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동행'. 전 호남신학대학교 교수 오현선 대표(공간엘리사벳)의 삶과 학문의 자리는 이 두 글자로 정리할 수 있다. 오현선 대표는 목회자이자 신학자, 기독교교육학자로서 여성·노동자·이주민·세월호·성소수자 이슈와 관련해 목소리를 내 왔고, 연대가 필요한 이들과 현장에서 동행했다.

고등학교 시절, "교육에 중립은 없다"고 말한 브라질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책을 외우다시피 읽었다는 그에게, 학문은 누군가를 편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영락교회에서 죽 신앙생활하다가, 대학교 1학년 때 선교 활동으로 시작한 야학이 그의 삶의 자리를 바꿔 놓았다. 누군가의 편에 서는 일은 오래된 몸짓이 됐다.

어렸을 적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에 몸담아 온 오현선 대표는 장로회신학대학교 학부(B.A.)·신학대학원(M.Div.)·대학원(M.A.)에서 신학과 기독교교육학을 전공했으며, 미국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에서 기독교교육학으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 이주민 사역을 하는 다문화교회에서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목사로 사역했다. 이후 10년을 광주 호남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학을 가르치다가 '교권 침해' 사건을 겪고 사직했다.

지금은 기독교교육학·해방신학 등을 바탕으로 평화·인권 대중 교육을 하는 1인 연구소 '공간엘리사벳' 대표이자, 건물 없는 교회와 평신도 중심 공동체를 지향하는 여울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억압받는 자와 연대해 오고 있는 공간엘리사벳 오현선 대표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억압받는 자와 연대해 오고 있는 공간엘리사벳 오현선 대표를 만났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오현선 대표를 7월 20일 신촌 한 카페에서 만나, 지나온 삶의 여정과 한국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3시간 넘게 나눴다. 인터뷰는 두 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이번 글에서는 가난하게 살았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자신을 신학자이자 목사로 인식하기까지 여정을 담았다. 다음 글에서는 다문화교회에서 이주민 사역을 하며 느낀 점, 한국교회 신학자로서 활동하면서 깨달은 바, 세월호 가족과의 동행 등을 담는다.

- 어린 시절은 어땠나.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외가·친가는 모두 경상도에 있었고, 부모님은 결혼 후 소자본을 갖고 올라오신 이주민이셨다. 경제적으로 눈이 밝거나 지식이 많은 분은 아니었다. 가세가 점점 기울면서 이사를 많이 했는데, 초등학교만 3번 옮겨 다녔다. 어린 눈에도 집 규모가 줄어드는 모습이 보였다. 불안정성 속에 가난하게 지냈지만, 오히려 그것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게 했다. 전과·참고서를 살 수 없으니까 베껴 가는 숙제를 못 해 언제나 혼자 생각하면서 공부해야 했다. 길고 천천히 하는 공부가 여러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어린 시절 중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198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옥인동 산꼭대기 작은 아파트에서 살았고, 서울여고에 다녔다. 광주 5·18 민중 항쟁에 대해 알게 된 대학생들이 서울역 광장에 모여 있었다. 학교 쪽으로 버스가 못 오게 돼서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집까지 걸어가야 했는데, 집 위치 때문에 가는 길에 만난 대학생 언니·오빠들에게 광주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참 많겠구나' 싶었다. 그분들에게 휩쓸려 오가면서 새로운 군부를 비롯해 (당시 국가 폭력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전까지 박정희 대통령을 매우 존경하던 학생이었으니까, '내가 너무 나이브했구나' 하는 인식과 함께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다. 이때 일들로 20대 이후까지 삶의 방향이 정해졌던 것 같다.

-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했는지 궁금하다.

부모님이 신앙을 갖고 있었다. 나는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소위 성령 체험이라고 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한 시점은 중학생 시절이다. 하나님께 간구하자 마음이 뜨거워졌고 혀에도 변화가 생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의식의 그림자가 내가 갈망했던 대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만든 것 같다. 불안정해 보이는 부모님 삶이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나를 안정적으로 보호해 주는 하나님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대학교 1학년 때에야 그리스도인 정체성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구로동 야학에서 나보다 나이 많은 청년 노동자를 만나면서부터다. 가난한 이들에게 선교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야학을 시작했는데, 그건 그야말로 낭만적인 생각이었다. 노동자들의 힘든 삶 앞에서 '하나님은 누구신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마주한 현실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구멍 뚫린 손가락을 꿰매 퉁퉁 부은 손에 붕대를 감고 온 노동자도 있었고, 눈앞에서 각혈하는 노동자도 있었으니까.

