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X IVP 서평단 모집 이벤트에서 우수 서평으로 뽑힌 김영은 님의 글입니다. - 편집자 주
1. 세상은 정말 변했을까

"그래도 세상 참 많이 변했어."

TV를 보던 그가 말했다. 여성 방송인 여럿이 모여 진행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되던 중이었다.

"어떻게 보면, 더 좋은 위치로 올라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야."

"(내가 잘못 들었나) 뭐?"

그는 나름대로 좋은 의도로 말했던 것 같다. 세상이 평등하게 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너무 황당했다. 진심인가. 우리는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를 보며 함께 분노하고 대화하지만, 젠더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이토록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체감하는 정도가 너무 다르다. 내가 느끼고 경험하는 사회를 그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아버지는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언제나 꿈을 크게 꾸라고 응원했고, 장래희망과 주관이 뚜렷했던 내 모습을 좋아했다. 남자아이들에게 밀리지 않는 딸을 자랑스러워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는 몹시 싫어했다. 실망했다고도 말했다. 네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겠다는 이야기로 들렸다고, 시간이 흐른 최근에서야 고백했다. 진취적인 딸을 응원했지만, 결혼하면 그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지금도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나는 결혼 계획을 밝히는 동시에 백수가 되었다. 면담이 진행되는 내내 칭찬과 앞으로의 계획을 말하던 대표는, 결혼 얘기를 듣는 순간 돌변했다. 벌써 결혼하면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힘들 거라고, 가정이 생기면 일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결혼) 결정을 후회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확히 3일 뒤 회사에서 잘렸다. (지금도 그 회사 근처에 갈 때마다 떠오른다. 언젠가 마주치면 명함을 건네며 이야기하고 싶다. 그때 당신 회사 떠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업계에서 커리어를 잘 쌓고 아직도 이 일을 잘하고 있다고.)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와 나는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고, 비슷한 동네에서 자랐다. 같은 종교에 비슷한 신념을 품고 있다. 둘 다 IMF 키즈이고, 집안의 첫째로서 감당할 무게가 있었다. 그러나 각자가 경험한 사회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던 것 같다.

그는 늦게 결혼한 큰아들이 낳은, 그 집안의 첫째 손주였다. 첫째 손주라는 이유만으로 조모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았던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강자였다. 어릴 때부터 덩치가 큰 편이라 어디 가서 무시당하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기득권의 위치에서 세상을 살았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지금도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나는 어릴 적부터 늘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그랬어도, 살면서 변태를 피할 수는 없었다. 이제야 겨우 생각하게 되었다. 왜 내가 조심해야 하지?) 공중화장실에 가야 할 때면 찝찝한 마음으로 마지못해 이용한다. 낯선 남자와 단둘이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같은 자리에 있어야 할 때는, 온몸이 긴장해서 몸이 아플 지경이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은 끊임없이 피해자처럼 느끼게 만드는 경험을 한다. 특정한 방식으로 보이면 안 된다, 밤에 나가면 안 된다, 특정 지역에 가면 안 된다, 술 취하면 안 된다, 하이힐을 신거나 화장을 하면 안 된다, 낯선 사람과 홀로 있으면 안 된다는 등의 말을 듣는다. 이러한 말들은 범죄의 진짜 원인인 범법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게 할 뿐 아니라, 강간을 해도 괜찮은 문화, 강간을 허용하는 문화를 만들어 낸다." (220쪽)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을 읽은 뒤, 그에게도 권해 함께 읽었다. 입에 올리기도 싫은 이 나라의 끔찍한 성범죄 뉴스를 대할 때면 분노에 떨며 그와 대화하고는 했다(주로 나는 이야기하고, 그는 듣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당했던 여러 불이익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함께 지켜본 사람이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온도는 이토록 다르다.

우리는 과연 같은 세상을 살고 있을까.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 인류의 상처, 여성 폭력> / 일레인 스토키 지음 / 양혜원 옮김 / IVP 펴냄 / 440쪽 / 2만 1000원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 인류의 상처, 여성 폭력> / 일레인 스토키 지음 / 양혜원 옮김 / IVP 펴냄 / 440쪽 / 2만 1000원
2. 전 세계 여성 폭력의 실태 알리다

여느 때와 같이 인스타그램 피드를 넘기던 중 이 책을 알게 되었다.

'인류의 상처, 여성 폭력'이라는 부제. 성 감별 낙태부터 여아 살해, 소녀 할례, 아동 강제 결혼, 명예 살인, 가정 폭력, 인신매매와 성매매, 강간, 전쟁에서의 성폭력까지. 전 세계에서 자행되어 온 여성 폭력의 실상을 이야기하는 책이었다.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큰 문제를 다루는 것 같았다. '당장 내 문제도 벅찬데, 이것까지 보면 힘들어. 좋은 책이 나왔네.' 여기까지 생각하고 관심을 끊으려 했다.

그런데 한 추천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왜 매일 두려움 속에 살고 있지?' 자문하는 여성들과 '도대체 누가 여성 혐오를 한다는 거야?' 반문하는 남성들 모두 이 책에서 답을 얻을 것이다." (공익법센터 어필 김종철 변호사의 추천사 중)

나도 모르게 다시 피드를 정독했고, 결국 나는 이 책을 읽고 지금 후기를 쓰고 있다.

사실 책이 도착한 날에는 무척이나 마음이 무거웠다. 뉴스만 봐도 너무 괴롭고 힘든데, 과연 이 책을 완독할 수 있을까. 목차만 봐도 괴로울 게 뻔해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읽겠다고 했을까. 책상 위에 올려 두고,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괴로운 마음으로 책을 쳐다봤다. 이러다 책장으로 들어가면 이사할 때까지 꺼내 보지 않을 걸 알기에, 결국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과 함께 일요일을 보냈다.

