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 모두가 정치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참여해야만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데 있어 정치나 권력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정치와 무관하게 내면적 성취에 몰두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때도 많다. 2,500년 전 아테네의 시민은 정치 참여를 의무로 요구받았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가 공적 참여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민회에 참여할 자유가 있었지만 그 자유를 기꺼이 실천하려 한 시민은 20%에 불과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행복은 개인의 삶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 하겠다. 모두가 공적인 자리에 참여를 강요받는 사회의 피곤함을 즐겨 수용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가정은 끔찍한 비현실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정치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사회가 개개인의 단순한 합이 아니고, 정치 없이는 개인성의 터전인 사회가 존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 아테네 시민의 사적인 삶도 민회에 참여하는 6분의 1가량의 공적 시민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다. 정치 참여가 시민됨의 의무로 요구되었던 고대 민주주의와는 달리 직업 정치인의 시대인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또 정치가 인간 사회의 미래를 모두 책임질 수도 없다. 정치가 아니더라도 인간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는 일은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 정책의 우선순위가 약간만 바뀌더라도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부 예산의 일부가 다르게 쓰이면 결핍된 조건을 가진 많은 아이들이 내일의 삶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정치가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으며 정치를 통해 이상 사회를 만들 수도 없다. 정치의 일상에서 권력・위계・강제와 같은 억압적 요소들을 완전히 없앨 수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지지 정당이 있고 그 정당이 집권할 수 있을 만큼 실력과 유능함을 발휘한다면, 여기에 기대를 거는 사회적 약자 집단도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온정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 시민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정치는 그것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것 없이는 사회도 개인도 존재의 토대를 가질 수 없기에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때로 열정을 발휘하고 또 때로 실망하면서도 좀 더 나은 정치가 가능하기를 바라고 요구하고 주장한다. 정치가 최소화된 세계 혹은 다른 원리가 정치를 대신하게 된 세계가 있다면 아마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한 교황이 지배했던 중세나, 공산주의 같은 전체주의 사회를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 중세 시대처럼 가장 고결한 종교의 가치를 앞세워 정치의 역할을 대신하려 했을 때, 나치 시대의 독일처럼 가장 순수한 민족성을 실현하고자 하는 세력이 국가를 지배했을 때, 소련처럼 역사 발전에 헌신하는 공산주의 인간형을 만들 수 있다고 여긴 당이 전체주의적으로 사회를 지배했을 때. 그 비극성은 생각하기 무서울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정치는 없앨 수 없다. 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괴롭지만 우리가 해야 할 고민은 어떻게 정치를 다뤄야 하냐는 것이다. 인간과 사회에 어떻게 해야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와 가능성을 이해하고 그 기초 위에서 정치가 갖는 긍정성을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라면 어디든 정치를 부패와 부정, 권력 다툼으로 비난하고 정치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드는 반(反)정치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강력하다.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조차 민주주의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한다. 적어도 공식 담론의 차원에서 민주주의는 거의 사회적 합의처럼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정치를 야유하고 정치인을 비난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권능을 무력화시킬 수는 있다. 가난한 보통 시민들이 정치를 멀리하게 해야, 자신들에게 유익하도록 정치를 독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늘 정치와 정치인을 부정적으로 말하고 비난하면서 실제로는 가장 정치적이고 투표도 열심히 하고 정부 정책이나 예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민주주의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부자 시민들이다. 정치를 가난한 시민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민주적 수단이자 무기로 이해하는 생각이 자리 잡지 않으면 달라질 것은 많지 않다. 그럴 경우 민주주의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여전히 정치는 기성 질서를 운영해 온 사람들만의 놀이터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가난한 시민으로부터 떼어 내고 기성 질서 운영자들의 전유물로 만들 수 있다. 비록 도덕적으로 수많은 문제와 모순을 갖고 있지만 좀 더 나은 사회적 삶을 위한 시민의 유익한 도구로 만들 수도 있다. 이 선택을 둘러싼 갈등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향배를 결정할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000년 전 예수의 수난을 통해 열린 구원의 길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모멸받는 사회에서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건강하고 안전한,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로 바꿔 가려는 우리들의 노력 속에서 빛날 거라고 생각한다. 신의 마음과 신의 형상을 닮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민주정치의 노력은 그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 주지는 않겠지만, 분명 신을 기쁘게 할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혹자는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정치가 바뀔까'를 회의적으로 되물을 수 있다.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노력과 실천이 다 성과를 얻고, 다 응답된다고 말할 수 없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다. 역사학자들을 괴롭히는 윤리적 고민 중 하나는 인간의 역사에서 정의로운 의도가 실패한 사례는 많다. 반면 정의롭지 않은 의도에서 나온 시도가 정의에 기여한 것이 많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사의 시간을 더 길게 본다면, 정의에 기여한 결과들은 그 이전에 실패했던 수많은 정의로운 시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초에 활동했던 독일의 철학자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은 '이성의 간지'(Die List der Vernunft; the cunning of reason)라는 개념을 통해 마치 세상사가 이성보다는 반(反)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합리적 이성이 자기를 실현하는 방법일 뿐이라며 현실 속에서 이성의 작동이 '간사하다고 할 정도로' 얼마나 신비로운가를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신의 은총이야말로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니 우리의 노력이 제아무리 응답되지 못하고 현실에서 보상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자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dennoch), 정의를 위해 힘쓰라!"에 있다고 본다.