'세상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곳이구나',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세상이 이토록 불공평할 수 있을까', '나를 만나 주신 하나님은 왜 이분들에게는 오지 않으셨나'…. 하나님에 대해 고민하면서 5·18을 비롯해 내 안에 파편화해 흩어진 기억을 토대로 성서를 펼치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예수님 주변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주목하게 되더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고,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오셨구나', '중학생 때도 하나님은 나를 연민하고 연대하는 마음으로 찾아오셨던 것이구나' 싶었다. 그렇게 경험 속에서 비판적 사고로 성찰해 보니 '나는 예수님이 찾으시는 그리스도인이겠구나' 생각하게 됐다. 이 같은 생각을 노동자 언니들과 같이하게 됐다.

오현선 대표는 야학에서 만난 노동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오셨는지 성찰할 계기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오현선 대표는 야학에서 만난 노동자들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오셨는지 성찰할 계기를 얻었다고 고백했다.

- 장신대는 어떻게 진학하게 됐나.

탤런트 김민희 씨가 똑순이로 출연한 '달동네'(1980~1981)라는 일일드라마가 있다. 5·18에 대한 인식으로 주변을 어슴푸레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됐을 때, 드라마에서 대학생들이 달동네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장면을 봤다. '어느 대학에 가든지 저런 멋진 일을 해야겠다' 마음먹었고, 어릴 때부터 꿈꿔 온 국선변호사라는 직업을 더 확실히 원하게 됐다. 그런데 학력고사를 칠 때 가정·국어 답을 밀려 썼고, 90점이 어그러져 법대를 준비하던 게 엎어졌다.

재수할 돈이 없으니 다른 대학에 적을 두고 재수하기로 했다. 영락교회 목사가 장신대를 권유했고, 부모님이 신앙인이기도 하니 신학교에 진학한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생각하던 대로 야학을 시작하면서 '법대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깨닫게 됐다. 결국 졸업할지도 안 할지도 모르는 상태로 장신대를 다녔다. 신학교 수업은 재미가 없었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야학을 대학처럼 다녔다.

영락교회 대학부에서 선택한 지역 선교 단체 동아리 중 하나가 야학 서클이었다. 검정고시 야학이 생활 야학, 노동야학으로 바뀌면서 낭만적 선교를 원했던 이들은 다 떠나갔다. 노동 해방을 지향하는 선후배들 중심으로 남아 힘든 시절을 보냈다. 야학을 참된 하나님나라를 위한 일로 생각했는데, 신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교회가 파송했지만, 노동야학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교회 탄압을 받았다. 교회와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절, 야학 쪽 구로경찰서, 장신대 쪽 성동경찰서, 영락교회 쪽 명동경찰서 직원들이 나를 쫓아다녔다.(웃음) 가택수사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어 사회과학 금서, 성명서 등을 모아 잘사는 친구 집으로 옮겨 놓은 적도 있다. 그 친구가 나를 믿어 준 일이 참 고맙다. 잡혀가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문은 어떻게 당하는지 먼저 다녀온 친구들에게 조언을 들으며 마음의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난다.

- 야학을 하고 경찰서 직원들에게 쫓겨 다닐 때 부모님 반응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엄마·아빠는 학력이 매우 낮으셨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진학해 부모님보다 학력이 높아지는 것을 좋아하고 존중해 주셨다. 법대가 아닌 신학교를 갔을 때도 그랬고, 어렸을 때부터 내 판단을 의심하지 않고 반대하지 않으셨다. 경찰서에서 전화 왔을 때 가슴 아파하셨지만 늘 기도만 해 주셨다. 부모님이 마루에서 기도하시던 장면이 떠오른다. 사교육을 시켜 주시거나 비싼 옷을 사 주시지는 않았지만, 신앙인으로 겸손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 신학교 수업이 흥미가 없었다고 했는데, 결국 신대원까지 졸업하고 대학원에도 진학했다. 계속 공부한 이유는.

