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안圖案에 숨긴 태극 문양

선교 초기부터 3·1 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 통치로 전환하는 기간에, 비교적 일제의 침략과 통치로부터 자유로웠던 내한 외국인이나 선교사들이 간행한 각종 출판·문화 콘텐츠에서 조심스럽게 혹은 은밀히 한민족의 상징인 태극을 사용한 흔적들이 종종 확인된다.

선교사들이 관여한 출판물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저널 Transactions of the Korea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의 표지이다.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는 1900년 6월, 서울의 유니온클럽에서 결성되어 게일·헐버트·언더우드·존스·아펜젤러·벙커·스크랜톤·알렌·에비슨·트롤로프 등 쟁쟁한 내한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되었다. 1900년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저널>을 창간할 때부터 표지에 태극 문양을 사용했는데,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1940년 정간되기 전까지 처음 사용했던 표지 도안을 끝까지 고수했다. 일제의 태극 문양 사용 금지 조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내한 선교사들의 치외법권적 안전망이 작동한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의 역사·종교·문화·언어·풍속·생활상을 연구하는 한국학 연구지라는 정체성으로 한국에 대한 애정을 지속적으로 표현한 중요한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저널>의 표지. 중앙에 태극 문양이 선명하다.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 저널>의 표지. 중앙에 태극 문양이 선명하다.

한국과 관련한 영문 서적 중에서 태극 문양을 적극 사용한 초기 사례로 한국을 네 차례나 방문하고 한국에 관한 책을 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부인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당시 쏟아지던 편견과 차별의 시선을 극복하고 여성으로서 세계 여행을 단행한 여행가이자 탐험가, 저술가였다. 그는 자신의 책 표지나 책등에 태극 문양을 삽입해 한국을 향한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표현했다.

비숍 부인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의 표지. 두 판본 모두 표지와 책등에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비숍 부인의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의 표지. 두 판본 모두 표지와 책등에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조선 사람의 품성과 근면성은 장래 이 민족을 기다리고 있을 더 나은 가능성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 조선은 처음에는 틀림없이 불쾌감을 주었겠지만, 이를 극복할 정도로 오래 산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강한 흡인력을 가졌다." [Isabella Bird Bishop, <Korea and Her Neighbours>(1898) 중에서]

초기 내한 선교사 언더우드 부인(Lillias H. Underwood)이 한국에서 보낸 15년 생활을 회고하며 집필한 <상투잡이와 함께 보낸 15년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1904)의 표지에는 '대한'이라는 한글 글씨와 태극 마크, 그리고 중앙에 태극 문양이 새겨진 한국의 전통 홍살문이 그려져 있다. 또 선교사 가정과 한국인 가정의 육아와 일상을 비교하며 조선의 생활상을 상세히 묘사한 <With Tommy Tompkins in Korea>(1905)에도 표지에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는 한국의 정체성·전통·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도안이 아닐 수 없다.

남편 언더우드 선교사도 한국의 정치·종교·풍속을 서구 세계에 소개하기 위해 저술한 <The Call of Korea>(1908) 표지에 테두리 장식 디자인으로 복수의 태극 문양을 삽입했다. 같은 북장로회 선교사 클라크(Charles Allen Clark)가 실화에 기반해 한국 기독교의 초기 성장 과정을 서술한 소설 <First Fruits in Korea>(1921)의 표지에도 <The Call of Korea>나 <With Tommy Tompkins in Korea>와 유사한 도안의 태극 문양이 수록되었다.

태극 문양이 삽입돼 있는 언더우드 부인과 언더우드의 저술들.
태극 문양이 삽입돼 있는 언더우드 부인과 언더우드의 저술들.

