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첫 국가 상징 태극기는 누가 창안하고 만들었을까? 결과부터 말하면 이응준 제작설과 박영효 제작설이 상당 기간 갑론을박해 오다, 현재 이응준의 창안, 박영효의 제정, 조선 정부 반포라는 단계로 전개·확정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전근대 국가 조선에는 근대국가의 필수 아이템인 국기國旗가 존재하지 않았다. 국기를 정하는 제도는 서양에서 유래했고, 오랫동안 중국에 사대하고 쇄국정책을 고수해 온 조선은 특별히 근대 독립국가로서의 상징에 대한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았다.

조선은 1875년 강화도 일대에서 일어난 운요호雲揚號사건 이후, 서양 각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1876년 1월 강화도조약朝日修好條規 체결 과정에서 일본은 "운요호에는 엄연히 일본 국기가 게양되어 있었는데 왜 포격을 했는가"라고 트집을 잡았다. 당시 조선 관리는 국기가 무슨 의미와 내용을 지니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1875년 강화도를 침략한 운요호. 선미 상단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1875년 강화도를 침략한 운요호. 선미 상단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1876년과 1880년에 2차에 걸친 수신사 일행이 일본을 다녀왔고, 1881년 2월에는 일본시찰단(신사유람단) 일행이 방일했다. 이렇게 잦은 조일 간 교류와 서구 열강의 개항 요구는 조선 정부의 국기 제작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1881년 9월 4일 충청도관찰사 이종원李淙遠이 고종에게 국기 제정에 대한 장계를 올렸고, 1882년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국기 제작이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응준의 첫 태극기 도안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당시, 역관이었던 이응준李應俊(1832~?)이 5월 14일과 22일 사이에 미국 함정 스와타라(Swatara)호 안에서 처음 태극기 도안을 완성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은 매우 긴장감이 흘렀는데, 청국 특사로 내한한 마젠중馬建忠이 조선은 청국의 속국이므로 청국의 국기(황룡기)와 유사한 '청운 홍룡기'靑雲紅龍旗를 게양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미국 전권특사 슈펠트(Robert W. Shufeldt) 제독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위배된다고 판단해 조선 대표에게 국기를 제정해 사용하라고 촉구했다. 물론 고종도 청국의 이러한 태도에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고 한다. 이에 김홍집은 역관 이응준에게 국기 제작을 명했고, 조선의 국기로서 태극기가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조인식에서 성조기와 함께 나란히 게양되었다.

제물포에서 열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의 모습(1882). 성조기와 태극기 게양 모습은 기록화에 수록되지 않았다.
제물포에서 열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당시의 모습(1882). 성조기와 태극기 게양 모습은 기록화에 수록되지 않았다.

현재 조미수호통상조약에 게양되었던 태극기의 실물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1882년 7월 19일 미 상원 의결과 28일 하원 동의를 통해 미 해군부가 발간한 <해양 국가의 깃발들 Flags of Maritime Nations>(1882)에서 이응준 태극기로 추정되는 이미지가 확인되었다. 이 책은 1882년 당시 세계 49개국 154점의 깃발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태극기의 삽화가 등장한 것이다. 영문 명칭에는 'Corea'라고 표기되어 있고, 태극기 하단에는 'Ensign'(선적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1899년 간행된 제6판에는 태극기 하단에 'National Flag'(국기)라는 설명으로 수정].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될 당시 미국이 태극기의 실물(혹은 사진이나 스케치 등)을 입수하여 그 도안을 책에 수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론 처음에는 이응준 태극기가 선적기의 의미로 고안되었지만,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조선의 독립국가 정체성을 대내외에 알리는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미 해군에서 간행한 <해양 국가의 깃발들 Flags of Maritime Nations>(1882)에 게재된 청국 황룡기(왼쪽)와 이응준의 태극기(추정).
미 해군에서 간행한 <해양 국가의 깃발들 Flags of Maritime Nations>(1882)에 게재된 청국 황룡기(왼쪽)와 이응준의 태극기(추정).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가 미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슈펠트 문서 박스에서 발견한 태극기 도안.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미 해군에서 간행한 <해양 국가의 깃발들>에 수록된 태극기의 도안과 거의 일치한다. 사진 출처 이태진 명예교수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가 미국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슈펠트 문서 박스에서 발견한 태극기 도안.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미 해군에서 간행한 <해양 국가의 깃발들>에 수록된 태극기의 도안과 거의 일치한다. 사진 출처 이태진 명예교수
박영효의 태극기 도안 확정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1882년 8월, 임오군란의 피해를 수습하기 위해 특명전권대신 겸 제3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했다. 박영효의 일본 방문기 <사화기략使和記略>에 태극기 제작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언급되고 있다.