그 혜택은 우리가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한 것으로 실현될 수도 있다. 우리 밖의 시리아 난민들에게 베풀어질 수도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는 게 없다고 느끼는 사회적 약자들이 좌절을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로 나타날 수도 있다. 다만, 은총이 어떻게 작용하고 신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가 알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다만, 정의를 위해 힘쓰라!"야말로 우리 인간이 실천이성으로 삼을 만한 충분한 윤리적 근거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2015년 6월 26일, 오마바 대통령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흑인 교회 총기 난사 희생자 추도식에서 추모 연설을 했다. "이번 사건이 교회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더욱 깊이 상처를 입었다"면서 그는 "교회는 언제나 미국 흑인 사회의 중심이었고, 적대감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곳이었으며, 고통의 피난처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9명에 이르는 흑인 목사와 신도의 목숨을 앗아간 자의 행동에 대해 다음같이 선언했다.

"지배의 수단이었고, 겁을 주고 억압을 하는 방법으로 두려움과 보복 범죄, 폭력과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나아가 사회를 더 깊이 분열시켜 이 나라의 원죄(흑인 노예제, 옮긴이)로 돌아가게 하려한 것이지만 오, 그러나 하나님은 신비로운 방법으로 일하신다. 하나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셨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쓰임 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연설 내내 "편리한 침묵"과 "편견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기보다 "더 오래 지속될 변화를 위한 고된 작업을 함께 하기"를 요청하면서, 오바마는 은총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살인 용의자는 미움에 눈이 멀어 핀크니 목사와 성경 공부 모임을 둘러싼 그 은총을 보지 못했다. 빛나던 그 사랑의 빛을 보지 못했다. 희생자의 가족과 법정에서 대면했을 때, 그는 희생자 가족들이 그런 태도를 보일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의 한가운데에서 용서의 언어라니,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증오에 눈이 먼 그는 핀크니 목사가 깊이 이해하고 있던 하나님의 은총이 갖는 능력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기서 멈추길 원하지 않으신다. 타인의 아픔과 상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 나라를 만들어 온 전통과 삶의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변화를 위한 도덕적인 선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은총을 드러낼 수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역사는 불의를 정당화하는 칼이 될 수 없다. 진보를 막는 방패도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 주는 설명서가 되어야 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 말이다.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 바로 그것 말이다."

은총에 대한 정치가의 오바마의 해석이 이런 수준을 보여 주었기에, 그가 연설 중간에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른 것이, 나에게는 전혀 작위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정치가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좋은 정치를 실천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고뇌와 노력 속에서 신비로운 은총을 기대할 수는 있다고도 생각한다. 정치는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창조한 신의 계획을 이해하는 데서도 하나의 '불타는 문제'로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을 기피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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