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톨릭교회 등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 기독교 변증론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표작으로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가 있다.(사진 출처 위키백과)

사제나 목회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설교로 신도들의 정치적 판단과 행동을 이렇게 저렇게 이끌려는 경우가 있다. 신도들 역시 목회자의 정치적 의견을 신의 판단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따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를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옹호하는 일에 헌신한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홍성사)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거나, 목회자가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해 주길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한다.

"목회자는 '인간은 앞으로 영원히 살 피조물'이라고 볼 때 필요한 일들을 돌보기 위해 전체 교회 가운데 따로 구별되어 특별히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정치적 프로그램을 제시하라는 것은 전혀 훈련받지 못한 생판 다른 영역의 일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 일은 사실 우리 같은 평신도가 해야 합니다. (139쪽)

마치 "노동조합이나 교육 분야에 기독교적 원칙을 적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노동조합원들과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인 것처럼 말이다.

정치가들 가운데도 기독교적 교리에 맞는 정치를 앞세우는 사람이 있다. 독실한 복음주의 신도였던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은 신의 뜻이라며 이라크 전쟁을 성전으로 선포했다. 물론 그 뒤에 판명되었지만,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를 억제하기 위한 전쟁이란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종교적으로 옳기 때문에 한 거짓말은 사소한 문제일 뿐이라는 그의 생각이 파괴적인 전쟁을 가져온 것이다.

큰 교회 장로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권력을 앞세우기보다는 "섬김의 봉사 정신으로" 국정을 이끌겠다는 말로 대통령직을 시작했다. 자신에게 정치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오로지 봉사하며 살아가는 일"뿐이라는 말을 앞세워, 자신이 시민에게 책임성을 실천해야 할 최고 권력자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도 많았다. 이 역시 옳은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신앙심이 깊은 기독인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행사한 공적 권력이 정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따져져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독일의 기독교민주당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다른 면모를 보여 주었다. 그는 우선 <그리스도인 앙겔라 메르켈>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기독교적 정치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과는 다릅니다. 오직 기독교 신앙은 저에게 방향만 제시할 뿐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저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우며, 더 나아가 이를 통하여 희망을 안기고, 저를 격려할 따름입니다. 아울러 기독교 신앙을 통하여 저는 인간적 한계를 체감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집니다. 따라서 저는 독일 사회 내에서 개신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력이 증대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앞에서 우리의 행동하는 양심이 격려받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의 정치적 결단이 의미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51쪽)

정치가 메르켈은 기독교 신앙이 가치와 방향을 말해 주기는 하지만 신앙을 앞세워 정치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했다. 루터주의 목사였던 아버지를 존경하는 독실한 신자로서 그녀에게 신앙의 힘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메르켈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인간적 한계를 느끼면서 그 안에서 번민하지만, 교회는 저의 막연한 삶의 불안감을 해소해 주며, 저에게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도와준답니다. 한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타인의 죄를 용서해야 한다는 신앙의 진리는 저의 마음을 항상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만일 그럴 수 없었다면 아마 우리는 미쳐버렸을 거예요." (118쪽)

그렇지만 교회를 통해, 혹은 신앙의 방법으로 정치를 하려 하지는 않았다. 늘 기도했지만, 정치는 역시 정치의 방법대로 해야 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노력으로 실천하는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제가 정치적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것은 정직하지 못한 일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항상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과 건강을 주실 것을 기도드립니다. 나머지 부분은 제가 채워야겠지요." (121쪽)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고 대부분의 찬송을 악보나 가사 없이 부를 수 있다는 메르켈은, 신앙을 정치적 목표를 위해 이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른 무엇보다 경계할 일이라는 사실을 깊이 자각한 정치가였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신앙의 힘을 믿고 거짓 주장을 동원해 이라크 전쟁을 정당화하려 했는데, 메르켈은 부시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기독 정치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라크 전쟁의 경우 우리는 이 현상을 목격했습니다. 또한 교회의 권위를 이용하는 경우에도 저는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37쪽)

정치는 목회자가 주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신앙의 원리로 정치를 이끌려 해서도 안 된다는 C. S. 루이스의 생각을 실천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정치가를 꼽으라면, 나는 앙겔라 메르켈을 들겠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을 기피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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