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인들이 도덕성과 진정성만 갖춘다면 지금 정치계의 문제는 사라질 수 있을까? 진정성은 있어야 하지만 진정성만 앞세우는 정치는 좋지 않다.

정치인들이 도덕성과 진정성 없이 정치를 하지 않아 문제라는 주장이 많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도덕성 회복', '초심 잃지 않기', '진정성 갖기'를 구호처럼 말한다. 그런데 이런 태도가 잘못된 정치관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이제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누구든 진정성을 가지고 정치를 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런 의지를 다져 갔으면 한다. 그러나 진정성을 앞세워 정치하는 일? 그건 좋지 않다. 그렇게 해서는 정치의 실제 현실을 제대도 다루지도 못하거니와 결과적으로는 '위선의 정치'로 귀착될 가능성만 더 높일 수 있다.

진정성은 모든 인간이 다 중시하는, 가장 인간적인 측면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착한 사람도 착하기만 한 게 아니듯이, 진정성이 인간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다. '진정성 있는 삶', '옳은 삶'을 살 수 있는 인간?  아마도 예수나 부처,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 나오는 조시마 장로 같이 '인간 이상의 삶'을 산 사람이라면 모를까 보통의 인간은 분명 그러기 어렵다. 그렇기에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는 '누구도 인간의 완전함을 전제할 권리는 없음'을 단언했고, 막스 베버는 '인간의 평균적 한계' 위에서 정치 윤리를 세워 가야 함을 강조했다.

돌아보면 우리 모두 오류와 잘못을 숙명처럼 이고 산다. 그렇기에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이 '좋은 삶', '좋은 정치'일 수는 있어도 '옳은 삶', '옳은 정치'일 수는 없을 것이다. 좋은 것은 다원주의적 기준이 될 수 있지만 옳은 것은 하나의 절대적 선택 내지 결단을 불러올 때가 많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옳음을 앞세우는 사람은 주변을 온통 분열로 물들게 할 때가 많다. 자신의 옳음만 생각할 뿐, 다양한 차이와 이견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C. S. 루이스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늘 타인으로부터의 용서가 필요하고 그만큼 부족함과 잘못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어느 정도 악한 인간은 자기가 그리 좋은 사람은 못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악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153쪽)"라고 말한다.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도덕적 독선가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좋으냐 나쁘냐만 생각하지 좋은 것, 더 좋은 것, 최선의 것, 나쁜 것, 더 나쁜 것, 최악의 것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173쪽)고 지적한다. 그는 확실한 판단을 갖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징 중 하나를 이렇게 말한다. 

"자기들이 포기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다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특별한 이유로 어떤 것 -육식, 결혼, 영화 등- 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 자체를 악하다고 말하는 순간, 혹은 그런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순간, 그는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133쪽) 

그래서 루이스는 불완전한 인간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늘 확신에 차 타인을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을 향해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냉정하고 독선적인 도덕가가 거리의 매춘부보다 훨씬 더 지옥에 가까울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167쪽)고 비판했는데, 사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도 온전히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자신도 살 수 없는 삶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니 그게 어떻겠는가? 

우리가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것은 여러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좀 더 좋은 성과, 좀 더 나은 대안, 좀 더 설득력 있는 논리를 위해 성실히 준비하고 실천하는 것, 그러면서도 때로 그렇게 노력해도 얻을 수 있는 결과가 나쁠 수도 있다는 역설(paradox)조차 인정하는 것, 그래서 조심스럽게 자신의 결정과 행동을 돌아보는 데 있다. 선의와 진정성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잃지 않으려 노력할 일이지, 그것을 앞세워 일을 하는 것은 결코 좋다고 볼 수 없다. 특히 '권력의 문제'를 다뤄야 하는 분야의 인간 활동에서는 때로는 재난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렇기에 "악마는 선의 속에 숨어 있다"는 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이다.

진정성이 권력을 만났을 때

물론 진정성을 앞세워 정치하는 것만 나쁜 것은 아니다. 더 위험한 것은 '진정한 진정성'을 가지고 정치하는 데 있다. 인간의 역사에는 진정한 진정성이 낳은 부정적 사례들이 끝도 없이 많다. 종교적 진정성을 따졌던 종교재판의 문제에서부터, 종교개혁 초기(신의 뜻에 맞는 급진적 정치를 내걸고 출발했으나 공포정치과 폭력적 진압으로 끝난) '재세례파에 의한 뮌스터 시의 자치' 사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6장의 주제이기도 한(사치와 탐욕을 없애고자 급진적 의식 개혁 운동을 했으나 대중에게 버림받아 화형당한) '사보나롤라의 통치', 나아가 공산주의 체제가 전체주의화 되는 경험 역시 깊은 관련이 있는 문제들이다.

