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기독교 민주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 앙겔라 메르켈이 강조했듯, 신앙의 힘은 기본적인 가치와 방향을 가리켜 준다. 우리를 늘 겸손하게 만들고 언제나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한다. 하지만 결국 현실의 민주정치가 해결해야 할 과업은 우리 스스로가 채워야 할 소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정치학적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양한 방법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핵심은 '정치에 대한 접근권이 시민 누구에게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열려 있다'는 데 있다. 이는 민주주의가 아닌 정치체제, 예컨대 군주정이나 귀족정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잘 알다시피 군주정과 귀족정에서는 특정 '혈통'과 '계급'에게만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사회 구성원은 피치자에 불과하다. 민주화로 일반 시민이 참정권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대개는 소수의 귀족과 엘리트 들이 정치를 훨씬 더 잘 활용하고 더 우월한 통치 기술을 발휘하곤 한다. 따라서 '체제로서의 민주주의' 성패는 '주권자로서 시민이 정치를 이해하고 다루는 실력이 느는 '’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컨대 '정치에 대한 이해를 사회화하고 정치 기술을 대중화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그 자신의 이상과 가치에 가깝게 실천하는 출발점이 아닐 수 없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 인간은 사실을 통해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인식의 틀'을 통해 사실을 이해한다. 사실과 사례, 정보가 늘어난다고 해서 새로운 인식의 힘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민주정치와 관련해서도 우리는 늘 새로운 사례와 사실, 정보를 접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재들이 의미 있게 해석되려면, 이를 가능케 하는 인식의 틀이 있어야 하고, 그럴 때에만 수많은 사실과 의견, 주장 들의 더미를 헤쳐 가면서 자신의 실천을 자각적으로 이끌, '생각의 힘' 혹은 '생각의 근육'을 키울 수 있다.  

내가 쓴 책 <정치의 발견>(후마니타스)󰡕에서도 지적했지만, 경제(economy)와 경제학(economics), 사회(society)와 사회학(sociology)처럼, 대부분 학문 이름과 그 대상이 서로 달리 표현되는 데 반해 정치와 정치학은 모두 'politics'로 표기된다는 점이 특별하다. 그만큼 정치와 정치학은 서로 떨어질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같아질 수도 없는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운명이 아닌가 싶다.

한마디로 말해 정치가는 '의지와 뜻'을 세워 말하고 또 실천하는 존재다. 반면 정치학자는 '개념과 이론'을 통해 문제에 접근한다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정치가와 정치학자가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면서 자신의 일을 잘할 수는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정치학자는 정치가와 다른 방법으로 정치의 문제를 다룰 뿐이다. 따라서 정치가가 다루고 있는 사안과 의제, 나아가 그의 실존적 고민을 도외시하고는 의미 있는 학문적 업적을 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정치가의 실천 의지 역시 이론에 의해 뒷받침된 합리적 개념의 도움 없이 내세워진다면, 일방적이고 고집스럽게 보일 뿐이다. 다루고자 하는 현실을 더 깊고 넓게 담아낼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좋은 실천을 위해 필요한 '말의 힘'과 '정치적 이성'은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좋은 정치가란 좋은 정치학자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며, 좋은 정치학자 역시 좋은 정치가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빼고, 정치와 정치학의 운명을 말할 수 없다. 그런 이유에서 우리가 개척해야 할 길은 '실천으로서의 정치'와 '학문으로서의 정치학'이 중첩되는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경우든 정치를 부정하게 여기고 멀리하기보다는 가까이 두고 선용(善用)할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 정치를 개탄하고 정치인들을 '죄다 도둑놈들'로 냉소 내지 일반화하거나, '정치에 관심 갖고 참여해 봐야 소용없다'는 식의 '반(反)정치주의에서 벗어나 정치를 자연스러운 인간 활동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 누가 정치를 부정하는가? 정치를 통해 기존 질서가 변화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는, 정치 밖의 사회적 강자 집단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보통의 시민들이 정치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다는 '민주주의의 비밀'을 감추고 또 못 보게 하려는 사람들이다. 외적으로 그들은 정치를 야유하고 욕하지만, 실제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은 정치를 누구보다 잘 혹은 자신들만 독점적으로 활용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다. 선하게만 살 수 있는 천사가 아니다. 도무지 극복할 수 없는 한계도 많다.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놀라운 의지와 정신 활동으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온 유일한 유기체이다.

권력을 포함해 정치의 거의 모든 요소에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이 있다. 인간 행동을 규제하는 강제적 성격도 있지만 뭔가 의미 있는 것의 성취를 가능케 하는 적극적 측면도 있다. 그렇기에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치는 가장 더럽고 추한 세계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가장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가 될 수도 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관점을 선택하겠는가? 

민주주의는 그 말이 생겨난 이래로 언제 어디서든, 혈통·계급·신분·재산상의 불평등과 상관없이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정치에 접근할 평등한 권리를 제공하는 것을 뜻했다. 민주주의자는 정치를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조직하고자 하는 자이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자는 정치를 중시하는 자이고, 정치에서 '민주적 승부'를 보려는 자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을 기피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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