노동야학으로 전환하고, 노동 탄압 현장에 함께하고, 노동조합 만드는 일에 개입하는 등 활동을 하면서 신학교 다니는 게 의미가 없다고 느껴졌다. 공장에 가서 노동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함께한 선배들이 계속 공부하면서 학술 운동을 하라고 권유해 방향을 틀었다. 당시만 해도 운동권은 조직적 사고를 했다. 돌아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인데, 선배들이 하라면 했다.(웃음)

고민은 많았지만, 신대원에 진학해 민중신학자들과 대화하면서 다른 과제가 생겨났다.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을 만나고 왔던 시기로 기억한다. 수원아카데미에서 통일신학 세미나가 열렸는데, 그때 신학생 스태프로 참여했다. 세미나에서 민중신학자·통일신학자들이 통일·분단 문제에 대한 고민을 나눴다. 세미나가 끝나고 같이 공부하자는 제안을 받아, 향린교회 당회장실에서 박성준·강원돈·홍근수·정호진 목사, 이재정 신부 같은 분과 민중신학·해방신학을 함께 공부했다. 이 과정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결혼도 했다.

그러다 독일이 통일되는 등 세계정세가 바뀌자, 하나님나라 경제체제로 사회주의 생산 체계를 이야기하며 운동을 벌인 사람들이 충격을 많이 받았다. 다들 더 공부하자며 네덜란드·일본 등 외국으로 흩어지기로 했다. 이분들과 공부하면서 나름대로 여성 안수 문제에 연대하는 일에 많이 참여했는데, 당시에는 우리 교단에서 여성 안수를 주지 않아 나는 미국장로교회에서 안수를 받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

- 여성 안수가 목적이라면, 한국의 다른 교단에서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여성 안수를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고 필요성을 느낀 것은 여성신학을 공부하면서였다. 그전에는 내 사고가 제한돼 있어서, 가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여성 이슈를 말하는 것은 순서상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계급 인식에 근거하면 여성 이슈는 차후 과제였다. 그런데 신대원을 졸업했을 때 여성 선배들이 에큐메니컬 그룹에 예장통합 여성이 적다며 나를 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에 간사로 보냈다. 간사로 일하면서 여성신학을 만났다.

여성에 대해 성찰하게 되니까 '우리 교단에도 여성 안수가 필요하겠구나' 싶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독교대한감리회 등 다른 교단으로 가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예장통합 개혁 과제로 이 문제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품은 꿈이 '미국장로교회에서 안수받고 돌아와 여성 안수로 교단을 나눠야겠다'는 것이었다.(웃음) 여성 안수를 이슈화하기 위한 힘을 기르고자 꿈을 안고 갔는데, 미국 갔던 해에 예장통합에서 여성 안수가 통과됐다. 선배들에게 허락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한동안 동지들과 노동자 친구들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오현선 대표는 예장통합에서 여성 안수를 주지 않던 때 미국장로교회에서 여성 안수를 받고자 미국으로 길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해에 여성 안수가 통과됐다. 이후 예상치 못하게 기회가 주어져 미국에서 학위까지 받게 됐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오현선 대표는 예장통합에서 여성 안수를 주지 않던 때 미국장로교회에서 여성 안수를 받고자 미국으로 길을 떠났다. 공교롭게도 그해에 여성 안수가 통과됐다. 이후 예상치 못하게 기회가 주어져 미국에서 학위까지 받게 됐다고 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미국장로교회에서 안수받은 과정은 어땠나.

미국장로교회 소속 LA 토랜스제일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갈보리교회를 담임하기도 했던 이필재 목사가 시무한 교회인데, 전도사를 구한다는 신문 광고만 보고 찾아온 나를 믿고 받아 주셨다. 안수 과정을 밟으면서 '하나님의 목사로서 이렇게 준비되는구나' 깊이 체감했다.

한 사람의 목사를 만들기 위해 총회-노회-교회가 정말 많은 정성을 쏟는다. 후보생으로 지정되면 교회에서 지지 그룹을, 노회에서는 회의 그룹을 만든다. 총회는 법을 통해 구조적으로 살피고, 후보생은 주로 노회와 관계를 맺는다. 목사 고시를 보기 전까지 계속해서 자기 성찰 페이퍼를 내야 하고, 목회 관련 질문을 받고 답해야 한다. 심리 테스트도 거쳐 전문가에게 분석을 의뢰한다.

목사 고시는 2주 동안 진행했는데, 서부에서 시험을 치르면 인적 사항이 전부 가려진 상태로 동부로 간다.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 이름·인종·성별·소속 등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다른 요소가 점수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막고, 세 사람이 채점한 점수의 평균으로 당락을 정한다. 이 모든 게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 과정인데, 노회가 1/3, 교회가 1/3, 내가 1/3 부담한다. 책임·노력을 나누는 것이다.

