등,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싸우는 사람들의 정신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바로 볼 수 있었다. 그 각성이 부채 의식 없이 광주를 떠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지금 나는 일산에 살지만, 5·18 정신과 갈릴리 청년의 정신을 하나님나라 정신으로 받아들여 살고 있다.

여호수아 여리고성 이야기를 본문 삼아, '주변에서 또 다른 주변으로' 가자는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다. 2014년 8월 세월호 도보 순례를 마치는 현장 예배에서 전한 설교다. 세월호 참사로 상처투성이가 된 진도와 팽목항으로 제자들과 봉사하러 갔다가 팽목항에서 안산까지 미수습자 수습과 귀환을 바라며 도보 순례를 결심했다. 제자들과 루트 답사와 예산 등 필요한 준비를 마친 후, 그리스도인 및 시민들과 20일간 도보 순례를 하고 해산하는 예배를 했다. 팽목항에서 시작한 순례가 광화문광장이나 청운동이 아닌 안산에서 마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지역에서 지역으로, 주변에서 주변으로 가는 삶의 가치를 제자들과 나누고 싶었다. 우리가 해방의 몸짓으로 주변에서 순례하듯 살아가면, '무너져라, 무너져라' 싸우며 외치지 않아도, 이웃의 고통에 관심 없고, 가진 것을 나누지 않고, 연대하지 않는 중앙은 마침내 고립돼 무너질 것이라고 설교했다.

해방적으로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들은, 이기적이어서 자기밖에 모르는 자본 의존적 권력층이 무너지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될 것이라고 했다. 살아가다가 다시 또 다른 갈릴리, 또 다른 주변에서 만나자고 하면서 설교를 마쳤다. 소외당한 곳을 주변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이 깨어 있는 주변은 해방과 자유의 땅이 된다.

오현선 대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삶터를 성찰하면서 현장에서 무엇을 실천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 호남신대와 시무하던 교회에서 사건을 겪고 사임했다.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교단 신학교 바깥에서 활동하며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는지 궁금하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광주에서 살고 싶었다. 은퇴 이후도 광주에서 살며 시민사회와 호흡하길 바랐다. 광주시에서 수년간 공무원 인권 교육을 부탁받기도 했고, 해야 할 일도 여럿 있어서 시민사회의 그리스도인과 연대하며 행복하게 살려고 했다. 몸담은 학교·교회에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학교에서 나왔을 때도 광주에 있으려 했지만, 마가복음 6장 7-13절 말씀을 되새길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 구절들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귀신 쫓는 권능을 주시며 파송할 때 말씀한 내용이 담겼다. 지팡이 외 신만 신고 옷 한 벌만 갖고서 누군가의 집에 머물 때는 떠나기까지 머물되, 영접하지도 말을 듣지도 않으면 나올 때 발의 먼지를 떨고 나오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따라 욕심 범위를 정해 삶을 분별할 수 있도록 노력해 왔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 뜻을 찾고 실천하다가 뜻을 같이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는, 먼지를 떨고 나와야 한다고 다짐하며 살았다.

학교에서의 일을 말하면, 종교개혁 주간 내 수업 내용에 불만을 품은 학생 몇 명이 총장에게 이야기했고, 총장은 내게 전화를 걸어 내 발언을 확인하고는 그렇게 지도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를 '교권 침해'로 보고 총장 태도에 항의했지만, 같은 말이 돌아올 뿐이었다. '발의 먼지를 떨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가족과 상황을 의논하다가, 딸의 말에 큰 위로를 받았다. "엄마의 일을 고마워하지도 않고 협력도 하지 않는 누군가와 계속 같이 살 만큼 우리 인생이 길지 않아요. 우리 일을 고마워하고 같이 협력할 수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요."

내 생존권을 걸고 사표를 쓰고 나왔으니, 연대하려는 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는 내 운동에 연대하지 말고, 각자의 몫으로 호남신대 개혁 운동을 이어 가라고 호소했다. 학교는 나왔지만, 지역 교회와 광주 시민사회에서 프리랜서로 살고자 '공간엘리사벳'도 만들었다. 그런데 내가 협동목사로 있던 교회에서, 교단 총회가 만들어 놓은 반동성애 프레임을 의지적으로 활용해 2018년 연말 당회에서 나와 의논 없이 '자진 사임'으로 결론 내는 것으로 내부 합의를 했다. '공식 전언'은 2019년 1월 첫 주에 전화로 들었다.

