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강동석 기자] 생태여성신학자 구미정 교수(숭실대 기독교학과 초빙)는 자기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이산離散'을 꼽았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 사업 실패의 영향으로 이사를 반복하다가, 어머니가 서울에 직장을 구하면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언니와 함께 춘천 외할머니댁에서 성장해야 했다. 일찍 철이 들어 반장과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면서도, 빵·책을 팔며 생계에 힘을 보탰다. '조손 가정'과 '가난'이 꼬리표가 돼 그늘을 남기기도 했다.

성서가 말하는 이스라엘의 삶도 '떠돌이'·'이산'이었기에, 그가 놓인 삶의 자리는 성서와 하나님나라를 보는 '눈'을 길러 줬다. '이산'의 삶을 살았던 윤동주 같은 이들이 꿈꾼 나라는 자연·약자가 존중받으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곳, '별'처럼 빛나는 하나님나라였다. 이는 생태여성주의적 상상력이 그려 내는 미래와 닮아 있었다. 구미정 교수는 오늘날의 생태·기후 위기를 지적하며, 인류가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 '더불어 살 줄 아는 인간')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미정 교수는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독교학과에서 기독교윤리학으로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석사·박사 학위논문은 각각 '생태학적 여성 해방 윤리의 모색'과 '생태여성주의의 기독교사회윤리학적 수용 가능성 모색'으로, 한국에서는 드물게 생태여성신학의 관점이 담겼다. 2005년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자로도 사역해 온 구 교수는 현재 수원 이은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이은교회에서 1월 4일 만난 구미정 교수는 시종일관 밝은 웃음을 보이며 3시간 넘는 긴 인터뷰에 응했다. 인터뷰는 두 편으로 나눠 게재한다. 첫 기사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삶을 정리했다. 생태여성주의적 상상력이 지향하는 세상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째 기사에서는 그의 글쓰기와 목회 이야기 등을 싣는다.

구미정 교수(숭실대 초빙)를 수원 이은교회에서 만났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나.

춘천에서 태어났는데, 사업가였던 아버지를 따라 가족 모두 서울로 이주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석유파동'으로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이 일로 부모님이 헤어졌고, 결국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인천 공동묘지 근처로 이사해 어머니와 언니, 나 이렇게 세 식구가 달동네에서 살았다. 이때는 신나게 잘 놀았던 기억밖에 없다. 아이들과 어울려 이 산 저 산을 헤집고 다녔다.

공장에 다니며 착실하게 딸들을 키우는 싱글 맘을 눈여겨본 이웃 목사님이 영종도에 있는 교회를 소개해 줬다. 어머니가 관리집사 겸 전도사로 섬 목회를 하게 됐다. 인천에 살던 담임목사님은 주일에만 섬에 왔는데, 그마저도 눈·비가 오면 배가 끊어져 어머니가 거의 모든 예배를 전담했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나는 장결핵에 걸려 요양이 필요했다. 몸이 아프니 예전처럼 뛰어놀 수 없었다. 체육 시간이면 혼자 교실에 남아 책을 읽거나 칠판에 낙서하며 '고독'을 삼켰다. 어머니는 바빴고, 나는 아팠기 때문에, 언니가 집안 살림을 도왔다.

국민 의료보험 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약값이 만만치 않았다. 할 수 없이 어머니가 '투잡'을 뛰셨다. 취로사업에 동원되어 제방 쌓는 일 같은 걸 하며 내 약값을 대셨다. 학교에 오갈 때는 산을 4개나 넘어야 해서 새벽 기도가 끝나자마자 집을 나섰다. 높은 학년 순서대로 나란히 줄을 서서 걸어 다녔다. 가끔 지나가는 트럭을 얻어 타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딸기밭을 지날 때면 일하던 아저씨·아주머니들이 딸기를 실컷 따먹고 가라고 불렀다. 다들 살림은 빠듯해도 인심은 넉넉했다.

놀잇감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교회에 딸린 사택에 살아서였는지 나는 예배와 모임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그때는 교회가 문화 활동의 본거지였다. 가을이면 아이들은 하굣길에 신발주머니마다 솔방울을 가득 주워 교회로 날랐다. 난로에서 타닥타닥 타들어 가던 솔방울 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그해 겨울 성탄절 행사로 왁자지껄하던 교회당 분위기는 또 어떻고.