안수식은 오롯이 나만을 위해 진행된다. 축하를 받으며 인사말을 전하고 축복기도를 하게 한다. 1시간 30분 동안 결혼식만큼 아름다운 하나님의 예전을 경험했다. 목사로서 준비됐다는 생각이 무르익었을 때 안수를 받을 수 있어 정말 감사했다. 장로교 목사가 되는 일이 거룩한 축복으로 느껴졌다. 도움을 준 분들에게 고마웠다. 언제 들춰 봐도 살아갈 힘을 주는 행복한 추억이다.

- 미국 클레어몬트신학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도 받았다. 미국행을 택할 때 계획한 건가.

학위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안수를 받기 위한 여정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친한 선배 이대성 교수(연세대)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가져간 돈이 몇 개월 만에 떨어지면서 남편과 미국 한인 교회 전도사로 지원했다. 남편은 신대원을 졸업했지만, 나는 여자이기 전에 신대원을 거쳐 기독교교육으로 대학원까지 마쳤는데도, 남편만 전도사로 쓰고 나에게는 사모 역할을 요구했다. 신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기타 등등의 일까지 떠맡아 힘들었다. 남편이 영어를 잘해 토플 성적이 높게 나와 먼저 공부하기로 하면서 대학 기숙사에 같이 살았다.

그러다 한인 교회가 많은 LA 지역으로 자리를 옮겨서 미국장로교회에서 안수받는 길을 더 알아보자고 했다. LA로 가서는 남편이 나를 위해 클레어몬트신학대학교에서 두 번째 석사과정을 밟았다. 마침 클레어몬트는 학생 배우자에게 한 과목 무료 수강을 제공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 제도를 통해 메리 엘리자베스 무어(Mary Elizabeth Mullino Moore) 교수의 박사과정 수업을 들었다.

한국에서 이분이 쓴 <Education for Continuity and Change>를 인상 깊게 읽어,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기독교교육이 어떤 학문인지 명확히 설명해 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에서 지속해야 할 전통과 변화시켜야 할 개혁 이슈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감 있게 변화를 일으킬지가 기독교교육 과제라는 내용을 성찰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업을 듣는데, 무어 교수가 학기 중간에 따로 불러 계속 공부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봤다.

여성 안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유로 생각이 없다고 했더니, "너는 공부해도 되겠다"고 말하면서 박사과정에 지원하라고 했다. 공부할 수 있는 '관점'(perspective)이 있다는 게 제안 이유였다. 박사 수업은 소수 인원이 하지 않나. 무어 교수는 친절하게 한 사람 한 사람 다 이야기할 기회를 줬다. 책 읽은 후 나누라고 하는데, 당시 영어를 잘하지 못해 열심히 읽고 할 말을 적어 가서 읽었다. 책을 안 읽은 미국 학생들에게는 나중에 말하라고 하고, 책 읽어 온 사람부터 이야기하게 했는데, 그때 준비해 가는 내 모습을 좋게 보셨던 모양이다.

초대에 응해 석사·박사과정을 같이 지원했다가, 둘 다 승인이 나서 박사로 들어갔다. 토플은 볼 수 있는 만큼만 보라고 배려해 주셨다. 글쓰기 시험은 신기하게도 교육에 대한 질문이 문제로 나왔고, 내가 고등학생 때 읽은 파울루 프레이리 책 내용을 바탕으로 짧은 문장으로 내 논리를 써냈더니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았다.

- 고등학생 때 읽은 책이라면?

파울로 프레이리의 <민중교육론 Pedagogy of the Oppressed>이다. 지금은 <페다고지>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는데, 당시 읽은 것은 지학순 주교가 머리말을 쓴, 1970년대 번역본이었다. 당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보물 같은 책이었다. 고등학생 때 우연히 발견해 읽고 또 읽으면서 외우다시피 했다. 프레이리는 "교육에 중립은 없다"고 말한다. 교육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와 함께하면서 편드는 것이라는 말이다. 무어 교수는 이런 생각을 잘 체화해 가르친 분이었다.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97). 교사 생활을 하다가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가 됐으나, 가지지 못한 자들을 돕기 위해 곧바로 은퇴했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문해 교육 운동을 벌였다. 사진 출처 플리커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Paulo Freire, 1921~1997). 교사 생활을 하다가 법학을 전공해 변호사가 됐으나, 가지지 못한 자들을 돕기 위해 곧바로 은퇴했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문해 교육 운동을 벌였다. 사진 출처 플리커

-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해 보니 어떻던가.