1904년에 내한해 1940년까지 한국에 정주하며 개성여학교(훗날 호수돈여학교)·태화여자관 등에서 일했던 감리교 여선교사 엘라수 와그너(Ellasue Canter Wagner) 선교사도 다수의 한국 관련 선교 이야기와 단편선을 출판했는데, 그중에서도 한일 강제 병합 직후에 간행한 <Pojumie : A Story from Land of Morning Calm>(1911)의 표지에도 상단에 쌍태극기가 삽화로 게재되었다. 그는 다른 저서 <Korea : The Old and the New>(1931)에서 한국인 특유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열렬한 민족정신이다. 조선 사람은 애국심과 자신의 친구, 가족, 왕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종종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맞았으며, 자신이 지키려는 원칙을 위해서라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끝까지 용감하여 좀처럼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Ellasue Wagner, <Korea : The Old and the New>(1931) 중에서]

미 남장로회 선교사로 1911년 내한해 26년간 광주에서 활동한 교육 선교사 스와인하트도 여성과 아동 선교에 관여한 관심을 살려 <The Korea Mission Field> 등의 잡지에 한국 아동과 가정에 대한 다양한 문학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가 1926년 간행한 <Sarangie : A Child of Chosen>(1926)도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다 기생집에 팔려 가게 된 사랑이가 기독교인들에게 구출되고 신앙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를 담은 선교 소설집이다. 이 책의 표지에도 태극 문양을 집어넣어 불행한 현실을 신앙으로 극복하는 사랑이와 한국의 현실과 미래를 향한 소망을 오버랩하고 있다.

왼쪽부터 클라크의 <First Fruits in Korea>(1921), 엘라수 와그너의 <Pojumie : A Story from Land of Morning Calm>(1911), 스와인하트의 <Sarangie : A Child of Chosen>(1926).
왼쪽부터 클라크의 <First Fruits in Korea>(1921), 엘라수 와그너의 <Pojumie : A Story from Land of Morning Calm>(1911), 스와인하트의 <Sarangie : A Child of Chosen>(1926).

이외에도 내한 외국인들과 선교사들의 다양한 기고와 출판물 등을 통해 한국의 상징인 태극이 사용된 사례가 확인된다. 태극은 서양인과 한국인들 모두에게 명실상부 한국의 역사와 민족성을 표현하고 외국인들이 한국에 대한 애정과 연민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자 수단으로 활용되고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크리스마스실(Seal)의 숨은그림찾기

한국에서 크리스마스실을 처음 만든 이는 셔우드 홀(Sherwood Hall) 선교사였다. 그는 평양에서 처음 의료 선교를 실시했던 미 북감리회의 의료 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부부의 아들로, 1893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셔우드 홀은 질병으로 고통받는 한국인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다 순직한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의 숭고한 삶을 본받아, 자신도 그러한 섬김의 삶을 평생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모국인 캐나다에서 의학 공부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셔우드 홀은 1925년부터 해주 구세병원에서 일하게 되었고, 한국인들의 가장 시급한 질병 문제를 '결핵'이라 판단하고, 1928년 해주 결핵요양원을 설립했다. 지금은 결핵이 흔하지 않지만,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는 가장 많은 한국인이 고통받았던 고질적 질병이었다.

셔우드 홀과 메리안 홀 부부.
셔우드 홀과 메리안 홀 부부.

그는 결핵 환자 치료뿐 아니라 일반 사회를 대상으로 한 결핵 퇴치 운동도 적극 추진했다. 1930년 6월 27일 그는 아내와 함께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감리교 선교부 소개로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실의 창안자 비셀(Emily P. Bissell) 여사를 만나 크리스마스실 운동에 대한 정보를 얻고 돌아왔으며, 1932년 크리스마스를 맞아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여 결핵 퇴치 운동의 새 기원을 마련했다. 셔우드 홀은 1932년 실을 처음 발행하며 이 사업의 동기를 세 가지로 이야기한다. 첫째, 한국 사람들에게 결핵을 올바르게 인식시키고, 둘째, 만인을 결핵 퇴치 운동에 참여시키는 것, 즉 실값을 싸게 매겨서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셋째, 재정적 뒷받침이 시급한 결핵 퇴치 사업의 기금을 모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셔우드는 '크리스마스실 닥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당시에는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이러한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봉사 때문이었다.

첫 크리스마스실의 초안으로 그려졌던 거북선 그림.
첫 크리스마스실의 초안으로 그려졌던 거북선 그림.
거북선을 도안으로 삼은 1967년 크리스마스실.
거북선을 도안으로 삼은 1967년 크리스마스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홀 자신도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한국인들의 민족운동을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있었기에 크리스마스실을 제작하면서 그 도안에 한국의 전통 건물과 풍습을 담아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1932년 처음 발행한 실의 첫 도안은 조선의 민중에게 애국심과 독립 의지를 고취하기 위해 '이순신과 거북선'으로 그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 관리의 강한 반대로 서울 남대문을 도안하여 발행했다. 그런데 이 도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남대문의 누각 창문에 작은 점들이 그려져 있다. 이는 바로 남대문에 실제로 그려진 태극 문양들이다. 이렇듯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에도 태극 문양이 보이지 않게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후 첫 도안에 숨겨진 태극 문양은 1957년판 크리스마스실에 당당히 그 실체를 드러내며 삼태극으로 발행되었다.