섬에서 꼬박 1년을 지내는 동안, 내 건강이 많이 좋아졌지만, 우리는 또다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됐다. 어머니를 그곳으로 이끌었던 목사님이 서울의 한 신학교 식당에 조리사 자리를 알선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울 집값이 장난이 아니지 않나.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어 언니와 나는 춘천 외할머니댁에 맡겨졌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우리는 그렇게 이산가족이 되었다.

구 교수는 어머니가 영종도 섬 목회를 하시던 시절을 웃으면서 회상했다. 그 시절 영종도는 자연과 마을 공동체에 대한 좋은 기억을 심어 줬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구 교수는 어머니가 영종도 섬 목회를 하시던 시절을 웃으면서 회상했다. 그 시절 영종도는 자연과 마을 공동체에 대한 좋은 기억을 심어 줬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춘천에서의 학창 시절은 어땠나.

초등학교를 3번 옮긴 터라, 모든 게 낯설고 힘들었다. 춘천이 고향 같지 않았다. 춘천여중·춘천여고를 거치는 내내, '결손가정'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지금은 그런 차별 언어 대신에 '조손 가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지만, 그런다고 아이의 상처가 쉽게 봉합되겠나. 외할머니가 딱히 구박해서라기보다는 그냥 존재 자체에 주름이 졌다. 해체된 가족, 지독한 가난, 병약한 몸에서 오는 슬픔과 외로움에 인이 박였다.

그럴수록 학교 공부에 에너지를 쏟았다. 나를 확인하는 수단이 공부였다. 어쩌면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한 위장 전술이었는지 모른다. 한 반에 60~70명씩 열두 학급이 있던 시절, 반에서 1등은 기본이고 전교 1등을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서울에서 힘들게 노동하며 생활비를 보내는 어머니가 안쓰럽더라. 어머니 인생도 버거운데, 나까지 짐이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철이 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점심시간마다 학교 매점에서 '알바'를 했다. 3교시가 끝나면 미리 도시락을 먹고, 4교시가 끝나자마자 매점으로 달려가 빵을 팔았다. 팔다가 남으면 빵집 사장님이 할머니께 갖다 드리라며 따로 챙겨 줬다. 집에 돌아와서 단팥빵, 크림빵 같은 걸 풀어놓을 때 마음이 뿌듯하더라. '내가 체력만 되면 신문 배달, 우유 배달이라도 할 판인데, 이거라도 즐겁게 하자'고 생각했다. 중3 때는 백과사전 같은 책들도 팔았다.(웃음)

- 이사도 많이 하고,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내 삶을 구성하는 키워드의 하나가 가난과 이산이다. 6·25 전쟁 때 이산가족이 된 분들 앞에서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겠지만, 내 영혼에 이산의 아픔이 새겨진 건 확실하다. 어디나 고향 같지만, 어디에도 고향이 없는 '뿌리 뽑힘'의 연속이었다. 지금 몸담은 대학에서도 비정규직 강사의 불안정한 지위를 아슬아슬 이어 가고 있다.

어릴 때는 이산의 경험이 참 슬펐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이들이 부러운 건 두말하면 잔소리고. 이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공부로 숨었던 거 같다. 춘천은 어차피 떠날 땅이라고 생각해 친구들을 깊이 사귀지도 않았다. 중고등학교 때 계속 반장을 하고 전교 부회장을 했지만, 좋아서나 적성에 맞아서 했던 건 아니다. 아이들이 뽑아 주니까 그냥 꾸역꾸역했는데, 늘 물에 뜬 기름처럼 겉돌았다.

신학을 공부하다 보니, 나의 이런 경험이 성경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더라. 아브라함이 '떠돌이'로 산 걸 빼놓고는 그가 왜 '믿음의 조상'인지 알 수 없다. 이산 혹은 난민의 자리는 정주 혹은 국민과 반대된다. "땅은 하나님의 것"(출 19:5; 레 25:25)이라는 말씀이 진리로 다가오려면 기꺼이 떠돌이의 자리에 서야 한다.

