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정치를 생각하면 먼저 가슴이 답답해진다. 어떤 때는 여야 간이 아니라 같은 당 계파 사이에서 오가는 말과 행동이 훨씬 더 사납다. 그게 더 걱정스럽게 여겨질 때도 많다. 이들이 정치를 하고 있는 건지 싸움을 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안 될 때도 많다. 정치에서 웃음이 사라진 지도, 정치가 시민들을 웃게 만든 지도 오래다.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다. 뭐든 상대방 탓으로 만들고자 마치 '거울 이미지 효과'처럼 모진 말을 반사하듯 주고받는 동안 놓치는 게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사안을 실체적으로 다루고 해결하려는 노력은 안 해도 되는 일처럼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게 있다. 우선 싸움이 있는 곳에 정치가 있다고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싸우기 위해 정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인간 사회에서 갈등과 다툼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정치의 역할과 기능이 있는 것이다. 거꾸로 정치가 갈등을 더 심화시키고 싸움을 인위적으로 조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반(反)사회적인 일이다. 우리가 처한 여러 상황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는 노력 대신, 없는 갈등을 만들고 사소한 갈등을 즐겨 최대화하려는 것을 정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정치가 필요하겠는가.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데, 사실 이 형용모순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정치가 안고 있는 근본적 어려움은 갈등적인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 속에서 일하는 데 있다. 그 때문에 정치라는 인간 활동은 수많은 이율배반(antinomy)을 감당해 내지 않고는 실천될 수 없다. 이런 운명적 조건을 더 깊고 넓게 이해하면서 남다른 정치 인식을 담은 말의 힘을 선용하는 일은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정치 언어의 역할은 변화와 개선을 위한 '가능성의 공간'을 확대하는 데 있지, 상대방이 거부감을 갖도록 정형화된 이미지를 부과해 소모적인 갈등을 지속하는 데 있지 않다. 민주주의는 강제나 억압이 아닌 설득의 힘, 말의 힘을 통해 실현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당연히 정치 언어가 좋지 않다면 그런 공동체에 가까이 가기는 어렵다. 변화와 개선을 이끌 적절한 말을 쓰는 일이 정치가의 의무이자 규범이 되었으면 한다. 사람이 공동체를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의 으뜸은 생산이나 성장, 기술에 있지 않다. 좋은 말의 효과에 있다는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면 정치의 긍정적 기능은 기대할 수 없다.

어떤 사안이든 절대적으로 옳은 결론을 갖기는 어렵다. 당연히 다양한 요구와 이견 사이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많다. 상대의 관점에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결정에 따라서 갈리게 될 피해자와 수혜자의 관점도 균형 있게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이 인간 행위를 이끄는 황금률(golden rule)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당파적인 입장을 말하더라도 최대한 보편적이고 공정할 때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계파와 파당적 입장만 고집스럽게 내세우면서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은 '정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 손톤 와일더(Thornton Wilder, 1897~1975) 미국의 소설가 겸 극작가. "격조 있는 문체와 신선한 형식, 인간존재의 의미를 찾는 명상적인 작품,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인생을 긍정하는 태도에 의해 미국 문학계의 특이한 지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평론가들이 말하는 공통적인 평가이다. 주요 저서에는 연애와 결혼, 그리고 죽음이라는 가정생활의 평범한 사건을 파헤친 <우리 읍내>와 <중매인> 등이 있다.

영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 ~1950)은 <나는 왜 쓰는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돌이켜 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됐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돼 있던 때였다."

상황을 개선하려는 실체적 목적은 빈곤한데, 뭔가 하는 척하는 구호나 상투적인 멋진 말만 외쳐서 일이 된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또는 그럴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변화를 모색하고자 한다면, 정치적이지 않을 수가 있을까?

흑인 여성이라는 정체성 속의 이중적 억압성을 날카롭게 문제 삼는 작품들로 퓰리처상과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 1931~ )은 "문학은 정치적인 동시에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문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치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한다. 가장 위험하고 갈등적이며 이율배반적인 조건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그곳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제대로 정치적이어야 실체적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 수 있고, 그럴 때 정치는 희망적이고 또 아름다울 수 있다.

정치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냉소와 개탄의 언어를 앞세워 변화의 가능성을 좁히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정치의 가치와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자들이자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개선과 변화의 방법을 찾아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사람들이다. 버락 오바마(Barack Hussein Obama II, 1961~ )는 그들을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을 가진 자들로 정의했다. 언제나 '예스! 위 캔!'(Yes! We Can!)을 함께 외쳤다. 반정치적인 사람은 변화에 대한 절망을 불러일으키려 하지만 제대로 정치적인 사람은 가능성, 상상력, 용기, 기백을 강조하며 희망과 의지를 말하는 자이다.  다음은 손톤 와일더의 자전적 소설 <Theophilus North>에 나오는 말이다.

"희망은 상상력을 투사한 한 결과이다. 절망도 상상력을 투사하지만 자신이 예견하는 불행을 너무도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러나 희망은 힘 있는 기백이며, 불행에 맞서 싸울 모든 가능성을 찾아 나설 의지를 깨운다. 상상력은 희망에 조응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결과를 그려 보고 모든 문을 두드려 보고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박상훈 

2015년부터 정치발전소 학교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영대를 졸업한 후 고려대학교에서 정치학 석·박사를 학위를 받았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정당의 발견>, <정치의 발견>,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이 있다.

박상훈의 기독인을 위한 정치

제1부 기독인에게도 정치에 대한 소명은 있다

1. 기독교와 정치학의 대화

2. 불완전한 인간의 정치

3. 인간의 자유의지와 민주적 자치

4. 민주정치를 위한 참여의 열정

5. 누가 정치를 이끌어야 할까

6. 신은 민주적 과업을 좋아하신다

7. 민주주의자는 정치주의자다

제2부 우리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8. 인간은 왜 정치적 동물인가

9. '진정성의 정치'가 중요하지 않을까

10. 철학적 인간 vs. 정치적 인간

11. 정치의 핵심으로서의 통치론

12. 정치적이되 아름다워야 한다

제3부 민주주의자가 갖춰야 할 정치적 이성

13. 소명으로서의 정치

14. 민주주의와 결사의 자유

15. 정당을 기피하는 사회가 위험한 이유

16. 갈등에 대한 민주적 이해 방법

17. 사회 갈등과 정당정치

18. 노동의 존엄성에 기초를 둔 공동체

19. 시민적 삶의 민주적 기초

20. 끝없는 여정의 민주정치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