무어 교수는 항상 서클 방식으로 가르쳤다. 교수를 직함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게 했고, 교수석·학생석 구분 없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게 한 것이다. 다리를 책상에 올리는 학생이 있을 정도로 자세도 편안하게 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분리돼 있지 않은, 교육과정에서 교육 목적이 드러나는 방식이었다. 그게 클레어몬트 학풍이기도 했다.

프랭크 로저스(Frank Rogers, Jr.) 교수 지도로 학위논문을 썼고, 논문 쓰는 사회과학 방법론은 엘리자베스 콘트 프레이저(Elizabeth Conde-Frazier) 교수에게 배웠다. 참여 행동 연구(Participatory Action Research)는 사회학 질적 연구에서 더 들어가 사회 이슈·문제를 당면한 사람 편에서 글을 쓰게 한다.

중립적으로 균형을 잡고 판단해 주는 게 학문의 역할이 아니라는 점을 뚜렷하게 확인했다. "모두를 위한 교육은 누구를 위한 교육도 아니다"는 점을 배울 수 있었다. 프레이리를 접하면서 이에 대한 감을 잡았고, 야학에서 체화했지만, 박사과정에서 온전히 해방적으로 깨달아 기쁨을 누렸다.

- 논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한다면.

서구 기독교교육 일반론에 계급 인식이 없다는 사실과 계급 이론을 다룬 민중신학에 페미니즘 관점이 없다는 사실을 비판한 것이다. 서구 이론은 가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민중신학은 해방을 이야기하지만, 가부장 문화의 계급 관점 사고가 지닌 근원적 한계를 보려 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을 담아낸 '백인 여성' 기독교교육학자 이론에는 실천성이 없다. 이렇게 세 부분을 비판하며 창조적으로 계승하려 했다. 계급성·페미니즘·현장을 지향하는 교육 이론을 쓴 것이다.

- "백인 여성 기독교교육학자 이론에 실천성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한국교회에서도 잘 볼 수 있는 지점이다. 교회는 사회구조로부터 억압받는 사람, 가난한 자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동질성 없이 항상 시혜자 입장에 서려고 한다. 교회 안 민중 및 소외된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혼자 자녀를 키우는 사람, 손자를 키우는 조부모, 비정규직 싱글 청년 등에게 선교비를 받아 교회 바깥의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쓴다. 교회 안 사람들과는 동일시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분리돼 있다. 어떤 메시지를 줘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당시 서구 여성신학 이론이 그렇게 들렸다. 현장 이야기 없이 페미니즘을 가르치면서, 도와주는 주체로 서려는 시혜적 태도로 보이기도 했다. 페미니즘 이론을 더 공부하면서 포스트콜로니얼리즘(탈식민주의)적 사고도 함께하는 무사 두베, 벨 훅스 등을 접했다. 특히 흑인여성해방신학 관점을 지닌 글을 통해 사고가 더 열리게 됐다.

우리는 언제나 동질성 없는 자기 우월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성찰해야 한다. 누구나 상대방을 도우면서 우월감을 느낄 위험이 있다. 이런 면모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국교회는 거대한 자본으로 시혜적 차원에서 나눠 주기만 하는 기구로 존재해 왔다.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니 참다운 하나님 교회 모습에서 멀리 떨어질 수밖에 없다.

- 2011년 출간한 <기독교교육, 엘리사벳을 찾아 나서다>(한국장로교출판사)에도 관련 내용이 나오는 것 같다.

박사 학위논문을 기반으로 쓴 책이다. 가난한 여성의 자기 성찰을 돕는 민중여성교육론이다. 다양한 현장에 처한 여성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게 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친화적인 대상은 교육받았고, 결혼했으며, 돈이 많고, 아이가 있는 남자와 그 가족이다. 계급적으로 가난하고 젠더적으로 여성인 사람에게 교회는 친화적이지 않다. '가난한 여성 노동자'를 위한 교육론을 담았다. 그 노동자는 이혼했을 수도 있고, 매 맞았을 수도 있고, 또 다른 폭력을 당했을 수도 있다. 스무 살에 만났던 여성 노동자들이 내 스승이었기에 그들과 함께 읽을 책을 쓰고 싶었다.