위대한 예술도 이산의 경험에서 나올 때가 많지 않나. 올해가 '소띠' 해인데 '황소'의 화가 이중섭도 그렇지만,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도 계속 이 나라 저 나라를 유령처럼 떠돌며 살았다. 그와 '노란 집'에서 화가 공동체를 실험한 폴 고갱도 그렇고.

우리 시대 청년들은 이산과 유목이 삶의 조건이다. '철밥통' 직업을 가질 수가 없으니 'N잡'을 뛰지 않으면 안 된다. '스펙'은 어느 시대보다 뛰어난데,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떠돈다. 중세 때는 '부모 찬스'에 기대어 신분이 세습됐다. 근대는 개인의 실력과 역량으로 신분 이동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그렇지 못했다. 뒤틀린 근대의 질병들이 적폐로 남아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절망한다.

사회학의 눈으로는 이런 삶의 조건들이 화가 나지만, 신학의 눈으로는 오히려 은총이라는 걸 깨달았다. 에덴에서 사람은 '땅을 갈 사람', 곧 '농의 사람'으로 창조됐다. <농촌과목회>라는 잡지에서 '농의 신학'을 만났는데, 농이라는 글자를 풀면, 별 진 자 위에 노래 곡 자가 붙어 있다고 하더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에서 번듯한 자리를 차지하는 데 욕심을 내지 않는다.

반 고흐가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다면, 윤동주는 '별 헤는 밤'을 썼다. 두 사람 모두 이산과 유목의 상징이다. 이들은 평생을 떠도는 자, 유리하는 자, 방랑하는 자로 살면서 별을 노래했다. 반 고흐의 별에는 기독교에 대한 환멸이 들어있다. 지상의 기독교가 너무 타락했기 때문에. 윤동주의 '별'에는 "패, 경, 옥" 같은 이국 소녀들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같은 동물들이 함께 존재한다. 이사야서 11장을 보는 기분이다.

이때의 별은 탈근대를 가리킨다고 본다. 근대가 빚은 제국주의·식민주의의 유산, 국경으로 둘러싸인 차별과 이산의 아픔을 뛰어넘는다. 우정과 환대로 공존하는 세상이다. 이산과 유목의 아이콘인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쳐들어가 이스라엘을 건국하면 안 되는 거였다. 그건 다시 근대 제국주의로 회귀한 거다. 이 순간에도 거기서 얼마나 폭력이 난무하나.

구미정 교수가 목회하는 이은교회 교인들이 직접 만든 십자가들. 예배당 한쪽 벽에 자리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대학을 이화여대 철학과로 진학했다. 이유가 있다면.

이화여대를 선택한 것은 고등학교에서 겪은 차별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고3 때 일이다. 우리 어머니가 강원도교육청이 수여하는 '장한 어머니상'을 받게 됐다. 교장 선생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서울에서 일하는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상 받으러 오셔야 한다고. 야간 자율 학습을 하고 있는데, 담임선생님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수상자가 바뀌었다며, 미안하게 됐단다. 그해의 수상자는 이과에서 1등을 달리던 아무개의 어머니가 받았다. 그분은 고등학교 교사였다.

학교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고 변두리 노동자로 일하면 '장한 어머니'가 될 수 없나. 나보다도 어머니가 받을 상처에 더 마음이 쓰였다. 때마침 수능 - 우리 때는 학력고사라고 불렀다 - 이 끝난 시점에 어느 방송국에서 '장한 어머니상' 수기 공모전이 열렸다. 상금도 대학 등록금의 절반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거기에 글을 써서 보냈는데 덜컥 최우수상에 뽑혔다. 이때 '효도'한 효력이 꽤 오래가더라.(웃음)

