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重力의 영'에라도 사로잡힌 듯 매사에 심각하고 진지하고 경직된 신학 풍토에서 그의 신학은 '춤추는 신'에 들린 듯 가볍고 경쾌하고 신명이 실려 있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 장애인을 편들고, 가부장적 자본주의 음모를 파헤치고, 거대 맘몬 세력에 의한 인간 신체의 상품화를 고발하는 글에서도 그의 신학 언어는 발랄한 움직씨로 팔팔하게 살아 있고 창조적 젊음의 생동하는 숨결을 잃지 않는다."

[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시인 고진하 목사는 생태여성신학자 구미정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 초빙)에 대해 이 같은 말을 남겼다. 이는 구 교수가 담임하는 수원 이은교회 목회자 소개란에 인용된 문구이기도 하다. 생명·평화·여성·자연이라는 키워드를 바탕으로 연구·저술 활동을 펼쳐 온 구미정 교수의 글쓰기는 낮은 자리를 향한다. 논문을 쓰더라도 대중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쓰고자 노력하고, 글의 주제도 약자·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맞춰져 있다.

구미정 교수는 그동안 기독교윤리학자이자 생태여성신학자로서 다종다양한 저작과 번역서를 내놨다. <교회 밖 인문학 수업>(옥당)·<구약성서, 마르지 않는 삶의 지혜>(사계절)·<두 글자로 신학하기>(포이에마) 등 20여 권의 저서와 <과학의 윤리>(나남)·<낯선 덕: 다문화 시대의 윤리>(아카넷) 등 9권의 번역서를 출간했다. 한두 글자 단어 속에 신학적 담론을 담아 명랑한 사유를 놀이하듯 풀어낸 책부터, 성경 속 짧게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 삶을 깊이 탐구한 저작, 생태·기후 위기 시대를 성찰하며 기독교적 생명·과학의 윤리를 논하는 책 등 그 면면이 예사롭지 않다.

<뉴스앤조이>는 1월 4일 이은교회에서 구미정 교수와 만나 3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구 교수와의 인터뷰는 두 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앞선 기사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삶을 정리했다. 이번 기사에서는 그의 글쓰기와 목회 이야기 등을 담았다. 4개월 전 시작한 유튜브 채널 '구미정티브이'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봤다.

구미정 교수(숭실대 초빙)를 그가 담임하는 수원 이은교회에서 만났다. 그의 삶과 학문, 글쓰기, 목회 이야기 등을 들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구미정 교수(숭실대 초빙)를 그가 담임하는 수원 이은교회에서 만났다. 그의 삶과 학문, 글쓰기, 목회 이야기 등을 들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출간한 저서들의 '저자 소개'를 보면, 글쓰기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나.

초등학교 때 결핵을 앓고 계속 몸이 허약하다 보니, 아이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게 불가능했다. 게다가 잦은 이사로 친구들을 사귈 기회가 적었다. 자연스럽게 책에 파묻혀 지냈는데, 우연히 쓴 시가 상을 받게 됐다. 그 뒤로 탄력이 붙어 신문사나 출판사에서 주최한 어린이 글짓기는 거의 휩쓸다시피 했다. 통일부가 주관하는 '통일 글짓기' 같은 데도 강원도 대표로 참가했다.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개근상은 못 받았어도 공로상은 받았다. 다들 내가 시인이 될 줄 알았다.(웃음)

중학교 때 쓴 시들을 모아 삽화까지 직접 그려서 엮은 시집을 어머니가 보관하고 계시더라. 그러다가 중3 때 문예부장을 맡으면서 사건이 터졌다. 가을 시화전에 내 시를 출품했는데, 국어 선생님이 기성 시인의 작품을 표절한 거 같다며 내 작품을 빼 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리 반 아이들이 만우절 때 장난을 친 게 괘씸했다고 하더라. 반장인 내가 덤터기를 썼다.