지지 시스템이 없어 힘든 처지에 놓인 한 사람이 위로받고 치유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썼다. 아픈 경험을 미화하지 않고, 아픈 경험에서 삶의 에너지를 발견하는 지혜를 얻었으면 했다. 내면 깊은 곳의 자기 모습은 정직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다. 들여다보면 아프니까 묻어 버린 채 사는 것이다. 그런데 묻어 놓은 그것이 삶을 더 불행하게 만든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사회적으로 연대해 희망을 찾아가는 교육론이 필요하다.

종교적·신학적 질문으로 구성한 MBTI, 내면의 그림자 살피기, 영적 자서전, 자기 성찰 일기 등 여성 관점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프로그램도 소개했고, 혼자서 할 수 있도록 이론적으로도 자세히 안내했다. 실제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논문 쓰기 전에 한국에 왔다. 사회적·경제적으로 안정적인 강남 여성 주부 모임, 금천구 독산동에서 만난 노동 여성 중심 모임, 이렇게 두 그룹을 만들어 교육 워크숍을 진행했다. 두 그룹 반응에 맞춰 프로그램 순서가 달라졌고, 삶의 자리가 다르니 교육 후 평가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한 그룹은 시어머니·남편·부모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꺼내 놓기도 했지만 '어떻게 가족을 더 행복하게 꾸려 갈 수 있을까'에서 그쳤다. 교회 공동체 내에 어떻게 적용할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페미니즘이 싫다며 매우 방어적으로 반응했다.

다른 한 그룹은 사회적 연대까지 나아갔다. 가사노동 품앗이를 비롯해 연대를 위한 아이디어도 자발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결혼에는 실패했지만, 이혼에는 성공했다"고 발상을 전환하는 참여자도 있었고, '외할머니-친정엄마-본인-자녀'로 대물림해 온 폭력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자신의 변화를 다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을 요청하는 참여자도 있었다.

- 이 책에서 '여성을 위한 기독교교육'의 지향점을 잘 표현한 본문으로 누가복음 1장 엘리사벳과 마리아 이야기를 언급한다. 특히 '엘리사벳'에게 주목했는데.

의인이라 불린 엘리사벳은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다. 노화한 몸으로 불임을 겪다가 수태고지를 받아 임신하게 된 여성이다. 아이 이름을 지을 때 문중 전통을 거역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분명하게 자기 목소리를 낸다. 가부장 문화 전통에 속한 여성이자 한 사람의 아내인데도, 주도적으로 자기 뜻을 펼쳐 나갔다. 엘리사벳과 마리아 이야기에 담긴 뜻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환대 정신의 실현이었다.

'환대'는 구약에서 파라오의 압제에서 해방된 히브리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며 얻은 삶의 지혜다. 어디 있든지 서로 환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만나와 메추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생존을 위해 택한 삶의 방식이다. 신약에서도 소중한 기독교적 가치로 제시한다. 마태복음 25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요,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는 표현은 하나님나라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환대를 드러낸다.

엘리사벳은 환대 정신을 담지한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수태고지를 받아 임신한 후에 요셉이나 친정 부모를 찾아가지 않고, 먼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간다. 마리아는 임신 초기 3개월, 엘리사벳은 임신 후기 3개월을 함께 보낸다. 엘리사벳은 결혼 전 약혼 관계에서 임신해 비혼모가 될 수도 있는 마리아를 환영하고 축복해 준다. 사회적으로 둘은 각각 불임의 수치, 비혼모의 수치를 감당한 사람으로서 서로 함께한다.

마리아 처지에서 임신은 당시로는 죽을 수 있는 죄인데, 엘리사벳은 포용성을 드러내고 죄를 묻지 않고 잘 분별해 낸다. 마리아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보지 않고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는 지혜를 갖고 있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함께 찬가를 만들어 부른다. 마리아 찬가는 하나님께서 비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쓰신다는 고백으로 시작해, 가진 것을 놓게 하고 주린 자를 배부르게 한다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진정한 환대는 이렇듯 해방을 낳는다.