한국의 첫 크리스마스실(1932, 숭례문 도안)과 해방 이후 태극 문양으로 발행된 실(1957).
한국의 첫 크리스마스실(1932, 숭례문 도안)과 해방 이후 태극 문양으로 발행된 실(1957).
1904년 호주 사진작가 조지 로스가 촬영한 숭례문(왼쪽), 누각에 복수의 태극 문양이 선연하다. 19세기 말 독일에서 제작된 숭례문과 태극 문양 엽서(오른쪽).
1904년 호주 사진작가 조지 로스가 촬영한 숭례문(왼쪽), 누각에 복수의 태극 문양이 선연하다. 19세기 말 독일에서 제작된 숭례문과 태극 문양 엽서(오른쪽).
오늘날 숭례문의 태극 문양들.
오늘날 숭례문의 태극 문양들.

이후 셔우드 홀은 한국의 전통 건물이나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한국 어린이와 민초들 모습을 도안으로 사용했다. 이런 크리스마스실이 일제 말기 우리 고유 풍습과 민속, 전통을 말살하려는 일제 총독부의 정책에 배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일제는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지 못하도록 훼방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던 1940년 12월 마지막으로 발행된 실에서 '서양 연호'인 '1940'을 쓰지 못하게 하고 대신 일본의 연호年號인 소화昭和를 사용하도록 강제했다. 홀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고, 뜻밖에 '제9년'(Ninth Year)이라는 연도를 표기한다. 이는 크리스마스실이 아홉 번째로 발행되었다는 의미였다. 이런 표기 방식으로, 구세요양원의 크리스마스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식 연호인 소화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실을 전통 한옥 대문 앞에 한복을 입은 어린이들이 서 있는 모습으로 인쇄할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었다. 결국 이후로 크리스마스실은 발행되지 못했고, 해방 후에 대한적십자사가 이어받아 발행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발행된 크리스마스실 도안.
1933년부터 1936년까지 발행된 크리스마스실 도안.
1936년부터 1940년까지 발행된 크리스마스실 도안.
1936년부터 1940년까지 발행된 크리스마스실 도안.
1940년 12월, 마지막으로 발행된 크리스마스실 도안. '제9년'(Ninth Year)이라고 연도를 표기하고 있다.
1940년 12월 마지막으로 발행된 크리스마스실 도안. '제9년'(Ninth Year)이라고 연도를 표기하고 있다.

일제에 의해 마지막으로 발행되었던 한옥 문 아래의 두 아이 그림은 1919년 3·1 운동 직후 내한해 한국의 아름다운 풍물과 풍경, 인물들을 그림으로 담아낸 영국의 판화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의 작품이었다. 그녀가 한국 곳곳을 다니며 그렸던 한국인의 얼굴과 풍경들은 지금도 그 아름다움과 생동감이 살아 있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훈훈한 감동을 전해 주고 있다. 1936년 키스가 도안한 한국 아동들의 연날리기 풍경은 다름 아닌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탑골공원이었고, 실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연날리기 그림의 원화에서는 주돈이의 음양 태극장이 그려진 태극연을 날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다른 작품 '연날리기 Kite Flying'에서도 천진한 아이들이 삼태극이 그려진 태극연을 신나게 날리는 모습이 확인된다.

