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가 대면한 가장 강력한 도전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가 관료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 낸 권력 효과에 있다. 달리 말하면 그 어떤 구조적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있어 그들이 의견을 모아 공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거대 조직의 권력 효과 때문에 시민 개개인이 이미 불평등한 조건 위에 서 있다는 사실부터가 문제라는 것이다.
'법인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 관료제'로 대표되는 '거대 조직화의 시대'에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권의 원리를 실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론은 허상에 불과하다.
국가 관료제는 위계 체제(hierachy)를 기본 원리로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1원 1표의 불평등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위에서, 혹은 그 속에서 민주주의를 그 가치에 맞게 실천하는 일? 결코 간단치 않다. 제아무리 자유로운 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라 해도, 개인의 힘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개인 역시 집단으로 조직되고, 집단으로 투표할 수 없다면 평등한 시민권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는 게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본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이 사회를 나눠서 대표하고 경쟁하고 통합하는 '정당의 조직적 역할'이다.
사회 약자들이 모여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집단 이기주의'라며 불온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집단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진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들의 자율적 결사체를 가리킨다. 그것을 이기적이라 비난하면 결사의 자유는 빈말이 되기 쉽다. 나아가 기존의 불평등 구조가 그대로 온존되기를 바라는 일이 될 때도 많다. 약자들에게 집단과 결사, 조직은 최고의 민주적 수단이자 가치이다. 이를 통해 공동의 이익을 진작하면서도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끔 집단이나 조직의 역할을 부정시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광장에서의 직접 행동을 강조하고 대중의 참여 내지 순수한 열정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무엇보다 운동과 열정의 힘은 간헐적으로는 강할지 몰라도 지속성을 갖기는 어렵다. 책임감을 공유할 일상적 기반을 가꿔 나갈 수도 없다. 사나운 주장과 일방적 공격성을 쏟아 놓고 돌아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대부분 위선적인 삶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시절의 대규모 운동을 구현하려는 복고적 열정보다, 민주주의에 맞는 일상적 실천을 더 안정적으로 조직하고자 애썼으면 한다.
무정형적인 운동의 열정은 민주주의에서라면 조직화되어야 한다. 일상적 조직의 문제를 회피하고 현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는 어렵다. 막스 베버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독일의 정치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분석의 사례로 삼아 "조직을 말하는 자는 과두제(적은 수의 우두머리가 국가의 최고 기관을 조직하여 행하는 독재적인 정치체제)를 말하는 것이다"로 유명한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을 주창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직의 역할을 부정하고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혁명적 1)생디칼리스트가 되었고, 자신의 이론에 동조자가 많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파시스트가 되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조직과 정당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 선거와 의회, 대의제를 제대로 발전시키는 일을 폄하하면서 뭔가 완전한 민주주의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미혹하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혁명적이고 민중적인 레토릭을 갖고 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는 행정 국가와 경제 권력에 무제한적 자유를 허용하는 일이 되기 쉽다.
1)생디칼리스트: 운동적 열정과 주체적 의지를 강조하는 직접 행동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당과 의회, 리더십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거리에서의 직접 행동과 총파업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그 뒤 자유로운 결사체들이 공동체를 이끄는 무정부적 조합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특징이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을 기피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