고2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담임이 국어 선생님이었는데, 학년 초에 학급 회의에서 친구들이 담임에게 바라는 내용을 전달한 게 화근이었다. 상담실로 나를 부르더니, 백지에 그 아이들 이름을 적으라고 했다. 반장으로서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반항한다며 몰아세웠다. 국어 시간을 좋아했는데, 그날 이후로 지옥이었다. 선생님이 나서서 반장을 '왕따'시킨 셈이다. 시인은커녕 글쓰기 자체에 환멸을 느꼈다.

대학에서는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 과제물 정도나 겨우 구색을 맞출 뿐, 속내를 드러내는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글에 사랑을 주지 않은 거다. 학위논문을 쓸 때도 문체가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고 교육받았다.

그렇게 글쓰기와 거리를 뒀는데, 이상하게 글이 나를 좇아왔다. 박사과정에 있으면서 한국여신학자협의회(여신협)를 들락거릴 일이 많았다. 거기서 다양한 선배 여성을 만나며 삶의 반경이 넓어졌다. 특히 김명현 선생님 덕분에 그분의 반려자 민영진 목사님을 알게 됐다.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지낸 구약학자이시다. 공동체성서연구원이 발행하는 <햇순>이라는 월간지에 '오늘을 바라보며' 코너를 써 보라 권하셨다. 원고료 줄 형편이 안 되니 부담 없이 써도 된다고 해서 덜컥 수락했는데, 몇 년간 쓰니까 독자가 생기더라. 이래서 글이 무서운 거다. 이어서 <기독교타임즈>에 칼럼을 썼다. 드디어 원고료를 처음 받았다. 기분이 좋더라.(웃음)

구미정 교수가 그동안 출간한 저서들과 역서들. 뉴스앤조이 여운송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글쓰기에도 '밀당'이 있다. 멋모르고 쓰다가 어느 순간 그만 쓰고 싶어진다. 그럴 땐 꼭 핑곗거리도 많이 생긴다. '바쁘다', '시간 없다', '힘들다'…. 내 경우에는 대구에 있는 계명대 교수가 되어 대구로 내려가면서 모든 연재를 중단했다. 매달 빚쟁이처럼 글을 뽑아내야 한다는 게 스트레스더라.

그때가 2003년 가을이다. 계명대에서 기독교 교양 강의를 전담하는 교수가 됐다. 1학년을 대상으로 2학점짜리 강좌 8개를 책임져야 했다. 전체 수강생이 1000명에 육박하니까 힘에 부치더라. 교수 일을 거래나 계약으로 생각하면 간단한데, 내 성격이 그게 잘 안 된다. 학생들과 소통하려다 보니 물리적으로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한 학기 내내 글을 하나도 못 썼다. 숨이 막히더라. 이러다가 내 영혼이 죽겠구나 싶었다. '글을 쓰는 게 쉬는 거였구나', '글을 쓰는 동안 스스로 치유하는구나'를 깨달았다. 고작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도망쳤다.(웃음)

- 계명대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글을 쓴 건가.

'본격적'이라니까 민망하다. 글쓰기가 본업인 작가도 아니고. 안정적인 직장을 때려치웠으니 다시 비정규직 지식 노동자가 된 건데, 얼마나 바쁘겠나. 다만, 계명대를 사임하고 대구대로 옮기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건 맞다.

대구대는 내가 2002~2003년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원(SFTS)에서 강의할 때 학생으로 만난 양재섭 장로님 덕분에 알게 됐다. 인류세포유전학 박사로 대구대 생명과학과에 재직 중이셨는데, 생명신학을 공부하러 오셨다. 이분이 SFTS 석사과정을 졸업하고 대구대 안에 생명윤리연구소를 만들어, 나를 연구원으로 초청했다.

대구대 캠퍼스 안에 주말농장도 있었다. 어머니가 주말마다 내려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상추며 고추며 호박은 기본이고, 고구마·감자·토마토도 심었다. 연구소 안에 아예 전기밥솥을 갖다 놓고, 주말농장에서 거둔 채소들을 곁들여 교수·학생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지금 생각해도 즐거운 추억이다.