이렇게 전시체제하의 태극 이미지는 크리스마스실 안에서도 숨은그림찾기로 일제 당국과 관원의 눈을 피하며 모든 한국인의 마음속 그림으로 가슴에만 아로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베스 키스(왼쪽)와 그가 그린 크리스마스실의 도안들. 탑골공원 '연날리기' 원화(중간)에는 주돈이의 음양 태극장이 선명하다.
엘리자베스 키스(왼쪽)와 그가 그린 크리스마스실의 도안들. 탑골공원 '연날리기' 원화(중간)에는 주돈이의 음양 태극장이 선명하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또 다른 '연날리기' 원화에는 삼태극연이 보인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또 다른 '연날리기' 원화에는 삼태극연이 보인다.
학교와 교회에 태극을 새기다

대한제국 초기 개화운동을 전개한 독립협회의 법인 도장 중앙에는 태극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다. 태극기와 태극 문양은 한국교회가 발행한 서양 달력에도 삽입되어 근대적 삶에 대한 새로운 상징으로 태극과 달력을 교차시켰다. 이렇게 태극기의 문화적 상징은 한국 기독교와 근대 한국의 생활 문화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어 갔다.

독립협회의 법인 도장(윤치호 소장).
독립협회의 법인 도장(윤치호 소장).
초기 한국교회가 새로운 생활 방식을 계몽하기 위해 보급한 달력. 왼쪽부터 대한예수교회연월력주일단(1903, 동은의학박물관 소장), 성서공회단력(1910,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소장).
초기 한국교회가 새로운 생활 방식을 계몽하기 위해 보급한 달력. 왼쪽부터 대한예수교회연월력주일단(1903, 동은의학박물관 소장), 성서공회단력(1910,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소장).

미 남장로회의 선교 지역 중 한 곳이었던 목포의 모교회인 양동교회 예배당 건물에서는 이례적으로 태극 문양이 발견된다. 1898년 9칸 한옥 예배당으로 시작한 양동교회는 교인 수의 증가로 1910년 건축에 착수했다. 유달산 돌로 지은 100여 평의 예배당은 정면 외에도 양쪽에 출입문이 두 개 있는데, 특별히 서쪽 출입문에는 위쪽 아치 조각에 한문으로 '대한융희사년大韓隆熙四年'(1910년)이라는 여섯 글자 중 '융'과 '희' 사이에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는 호남 기독교인들의 깊은 신앙과 민족의식을 교회 건축에 표현한 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엄혹한 일제강점기를 보내며 이 태극 문양이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서쪽 출입문 위로 큰 등나무가 있어, 거기에 가려 글씨와 태극 문양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목포 양동교회(왼쪽)와 서쪽 출입문의 태극 문양(오른쪽).
목포 양동교회(왼쪽)와 서쪽 출입문의 태극 문양(오른쪽).

1929년 제6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전신) 기념 메달에서도 태극을 발견할 수 있다. 기념 메달 앞면에는 한반도와 십자가, 뒷면에는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 1924년 출범한 한국 최초의 교파 연합 기구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도 3·1 운동 이후 한국 사회와 교계에서 활발히 전개되던 농촌 운동, 절제 운동, 기독교 진흥 운동, 기독교 학생운동 등의 다양한 사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고, YMCA, YWCA, 감리교와 장로교의 사회운동 기관들을 조율하며, 복음 전도 사업 이외의 당대 사회 현안에 대한 구체적 대응과 대안 모색에도 적극 참여했다. 아울러 1926년 일제 당국이 종교를 통제하기 위해 '종교 법안'을 발의했을 때에도, 한국교회와 기독교 단체들을 대표해 신앙의자유와 교회의 주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렇듯 1929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기념 메달은 민족 교회 정체성을 보존하고 일제의 간섭에 저항하는 주체적 집단으로서 연합공의회의 성격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역사적 증거다.

제6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9) 기념 메달. 앞면에는 한반도와 십자가, 뒷면에는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소장).
제6회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1929) 기념 메달. 앞면에는 한반도와 십자가, 뒷면에는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다(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소장).

이러한 기독교의 태극 문양을 통한 민족적 신앙 양태는 기독교계 학교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남감리회 선교부에서 설립한 배화학당(배화여학교)의 당인(학교 도장)에는 중앙에 태극 문양이 각인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배화학당은 민족 운동가였던 남궁억 장로와 차미리사 선생 등이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 민족 교육을 실시한 전통 있는 기독교 학교였다. 이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들은 1920년 3·1 운동 1주년을 맞아 필운대 언덕에 올라 만세 시위를 펼쳐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은 바 있다. 남궁억 선생은 학생들에게 한반도 모양의 열세 송이 무궁화 자수 실습을 실시해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조화하도록 가르쳤다.

