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10/14) 충남 서산에 있는 해미읍성을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관광지이지만, 150여 년 전 이곳은 아비규환이었다고 해요. 1000명이 넘는 가톨릭교인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거든요(병인박해). 목 베여 죽고, 매달려 죽고, 돌 맞아 죽고, 산 채로 묻혀 죽고….

충남에는 가슴 아픈 순교 역사가 많다고 하죠. 그중 외국인 주교 1명과 신부 2명, 조선인 교인 2명이 순교한 보령 갈매못 이야기가 제 가슴을 먹먹하게 했는데요. 일행 중 한 분이 전해 오는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처형장에서 주교가 목숨을 잃고 한 신부가 몹시 몸을 떨었대요. 망나니가 주교에게 칼을 내리치고 돈을 더 내라며 흥정하자, 이를 보고 겁에 질렸던 거죠. 그러자 함께 있던 교인이 그를 품에 안고 용기를 북돋웠다고 해요. 이때 두 신부는 29세, 30세 청년이었어요.

우리나라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가슴 아픈 역사가 많지요. 특히 해외에서 온 선교사님들이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겪은 희생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고요. 복음을 전하겠다는 사명은 단순 명료하지만, 그 사명을 실천하는 삶은 단순하고 명료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예수님의 사랑을 가르치고 실천할 때마다 자신과 가정에 고통과 상실, 위기가 찾아오는 걸 보면서, 선교사님들은 얼마나 많은 회의와 번민, 갈등에 부딪혔을까요.

선교사님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포기하지 않은 결과, 오늘날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과거 선교사님들과 현재 한국교회 모습을 비교하면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해요. 하나님나라를 위한 사명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을 텐데, 그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건 도대체 무엇일까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저는 이번 기회에 제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 돌아보기로 다짐했습니다.

by 박요셉

처치독 리포트

· 이번 '처치독 리포트'에서는 여성 안수논란을 다룹니다. 예장합동과 예장고신은 올해도 여전히 강경한 입장을 보였죠.
· '이건 왜 이래?'에서는 예장합신의 분립을 다룹니다. 벌써 마지막 연재네요. 궁금한 점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봐 주세요!

올해 교단 총회에서도 '여성 안수'는 절대 불가였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은 신학자 5명에게 연구를 맡겼는데, 대부분 안수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놨습니다. 목사뿐 아니라 강도사도 안 된다고 합니다. 여성 안수가 허용되면 동성애를 용인하는 문화도 퍼질 것이라고 연구 보고서를 쓴 목사도 있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에는 '개혁신학의 본산'이라는 네덜란드개혁교회(RNC)와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올라왔어요. 여성 안수를 허용했으니 신학적으로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이죠. 여기도 역시 '성경을 자유주의적으로 해석하면 동성애도 허용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유주의적이 아닌 '정통주의적'인 해석은 뭘까요. 디모데전서 2장 12절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1장 5절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도 지켜야 하는 것 아닐까요?

참 이상합니다. 성경 구절대로 믿고 살려면 고대인이 되어야 할 텐데요. 선지 해장국을 먹어서도 안 되고, 삼겹살·치킨·족발을 먹은 사람도 부정한데 말이죠. 같은 논리라면 교단들은 당장 한국에서 여성 안수를 주고 있는 대다수 교단과의 교류부터 끊어야 할 겁니다.

다른 구절에는 유연하면서 유독 '여성 안수는 성경이 금한다'고 둘러대는 것은 성경에 쓰여 있어서가 아니라 남성들이 독차지해 온 기득권을 빼앗기기 싫어서 '선택적 문자주의'를 택한 것 아닐까요?

더욱더 서글픈 사실은 이런 황당한 연구 보고서가 교단 최고의 신학 전문가라는 총신대·고신대 교수들에게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이런 신학적 주장이 얼마나 허망한지 총신대학교 신대원 출신으로 "여성에게도 목사 자격을 부여하라"고 오랜 시간 투쟁해 온 강호숙 박사의 '여성 안수 주체는 여성인데 왜 남성이 결정하는가'와 박유미 박사의 "'기능적 종속'은 여성 차별이 아니라는 예장합동"이 잘 지적하니 한번 읽어 보세요.

'여성 안수 안 된다'는 신학부 "성경에 안 나와"…"동성애 허용으로 이어질 것"이란 연구도
예장합동이 여성 안수에 반대하는 이유
교단 정치가 낡고 추함을 드러낼수록 변방에서는 새로운 신앙이 눈을 뜰 것이다
여성·퀴어 시각으로 성서 해석하는 페미니스트 신학자

by 최승현

이건 왜 그래?
평소 궁금했는데 물어볼 데가 없어요

합동·통합·기장·합신 뭐가 달라요?(마지막)

벌써 마지막 연재네요. 오늘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예장합신)의 분립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요. 지금까지 잘 따라오셨으니, 마지막도 끝까지 읽어 주실 거죠? (질문하신 분도 계속 보고 계시는 거 맞죠? ^^)

예장합신은 다른 장로교단보다 규모가 작은 편이에요. 2019년 기준으로 교회 수가 961개로, 1000개가 채 안 되죠. 참고로 예장고신이 2110개, 기장이 1636개입니다.

그러나 규모보다 교계에 끼치는 영향력은 작지 않습니다. 대표적으로 남서울교회 홍정길 원로목사님이 이 교단 소속이죠. 예장합신은 예장합동이나 예장고신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보수적인데요. '바른 신학', '바른 교회', '바른 생활'을 주요 이념으로 세우고 있습니다. 어떤 분위기인지 느낌 오시나요?