그 무렵 번역 작업을 많이 했다. <기초생명윤리학>(공역, 대구대출판부)을 우리말로 옮기고, 이걸 교재 삼아 대구대와 영남신학대에서 생명윤리를 가르쳤다. 마침 한국연구재단의 명저 번역 지원 사업에 선정돼 <생명의 해방: 세포에서 공동체까지>(나남), <과학의 윤리> 같은 책들도 번역했다. 복합학 분야 책들이어서 과학자와 공동 번역을 하며 많이 배웠다.

구 교수는 글쓰기를 '뜨개질'에 비유했다. 한 코 한 코 풀어지지 않게 신경 쓰면서 뜨개질을 이어 가듯, 한 문장 한 문장 막힘없이 써 나가는 것이 글쓰기의 제1원칙이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구 교수는 글쓰기를 '뜨개질'에 비유했다. 한 코 한 코 풀어지지 않게 신경 쓰면서 뜨개질을 이어 가듯, 한 문장 한 문장 막힘없이 써 나가는 것이 글쓰기의 제1원칙이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그러던 중 2005년 가을에 <기독교사상>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공부한 생태여성신학과 관련한 글을 매달 써 달라고 했다. 쪽글도 아니고 무려 단편소설 분량인데, 강의하랴 번역하랴 언제 쓰나 싶었다. 독자층이 주로 목회자·신학생일 텐데, 생소한 생태여성신학을 거부감 없이 전달할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여 끙끙대고 있던 중, 어느 날 문득 글이 나를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면 '글감'이 떠올랐다고 해야 할까.

꿈인 듯 생시인 듯 '정'·'몸'·'물' 같은 단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거다' 싶었다. 신학의 패러다임이 '여성'·'자연'·'비서구'를 축으로 해서 새롭게 돌아가야 한다고 믿던 차였기에, 이런 글자들이라면 얼마든지 내 생각을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 글자로 신학하기'를 연재하면서 신기한 체험을 많이 했다.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이끌고 가는 듯한 경험.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웃음)

그때부터 글쓰기의 맛을 알게 된 거 같다. <기독교사상> 연재가 끝나니 <활천>(기독교대한성결교회), <기독교세계>(기독교대한감리회) 같은 데서도 연락이 왔다. 거의 1년 이상씩 연재를 이어 갔다. <주간기독교>에서는 '두 글자로 신학하기', '성경 속 여성 리더십'을 연재했다. 5년 이상 매주 글을 써 보냈다. 이런 글이 쌓여 <한 글자로 신학하기>(대한기독교서회), <두 글자로 신학하기>, <핑크 리더십>(생각의나무), <성경 속 세상을 바꾼 여인들>(옥당) 같은 책이 나오게 됐다. 칼럼 쓰기도 <서울신문>부터 <국민일보>·<경기일보>·<경기신문>까지 꾸준히 이어 오고 있다.

- 진짜 쉼 없이 쓴 거 같은데, 비결이 있나.

처음부터 많이 쓰려고 마음먹었다기보다는 그냥 원고 청탁을 거절하지 못한 거다. 어느 등산가가 그러더라. "처음부터 산을 오르려던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떼다 보니 어느 틈에 산에 올라 있었다."(웃음)

뭐든 자꾸 하면 늘게 돼 있다. 요리도 이것저것 만들다 보면 저절로 늘지 않나. 글도 자꾸, 자주 쓰다 보니까 슬슬 문체가 나오더라. 지문 같은 거다. 글만 읽어도 성격이 보인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았다. 어려서는 배운 티도 좀 내고 잘난 척도 좀 하고 싶어서 현학적으로 썼는데, 다 헛되더라. 어깨 힘을 빼야 한다, 놀이하듯 써야 한다, 요즘은 이걸 절감한다.

