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 라파엘로(Sanzio Raffaello, 1483~1520)가 그린 '아테네 학당'.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요청에 따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 헤라클레이토스, 프톨레마이오스 등 고대의 지적 영웅들이 한 자리에서 회합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거장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을 보면 그 중심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위치한다. 플라톤은 한 손에 '인간 사회의 본(本)을 이루는 우주의 영혼'을 논한 <티마이오스>라는 책을 들고 있다. 다른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걸어 나온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적 인간의 실천 윤리를 다룬 그의 책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을 들고 나온다. 오른쪽 손바닥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인간 삶의 윤리적 목적성'과 동시에 '인간 정치의 현실적 제약'을 균형 있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프랑스 출신 여성 철학자이자 기독인, 나아가 노동운동가인 시몬 베유가 쓴 <중력과 은총>(La Pesanteur et La Grace)을 보면서도, 제목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은 천사가 아니며 천사에게 정치를 맡길 수도 없는 불가피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슬픔과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을 돌보는 일에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중력(gravity)이라고 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 현실의 법칙대로 살아가면서도, 영원성의 가치를 갈구하게 하는 은총(grace)은 그녀 삶을 지탱시켜 준 힘 같았다. 중요한 건 그런 자각이 결코 인간을 굴종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데 있다.

순종과 헌신이 분명 영혼의 양식 가운데 하나일지라도 그것은 처벌에 대한 공포, 보상에 대한 기대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자율적으로 결정하거나 동의한다는 점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두려움으로 회중의 복종을 얻고자 하는 행위는 또 다른 영혼의 양식인 자유를 박탈하는 일이 된다는 사실을, 그녀보다 더 잘 말한 사람은 없지 않나 싶다. 우리는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부자유와 불평등의 원리에 사로잡히는 대신 인간 스스로의 자치를 잘하는 것을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으로 생각해야 한다. 동시에 이를 통해 신의 계획을 좀 더 깊이 이해하려 애써야 한다. 순종과 헌신에 대한 권위주의적인 해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자 했던 신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흔히 열정으로 번역되는 Passion(독일어로는 Leidenschaft)의 다른 의미가 '인간을 구원하고자 예수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과 수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 종교음악의 정점을 이루는 바하의 작품, '마태오 수난곡'(St Matthew Passion)이나 '요한 수난곡'(St. John Passion)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음악보다 제목에 들어 있는 Passion이라는 단어가 더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예수는 왜 전지전능한 능력으로 완전한 인간 세상을 만들려 하지 않고 죄지은 인간을 대신해 그 모진 수난을 감수했을까?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예수의 희생으로 구원의 길이 열렸지만 그 길을 넓히고 단단하게 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의 노력과 고뇌, 달라짐을 통해 실천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인간은 예수의 수난(Passion)에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열정(passion)으로 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세상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상적 최선을 만들 수 없고 끊임없는 고뇌를 동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무가치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해 본다. 분명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의 다른 얼굴은 슬픔과 고뇌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불완전함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고통과 슬픔에 대한 자각이 가치를 상실하는 데 있지, 고통과 슬픔 없는 인간 삶에 대한 허망한 약속으로 우리를 미혹하는 데 있지 않다. 그렇기에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문호 도스토옙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는 "고뇌를 거치지 않고서 행복을 파악할 수는 없다. 황금이 불에 의해 정제되는 것처럼 이상도 고뇌를 거침으로서 순화되는 것이다. 천상의 왕국 역시 우리의 노력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신의 왕국이 완전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하고 있는 민주정치의 한계를 우습게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예수의 몸 되신 교회라는 나라'에 헌신하는 삶을 앞세워 교회 밖의 민주공화국에 대한 참여를 부정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본다. 일체의 현실 정치 참여를 냉소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내면의 삶과 영혼의 평안에만 몰입하려 함으로써 현실에서 멀어지는 점도 최선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더 나은 인간 현실을 위해 우리가 민주정치에 참여하더라도 이상적 최선을 가져오지 않을 수도, 현실의 민주정치 안에서 수많은 심리적 갈등과 고뇌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구원의 의미를 깊이 자각할 기회가 생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을 기피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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