중앙에 태극 문양이 새겨진 배화학당의 당인(왼쪽)과 남궁억 선생이 직접 고안해 보급한 한반도 모양 무궁화 자수(오른쪽). 배화 학생들에게는 자수 실습도 민족의식 고취와 신앙 훈련의 연장이었다.
중앙에 태극 문양이 새겨진 배화학당의 당인(왼쪽)과 남궁억 선생이 직접 고안해 보급한 한반도 모양 무궁화 자수(오른쪽). 배화 학생들에게는 자수 실습도 민족의식 고취와 신앙 훈련의 연장이었다.

1930년대가 되어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이 노골화되어 갈 즈음, 기독교계 교육기관에서는 학교의 교표를 새롭게 제정했다.

이화학당의 경우 1914년 처음 제정한 교표는 단순히 배꽃 이미지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1930년 아펜젤러 교장이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교장대리를 맡고 있던 밴 플리트(Edna Marie Van Fleet) 선생이 교수회의에서 여러 선생님들에게 받은 의견을 종합해 직접 디자인한 학교의 교표가 완성되었다. 아동교육학을 전공하고 이화보육학교 학감 및 교수로 1918년부터 20여 년간 봉직한 밴 플리트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예술에 깊은 애정과 통찰을 갖고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미술사를 강의하기도 했다. 밴 플리트가 초안한 이화의 새 교표는 중앙에 숭례문이 자리 잡고, 상단에는 태극 문양, 하단에는 배꽃이 장식되었다. 이 교표는 이후 1933년에 배꽃이 외부 테두리 장식으로 변동되고, 상단에 십자가, 하단에 태극 문양이 배치된 현재 모습으로 수정되었다가, 1939년에 이르러서는 일제의 강압으로 민족 정체성이 반영된 숭례문과 태극 문양은 삭제된 채로 십자가와 배꽃 문양만이 남게 된다. 해방 이후 이화여대 교표는 1933년 모습을 기반으로 새롭게 복원되었다. 이렇듯 한 학교의 교표 변천사만 보더라도 한국 근현대사의 노정이 선명하게 조망된다.

밴 플리트 교수가 1930년 처음 완성한 이화의 교표(왼쪽부터 첫 번째). 이후 1939년(두 번째)에 숭례문과 태극 문양은 삭제되었다가, 1964년(세 번째)에 현재의 교표가 확정되어 오늘(네 번째)에 이르고 있다.
밴 플리트 교수가 1930년 처음 완성한 이화의 교표(왼쪽부터 첫 번째). 이후 1939년(두 번째)에 숭례문과 태극 문양은 삭제되었다가, 1964년(세 번째)에 현재의 교표가 확정되어 오늘(네 번째)에 이르고 있다.

일제 말기 일제에 의해 잠시 문을 닫았던 연희전문학교도 해방 직후 연희대학으로 문을 열었을 때 새로운 학교의 교표를 방패와 십자가, 태극 문양이 조합된 모양으로 디자인했다.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희대학이 오늘의 '연세대학교'로 통합되었을 때에도 초기 교표는 연희대학의 모양을 따랐다. 이는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의 탄압에도 한국학과 조선어 교육에 집중한 연희전문의 전통을 해방 이후에도 계승한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이후 현재의 연세대 교표는 '연세'의 한글 자음 'ㅇ'과 'ㅅ'을 반영한 방패 모양으로 변경되면서 교표에서 태극이 사라지게 된다.

연희대학 교표(1946, 왼쪽), 그리고 연희와 세브란스가 통합했을 때의 연세대학교 초기 교포(1957, 오른쪽). 중앙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십자가와 방패 모양이 조합되어 있다.
연희대학 교표(1946, 왼쪽), 그리고 연희와 세브란스가 통합했을 때의 연세대학교 초기 교표(1957, 오른쪽). 중앙의 태극 문양을 중심으로 십자가와 방패 모양이 조합되어 있다.