다만 글쓰기의 기본은 '소통'이니 독자가 읽기 쉽게 쓰려고 노력한다. 이건 뜨개질을 하면서 터득한 거다. 내 취미 중 하나가 뜨개질이다. 뜨개질이 명상이나 수행 효과를 낸다.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다.(웃음) 틈날 때마다 예쁜 색실로 머플러를 떠서 가까운 벗들에게 선물로 준다. 그런데 머플러를 뜨다 보면 무늬가 틀어지거나 코가 빠질 때가 있다. 뻔히 보이는데 모른 척하고 넘어가면 계속 그 부분이 걸린다. 발견했을 때 얼른 풀고 다시 뜨는 게 상책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한 단어 한 단어, 한 문장 한 문장 이어 가는 데 막힘이 없어야 한다. 이걸 제1원칙으로 삼고 있다.

화가들이 자화상을 많이 그리지 않나. 특히 가난할수록 모델을 구하기 어려우니까. 글쓰기도 그렇다.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생각·감정·가치·지향 등을 담아서 쓰다 보면 뭔가 영혼이 가지런해지는 느낌이 든다. 언어가 정갈해진달까.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하시던 '밀양 할매'들이 글을 배워서 책을 펴낸 일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평범한 사람에게 글쓰기는 화가가 자화상 그리는 것과 비슷하다.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객관화하고 다른 사람의 공감을 끌어내고, 그런 과정에서 치유가 일어난다. 요즘은 데카르트의 명제를 패러디해서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많이 한다. 삶이 고단하고 마음이 복잡한 사람을 만나면 글을 써 보라고 권한다.

구미정 교수가 목회하는 이은교회 예배당 입구. '넉넉하고 명랑한 예수 공동체'라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목회도 꾸준히 해 온 것으로 안다. 언제 목회자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궁금하다.

어머니가 잠시 섬 목회를 하신 게 무의식적 동기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머니는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신 분이 아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주변에 여성 목사를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박사과정 시절에 여신협 정의평화위원장을 맡아 정대협 수요 시위 때 설교도 했지만, 목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은 별로 없었다.

직접적 계기는 SFTS에서 강의할 때 찾아왔다. 학생들이 주로 남성 목회자들이었는데, '여성신학과인간화'라는 수업을 다 듣더니 시큰둥하게 말하더라. "교수님은 목사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씀하셔도 되죠." 교인의 70%가 여성 아닌가.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여성의 눈으로 성경을 읽고 세상을 읽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여신협에서 알고 지내던 선배 여성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구 박사, 지금 운전하고 있는데 왜 면허증은 안 따려고 그래? 우리 땐 아예 여자한테 면허증을 안 주니까 못 땄지. 지금은 여자에게도 준다잖아? 교회 안에서 이미 설교도 하고 특강도 하고 그러면서 왜 십자가는 안 져?"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종이 되기가 싫었구나. 딸로만 살려고 했지, 종은 안 하려고 도망 다녔구나', 깊은 데서 회개가 솟구쳤다. 페미니즘에서 금기시하는 용어인 '순종'이니 '섬김' 같은 말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그 무렵, 지인이 부산 믿음교회를 소개해 줬다. 경성대에서 민중신학과 동양신학을 가르치던 김명수 교수님이 목회하던 교회다. 거기서 전도사 훈련을 받고 2005년에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는 대구 마가교회(장애인 공동체)에서 협동목사로 봉사하다가 서울 숭실대로 올라왔다.

- 목회와 강의를 병행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강의는 원래 계속해 왔던 거고, 목회는 교단 배경이 없어서 그런지 전임을 맡을 기회가 없더라. 교단·교파를 가리지 않고 어느 교회든지 불러만 주면 무조건 달려갔다. 두 영역 모두 비정규직 노동자인 셈인데, 이렇게 '투잡'·'쓰리잡' 뛰는 것도 나름 괜찮다.(웃음) CBS '성서학당'에서 '성경 속 여인들'과 '마가복음'을 강의한 경험도 나에게는 목회였다.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가슴에 새겼다. 물처럼 살자, 인연 따라 흐르자. 어차피 주의종인데, 고집부릴 일이 뭐 있나. 계획도, 의지도 소용없더라. '가난'과 '이산'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어떤 길로 이끄셔도 다 살 만하다.