1883년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오사카판) 1월 10일 자에 게재된 박영효의 초상(왼쪽). 그가 수신사로 일본에 체류 중일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문서에 실려 있는 태극기(오른쪽). 이 태극기는 1882년 11월 일본 외무성 관원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Harry S. Parkes)에게 보낸 문서에 남아 있는 태극기다. 일반적으로 이 문서 작성 시기가 박영효의 일본 체류 기간과 일치하며, 당시 박영효가 각국 공사에게 태극기를 배포했다는 점에서 이 태극기가 박영효의 도안으로 추정된다.
1883년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오사카판) 1월 10일 자에 게재된 박영효의 초상(왼쪽). 그가 수신사로 일본에 체류 중일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문서에 실려 있는 태극기(오른쪽). 이 태극기는 1882년 11월 일본 외무성 관원 요시다 기요나리吉田淸成가 영국 공사 해리 파크스(Harry S. Parkes)에게 보낸 문서에 남아 있는 태극기다. 일반적으로 이 문서 작성 시기가 박영효의 일본 체류 기간과 일치하며, 당시 박영효가 각국 공사에게 태극기를 배포했다는 점에서 이 태극기가 박영효의 도안으로 추정된다.

"1882년 9월 25일, 맑음. 새벽 4시 고베에 도착해 아침 8시에 숙소인 니시무라야西村屋에 여장을 풀고, 누각에 올라가 경치를 구경했음. (중략) 새로 제작한 국기를 누각에 달았음. 흰 바탕의 천을 네모나게 세로로 깃대에 걸었는데, 세로의 길이는 가로의 5분의 2를 넘지 않았음. 중앙에는 태극을 그려 청색과 홍색으로 메우고, 네 모서리에는 건·곤· 감·리의 4괘를 그렸음. 이는 일찍이 상감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바임." (<국역 해동 총재 Ⅺ> 중 '사화기략', 87.)

박영효는 태극기 제작이 개인적인 결정이 아닌 오래전부터 고종의 명으로 진행되었던 프로젝트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 초기 태극기 제작은 그런 의미에서 당시 청국의 간섭과 통제를 벗어나 자주국가로 가기 위한 길을 모색한 고종의 의지가 반영된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박영효는 같은 글에서 태극기는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제작했으며, 디자인은 일본 주재 영국 영사 애스턴(W. G. Aston, 阿須頓)과 상의해 당시 해외 각국 깃발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영국인 선장과 의논해 만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영국인 선장은 "태극 주변의 8괘는 시각적으로 복잡하고 타국에서 모방하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4괘만을 네 모퉁이에 그려 넣으면 좋겠다"고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어 3개의 시안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정된 국기의 시안을 조정에 보내 보고했다(<사화기략> 89-90.). 태극기는 이듬해인 1883년 3월 6일 자 <승정원 개수 일기承政院改修日記>에 국기 반포에 관한 왕명이 실려 공식 채택되었다.

박영효 방일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유길준이 그린 태극기(왼쪽)와 유길준 사진. 태극기 형태와 구성은 박영효의 태극기와 유사하다(<유길준 전서 4>, 일조각, 1996.).
박영효 방일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유길준이 그린 태극기(왼쪽)와 유길준 사진. 태극기 형태와 구성은 박영효의 태극기와 유사하다(<유길준 전서 4>, 일조각, 1996.).

박영효는 이응준의 태극기에서 4괘의 좌우 위치를 바꾸었으며 그 모양이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태극기 모본으로 확정되었다. 이응준과 박영효의 태극기 도안 제작 과정은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매우 역동적인 노정의 산물이었다.

이상재의 태극기 제작설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태극기 첫 도안자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논쟁이 있었지만, 시기적으로 이응준의 태극기 도안(1882년 5월)이 가장 앞섰으며, 이후 박영효가 이응준의 태극기를 오늘의 모습과 유사하게 확정(1882년 9월)했고, 이듬해 조선 정부의 공식 채택과 반포(1883년 3월) 과정을 거쳐 우리 민족 역사 속에 널리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월남 이상재 선생.
월남 이상재 선생.