"신원도 확인할 수 없고,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으며, 눈에 띄지도 않은 채 정상성이라는 얇은 막에 가려져 외면당하거나, 홀로 고통당하는 여성이 훨씬 더 많다. 이들의 죽음은 신문에 실리지도 못하며,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늘 존재하며 그 수가 어마어마하게 많다. 통계가 우리에게 여실히 보여 주듯, 전 세계에서 15~44세의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으로 말미암은 죽음, 장애, 신체 훼손, 암, 말라리아, 교통사고로 인한 상해를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다." (17쪽)

"다른 나라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행이나 무시가 그 정도로 심하지는 않다며 감사할 수도 있다. 불행히도 이런 생각은 틀렸다. 전 세계에서 보고되고 유엔에서 승인하는 보고서들은 이보다 훨씬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든 사회에서 여성과 여아는 이러저러한 신체적, 성적, 심리적 학대를 당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역사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가 불평등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신중하게 규명되었으며, 그 권력 관계는 수입, 계급, 문화를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나타난다." (22쪽)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수동적인 연민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불의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헌신과 인내와 전 세계적으로 연계된 행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필요하다." (39쪽)

이 책은 학술서 같은 느낌이 든다. 잘 쓰인 한 편의 논문 같기도 하다. 여성 폭력의 실태를 구체적 통계와 증언으로 설명하고, 그 원인을 탐구하며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조하게 거리를 두고 읽기는 힘들다. 솔직히 말하면, 힘든 책이다. 차마 상상하기도 싫은 일들에 대한 증언과 통계를 계속 읽어 가야 하니 말이다. 치가 떨리는 사례들을 보며 몇 번이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문제에 맞서 싸우며 희생한 분들 덕에 나아지거나 해결된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대로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진다. 지금도 여아를 사고팔고, 여자를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여기는 문화가 팽배하다. 법을 세우는 일부터 반대가 심하지만, 법이 있어도 지켜지지 않는다. 전통과 문화가 이들을 잡아먹는다. 통제력을 상실했지만, 적어도 여성은 통제할 수 있다고 위안하는 인간들. 그 속에서 벌어지는 가정 폭력, 여성 폭력, 아동 폭력. 나도 약자의 위치에 있고, 그 설움을 아는데도, 나보다 더 약한 자를 괴롭히는 일을 당연시하는 미친 세상.

"그러니 전 세계적으로 남성이나 남아와 달리 여성과 여아가 자신의 행동을 조심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강간당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강간은 여성 인구 전체를 남성 인구 전체에 종속시키는 강력한 수단이다. 비록 많은 남성이 강간을 하지 않고, 많은 여성이 한 번도 강간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209쪽)

3. 동아시아에 있는 한국에서는…

오늘도 몇몇 뉴스를 보고 아침부터 분노했다(그렇다, 하나도 아니고 '몇몇' 뉴스였다). 왜 여성 폭력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기는 거지? 똑같은 폭력이고 똑같은 살인인데, 왜 이렇게 별일 아닌 거로 치부하지? 젠더를 기반으로 둔 폭력은 "인권침해 중에서 가장 폭넓게 퍼져 있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침해"다.

이 책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사는 나라 한국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가 변하고 있는 것 같으나, 엄밀히 따지면 그런 척하고 있는 느낌이다. 최근의 법정 판결들을 보면서 몇 번이나 절망했던가. 이 나라에 계속 살아도 될까. 아니, 이 세계에 희망이 있나.

이 나라는 아동 성 착취를 찬성하는 건가. 여성의 목숨은 남성의 목숨보다 가벼운가?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이 정말 두 사람만의 일인가. 왜 몰래카메라가 사라지지 않으며, 불법 동영상이 근절되지 않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계란 두 판 훔친 생계형 범죄가 수천수만의 불법 음란물을 만들고 유통하며 시청한 범죄와 같을 수 있는가. 시험 문제 유출이 (물론 잘못된 일이지만) 사람을 폭행하고 인생을 망가뜨린 일보다 더한 문제란 말인가.

법정이 그대로라면, 집행이 지금과 같은 식이라면, 변화될 수 없다(서밤 작가의 만화 '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를 추천한다). 진정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걸까.

여성 폭력은 개인의 불행이 아니다. 개인이 운이 없어서, 또는 잘못된 행실 때문에 겪는 일이 아니다. 사회의 제도와 문화가 그 폭력을 옹호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왜 이런 폭력이 발생하는가?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과연 멈추는 일은 가능할까? 우리는 소망을 품고 나아갈 수 있을까?

읽는 내내, 마음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일레인 스토키는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고, 현장을 확인하며 연구하고 조사한 자료를 내민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커다란 죄악의 문제를 직시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희망을 찾고 소망을 이야기하는 저자가 놀랍다.) 회복될 수 있고, 속박이 끊어질 수 있다고. 회개와 변화, 구원의 삶은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젠더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그러니 실감하지 못했던 문제를 직시하고, 폭력을 멈추는 일에 함께하자고 권한다.

"편안한 세상에 사는 우리가 무관심과 피상적 연민을 거부하고, 여성에 대한 전쟁의 잔혹 행위에 대항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도전을 받아들인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255쪽)

그렇다. 고통당하는 이들의 현실을 마주할 때,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 추천사의 말처럼 "읽기 쉬운 책은 아니지만 꼭 필요한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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