전언을 듣고 교회를 떠나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5개월간 대화했다. 처리 과정에 대한 당회의 공식 사과를 받고, 2019년 5월 말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다녔던 교회를 떠났다. "여러분이 교회 공동체로서 해서는 안 되는 방식의 일을 저에게 했으니 그 부분에 대한 사과를 요청드렸습니다. 사과해 주셔서 감사하고 더 있고도 싶지만, 신학자로서 성소수자에 대한 생각은 바꿀 수 없어 교회를 떠납니다. 다만 이 이슈에 대한 신학적 대화가 필요할 때는 언제라도 오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나왔다. 일개 협동목사로 9년을 지냈지만, 결국 성소수자 이슈로 교회에서 나오게 됐으니 나는 이런 게 교단 역사에 기록돼야 할 사건이라고 인식한다.

광주에 살면서 가족과 친척이 없더라도 빈자리가 크지 않았는데, 교회를 나오니 쓸쓸해지더라. 동무들이 있는 고향 서울에서 활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일산에 살면서 활동하는데, 푸근하고 행복하다. 고향이 주는 선물 같다.

세계의 모든 사람이 이주민 정체성을 안고 이주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 태어나고 자란 터를 떠나 사는 존재들이 경험했을 불안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광주에 살면서 겪은 일들 가운데 많은 일이 비호남인·비남성으로서 겪은 차별이었다는 사실을 떠나온 후 더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마음에 따스하게 남아 있는 제자들·교우들·동지들이 있어, 광주로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설렌다.

지금은 광장의 신학자로 지내는 셈인데, 어떤 순간이든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 묻고 성찰하면서 움직이려 노력한다. 신학교에서 나오고 나니, '교수로서 받은 혜택이 정말 많았구나' 싶다.(웃음) 소신을 유보하는 일부 교수 신학자가 이해될 지경이다. 한편으로 이해하려 노력도 해 보지만, 그게 진정한 신학자·목사의 삶은 아니지 않겠나. 뜻을 편하게 말할 자유가 내게 더 소중한 가치다.

광장의 가능성은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소망을 품게 하는 데 있다. 얀 후스 동상이 있는 체코의 광장을 걸을 때도, 5·18민주광장을 걸을 때도 그렇게 느꼈다. 광장에는 따로 그어진 길은 없지만, 그렇기에 걷는 자의 걸음이 곧 길이 된다. 지금 가고 있는 길도 그러길 바란다. 지난 40년여간, 눈앞에 놓여 있는 분명한 길을 걸어온 것은 아닌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도, 나의 욕망인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길인지만 분별하면 그 걸음이 곧 길이 될 것을 안다.

오현선 대표는 호남신대를 나온 후에도 교단에 신학자로서 목소리를 내 오고 있다. 2019년 8월 6일, '동성애 옹호자'로 찍혀 목사 고시 합격 무산 위기에 처한 두 전도사가 조사차 총회로 소환되자, 오 대표는 총회 회관 앞에서 피켓 시위를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오현선 대표는 호남신대를 나온 후에도 교단에 신학자로서 목소리를 내 오고 있다. 2019년 8월 6일, '동성애 옹호자'로 찍혀 목사 고시 합격 무산 위기에 처한 두 전도사가 조사차 총회로 소환되자, 오 대표는 총회 회관 앞에서 피켓 시위를 진행했다. 뉴스앤조이 이은혜

- 그간 세월호 가족들과 가까이서 연대해 왔다고 알고 있다. 연대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처음에는 세월호 희생자 304명의 이야기가 모두 하나의 같은 이야기인 줄 알았다. 제자들과 진도체육관에 가서 있는 듯 없는 듯 봉사만 하고 오자고 했다. 유가족이 된 가족들이 한 분씩 진도체육관을 떠나고 넓은 체육관에 몇 사람 남지 않게 되자, 당시 실종자로 불렸던 미수습자는 어떻게 될지 내심 걱정이 들었다. 그해 11월 미수습자를 수습하는 일도 그치고 배를 인양하는 일도 중심의 논의에서 배제돼 갔다. 그런 모습이 내 눈에도 보였다.