그런데 그동안 학계에서 이응준과 박영효의 양 제작설이 갑론을박하는 동안 간과되었던 다른 하나의 주장이 있었으니 바로 이상재李商在(1850~1931)의 제작설이다. 월남月南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과 대한제국 시기 문신으로 일본시찰단(1881) 수행원, 주미공사 서기관, 학무아문 참의, 의정부 총무국장 등을 지낸 엘리트 정치인이었다. 그는 1902년 개혁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한성감옥에서 성서를 읽고 개종해 기독교인이 되었다. 출옥 후 이상재는 YMCA를 중심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며 조선교육협회장, 조선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주도, 흥업구락부 회장, 신간회 회장 등의 활동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사회운동, 교육 운동, 민족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한성감옥에 투옥된 개혁당 사건 연루자들(1903년경). 맨 왼쪽에 결박된 채 서 있는 사람이 이승만,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홍재기·유성준·이상재·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이숭인(이상재의 아들)·유동근·김린·안국선.
한성감옥에 투옥된 개혁당 사건 연루자들(1903년경). 맨 왼쪽에 결박된 채 서 있는 사람이 이승만, 앞줄 왼쪽부터 강원달·홍재기·유성준·이상재·김정식, 뒷줄 왼쪽부터 이숭인(이상재의 아들)·유동근·김린·안국선.

고환규는 '태극기와 월남 이상재 장로'라는 기고(1978년 월간 <목회> 9월호)를 통해 태극기의 최초 창안자가 이상재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1882년 당시 22세에 불과했던 박영효보다는 11세 연상이었고 <주역>과 <태극도설>에 조예가 깊었던 이상재가 최초의 태극기 창안자로서 더 유력하다는 것이다.

이상재는 1881년 1월(박영효가 사절단으로 방일하기 1년 전), 박정양을 단장으로 구성된 일본시찰단(신사유람단)이 일본에 파견될 때 박정양의 개인 비서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당시 박정양은 국가를 대표해 방일하는 일본시찰단이 국가를 상징하는 국기를 갖고 일본에 입국해야겠다는 생각에 비서인 이상재에게 깃발을 고안하라고 지시했고, 이상재는 선상에서 태극기의 초안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1881년 일본시찰단 방일 과정에서 이상재가 고안한 태극기는 이후 전개된 대일對日, 대미對美 외교 활동에서 조선을 상징하는 국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음은 이상재의 유족인 이홍식李鴻植 씨의 주장이다.

조선의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 그는 주미공사로 지낸 11개월간 미국을 관찰·탐문한 기록인 <미속습유美俗拾遺>를 남겼다.
조선의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 그는 주미공사로 지낸 11개월간 미국을 관찰·탐문한 기록인 <미속습유美俗拾遺>를 남겼다.

"할아버지께서 태극기를 만드셨다는 말은 구전口傳으로 심심찮게 들어왔습니다. 개화 초기 외교관 박정양 씨와 가장 밀착해 계셨던 조부는 일찍이 역학易學에 달통하신 관계로 박씨의 요구에 따라 능히 오늘의 태극기를 창안한 줄 아는데 우리 한산韓山 이 씨 가문은 무슨 일을 밖에 선전하지 않는 미풍을 지키느라 내세우지 않아요." ('이홍식의 증언', "태극기와 월남 이상재 장로", <목회>, 1978년 9월호, 154.)

고환규의 글에서는 YMCA에서 이상재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 사제 관계를 맺은 윤치영尹致暎(1898~1996)의 진술도 장문으로 인용되었다. 윤치영은 "월남 선생은 후일에 우리와 접촉할 때에도 유학 체계에 밝고 <주역>과 <태극도설>에 깊은 이해가 있는 자신이 그때 태극기를 손수 고안하고 박정양 씨와 의견을 모아 직접 내걸었다는 말을 비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또 "월남 선생 측근의 많은 인사들과 함께 나는 선생으로부터 태극기가 지닌 심오한 의미의 말씀을 자주 들을 기회가 있었고, 그 해명을 육성으로 듣곤 했다"고 증언했다. 윤치영은 이러한 정황적 근거들을 토대로 이상재 선생이 태극기를 고안하고 창제한 인물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고 말했다.

생전에 이상재 선생은 잡지 <별건곤>에 자신이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임명(1887)되어 박정양 전권대사와 함께 도미할 당시의 회고문을 기고했다. 이 글을 통해 월남 선생은 당시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가 미국 땅에 나부끼는 모습을 매우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초대 주미공사관원 일행.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이완용·박정양·이채연. 뒷줄 왼쪽부터 김노미·이헌용·강진희·이종하·허용업 등 수행원과 하인들.
초대 주미공사관원 일행.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이완용·박정양·이채연. 뒷줄 왼쪽부터 김노미·이헌용·강진희·이종하·허용업 등 수행원과 하인들.
1891년 고종의 내탕금 2만 5000달러로 사들인 두 번째 주미공관. 입구에 태극 문양이 선명하다.
1891년 고종의 내탕금 2만 5000달러로 사들인 두 번째 주미공관. 입구에 태극 문양이 선명하다.