어쨌든 제도권 교육에 나름 소심하게 반항한다는 게 서울대를 안 가는 선택이었다. 그해에 춘천여고에서 19명이 서울대에 합격했다. 학교 측에서는 서울대에 한 명이라도 더 집어넣으려고 마지막까지 내 입학원서를 붙잡고 회유했지만, 나는 이화여대를 가겠다고 우겼다. 여중·여고를 나와서 그런가, 이상하게 남녀공학은 보이지 않더라. 굳이 이화여대를 가야겠으면 영문과에 들어가라는 권유마저 뿌리치고 철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그때는 뜯어말리는 선생님들이 이상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가난한 집 아이한테 철학이 웬 말인가. 실용 학문을 택해도 시원찮을 판에.(웃음) 하지만 나는 무슨 대책 없는 낙관주의인지 몰라도 다른 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학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독일로 유학 가서 철학자가 되는 게 꿈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도 반대하지 않았다. 철학이 뭔지는 몰라도 대충 괜찮은 학문이라는 정도는 아시더라. 만약 어머니한테 매 학기 등록금을 달라고 할 처지였다면 사립대학에 들어가는 게 부담스러웠을 텐데, 4년 장학금이 보장됐다. 어차피 어머니가 말릴 근거가 없었다.(웃음)

- 이화여대에 들어가 보니 어떻던가.

들어가자마자 잘못 왔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기대와 달랐다. 한쪽에서는 민주화 투쟁이 한창인데, 다른 쪽에서는 '이화 100주년' 어쩌고 축제 분위기였다. 운동권 선배들이 '의식화 교육'을 한다며 나를 포섭했다. 읽고 오라고 준 책이 <빼앗긴 일터>(창작과비평사)였다. 몇 장 넘기다가 못 읽겠더라.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삶인데, 저들은 이런 이야기를 책으로 공부해야 아는구나. 기층 민중의 삶을 관념으로 접하고 연민으로 운동하는 모습이 허위의식처럼 느껴졌다.

부잣집 딸들은 왜 그리 많은지. 이대 필수교과에 수영이 들어있다. 교내 실내 수영장에 들어서면, 서울, 그것도 강남 출신 애들은 너무 귀태가 나는 거다. 나같이 지방 출신에다가 물에 뜨지도 못하는 애들은 촌티만 날리고.(웃음)

이대 필수교과에 테니스, 수영, 사교댄스 같은 과목이 있는 건 사실 일제강점기 유산이다. '관료 부인'으로서 '교양 있는 신여성'이 되도록 신체를 훈육한 거다. 국가 시책에 부합하는 여성상 만들기에 이대가 앞장섰다. 물론 학교 다닐 때는 이런 문제의식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수영 과목이 필수인 이유도 여자가 물에 빠졌을 때 스스로 살아남으라는 좋은 의도이겠거니 싶었다. 수영복에서도 계급 차이가 난다는 게 슬프기는 했지만.

언니가 결혼을 일찍 해서 어머니와 단둘이 살게 됐는데, 이게 간단치 않더라. 어머니 눈에 난 여전히 초등학생이었다. 대학생으로서 데모를 실컷 할 수 없다는 게 커다란 부채 의식으로 남았다. 그렇다고 주말마다 미팅 약속이나 잡는 부르주아 문화에 속할 수도 없었다. 4년 내내 대학 언저리를 떠돌았다. '회색분자'라는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래도 '철학하는 습관'을 익힌 건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뿌리에서부터 새롭게 질문하기.

페미니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이대의 공기에는 페미니즘이 묻어 있다. 수영 수업이 있는 날, 하필이면 생리가 겹쳐도 어떻게든 물에 들어가야 한다. 여자라서 못한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가 '맷집'을 키워 준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으로 활동하다 보면, 원치 않게 여성 차별의 '구조'와 부닥치게 된다. 그때 무너지지 않으려면 맷집이 필요한데, 여성에게는 페미니즘 공부가 힘이 된다. 페미니즘은 자기 안의 여성을 만나게 하고 키워 주니까.

대학 4학년 때 기독교학과 정현경 교수님의 조직신학 수업을 들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모교로 돌아온 정 교수님은 존재 자체가 충격이었다. 나는 매사에 애매하고 지질하고 위축돼 있는데, 그분은 당당하고 솔직하고 활기가 넘쳤다. 어느 날 교수님이 나를 자기 연구실로 불렀다. "너, 철학과 학생이지? 리포트를 너무 잘 써서 누군지 궁금했어. 내가 박사이지만, 너보다 잘 쓸 수 없을 거야. 혹시 조직신학을 전공할 마음은 없니?"