당시 자원봉사자였던 한국기독교장로회 청년 집사 이승용 약사가 눈을 끔벅거리며 "내일부터 걸으려고요. 올라가다 지구대에서 자고, 돈 있는 거 털어 밥 사 먹으며 걸으면 되겠죠?"라고 내게 말을 걸어 오시더라. 속으로 '어쩌지?' 하다가 이내 "나랑 갑시다"라고 답했다. 실종자 대책마저 가라앉는 상황에서 시민으로 왔던 그분과 함께하기로 하고, 제자들을 모아 답사단을 파견하고, 예산을 세우도록 요청했다. 예산이 1500만 원 나와서 개인적으로 빚을 내려 했다. 교수로 살면서 갚을 수 있을 돈이니 결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이 일을 학교와 교단에 알렸고, 당시 이홍정 사무총장, 이승렬 사회부 목사, 변창배 목사가 협조해 예산을 세월호로 모인 헌금에서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당시 상황을 연구 논문으로 적어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 우여곡절 많았던 20일 순례를 마치고 팽목으로 다시 돌아오니 은화 엄마가 가족으로 대해 주셨다.

신뢰를 얻고자 행동한 것은 아니었으나, 귀하게 여겨 주셨다. 세월호는 304명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소중하고 세심하게 각각 다르게 살펴야 하는 일이었다. 순례를 마친 후, 피해 당사자가 아닌 나는, 단지 "우는 자와 함께 울라"는 말씀대로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고, 배가 인양될 때까지 외침을 그치지 않았던 미수습자 가족 몇 분이 계셨던 팽목을 오가며 살기로 했다.

세월호 참사에서 종교인의 위치는, 좀 거친 표현으로 '꼰대'였다. 앞서 언급한 보여 주기식 선교 에피소드들과 다르지 않았다. 세월호 이야기를 배경 삼아 자기 일들을 하고, "이러면 돼", "저렇게 하면 좋아"라며 가족들을 가르쳤다. 부탁하지 않은 대변인 노릇을 순간순간 카메라 앞에서 자처하기도 하고, 위로하러 와서 충고하고 떠나는 인사들도 보게 됐다.

곁에 오래 있다 보니, 반면교사를 참 많이 두게 됐다. 참사를 경험하는 중인 피해 당사자와 현장에서 어떤 예의를 갖춰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우리는, 아직도 생생한 현실로 아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고도 체험관이나 기록관과 같은 교육 현장에 온 것처럼 행동했다. 이런 생각을 나누는 일은 매우 민감해 우려스럽기도 하다. 혹시 상처를 주는 말이 될까 봐 두렵기도 하지만, 세월호를 좀 길게 본 내 개인적 생각으로 기억해 주면 되겠다.

은화와 다윤이 가족과 함께 인양 전에는 팽목항, 인양 후에는 목포에서 시간을 보냈다. 은화와 다윤이를 보내는 이별식이 있던 2017년 9월 24일까지 함께 예배했다. 박흥순 소장(다문화평화교육연구소)과 제자들이 자주 동행해 주었고, 함께 특별한 날이나 절기 예배도 같이 꾸몄다. 성찬이 있는 예배단을 서클로 꾸몄고, 엄마·아빠들은 같이하고 싶을 때 예배 자리에 참여하셨다. "예배하며 지내면 기다리는 시간이 버텨질 수 있을까요. 그럴 것도 같아요"라며 웃고 울던 엄마들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나는 세월호 모든 가족의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호 속 소수자, 가장자리에 있던 은화와 다윤네 두 가족 곁에 머문 시간이 많아졌다. 인양 발표와 인양, 아이들의 남은 흔적을 찾는 부모들 가슴이 녹아내리는 나날을 지나, 수습한 뼈들로 입관하고, 이별식을 하고, 납골당에 안치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6년. 이제 두 가족의 엄마·아빠들은 당신의 아픔과 비교할 수조차 없는 내 아픔마저 감싸시는, 나의 새로운 가족이 되어 주셨다.