해방 이야기, 마리아 찬가는 여성만의 전통이 아니라 기독교의 위대한 전통이다. 누가 공동체에서 엘리사벳을 부각한 데는, 이를 실천하도록 의도하는 삶의 자리가 있었을 것이다. 엘리사벳의 처소는 교회의 원형(archetype)을 제시한다. 닮아야 할 교회 모습, 기독교교육 정체성으로 생각한다. 내 연구소 이름을 '공간엘리사벳'으로 지은 것도 이런 이유다.

오현선 대표의 저작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주 여성을 대상으로 한 부모 교육 프로그램을 담은 <이주 여성과 함께하는 부모 교육>, 민중여성교육론을 바탕으로 기독교 여성의 자기 성찰을 돕는 <기독교교육, 엘리사벳을 찾아 나서다>, 이주민 문제를 다루는 논문들을 엮은 <다름·다양성·관용>, 청소년 평화교육 교재 <올리브유>(공저). 뉴스앤조이 여운송
오현선 대표의 저작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주 여성을 대상으로 한 부모 교육 프로그램을 담은 <이주 여성과 함께하는 부모 교육>, 민중여성교육론을 바탕으로 기독교 여성의 자기 성찰을 돕는 <기독교교육, 엘리사벳을 찾아 나서다>, 이주민 문제를 다루는 논문들을 엮은 <다름·다양성·관용>, 청소년 평화교육 교재 <올리브유>(공저). 뉴스앤조이 여운송

- 자기 자신을 신학자이자 목회자로서 확실하게 인식한 시점은 언제인가.

안수받기 위해 미국으로 삶의 자리를 옮긴 터라, 목회자 정체성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안수와 학위를 받은 후 '목사로서의 신학자', '신학자로서의 목사'라는 인식으로 지내 왔다.

미국에서 목사 안수와 박사과정을 동시에 진행해 각각 5년, 5년 6개월이 걸려 2003년 12월 안수를 받았고, 2004년 5월 학위를 받았다. 교회·대학에서 여러 요청이 왔지만, 친정엄마가 쓰러지는 등 부모님이 위기 상황이라 학위를 받고 혼자 귀국했다. 남편은 논문을 계속 써야 하기에 남았고, 딸도 대학 갈 때까지 미국에 있기로 해서 기러기 생활을 하게 됐다.

귀국하니 안산에서 조직 운동을 같이했던 이들이 환영해 줬고, 그중 박천응 목사가 목회를 제안했다. 자신은 NGO를 운영할 테니 교회 예배를 맡아 달라고. 그렇게 이주민 사역을 하는 다문화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부임 첫해, 처음으로 '이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먼 곳까지 돌아서 안수받게 하셨구나' 느낀 사건이 일어났다.

임신 6개월의 몸을 이끌고 우간다에서 한국으로 오신 분이 있었다.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해 교회가 운영하는 쉼터에서 지냈는데, 태어난 아이 다니엘라가 반년도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다. 기관지 문제가 심했고, 숨 쉴 때마다 고통을 받아 자라지 못한 채 자그만 모습 그대로 숨을 거뒀다. 그 아이의 마지막을 부모와 함께했다. 서울대병원에 있는 아는 의사 선생님에게 치료 기회를 얻어 구급차를 타고 갈 때 동행했는데, 그 동행이 부모에게 위안을 준 것 같다.

아이의 장례는 아프리칸 교우들이 참석해 소박하게 진행됐다. 나는 아이에게 안수하고, 장례를 치르고 화장한 후 땅에 뿌려 줄 때까지 목사로서 집례했다. 예전이 끝나고 '이 한 번을 위해 목사로 세워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82년 신학교에 입학해 21년이 걸려 안수를 받았다. 그 오랜 시간이 다니엘라를 하나님 품으로 잘 보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영어를 할 수 있는 여성 목사로서 다니엘라의 부모와 고국에 있는 할머니·할아버지를 위로하는 데 오롯이 쓰임 받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고백하며 혼자서 많이 울었다.

목사는 생애 주기에 필요한 예전과 일상을 살아가기 위한 메시지를 신학적으로 해석해 설교할 수 있어야 한다. 말씀과 성례를 신학적으로 이해해 베풀 수 있는 목사로서 다니엘라 가족과 함께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다니엘라 가족은 현재 고국으로 돌아가 산다. 지금은 페이스북으로 연결돼 있는데, 당시 하나님께서 다문화교회 목사로 그 가족의 한 부분으로 나를 존재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들과 동행하는 사건을 통해 목사이자 신학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명확하게 인식하게 됐다.(계속)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