이 정도로 솔직한 게 그분의 매력이다. 솔직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는 걸 배웠다. 칭찬은 과분했지만, 나는 소심하게 거절했다. 교수님의 페미니즘이 어쩐지 내 옷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더라. 그 느낌에 이름을 붙이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언젠가 새길교회 주일예배 설교를 마치고 교우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한완상 선생님이 그러시더라. 새길교회에 여성신학자들이 종종 와서 설교하는데, 구미정은 다르다고. "뭐가 달라요?" 했더니 "예수의 십자가가 살아 있어. 그게 힘이야" 하시더라.

석사 학위논문을 쓰면서부터 서서히 내 길이 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생태'는 관계다. 모든 존재는 다 관계 안에 있다. 기독교가 말하는 회개도 단지 심리적 반성이 아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다시 잇는 혁명적인 작업이다. 연못의 물고기를 생각해 보자. 물고기는 연못과 떼어 놓고 이해할 수 없다. 물고기가 섭취하는 영양분이 적절한지도 보고, 천적 관계도 헤아려야 물고기의 건강 상태가 나온다. 모든 존재론의 기본은 관계론이며 생태학이다. 이화의 품에서 자라는 동안,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를 만난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겠다.

이은교회 한쪽 벽에 있는 루터의 '95개 논제'와 주기도문. 루터는 95개 논제를 통해 당대 신앙의 기존 틀에 문제를 제기하고 종교개혁을 열어젖혔다. 구 교수는 이런 루터의 모습이 예수와 닮아 있다고 했다. 그는 대학 시절, 기존 윤리적 틀을 열어젖히는 예수의 모습을 만나면서 신앙의 전환기를 맞았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이은교회 한쪽 벽에 있는 루터의 '95개 논제'와 주기도문. 루터는 95개 논제를 통해 당대 신앙의 기존 틀에 문제를 제기하고 종교개혁을 열어젖혔다. 구 교수는 이런 루터의 모습이 예수와 닮아 있다고 했다. 그는 대학 시절, 기존 윤리적 틀을 열어젖히는 예수의 모습을 만나면서 신앙의 전환기를 맞았다. 뉴스앤조이 여운송

- 철학과를 졸업하고, 기독교학과로 진학했다. 더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있다면.

대학생이 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유치부부터 고등부까지 다 섭렵했다.(웃음) 공과 교재로 가르치는데, 성에 안 차더라. 어릴 때부터 성경 암송 대회에 나가 상도 많이 받고 그랬지만, 머리가 크니까 주입식·암기식 교육에 회의가 들었다. 이를테면, 창세기 1장 창조 이야기에서 첫째 날에 하나님이 '빛'을 만드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태양은 넷째 날에 창조되었는데, 그럼 첫째 날의 '빛'은 태양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이들이 물어보면 대답이 궁했다. 모태신앙으로 자랐고, 주일이면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 교회학교 교육을 받았는데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부끄러웠다. 

이화여대가 기독교 대학 아닌가. 1학년 필수 교양과목에 기독교 수업이 있다. 나는 정치신학자로 유명한 서광선 교수님한테 배웠다. 전두환 정권에 저항한 일로 해직되셨다가 복직한 분이다. 그분이 <소외된 사회의 예수>(종로서적)를 읽고 소감을 쓰라는 숙제를 내 줬다. 읽어 보니, 예수는 완전 '빨갱이'더라.(웃음)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구분해야 한다는 지당한 말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렸다. 매시간 '난 도대체 뭘 믿은 거지?' 갈등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까지 교회 안에서 알던 예수와 결이 다른 예수가 줄줄이 나왔다. 고갱이 그린 '황색 그리스도', 러시아 유대인 난민촌 출신의 샤갈이 그린 '백색 예수', 흑인신학이 부르짖은 '흑인 예수', 에드위나 샌디스가 조각한 '크리스타'….

'나는 왜 이런 고민을 한 번도 안 하고 살았을까', 신앙에 지진이 일어나면서 변증법적 사고의 여정에 들어섰다. 2학년 때부터 기독교학과를 부전공으로 택해 부지런히 수업을 들었다. 철학에서 도전받는 것들도 존재에 엄청난 지각변동을 일으키지만, 신학의 도전은 더했다. 모름지기 '구원'이 걸린 일 아닌가.(웃음)

- 대학원에서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했는데.