구미정 교수는 2005년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어떤 계획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물처럼 흘러가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구미정 교수는 2005년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어떤 계획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물처럼 흘러가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이은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넉넉하고 명랑한 예수 공동체'라는 교회 표어가 오늘날 작은 교회들이 나아갈 길을 보여 주는 듯하다.

10여 년 전에 설교하러 온 적이 있는 교회인데, 은퇴하신 담임목사님이 후임자로 나를 불렀다. 내 글과 생각을 좋아하신 분이다. 너무 작은 교회라 전임 목사를 쓰기 어려워서, 나처럼 '투잡'이 가능한 사람을 찾았다더라.

교회가 새 출발을 하면서 간판을 바꿨다. 교인들 대상으로 공모해 '이은교회'가 뽑혔다. 하늘과 땅을 잇고, 땅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하늘을 잇고, 그렇게 서로 '이어 간다'는 뜻을 담았다. 이게 창조 신앙이다. 어찌 보면 동학사상과도 맞닿아 있다.

표어도 교인들이 정했다. 넉넉함이 은혜라면, 명랑함은 감사다. 모세가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성소의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바치는데, 넉넉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았다는 거 아닌가. 인생을 살아 보면 광야에서는 이런 마음을 내기가 어렵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 포획돼 노예처럼 살다 보면, 맨날 움켜쥘 생각만 하지, 나눌 줄 모른다. 우리는 그러지 말자는 거다. 이걸 가능케 하는 힘이 '명랑성'이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강조하고, 시몬 베유도 그랬지만, '중력의 영'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명랑해야 한다. "삶이여, 너는 작은 손으로 캐스터네츠를 고작 두 차례 쳤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발은 벌써 춤을 추겠다고 야단이다." 니체가 한 말인데, '어린아이 같아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예수님 말씀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명랑해야 저항이든 투쟁이든 오래할 수 있다.

- 뜻있는 작은 교회도 많지만,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전반적으로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분위기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여론이 더 안 좋아지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공공성의 부재랄까. 신앙이 너무 사사화私事化(privatization)해 있는 게 문제다. '나/우리가 모이겠다는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냐', 이런 태도에는 '타자'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교양이고 상식이고 다 필요 없이 '막가파'식으로 군다. 전형적인 조폭 문화다. 힘이 세니까 그래도 된다는 심보다.

이렇게 된 데는 복잡한 변수가 많다. 뒤틀린 현대사 속에서 한국교회 전체 판이 커졌다. 마치 한국 경제 전체 판이 커진 상황과 유사하다. 우리나라가 국제사회에서 '5030 클럽'에 든다고 하지 않나.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민소득 3만 불 이상인 나라가 7개밖에 안 된다. 전통적인 서구 열강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런데도 국민 대다수는 삶이 힘들지 않나. 상위 1%가 움켜쥔 부가 나머지 99%와 맞먹는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각하다. 이 뒤틀린 문제가 한국교회 안에도 그대로 '미러링'돼 있다.

그 뿌리를 더듬으려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우리 민족의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식민 지배와 동족상잔의 비극을 어떻게든 청산하고 극복해야 하는데, 그 숙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흘러왔다. 입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하지만, 속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분단"을 외친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통일 문제를 평화와 연결 짓기는커녕 비용만 계산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나. 모든 길이 경제로 통한다. 이게 우상숭배다.