딸의 뼈를 감싸안고 입 맞추며 오열하는 엄마들과, 울지도 못하는 아빠들의 침묵이 더 안쓰러웠던 입관식 새벽. 그날 기억은 다니엘라를 보낸 그 하루와 겹쳐져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종교인·목사는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아픈 곳에 계신 하나님을 그렇게 만나고,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조용히 머물러야 하는 것임을 아프게 깨달았다. 아픈 곳에 계신 하나님처럼, 우리도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

2015년 12월 학기 말, 제자들에게 세월호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은화 부모님을 수업에 초대했다. 수업 끝나고 같이 얼어붙은 교정을 산책했다. 은화 엄마는 내게 하나님에 대해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본인도 교회와 집밖에 모르고 살았고, 은화도 교회에서 자랐는데, 하나님이 은화 시신이라도 찾게 해 줘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능력자여서 하나님이 아니라, 엄마라도 다가갈 수 없었던 은화의 옆자리에 계실 수 있는 분이라서 하나님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상상조차 하기 무서웠던 세월호에서 보냈을 마지막 날의 은화와 하나님을 마음에 떠올리며 은화 엄마가 또 아플까 봐,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있다.

신실한 개신교 신자인 두 가족은 아직도 교회에 못 가고 계시다. 교회가 아주 작은 판단이나 서투른 위로, 과장된 배려 없이 진정한 존중감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에 대한 깊은 예의를 갖추고 표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때가 이분들이 다시 교회에 갈 수 있는 날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 3주기인 2017년 4월 16일, 목포신항에서 열린 미수습자 가족과 함께한 부활절 예배 당시 말씀을 전하는 오현선 대표. 뉴스앤조이 이은혜
세월호 참사 3주기인 2017년 4월 16일, 목포신항에서 열린 미수습자 가족과 함께한 부활절 예배 당시 말씀을 전하는 오현선 대표. 뉴스앤조이 이은혜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2017년 9월 24일 진행된 조은화·허다윤 양 이별식 위로 기도회. 뉴스앤조이 박요셉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2017년 9월 24일 진행된 조은화·허다윤 양 이별식 위로 기도회. 뉴스앤조이 박요셉

-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신학자로 살아가면서 느끼는 점이 있다면.

한국교회는 철저히 남성 중심 가부장 문화 위에 서 있고, 그 바탕에서 성장했다. 수구·보수 신앙을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할 수밖에 없었던 신자들이 분단 고착에 기여해 왔다. 일부 목사는 일부 남성만 남기고 나머지 모든 존재를 서열화한 후 차별·배제하고, 이웃 종교와의 대화를 혼합주의로 몰아세우고, 배제·혐오를 정당화하는 문자주의 해석을 일삼으며, 이에 대한 맹종을 신앙심 깊은 자들의 순수성이라고 부추겼다. 이 같은 현실을 드러내고 다시 교회를 세우는 일이 신학자에게 주어진 책임이 아닐까.

일부 대형 교회는 권력을 지닌 남성 목회자, 그들과 이해관계로 연결된 사람들 중심으로 성장·유지·지탱된다. 지난 역사에서 가난한 자와 여성을 배제한 교회는 스스로 변한 적이 없다. 여성 문제 하나에도 닫혀 있는 교회가 동성애나 이슬람 등 나머지 모든 것에 열려 있을 수 없다. 강고하게 닫힌 성의 문을 하나라도 열라는 내·외부의 요청에 자발적으로 수긍할 리도 없다.

그간 변화를 요청하는 대상을 혐오의 대상으로 재빠르게 치환하는 기술을 축적해 온 교회들은 공산주의, 페미니즘, 이슬람, 난민 이슈 등에서 퇴보를 겪었다. 그러면서도 이제는 또 다른 이슈,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대오를 정비하며 힘겨루기하는 중이다. 신학자로서 가부장 문화에 기초해 형성된 강고한 교회의 교권주의를 해체하고, 교회가 행하는 다양한 차별에 대한 죄책을 고백하길 요청하며, 진정한 변화로 돌아서길 촉구하려 한다.

명성교회 부자 세습 반대에는 연대하지만,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에는 반대하며 성소수자를 향해 폭력적 혐오 발언과 가짜 뉴스를 재생·확대하는 교회들이 돌아서길 바란다. 명성교회 세습 반대 운동이 답보 상태에 있다가 세습 철회안이 올라가면서 이를 지지하는 추진회의가 발족했다. 함께하자는 초대를 받았으나, 개혁 과제를 서열화하는 안전한 연대에 함께할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보내는 응답으로, 초대장을 썼다. 부자 세습 문제를 건강하게 비판하려면 성평등·양성평등 문제 또한 지적해야 한다고 본다. 특히 그간 목회자 성차별·성추행·성폭력 문제에 분명하게 비판적으로 대응하지 않은 죄책을 고백하고, 성소수자 혐오 등 부당한 한국교회 태도에 저항하려는 나의 개혁 운동에 함께하자고 초대한 것이다.