이들 사례의 주인공들이야말로 진정한 진정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이 그런 마음으로 권력을 다룬 데 있었다. 당연히 권력의 문제를 이해할 능력과 그것을 다룰 실력을 키우지 못하고 모든 것을 진정성으로 해결하려 했을 때, 결과는 어땠을까? 참혹했다. 착취도 억압도 없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공산주의자들의 경우, 진정한 진정성이 있었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조직을 지키고자 했고 가족이나 형제보다도 같은 진정성을 갖는 동지를 더 신뢰했다. 그런 그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동지는 물론 타자 일반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고 숙청과 정화를 위한 폭력을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아무도 믿지 못하고 자식이나 형제에게 권력을 세습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조금 맥락에서 벗어난 이야기 같지만, 글을 쓰고 읽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만장일치적 동의가 어려운 정치적 주제일 경우는 특히 그러한데, 그런 글일수록 내용의 옳고 그름 여부로 따져지는 것보다는, 의미 있는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모두 옳은 글은 세상에 없다. 다만 부분적으로만 옳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그거면 충분하다. 좋은 글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그렇게 여겨지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지혜로운 무관심'이 필요하다. 오래전 볼테르(Voltaire, 1694~1778)도 강조했듯, 사실이라고 해서 모든 게 다 따져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르게 옳기 때문에 우린 서로에게 배울 수 있고 그렇기에 공존하고 협력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누구든 민주주의를 해서 성과를 내려면 꼭 익혀야 할 정치 윤리가 아닐 수 없다.

누군가의 내면이 어떠하고 그것이 진정한 것인가는 함부로 따져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동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면적 진정성은 타자가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에 대해 늘 다짐하고 다잡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성 있는 말이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것, 아니 제대로 따져져야 할 것은 그런 말과 실제 행동 사이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이론에서는 이 문제를 ① 신뢰성(reliability), ② 책임성(responsibility), ③ 응집성(coherence)의 기준으로 다룬다.

신뢰성은 '정책적 주장과 실제 정책 사이의 일관성'을 뜻한다. 달리 말하면 '정책적 주장이 실제 정책에 대한 예측성을 갖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말과 행동의 일관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그가 매번 자신의 말과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역시 예측의 신뢰성은 있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책임성은 '앞선 정책과 이후 정책의 일관성'을 말한다. 말과 실천 사이의 일관성이 아니라 앞선 실천과 이후 실천 사이의 일관성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 정책이 시도 때도 없이 변덕스럽게 바뀐다면 책임성이 약한 것이 된다.

응집성은 뭘까? 그것은 신뢰성과 책임성의 결과로 정치인이나 정당의 '정책적 주장과 행동이 안정되어 잘 변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정책적 주장과 행동의 일관성, 앞선 정책과 이후 정책의 일관성이 안정된 예측성을 갖지 못하면, 어느 정당이 공공 정책의 운영권을 가져야 하는지를 둘러싼 시민의 투표 선택은 과도한 불확실성을 동반하는 투기 행위에 가깝게 된다. 정치가들과 정당들이 오늘은 보수, 내일은 진보로 변신할 수 있다면 무슨 민주주의가 가능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시민이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시민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

진정성 대신 신뢰성, 책임성, 응집성을 만족시키는가

결국 우리가 중시해야 할 것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성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정치가 아니다. 정치적 말과 실천 사이의 관계 혹은 앞선 정책적 실천과 이후 정책적 실천 사이의 관계가 신뢰성과 책임성, 응집성의 요건을 만족시키는가 살피는 것이다. 정치가의 내면이 착하고 진정한지를 누구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정치가 스스로도 돌아보며 자신을 그렇게 확신하기도 어렵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가 공적으로 약속한 것을 준수하게 하고 일관된 정책을 추진하게 해서 안정된 정치 이념과 공적 가치를 견지하게 할 수 있을까", 혹은 "그렇지 못할 때 어떻게 그를 정치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방법과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이 민주적으로 더 유익한 일이 아닌가 한다.  

도덕주의적 편견이 강한 우리 현실을 고려해 볼 때, 진정성을 앞세워 정치하지 말라는 필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앞으로도 유사한 이율배반적 주제를 다양한 방법으로 살펴볼 텐데, 다시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우선 선한 마음과 진정성을 갖는 삶은 개개인이 가져야 할 과업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타심을 갖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야 말로 인생을 풍부하게 사는 길이라고 말이다. 다만 그런 개인 윤리를 확장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초점은 여기에 있다.

개인 도덕이 강조되는 사회는 역설적이게도 더 부도덕해진다. 개개인의 도덕성을 요란하게 따지는 동안, 정작 중요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은 슬그머니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선한 곳에서는 선한 것만 나오고 악한 곳에서는 악한 것만 나온다는 계율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누구든 정치적 어린애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개인을 확장하면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니듯, 개인 윤리와 사회 내지 정치 윤리는 긴장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 그렇기에 정치 윤리가 갖는 특별함은 깊이 사색되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C. S. 루이스 역시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 아니라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하셨(음)"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수많은 윤리적 고뇌 속에서 때로 자신의 영혼이 위태로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익을 위해 악한 수단조차 담대하게 부여잡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야말로, 정치라는 분야의 인간 활동이 고뇌 속에서 감수해야 할 도전이 아닌가 한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을 기피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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