내 언어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뜻은 '심비우스'(Symbious), 곧 더불어 사는 존재에 있는데, 모두 '사피엔스'(Sapiens)로 타락했다. 종이 조금만 달라도 멸종하려 든다. 제국주의 심성이 내면화했다. 기독교인은 예외인가? 아니다. 사피엔스 중에서도 최고 사피엔스를 욕망한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호도하면서. 옆 교회가 무너지든 말든, 이웃이 죽든 말든 자기만 승리하면 된다는 식이다.

역사학자 박정신 교수님의 여러 책에 나오지만, 구한말 사랑방 공동체로 시작한 한국교회는 '역사의 앞섬이'였다. 3·1 혁명도 교회가 앞장섰다. 그랬던 교회가 어쩌다 '역사의 뒷섬이'로 전락했는지 안타깝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보수 대연합의 중심에 있다. K-방역은 물론이고 사회 전반의 진보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수구 세력의 아성처럼 돼 있다.

광화문 거리 집회를 주도한 전광훈 목사나 신천지 이만희 교주, 인터콥 최바울 대표 같은 일부 지도자 탓만 할 수 없다. 이들의 선동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신도들도 문제다. 코로나19 팬데믹처럼 두려움이 증폭하는 상황에서 더더욱 폐쇄적으로 맹신에 빠진다. '믿음'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욕망'이다. 대부분 교회는 그들과 선을 그으며 '다름'을 주장하지만, 기독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볼 때는 '도토리 키 재기'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욕망 유전자가 대동소이한 게 문제라고 본다.

긴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된 역사적 배후에는 거칠게 말해 '미국 기독교'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흔드는 기독교인들의 심리 밑바닥에 모방과 선망의 대상 미국이 있다. 한국교회가 길을 찾으려면, 신앙과 영성에 붙어 있는 '메이드 인 유에스에이'(Made in USA) 딱지를 떼어 버려야 한다. 번영신학·성공신화·엘리트주의·영웅주의를 타파하고, '작음·연약함·낮아짐·내려감' 같은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원론적인 말 같지만, 예수의 십자가 외에는 답이 없다. 그래서 곧 나올 책 제목도 <십자가의 역사학>(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이다.(웃음)

이은교회 예배당 한쪽에 있는 단. 뉴스앤조이 여운송
이은교회 예배당 한쪽에 있는 단. 뉴스앤조이 여운송

- 기독교 인문학 분야 책을 많이 썼다. 여러 저작을 통해 성경을 깊게 읽는 작업도 이어 왔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다면.

리더십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남성 보스가 다수인 영역에서 여성이 리더가 되면, 남성의 보스십을 '미러링'하기 쉽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세상이 안 바뀐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리더십을 찾다가 <핑크 리더십>(생각의나무)을 쓰게 됐다. '핑크'는 여성성의 상징이면서 원초적인 자궁의 색깔이다. 노자가 말한 '생이불유生而不有 위이불시爲而不恃', '낳되 소유하지 않고 행하되 기대하지 않는' 도와 덕이 자궁의 특징이다. 내가 보기에는 예수님의 리더십이야말로 '핑크 리더십'의 전형이 아닌가 싶다.

이 작업이 <성경 속 세상을 바꾼 여인들>(옥당)로 이어졌다. 이 책에서 훌다를 쓸 때 끙끙 앓았기 때문인지, 가장 기억에 남는다. 훌다는 성경 기록이 희박한 인물이다. 요시아 종교개혁을 이끈 위대한 예언자, '네비아'(נביאה)이지만, 그녀의 삶을 더듬을 수 있는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 '예루살렘 제2구역'에 살았다는 것과 '살룸의 아내'(왕하 22:14; 대하 34:22) 라는 기록이 거의 전부다.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격'이라고나 할까.

그러다가 우연히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단편 <회당의 동물>을 읽고 무릎을 탁 쳤다. 카프카도 난민 아닌가. 그의 삶과 작품에도 이산의 그림자가 있다. <변신>에 보면 자의식이 얼마나 애잔한가.