얼마 전,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교단 총회장 성명서에 개인 이름으로 답신하기도 했다. 교단 지도자들 행보와 방향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여울교회 교우들도 총회장 성명에 답신하고자 논의 중이다(인터뷰 시점에서 11일 지난 7월 31일, 여울교회 입장문이 발표됐다. - 기자 주). 신학자들, 지역 교회 목회자·교인들 목소리가 소신 있게 나왔으면 한다.

혐오를 '사랑'이라 말하는 목사들이 있다. 성소수자를 치료 대상으로 보고 정죄하는 것이 창조 정신과 교회 질서를 지키는 일이라고 정말로 확신한다면, 지금의 지위와 교회를 비롯해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광야의 요한처럼 나와서라도, 혐오를 사랑이라 외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가진 것을 내어놓고 외칠 수 있다면 진정성이라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으리라. 가진 자의 타자 혐오는 자기 것을 지키려는 기획된 증오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교단의 '여성 단체'이면서도 '젠더 평등'을 이야기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매우 이해하기 어렵다. 가부장 문화로 가득 찬 교회에서 상처 난 피해 당사자 이야기를 발굴하고 치유·개혁해 가야 하는데, 오히려 남성 목사들 요청을 조직 차원에서 수행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단체가 교단과 협력해 많은 일을 하지만, 교단이 지향하는 부흥과 성장 논리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의 방향으로 여성들이 견인해 갈 수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 적당히 여성 지도력을 활용하는 교단을 향해 양성평등 입장에서라도 비판적으로 견인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구색 맞추기 위해 여성을 내세우며 소비하는 시대를 그치게 해야 한다.

- 난민·이슬람·동성애 등 사회적 이슈가 나올 때마다 보이는 한국교회의 혐오·차별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나.

교단이든 개교회든 개별 교인이든 사회적으로 낯선 이슈를 만날 때는 먼저 당사자들과 친밀해지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 난민 문제를 함께 풀어 가려면, 그들과 대화해 보고 판단해야 하지 않나. 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어떻게 한국까지 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들어 봐야 한다. 정부 대책이 있을 것이고,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때야 희미하게나마 보일 것이다. 물어볼 만큼 묻고, 이해한 만큼, 연대할 만큼 연대하면 된다.

여성 지도력 향상 과제도 여성 교인 목소리를, 신학자의 소리를 포함해 적극 듣고, 여성 목회자 현황도 세심히 살펴야 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견해 역시 만나거나 대화 한마디 없이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린다. 혐오는 무지와 두려움의 또 다른 얼굴이다. 성소수자 교우가 한 번도 찾아온 적 없다면, 그 교회에 성소수자가 우연히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성소수자에게 친화적이지 않아서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성소수자 교우들이 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성소수자를 향한 일방적 편견에 싫증이 나 교회를 떠난 이도 있을 것이며, 자신도 그 편견을 내면화해 스스로 죄인이라 여기며 힘들어하는 소수자도 있을 것이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교우들이 내게 와서, 때리는 남편이 무섭지만 자기 잘못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가슴 아픈 일이다. 교회가 먼저 판단을 내리기 전에, 주변의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 목소리를 들으며,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면 좋겠다.

교회 안에 이미 매우 많은 다름이 교차하고 있다. 그 교차점에서 발생해 온 수많은 차별에 침묵해 온 교회가 느닷없이 난민, 이주민, 이웃 종교, 젠더 다양성에 대한 의견을 주도해야 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이 서글프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통해 우선적으로 언급된 23가지 차별 요소로 피해 본 사람들 곁에 서 있지 않았던 교회는 그 입을 닫고, 피해자·소수자들 이야기를 들을 귀와 보는 눈을 크게 열길 바란다. 기독교 사랑의 메시지를 정죄의 도구로 사용하는 일을 당장 멈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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