"도처에 흔날리는 태극기

이 상투잡이 공사의 일행인 우리가 떠날 때에 공사관에 게양할 조선 국기를 미리 예비한 것은 물론이어니와 우리가 타고 가는 기선 중에도 좌상에 국기를 꼬잣섯는데 눈치 빠른 선주는 벌서 우리 국기를 준비하야 식당이나 우리 출입하는 문구에다 게양하고 또 미국에 상륙할 시에도 부두, 정차장, 차내, 호탤까지 우리 국기를 게양하야 환영의 의를 표하엿섯다. 도처에 조선 국기를 볼 때에 반갑기도 하려니와 미국인의 외교술이 발달된 것도 감복하엿섯다." (이상재, '상투에 갓 쓰고 미국에 공사갓든 이약이', <별건곤> 제2호 1926년 12월 1일 자)

합력하고 조화하여 완성한
민족의 상징, 태극

이상재 선생이 자신을 태극기 최초 창안자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문헌이나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1948년 2월 8일 <경향신문>에 유자후柳子厚(1895~ 납북, 이준 열사의 사위, 경사經史에 해박하며 신학문新學文에도 능통했다고 전해진다.)가 기고한 '국기 고증 변'이라는 글을 보면 이상재가 태극기 제작 과정에서 일정 부분 참여했으리라는 정황적 개연성이 확인된다.

유자후, '국기 고증 변', <경향신문> 1948년 2월 8일 자.
유자후, '국기 고증 변', <경향신문> 1948년 2월 8일 자.

"나라를 대표하는 국기로서의 기호에 관한 문헌은 고적에서 도무지 이를 찾어볼 수 없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호로써 이 태극 국기의 근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주설이 구구한 모양이니, 혹자는 병자 강화조약(1876) 때에 제정된 것이라 하고, 혹자는 임오년 한미 통상조약(1882) 때 선정된 것이라 하고, 또 혹자는 임오군란 후 일본 수신사(1882) 박영효 씨가 작하였다 하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주장 가운데 최후의 설이 근시近是(사실에 가까운)한 것이다. 지금까지 참고 된 결과를 보면 본래 김옥균 씨의 창○(創○)로써 김홍집 씨와 상의하고 어윤중 씨의 찬성을 받은 후에 박영효 씨의 동의를 얻어 고종 황제께 품달하여 어재가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듯하다. 그리고 보면 우리 태극기의 창안자는 김옥균 씨요. 그 제정자는 고종 황제였던 것이다.

(중략) 우리 태극 8괘의 국기가 이와 같은 경위와 이와 같은 뜻을 갖고 탄생하기는 실로 대조선 개국 491년 임오년 7월 25일 고종 19년 서력 188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에 특명전권대사 수신사 박영효 씨가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향하였던 날이다. 그리고 고종 황제께서 각국의 기호와 비교하여 만약 고칠 점이 있거든 고치라는 품허까지 내리셨다. (하략)" (유자후, '국기 고증 변', <경향신문> 1948년 2월 8일 자)

최근 언론을 통해 알려진 유자후 선생이 쓴 '국기 고증 변'의 내용에는 기존의 이응준·박영효 제작설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주장이 제기된다. 그의 글에는 이응준에 대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으며, "지금까지 참고된 결과" 김옥균·김홍집·어윤중·박영효 등이 논의를 거쳐 고종의 재가를 받았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있다(유자후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어떤 자료들과 관련 증언 등을 수집해 근거로 삼았는지는 추후 심층 연구 과제이다). 태극기 창안이 어느 한 사람의 독단적인 노력이나 재능으로 성취된 결과가 아니라 당대 집단 지성의 협업과 공동 작업의 결과라는 관점이다. 그리고 당시 청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립국가의 자주성을 획득하려 한 고종의 의지와 노력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유자후의 <경향신문> 기고에서도 이상재는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글에서 언급된 인물들 중 김홍집은 이상재가 수행원으로 참여한 1881년 일본시찰단의 조직과 출범의 제안자였으며, 김옥균·어윤중은 이상재와 함께 일본시찰단에 직접 참가한 단원이었고, 박영효는 이듬해 일본사절단 대표로 활동한 인물이다. 아울러 1882년 박영효의 태극기 도안을 기록으로 남긴 유길준은 이상재와 함께 1881년 일본시찰단에 동행하여 도일 후 곧바로 최초의 일본 유학 생활을 시작한 인물이다. 이러한 태극기와 관련한 여러 인물 간의 친밀성과 유기적인 관계망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응준과 박영효가 태극기를 고안하고 확정 짓기 이전부터 고종의 주도하에 당시 조정의 젊은 인재들이 협력하여 조선 국기의 도안을 함께 궁리하고 모색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으리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역동적인 시대 흐름 속에 이상재도 이들과 함께 일했을 것이며, 그도 태극기 창안에 일정 부분 역할을 감당했으리라는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사료된다.