카프카의 <회당의 동물>에는 거룩한 회당 안에 있어서는 안 될 부정한 동물 이야기가 나온다. 랍비들의 회의에서 이 동물을 쫓아 버리기로 결의하는데, 종지기가 아무리 쫓아내려고 해도 안 나가니까 결국 회당에 불을 지른다는 이야기다.

'훌다'라는 이름의 뜻은 '족제비'다. 족제비는 레위기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에 속한다. 카프카가 훌다를 염두에 두고 그 소설을 썼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눈에는 한국교회의 변방에서 어떻게든 변화와 개혁의 목소리를 내려고 몸부림치는 여성 목회자·신학자 모습이 훌다와 겹치더라.

운 좋게도 이 책이 다 팔린 바람에 개정 증보판을 내게 됐다. <교회 밖 인문학 수업>으로 제목을 바꿔 펴내면서 막달라 마리아를 추가로 집어넣었다. 이 글을 쓸 때 '마리아복음서'를 꼼꼼히 읽은 기억이 새롭다. 그녀를 창녀로 선언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가짜 뉴스'를 가톨릭교회가 실수라고 공식 인정한 게 1969년이다. 그런데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Jesus Christ Superstar' 같은 대중 뮤지컬에서는 여전히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로 등장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최후의 유혹>(열린책들)에서도 그렇고.

이런 외설적 관음증이 우리 시대 기독교 안팎에도 성행하지 않나. 그러지 말고 맨눈으로 보자는 게 내 주장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도의 모범이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행한 뒤로 끝까지 의리를 지키지 않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제자, 제도권이 알아주든 말든 깊은 통찰과 침묵 가운데 하나님과 소통한 사도. 일상에서 신나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태어나게 - 신이 나게 - 산다는 게 뭔지 고민하게 되더라.

- 유튜브 '구미정티브이'를 시작했다.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 어떤 활동을 펼칠 예정인지 궁금하다.

제자들이 등을 떠밀었다. 장비들을 챙겨서 교회로 쳐들어왔다. 내가 수업을 은근 재미있게 하는 모양이다. 딱 그대로만 하면 된다고 옆구리를 찌르기에 넘어갔는데, 이게 함정이었다.(웃음) 자기들도 이 교회 저 교회에서 목사, 전도사로 일하는 처지에 언제 모여서 뭘 찍나.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 처지다.

지금 꾸준히 업로드하고 있는 오디오북은, 집에서 내가 쓴 글을 직접 녹음해 이메일로 보내면 제자들이 영상을 입혀 유튜브에 올린다. 아직은 '놀이의 영성'이 기특하기만 한데, 언제까지 이렇게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바람에 부끄러움은 순전히 내 몫이다. 저들이 판 함정에 단단히 빠졌다.(웃음)

사회적 거리 두기가 완화됐던 시점에 제자들과 함께 '좀비'를 주제로 '신학 토크'를 열었었다. 우리 시대에 왜 이렇게 좀비 영화가 많은지를 놓고 토론했다. 그러면서 좀비 현상은 신자유주의 시대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한 고발, 초개인주의에 대한 반성, 몸의 부활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고 풀이했다. 제자들과 함께 만드는 콘텐츠는 주로 이런 신학 토크가 될 거다.

'핑크 리더십'에 관한 시리즈도 곧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다. 교회 안팎에서 변화의 새바람을 일으키는 여성 지도자를 찾아 소개하는 코너다. 내가 제자들과 함께 만들었던 계간지 <이제여기그너머>에서 다룬 '마르다의 밥상'도 영상 콘텐츠로 만들어 올리려고 한다. '교회 밥상이 살아야 기독교가 산다'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건 여러 손이 필요하지만, 혼자서도 생산할 수 있어야겠다 다짐해 본다. 그러려면 기계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다. 이 모든 일에서 중요한 건 '놀이와 노동의 경계 허물기'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의 추이를 지켜보며 여건이 허락되는 대로 천천히 몸을 풀 테니,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봐 달라.(끝)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