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시민 권력의 조직체는 두말할 것 없이 1)정당(political party)이다. 정당으로 조직된 시민의 의지가 단단할수록, 정당 간의 경쟁이 사회를 더 넓게 대표할수록, 행정 권력과 경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시민 권력의 기반은 강해진다. 그럴 때만이 좀 더 균형 있는 공동체를 발전시킬 가능성은 커진다. 

정당이 발달하지 못하는 민주주의에서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이익과 열정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렵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그 핵심을 정의하라면, "오늘의 여당이 내일에는 야당이 되는 체제, 오늘의 야당이 내일에는 여당이 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야당이 잘 조직되어 있지도, 미래의 정부로서 신뢰도 주지 못한다면 어찌될까? 

조직과 정당을 싫어하는 태도는 민주주의의 효과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난다. 정치 역시 권력 다툼과 전략적 계산에 의해 지배되는 일이 많고 그 속에서 정당이 기능하고 있다. 정당 중심 정치를 좋게 만들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를 그 가치에 맞게 실천하기는 어렵다. 오늘날 우리 민주주의의 문제는2) '대의제 때문'이 아니라 대의제를 민주적 가치에 맞게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데 있다. '정당 때문'이 아니라 민주적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정당들이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데 있다고 봐야 한다.

'민주주의가 어떤 사회적 효과를 낳느냐' 하는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그 나라의 정당정치가 어떤가'에 달려 있다고 해서, 정당이면 다 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제도도 한계가 있고, 시대와 조건을 초월해 이상적 대안을 말할 수는 없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당은 끼니에 비유될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와 그렇지 않은 체제를 복수 정당 체계의 유무로 판단하듯이, 정당은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본질적인 기준이다. 

아무리 운동이나 휴식, 명상, 영양제가 건강에 좋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끼니를 대체할 수 없듯, 민주주의라면 그 어떤 것도 정당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혹자는 지금 정당들의 모습을 보고도 그러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으나, 기존 정당을 좋게 만들거나 기존 정당보다 더 좋은 정당을 만들지 못한다면 달라질 것은 없다. 지금의 정당들에 대해 냉소하기만 할 일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정당정치의 체질을 튼튼하게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한국 사회 전문가들이나 지식인들은 마치 국민의 뜻이나 시대정신을 자신들이 대변하고 있는 듯이 말하고 처신하면서 정당을 아래도 내려 보는 경향이 있다. 언론 종사자들 역시 파당적인 효과가 큰 의견을 초당적인 자세로 말한다. 당연히 당적 갖는 일은 꺼린다. 시민운동가는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당적을 기피한다.

법률가들은 정당 가입 경력이 있으면 특검 참여를 못하는 등 불이익이 많다며 변명한다. '초당적 중립성'을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교수도 교사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모두가 당적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우리의 지식사회는 좀 심하다. 그들에게 정당은 영향력 행사의 도구일 뿐, 정당이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은 무시해도 좋은 듯이 행동한다.

복수의 정당으로 조직된 그 어떤 의견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면, 사람들은 정치 전체를 대상화해 냉소적인 말을 쏟아 내기 쉽다. 지식인도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심하다. 이견과 차이가 있어야 합의도 조정도 의미가 있다. 처음부터 국민적 합의나 전체 의사를 앞세워 내 주장의 옳음을 강변하면, 목소리는 커지고 갈등은 더 격화될 뿐이다. 당적을 갖는 사람과의 대화가 반드시 대립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과 의견이 더 부드러울 수도 있다. 서로의 정치적 차이를 고려해 최대한 설득력과 보편성을 갖춰 말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당도 완벽할 수 없고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있기에, 상대 정당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일도 자제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없던 애정도 생기고 책임감도 갖게 된다. 정당 친화적인 사회가 오히려 더 평화롭고 말의 내용도 더 풍요로울 수 있다. 민주주의란 의견이 다른 정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체제인데, 당적을 갖는 일을 모두가 회피하는 사회가 된다면 대체 무슨 재주로 민주주의를 좋게 만들 수 있을까? 

모두가 당원이 될 이유는 없지만, 지금보다는 좀 더 자유롭게 당원이 되고 당 생활에서 참여의 보람을 찾는 일이 가능했으면 한다. 어느 정당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생각에 가까운 정당에 참여해 보는 것을 권장하고 싶다. 시민 모두가 초당적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민주주의자의 생각과 거리가 먼 일일뿐 아니라, 그런 사회가 실현된다면 필시 전체주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 정당이란, ① 특정의 정치적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으로, ② 그에 맞게 사회 여론을 형성하고, ③ 이를 통해 유권자의 선호 형성에 기여하고, ④ 지지자와 당원에 대한 정치 교육자 역할을 하고, ⑤ 공직 후보자를 지명해 선거 경쟁에 내보내 선출직 공직자 집단의 재생산에 기여하고, ⑥ 공공 정책을 입안하고, ⑦ 갈등의 표출과 매개, 조정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 통합에 기여하고, ⑧ 조직 구성원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등의 기능을 한다.

2) 현대 민주주의란? ① 복수 정당 체계, ② 야당이 집권할 수 있는 체제, ③ 정당 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제도화한 체제,  ④ 정치적 대표 체계를 통해 사회 갈등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는 체제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 친화적인 시민 문화가 필요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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