예장합신은 비교적 최근(?)에 분립했습니다. 1981년인데요. 교회사에서는 이때를 8차 장로교 분열로 명명합니다. 네, 맞습니다. 예장합신의 분립이 8차라면 그전에는 4~7차 분열이 있었다는 소리죠.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4~8차 장로교 분열이 모두 예장합동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에요.

장로교 분열 

· 1차 분열(1952): 고신의 분립
· 2차 분열(1953): 기장의 분립
· 3차 분열(1960): 합동과 통합의 분립
· 4차 분열(1961): 합동과 대신의 분열
· 5차 분열(1962): 합동과 호헌의 분열
· 6차 분열(1963): 합동과 고신의 재분열
· 7차 분열(1979): 합동과 합동보수(나중에 '예장개혁'으로 발전)의 분열
· 8차 분열(1981): 합동과 합신의 분열
    ※<한국 장로교 총회 창립 100년사 1912-2012>(홍성사)  참고

우르르 쏟아져 나온
군소 교단들

1970년대 후반, 예장합동은 주류와 비주류 간의 갈등이 컸어요. 두 그룹은 지역을 기반하고 있었는데요. 영남·평남 출신 목회자들이 주류, 호남과 황해도 출신 목회자들이 비주류 그룹을 이루고 있었어요.

당시 교권 실세는 주류 측 지도자 이영수 목사라는 인물이 차지하고 있었어요. 이영수 목사는 1979년 64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는데요. 64회 총회 개회를 앞두고 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비주류 그룹 총대들이 회의장에 못 들어간 거예요. 회의 시작 전 문이 모두 잠겼거든요(누가 잠갔을까요?). 주류 그룹 총대들은 시작하기 2시간 전부터 이미 입장한 상태였고요. 이에 반발한 비주류 그룹은 교단을 나와 합동보수를 만듭니다.

합동보수의 분립
· 비주류 그룹 총대들이 만든 예장합동보수는 이후 계속 이합집산해요. 합동보수는 1981년 홍은동 측과 청담동 측으로 갈라졌다가, 1985년 '예장개혁'이 되는데요. 이들은 얼마 안 돼 또다시 분열합니다.
· 모두가 정통을 외치고 있지만 잦은 분열로 누가 정통인지 알기 어려운 때였어요. 그러던 중 1998년 예장합동에서 분열해 나온 9개 교단이 예장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모입니다. 대교단의 탄생이었죠.
·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예장개혁은 2005년 예장합동과 재통합합니다. 현재 예장합동 총회장 소강석 목사가 이때 합류한 예장개혁 출신이에요.

교권 다툼, 총신대 개혁 운동
그리고 합신의 탄생

1979년은 이렇게 교권을 둘러싼 파벌 싸움이 컸을 때였어요. 엉망이었죠. 일반 정치권과 다를 바 없는 교계 모습에 실망한 이가 많았습니다. 교권을 향한 혐오가 신학대까지 퍼졌고, 이것이 예장합신이 탄생한 계기가 됐습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할게요. 1979년 사회에서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10·26 사건으로 유신 정권이 몰락합니다. 이때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전국에 확산하는데, 이러한 흐름이 총신대에도 영향을 줍니다. 교권을 바탕으로 신학대 운영을 주무르던 이영수 목사의 퇴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던 거죠. 대표적인 사건이 '신대원 학생 146명의 고발 사건'입니다.

신대원 학생 146명 고발 사건(1979년)
· 신대원 학생 146명이 총신대에 심각한 재정 비리가 있다고 관계 기관에 투서한 사건. 검찰은 조사 결과 비리가 없다고 발표. 총신대 이사회는 고발장에 참여한 학생들을 모두 제적시키라고 교수회에 지시하지만, 교수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 사건 이후, 신대원 학생들과 이사회 간에 갈등이 커집니다. 급기야는 학생들이 이사들을 감금해 사퇴를 강요하는 일도 벌어지죠.

이사회는 교계에서 존경받는 신학자 박윤선 박사를 학장대리로 세워 갈등을 봉합하려 합니다. 하지만 박윤선 박사도 얼마 안 돼 이사회와의 의견 충돌로 사임해요. 이사회는 38세 교목실장을 후임 학장으로 세우는데요. 이해가 안 되는 인사 조치로 노장 교수들도 이사회에 등을 돌리게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계기로 학생들과 교수들은 새로운 신학교가 필요하다는 데 중지를 모아요. 박윤선 박사가 중심 역할을 맡았죠. 그렇게 해서 1980년 11월 합동신학교가 설립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합동신학교 관련 인사들을 중심으로 예장합신(당시에는 '개혁'이라는 이름을 사용)이 탄생해요.

누가 3줄 요약 좀
· 1970년대 후반, 예장합동 안에는 교권을 둘러싼 파벌 싸움이 극심해짐. 이러한 갈등으로 군소 교단들이 만들어짐.
· 신대원 학생들은 교권에 반기를 들고 이사회와 갈등하기 시작. 노장 교수들도 학생들을 지지.
· 새로운 신학교가 필요하다는 여론을 바탕으로 1980년 합동신학교가 설립됨. 이듬해, 합동신학교 관련 인사들을 중심으로 예장합신이 만들어짐.

by 박요셉

※처치독은 일주일 동안 <뉴스앤조이>가 보도한 이슈와 사건들을 쉽게 풀이해 주는 뉴스레터입니다. 구독을 신청하시면, 매주 금요일 오후 처치독을 만날 수 있습니다.

※ 처치독 구독하기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