동양의 하늘과 서양의 하늘을
조화케 하는 믿음

그럼에도 굳이 이상재 선생이 태극기의 최초 창안자라고 무리하게 주장하며 논쟁을 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그가 사대事大를 국시國是로 삼았던 조선의 사대부士大夫로서 독립국가의 상징인 태극기를 바라보며 느꼈을 감흥과 시대 인식은 어떠했을까하는 점에 더 주목하게 된다. 그가 조미 수교 이후 주미공사관 서기관으로 처음 도미하는 과정에서 미국 땅에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았던 고백은 청국 공사의 간섭과 훼방을 물리치며 주체적인 독립국의 시민 정체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재발견하는 전환기적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이상재가 새롭게 올려다보았을 태극기는 지난 500여 년간 지속된 반상과 남녀의 차별, 상하 군림과 굴종의 역사를 극복하고 만국과 만민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새로운 시대정신과 세계관을 상징하는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였던 것이다. 태평양을 건너 맞이하게 된 태극기의 자유로운 나부낌은 억압된 과거를 벗어나 자주적 독립국가로 나아가는 새 시대의 시그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태극기의 첫 창안자로 구한말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이상재나 박영효보다도 중인 역관 출신 이응준이 지목되고 기억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인 감동과 울림을 준다.

근대국가 수립 과정에서 그 상징이 되는 태극기의 게양 앞에 가슴 뜨거웠던 인간 이상재의 애민 애족 정신은 이후 큰 정치적 시련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과 만나 더욱 견고해졌다. 그는 유자 출신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양의 지혜와 정신 유산을 기독교와 조화하고 상호 보완하는 관용과 공존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는 종종 '하나님'이라는 호칭 대신 유교의 '상제'上帝를 즐겨 사용했다. 동양의 하늘이 기독교의 하나님과 다르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가 잡지 <신생명>에 기고한 '참평화眞平和'라는 글의 일부 내용이다.

이상재, '眞平和', <신생명>, 1924년 4월, 31.
이상재, '眞平和', <신생명>, 1924년 4월, 31.

"마태 십이 장 이십오 절 '국마다 스스로 분쟁하면 멸망할 것이요, 성이나 가이나 스스로 분쟁하면 입入치 못한다'하였고, 동양 선성先聖이 왈 천시불여지리天時不如地利(하늘이 주는 좋은 때는 지리적 이로움만 못하고)요, 지리불여인화地利不如人和(지리적 이로움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라 하였으니, 천하만사가 화평化平이 아니고는 하나도 될 수 없나니라. (중략) 우리 기독基督이 자기를 희생하여 사람의 죄를 대속하신 진의眞意(참뜻)를 불망不忘(잊지 않을 것)할지니, 진평화眞平和의 본원本源은 애(사랑)와 노(애씀)에 재(있다)하다 하노라. 동양 선성先聖도 부도夫道는 인노人怒뿐이라 하였나니라." (이상재, '眞平和', <신생명>, 1924년 4월호, 31.)

이상재의 삶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과 진리를 잊지 않으면서도 동양 성현들이 남긴 지혜와 수덕修德의 정신 또한 무시하지 않는 균형감을 보여 주었다. 그렇게 이상재 선생은 태극의 조화로운 이미지처럼 평생을 흔들림 없이 이 땅의 고통 받는 민족에 대한 애정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고 투쟁할 수 있었다. 그가 감히 그러한 삶을 살아 낼 수 있었던 것은 새 시대를 향한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가 그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까닭은 아니었을까.

1923년 함흥 지역 YMCA 농촌 강습회를 마치고 청년들과 함께한 월남 이상재 선생(맨 왼쪽).
1923년 함흥 지역 YMCA 농촌 강습회를 마치고 청년들과 함께한 월남 이상재 선생(맨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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