철학과를 다녀서 그런지, 종교철학이나 조직신학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그건 인식론적인 거고, 실존적으로는 윤리학이 늘 걸렸다. 어린 시절의 나는 도덕주의자였다. 국가나 학교, 교회 같은 제도가 이상화한 인간상을 내면화해, 어디서나 '모범생' 소리를 들었다. '교회 다니는 애'는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길거리에 쓰레기가 널려 있는 꼴을 못 봤다. 그걸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직성이 풀렸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 '꼴통'인 건데, 그때는 주변에서 '착하다'고 칭찬하니까 그게 정상인 줄 알았다. 오죽하면 세계도덕재무장한국본부에서 주는 '선한 청소년상'을 받았겠나.(웃음)

우리 때는 불시에 책가방 검사를 하는 일이 많았다. 한번은 우리 반 친구 가방에서 피임약이 나왔다. 교실이 발칵 뒤집혔다. 지금이라면 "준비성이 철저하군. 이런 것도 알아서 챙기고" 했을 텐데, 그때는 그렇게 유연하지 못했다. 그 애가 정학을 맞은 게 '도덕적으로 옳은 처사'로만 보였다.

예수를 알아 갈수록 내 위선이 부끄러웠다.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예수가 자꾸 '태클'을 걸었다. 예수는 해체주의자 같았다. '이게 정답이다' 싶으면 망치로 때려 부순다. 표준·규범·정상에 매인 바리새주의를 확 열어젖히고 '새 사람'이 되게 한다.

겉으로 신앙이 좋아 보이는 것과 진짜 신실하게 사는 건 별개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죄를 덧씌우는 심리 혹은 구조를 규명하고 싶어서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하게 됐다. 인간의 행동보다는 존재에 관심이 많았다.

배 속에 플라스틱 쓰레기를 가득 품은 알바트로스의 사체. 사진가 크리스 조던의 다큐멘터리 '알바트로스 Albatross'의 한 장면으로, 오늘날의 생태 위기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배 속에 플라스틱 쓰레기를 가득 품은 알바트로스의 사체. 사진가 크리스 조던의 다큐멘터리 '알바트로스 Albatross'의 한 장면으로, 오늘날의 생태 위기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유튜브 동영상 갈무리

- '생태여성주의'로 석사·박사 학위논문을 썼다. 학위논문을 쓰게 된 배경과, 논문 내용을 소개해 준다면.

생태학·여성학 모두 20세기 후반에 대두된 관심이다. 심지어 그 둘을 결합한 생태여성주의는 역사가 무척 짧다. 석사 논문을 쓸 때가 1992년인데, 그때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환경 정상회담'이 열렸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참석해 연설했다. 환경문제가 신앙과 무슨 연관이 있나 싶었다. 아니 그때까지 한 번도 이걸 궁금하게 여겨 본 적이 없었으니까. 교회에서는 늘상 '개인·영혼 구원' 얘기만 하니까 자연·환경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못 듣지 않나. 심지어 자연과 환경의 차이도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정답이 아니라는 감이 들었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사랑, '아가페'는 자기희생이 핵심인데, 페미니즘은 여자라고 무조건 희생하지 말고 자아실현을 하라니,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스러웠다. 그 지점에서 '생태여성주의'를 만났다. 눈이 확 떠지는 기분이었다.

생태여성주의는 한마디로 생태학과 여성학 양쪽의 약점을 서로 보완하는 사상 체계다. 생태계 보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특수한 사회문제를 소홀히 다룰 수 있다. 지구가 죽어 가는 마당에 개인의 고통쯤은 대수롭지 않다는 식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 보편성의 오류를 여성학이 잡아 준다. 여성학은 '지구 위 최후 식민지'라는 여성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특수성을 지닌다. 그런데 특수성은 또 잘못하면 당파적 이익으로 흐르기 쉽다. 이 위험을 깨닫도록 돕는 게 생태학이다.

