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민주주의가 대면한 가장 강력한 도전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가 관료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 낸 권력 효과에 있다. 달리 말하면 그 어떤 구조적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있어 그들이 의견을 모아 공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 이전에 거대 조직의 권력 효과 때문에 시민 개개인이 이미 불평등한 조건 위에 서 있다는 사실부터가 문제라는 것이다. 

'법인 자본주의' 그리고 '국가 관료제'로 대표되는 '거대 조직화의 시대'에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권의 원리를 실천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론은 허상에 불과하다. 

국가 관료제는 위계 체제(hierachy)를 기본 원리로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1원 1표의 불평등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 그 위에서, 혹은 그 속에서 민주주의를 그 가치에 맞게 실천하는 일? 결코 간단치 않다. 제아무리 자유로운 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라 해도, 개인의 힘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개인 역시 집단으로 조직되고, 집단으로 투표할 수 없다면 평등한 시민권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는 게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본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이 사회를 나눠서 대표하고 경쟁하고 통합하는 '정당의 조직적 역할'이다.

▲ 로베르트 미헬스(Robert Michels, 1876~1936). 독일 쾰른 출생의 정치사회학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영국, 프랑스에서 유학했다. 마르크르크대학 강사로서 독일 및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운동에 관여했다. 1913년 베버에게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아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의 공동 편집자가 되었다. 그의 학문 영역은 정당, 조합, 대중사회, 내셔널리즘에서 우생학, 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했다. 대표적으로 그의 저서 <정당사회학>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사회민주당의 실태를 분석하여 '과두제의 철칙'을 실증적으로 밝혀낸 것으로 유명하다. 평등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진보 정당임에도 현실에서는 관료적 엘리트의 지배, 즉 과두제화로 실천되고 있음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면서, 조직을 만드는 순간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일종의 '민주주의 불가능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의 주장은 '단위 비약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정당들 사이를 규율하는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별 정당의 문제로 환원해 민주주의를 다뤘기 때문이다. 아무리 민주적인 정당도 하나만 존재하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일당제를 민주주의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복수의 정당들이 경쟁하는 민주주의하에서도 개별 정당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집단 지도 체제를 할 수도 있고, 최고 지도부 중심의 민주 집중제를 할 수도 있고, 일반 당원이 폭넓게 참여하는 개방적 결정구조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이는 해당 정당이 다룰 몫이다. 결국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혁명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미헬스는 그 어떤 제도와 조직, 정당, 의회, 대의제도 부정한 생디칼리스트에서 출발해 만년에는 파시즘에 경도되는 귀결을 보였다.

사회 약자들이 모여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집단 이기주의'라며 불온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집단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진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들의 자율적 결사체를 가리킨다. 그것을 이기적이라 비난하면 결사의 자유는 빈말이 되기 쉽다. 나아가 기존의 불평등 구조가 그대로 온존되기를 바라는 일이 될 때도 많다. 약자들에게 집단과 결사, 조직은 최고의 민주적 수단이자 가치이다. 이를 통해 공동의 이익을 진작하면서도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끔 집단이나 조직의 역할을 부정시하는 것을 본다. 그들은 광장에서의 직접 행동을 강조하고 대중의 참여 내지 순수한 열정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무엇보다 운동과 열정의 힘은 간헐적으로는 강할지 몰라도 지속성을 갖기는 어렵다. 책임감을 공유할 일상적 기반을 가꿔 나갈 수도 없다. 사나운 주장과 일방적 공격성을 쏟아 놓고 돌아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대부분 위선적인 삶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시절의 대규모 운동을 구현하려는 복고적 열정보다, 민주주의에 맞는 일상적 실천을 더 안정적으로 조직하고자 애썼으면 한다. 

무정형적인 운동의 열정은 민주주의에서라면 조직화되어야 한다. 일상적 조직의 문제를 회피하고 현대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기는 어렵다. 막스 베버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독일의 정치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분석의 사례로 삼아 "조직을 말하는 자는 과두제(적은 수의 우두머리가 국가의 최고 기관을 조직하여 행하는 독재적인 정치체제)를 말하는 것이다"로 유명한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을 주창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직의 역할을 부정하고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혁명적 1)생디칼리스트가 되었고, 자신의 이론에 동조자가 많던 이탈리아로 건너가 파시스트가 되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조직과 정당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 선거와 의회, 대의제를 제대로 발전시키는 일을 폄하하면서 뭔가 완전한 민주주의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미혹하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혁명적이고 민중적인 레토릭을 갖고 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는 행정 국가와 경제 권력에 무제한적 자유를 허용하는 일이 되기 쉽다.

1)생디칼리스트: 운동적 열정과 주체적 의지를 강조하는 직접 행동주의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당과 의회, 리더십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거리에서의 직접 행동과 총파업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그 뒤 자유로운 결사체들이 공동체를 이끄는 무정부적 조합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특징이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을 기피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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