감리교의 남자 교육을 위해 설립된 첫 근대식 학교인 배재학당도 1935년 개교 50주년을 맞아 새 교표를 제작했다. 당시 배재고등학교는 콘크리트와 벽돌이 혼합된 2층 구조물로 학교 강당을 신축했으며,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도약을 위한 모색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배재학원의 재직자들은 학교의 교표를 새롭게 제정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배재학원 홈페이지에는 1923년 임학선 선생에 의해 교표가 도안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배재 50주년을 맞아 1935년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가 기고한 글에는 배재의 새로운 교표 제정의 과정과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새 깃발이 고안되어 6월에 처음으로 휘날렸습니다. 전에 교기가 있기는 했지만 낡아 삭아져 여러 해 동안 교기가 없었습니다. 방패형의 새 도안은 한글 'ㅂ'을 바탕으로 그 한가운데 'ㅈ'을 흰 바탕에 푸른색으로 넣고, 영어 'p'에 'c'를 붙여 'cP'를 빨간색 안에 새겨, 두 개가 생명의 이원론을 상징하는 디자인으로, 50주년 기념식 하객 1000여 명이 처음 그것을 보고 치하했습니다. 이 교기는 1929년 동창들의 선물입니다." (H. D. Appenzeller, "배재 개교 50주년 기념일", <아펜젤러와 한국 제Ⅱ권>, 배재대학교, 2013, 384.)

배재대학교에서 출간한 아펜젤러 부자의 문집 <아펜젤러와 한국>의 역자인 김명환 박사는 후손인 루스 아펜젤러와의 인터뷰를 통해 배재의 새 교표에 들어간 'P'와 'c' 조합을 통한 'cP'의 이미지는 일본 정부를 속이기 위한 장치였으며, 결국 한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태극 문양을 표현한 것이라고 증언했다고 밝히고 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대륙 침탈의 야욕을 드러낸 후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노골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1935년에 배재학교의 새 교표에 태극 문양이 새겨진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일제는 이러한 배재학교의 의도를 간파하고 태극 문양의 교표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다.

배재학교의 임학선 선생이 도안했다고 전해지는 배재학원의 교표(왼쪽). 방패 모양에 배재의 'ㅂ'과 'ㅈ'을 배경으로 배치하고, 중앙 상단에 영어로 Pai Chai의 'P'와 'c' 조합을 통한 'cP'를 새겨 넣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태극 문양으로 디자인되었다. 오른쪽은 현재의 배재 교표.
배재학교의 임학선 선생이 도안했다고 전해지는 배재학원의 교표(왼쪽). 방패 모양에 배재의 'ㅂ'과 'ㅈ'을 배경으로 배치하고, 중앙 상단에 영어로 Pai Chai의 'P'와 'c' 조합을 통한 'cP'를 새겨 넣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태극 문양으로 디자인되었다. 오른쪽은 현재의 배재 교표.

구한말부터 해방 직전까지 한국 기독교의 교육 계몽 사업에 종사했던 윤치호는 1939년 일기에서 일제의 억압으로 기독교 학교들과 선교사들이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제는 그녀(엘리스 아펜젤러)가 사표를 내는 게 이 학교(이화여중고)를 위한 최선의 방책이 될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1)외국인들이 조선 중등 교육기관의 교장으로 일하는 걸 당국자들이 원치 않는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당국자들은 미국인들이 천황의 적자赤子인 조선 청년들을 탈일본화시킬까 봐 우려하고 있다. (2)학무국 당국자들이 학교에 강요하는 모든 요구 사항을 미국인 교장이 기꺼이 따른다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교단에 설 때마다 일장기에 경례해야 한다. 황국신민 서사를 제창해야 하며, 일본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하고 전몰장병의 영령에 감사 묵도默禱도 해야 한다. 국가를 제창해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신사참배를 해야 한다. 그는 이런 의식들을 치르면서 얼굴을 펼 수가 없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에게서 냉소적이거나 겁에 질린 표정을 읽을 수 있게 될 것이다. (3)경찰과 밀정들 역시 그런 낌새를 채고는 조선인 교사들을 닦달하게 될 것이다." (<윤치호 일기>, 1939년 2월 15일 수요일 중에서)

전시하 총동원 체제를 불러일으킨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 야욕은 1930년대를 거치며 더욱 광폭해지고 있었다. 민족의 상징인 태극은 선교사들과 기독교 기관들의 제도적 보호막 아래서 은밀한 암호처럼, 혹은 숨은그림찾기 문제처럼 간신히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는 이제 그러한 옅은 호흡과 나지막한 희망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광기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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