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일까? 이 작은 질문이 결코 간단치가 않다. 대체 정치라는 인간 활동은 왜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적 동물'을 말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정치는 개인의 삶과 무관한 것일까? 정치에 무관심하면서 윤리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권력적이지 않은 삶'과 '권력을 선용하는 삶'의 두 비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결정을 하겠는가? 결국 인간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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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정치라는 말의 기원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그 말은 '시민으로서의 좋은 삶은 그들 사이의 공통된 문제를 다루는 정치가 좋아야 가능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치가 어떠냐' 하는 문제와 시민 개개인이 보람 있는 삶을 살 가능성 사이에 깊은 상관성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결론을 먼저 말하면, 개개인의 삶에 정치가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아주 직접적이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개인으로서의 사적 삶과 정치라고 하는 공적 기능 사이의 거리는 짧고 가깝다. 달리 말해 사회라고 불리는, '개개인 모두가 터 잡고 있는 공통의 조건'을 정치가 어떻게 움직여 가느냐에 따라 각자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 하는 문제 역시 아주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를 만나서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은가? 분명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반응은 사회마다 다르다. 사회적 안전망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잘 갖춰진 유럽의 복지국가들에 비해 미국은 각자가 가진 시장 경쟁력에 따라 개인의 삶이 상당 부분 결정된다.

유럽은 대략 고졸자의 30~40퍼센트 정도가 대학을 가고, 나머지 60~70퍼센트는 일찍부터 직업교육을 받는다. 이에 반해 미국은 거의 대부분이 대학에 진학해 직업교육이 아닌 일반 고등교육을 받는다. 그 결과 대졸자의 90퍼센트 이상은 대학 전공과 무관한 분야에서 직업을 찾아야 한다. 당연히 이들에게 취업 경쟁은 몹시 치열하다. 의료보험 역시 민간 기업이 주관하고 그 비용은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이런 조건에서 연애와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취업 능력이 결정적이다. 대학 다니며 빌린 학자금도 갚아야 하고, 결혼해 살 집을 얻는 데 필요한 모기지론(mortgage loan)도 신청해야 하며, 아이를 낳으려면 의료보험을 제공하는 직장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애 상대가 어떤 스펙을 갖췄고 어느 정도의 소득수준을 유지할 수 있고 어느 규모의 직장에 취업할 수 있을까를 중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들에게 실직은 곧 무보험자 및 모기지론 미납자로 전락할 위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일의 존엄성을 배우고 다양한 직업교육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상의) 사회 안전망의 보호를 받는 유럽의 젊은이들은 어떨까? 누구와 연애하고 결혼하고 싶은가에 대한 유럽 여성들의 응답은 흥미진진하다. 가강 많은 응답은? "키스 잘하는 남자"다. 간단히 말해 입을 맞췄을 때 사랑하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는 남자와는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키스 잘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의무이자 예의라는 뜻이기도 하겠다. 두 번째 많은 응답은 무엇일까? "유머 있는 남자"다. 누구라도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비극적 운명을 견딜 수 있도록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 있다면 그것은 유머다. 그런데 그런 유머 감각을 갖추지 못한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하는 일? 도저히 관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 번째 많은 대답은 무엇일까? "요리 잘하는 남자"다. 가사를 분담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기 이전에,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것을 즐거움으로 생각하는 남자라야 사랑할 수 있단다. 네 번째 대답은 "폭력적이지 않은 남자"다. 아무리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 단련해도 완력에 있어서 남자를 당해 내기는 어렵다. 따라서 폭력 성향이 잠재해 있는 남자와 연애하고 결혼할 수는 없단다. 아무튼 이런 대답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찍부터 자신의 직업 생활을 준비하고 나아가 실직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튼튼한 사회에서라면, 연애와 결혼의 상대를 선택할 때 스펙이나 취업 및 소득 조건을 따지기보다 정말 사랑하고 싶은 상대를 찾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젊은이가 유럽의 젊은이들에 비해 뭔가 인종적으로 별종이거나 해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도 중요하지만 결혼해 아이를 키우려면 보험 혜택이 제공되는 회사에 다닐 정도의 조건을 갖춰야 하는 사회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개개인의 태도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지, 타고난 인성이 달라서는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떨까? 대학생들에게 연애와 결혼의 대상으로 이성을 생각할 때 먼저 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을 때 가장 많은 응답은 "외모"였다. 대답을 듣는 순간 당황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사실 피부만 보아도 웬만큼 소득과 학력 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다. 강남 지역만이 아니라 규모가 큰 지하철 역 광고판마다 성형외과 광고로 뒤덮여 있는 현실에서 어쩌면 이들의 반응은 솔직한게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느냐 아니면 학력이나 경제적 조건, 외모가 더 먼저 고려되느냐 하는 지극히 사적인 문제도 개인들이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 하는 문제, 즉 해당 국가의 정치가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 왔는지 하는 문제와 그야말로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학을 학문으로서 세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가족을 이루고 친족과 마을을 이루어 사는 것만으로는 '목적을 가진 삶', '윤리적으로 좋은 삶'을 살 수는 없으며, 그러한 삶은 오로지 정치 공동체를 이루어 살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가족이나 친족 공동체로 이루어진 마을 안에서만 인간이 살게 된다면, 정의란 무엇이고 자유란 무엇인지가 중요할까? 그보다 더 큰 규모의 공동체 속에서 남들 내지 타인들과의 삶이 불가피해야, 왜 법이 필요하고 또 법 앞의 평등이 중요한지,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문제와 어떤 관련 있는지, 나아가 공적 결정에 필요한 정당성의 토대를 만드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등등이 제기되지 않겠는가?

이상과 같은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누군가 정치 공동체 없이도 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거나 아니면 인간 이하의 존재이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의 의미를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 그건 크게 오해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정한 의미는, 개개인이 선한 목적을 가진 좋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것을 위해서라도 좋은 정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정치적인 사람은 '현실을 개탄하고 냉소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 기성세력이 지배하는 정치 질서는 달라지기는커녕 더 강해지기만 할 것이다. 사람들을 정치에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어떻게 하면 지금과 같은 정치를 바꾸고 변화시켜 공동체에 기여하게 할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이 제대로 정치적인 사람일 것이다. 변화의 에너지와 적극적 참여의 열정을 모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정치와 사회도 달라질 수 있고 또 그래야 새로운 가능성도 만들어질 수 있다. 개탄과 야유, 냉소는 일반 시민을 정치에 다가가지 못하게 만드는 '악마의 유혹'일 때가 많다. 

사회는 개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인간이란 '사회 속에서만 개별화될 수 있는 존재'다. 달리 말해 사회가 없다면 개인도 없다. 그렇기에 사회 혹은 공동체 전체를 관장하는 정치의 기능이 좋아야 개개인도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여러분은 어떤가? 스펙과 소득이 연애와 결혼의 조건이 되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아니면 키스 잘하고 유머 있고 요리 잘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위해서도, 정치가 공동체적 차원에서 제 기능과 역할을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는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을 기피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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