산에는 온갖 존재가 어우러져 산다. 무엇 하나 낭비가 없다. 키 큰 나무는 키 큰 나무대로, 키 작은 나무는 키 작은 나무대로, 꽃은 꽃대로, 풀은 풀대로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피고 자란다. 구별되지만 차별하지 않는다. 차이를 욕망하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석사 논문을 써 내려가는데, '동학'이 보이더라. 경천애인敬天愛人은 기독교·불교·유교에도 있다. 그런데 동학은 경물敬物까지 가더라. 만물이 귀하다는 거다.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까지 허문다. 특히 동학의 '생명 십계명'이 감동이었다. 해월 최시형은 '나무라도 생 순을 꺾지 말라'고 가르쳤다. 북미 원주민들이 마을 어귀에 있는 바위 하나를 옮길 때도 일곱 세대를 내다보고 판단하라고 했던 것과 통한다.

석사 논문에서 기초적 내용을 다루다가, 박사 논문에서 본격적으로 확장했다. 생태여성주의 시각에 비추어 전통 기독교사회윤리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사회라는 말 자체가 인간 중심이지 않나. 기독교윤리가 남성을 도덕 주체로 삼고 여성을 타자화한 점을 비판하는 데서 그치면 안 됐다. '가난한 자 중의 가장 가난한 자'인 자연까지 담론 질서에 포함해야 했다. 인류 문명사 전체를 다시 살피는 작업인데, 30세를 갓 넘긴 나이에 뭘 안다고 그렇게 당돌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웃음)

- '생태여성주의'가 지금 이 시대에 어떤 통찰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가 몸담은 문명이 전적으로 새롭게 탈바꿈해야 한다. 그러려면 상상력의 층위가 달라야 한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자본주의, 가부장적 과학주의, 가부장적 합리주의 갖고는 안 된다. 그래서 생태여성주의가 필요하다.

1960년대에 이미 그 움직임이 있었다. 두 명의 여성이 인류 문명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한 명은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1921~2006). <여성의 신비 The Feminine Mystique>(평민사)를 통해 '여성다움의 신화'를 폭로하면서 여성운동에 불을 질렀다. 다른 한 명은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 <침묵의 봄 Silent Spring>(에코리브르)을 써서 '지구의 날'이 선포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책은 앨 고어(Albert Arnold Gore Jr., 1948~) 전 미국 부통령의 추천작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 '불편한 진실 An Inconvenient Truth'(2006)로 유명한 노벨평화상 수상자 말이다.

작년 11월에 환경재단 '레이첼카슨홀'에서 한국 생태 문명 회의가 열렸다. 나도 참여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엘 고어의 딸 카렌나 고어(Karenna Gore, 1973~)를 만났다.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비대면 '줌'(Zoom) 화상회의를 통해서였지만. 그녀의 제안이 인상적이었다. 국제 정책을 다룰 때는 세 개의 의자가 더 있다고 상상해 보란다. 첫 번째는 탄소 배출을 가장 적게 하지만 가장 크게 불이익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 두 번째는 고갈되는 자원과 약탈당하는 토지, 세 번째는 미래 세대 인간과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

세상을 바꾸는 건 이런 상상력이다. 근대라는 시간이 자연에 걸린 마법을 풀고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해 기후 재앙과 같은 지구 문제를 낳았다면, 이제는 '재마법화'가 필요하다. 뉴질랜드 정부가 2017년에 황거누이강과 타라나키산을 헌법상 법적 주체로 인정한 게 그 보기다.

현 인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 불리는 이 무시무시한 인간종이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지질학자들이 현대를 '인류세人類世'(Anthropocene)라 부르지 않나. 지구를 종말에 이르게 할 변수가 인류라는 의미다. 이걸 깨달아 알면, 새로운 인간종으로 변신해야 한다. 그 이름을 나는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라고 부른다. '더불어 살 줄 아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저명한 유대 랍비 아브라함 헤셸(Abraham Joshua Heschel, 1907~1972)은 <누가 사람이냐>(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인간은 자기 본성을 기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본성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다른 생명체와 구별된다"고 말했다.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자신의 본성을 창조할 수 있다.

예수는 하나님나라를 상상하라고 가르쳤다. '총, 균, 쇠'가 아니라 상상력으로 세상을 바꾸셨다. 유대인의 창의성의 원천은 '티쿤 올람'(Tikkun Olam)이라고 하더라. '네가 옴으로 인해 세상이 더 나은 곳으로 바뀌었냐'는 물음이다. 지금 우리는 이 숙제를 받아 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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