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는 더욱 기회를 볼 필요가 있으나"

"4. 기독교도의 동정. 

 1. 기독교의 시국 인식 

(1) 평남 노회의 동정

평안남도 소재 평양 및 평서 양 노회는 12월 7일부터 평양부에 있어서 동계 연합 사경회를 개최하였는데, 위 양 노회 간부는 신사참배 문제 이래 각종 국가적 행사에 교리 위반을 방패로 당국의 방침에 결항決抗하고 있는 바 (중략) 소관 평양서에 있어서 사전 책임자에게 엄중 경고 (중략) 노회 자체의 존립에 미칠 영향을 가늠하기가 어렵지(난계難計) 않으므로, 점차 자중하여 시국에 순응하여 숭미崇米 사상을 배제해야 하니, 동교仝教 혁신을 말하는 데 이른 결과, 혁신 의식이 점차 교내에 미만(㳽漫, 넘쳐 흐름)하여 사경회 회장에 있어서 민족파의 급선봉인 목사 주기철도 드디어 대세에 순응하여 13일 제7일에 참가자 2000명에 대하여 극히 시국을 인식한 인사를 한 뒤에 출정군인 가족出征軍人 家族 위문금의 헌납을 제안했으니 즉좌卽座에서 56엔 50전의 거금이 모였다." ['치안 상황: 기독교도의 동정' 제44보-47보, <국내 항일운동 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1938년 1월 14일]

1937년 12월 7일, 평양과 평서 양 노회가 공동주최한 동계 연합 사경회가 평양에서 개최됐다. 당시 서북 지역 장로교회들은 "신사참배 문제와 각종 국가 의례에 교리 위반을 명분 삼아 저항"했다. 하지만 일제 당국의 엄중한 경고로 "노회 자체의 존립"에 위협을 느낀 장로교 지도부는 "점차 순응"했다. 마침내 12월 13일 2000명의 사경회 참가자 앞에서 장로교 지도부의 전향적 태도가 미묘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치안 상황: 기독교의 동정',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1938년 1월 14일. 이 보고서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평양 지역 장로교 지도자들의 전향적 태도에 대한 보고가 비교적 상세히 적혀 있다. 이 당시 지도부는 신사참배 문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논의하기로 하되 국기 게양과 동방 요배는 교회 차원에서 수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치안 상황: 기독교의 동정',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1938년 1월 14일. 이 보고서에서는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평양 지역 장로교 지도자들의 전향적 태도에 대한 보고가 비교적 상세히 적혀 있다. 이 당시 지도부는 신사참배 문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논의하기로 하되 국기 게양과 동방 요배는 교회 차원에서 수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평양 연합 사경회에서의 비상한 기류 변화를 감지하고 보고한 문서 '치안 상황: 기독교도의 동정'(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1938년 1월 14일)에서는 "사경회 회장에 있어서 민족파의 급선봉인 주(기철)목사(당시 부노회장 - 필자 주)"가 "극히 시국을 인식한 인사"와 "(중일전쟁) 출정군인 가족을 위한 위문금 헌납 제안"을 했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평양에서는 1935년 일제가 평남도지사 야스다케安武直夫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와 국가 의례를 기독교 학교와 교회에 강요하기 시작해 1938년에 이르러 그 강압적 핍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 속에서 "교리상 이유로" 신사참배를 비롯한 각종 국가 의례를 반대해 오던 장로교의 보수적인 지도자들이 일제 당국으로선 눈엣가시 같았을 것이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과 이어지는 승전보, 일제의 더욱 강고해진 탄압과 강요 앞에서 완강하던 교회 지도자들도 결국 "일제에 순응하는 것은 시대의 대세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체념과 한계에 봉착했다.

1932년 평양 숭실학교 강당에서 열린 평서·평양 양 노회 연합 사경회 광경
1932년 평양 숭실학교 강당에서 열린 평서·평양 양 노회 연합 사경회 광경
주기철 목사(1897~1944)
주기철 목사(1897~1944)

평양·평서 양 노회의 지도자들은 연합 사경회 기간에 일종의 타협안을 궁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침내 사경회를 개최한 지 7일째 되는 13일, 2000명의 신자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천명했다.

"주 목사의 전향한 행위転向振에 일반 회중도 다대한 감동을 받은 바와 같이 간부 등은 '신사참배는 더욱 기회를 볼 필요가 있으나, 당장은 국기 게양 및 동방 요배는 장래 이것을 실행해야 함'이라고 의견에 일치하여 일반에게 주지周知시켜야 함을 가지고, 동정 시찰 중." ['치안 상황: 기독교도의 동정' 제44보-47보, <국내 항일운동 자료: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문서>, 1938년 1월 14일]

정리하면 "교리상 신사참배를 시행하는 것은 곤란하나 일제가 요구하는 국기 게양과 동방 요배는 앞으로 실행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장면은 이후 네 차례의 구속과 탄압 속에서도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의 저항 동기가 순수한 종교적·교리적 논리에 입각한 것이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주기철을 비롯한 당대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교회 내 일장기 게양과 동방 요배, 황국신민서사 제창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은 정치적 타협 과제에 불과했다. 이렇게 1937년 12월 평양 연합 사경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일말의 갈등 가능성만 여지로 남겼고, 전국 모든 교회는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빠르게 순응해 갔다. 그리고 1938년 2월 평북노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시작으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1938년 9월 10일)는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당시 홍택기 총회장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황국신민서사 암송(사진 위)과 동방 요배 모습(사진 아래).
황국신민서사 암송(사진 위)과 동방 요배 모습(사진 아래).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宗敎가 아니오,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 의식임을 자각自覺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率先 수행하고 급히 국민정신 총동원國民精神 總動員에 참가하여 비상시국하非常時局下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함. 소화 13년(1938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성명서 중에서)

이러한 장로교 총회 결의에 반발한 평양신학교는 가을 학기 개교를 무기한 연기·휴교했고, 소위 (후)평양신학교가 총독부 인가를 받아 1940년 4월 11일 개교(교장 채필근 목사)했다. 이때부터 평양신학교에서도 각 절기마다 신사참배와 동방 요배를 실시했으며, 교내 강당에는 일장기를 게양했다.

1941년 3월 12일 (후)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 모습. 강당 중앙 전면에 일장기가 크게 게양돼 있다.
1941년 3월 12일 (후)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식 모습. 강당 중앙 전면에 일장기가 크게 게양돼 있다.
1930년대 말 김화감리교회 내부 모습.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피도수 선교사가 예배당을 한국식으로 아름답게 조성했지만, 그 중앙 상단에는 일장기가 게양됐다.
1930년대 말 김화감리교회 내부 모습. 한국 문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피도수 선교사가 예배당을 한국식으로 아름답게 조성했지만, 그 중앙 상단에는 일장기가 게양됐다.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붉은 신앙

파시즘 시기 일제는 한국교회 어용화 및 일본 기독교 체제로의 편입을 적극 획책했다. 1938년 5월 8일 경성 부민관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창설해 이를 '친일어용단체'로 활용하고자 했다. 이 단체는 조선 내 일본인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돼 "이 시국을 극복하자면 내선內鮮 교회가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조직됐다. "본회는 기독교의 단결을 도모하고 상호 협조하여 기독교 전도의 효과를 올려, 성실한 황국신민으로서 보국함을 목적으로 한다"(<靑年>, 1938년 7월 호, 18~19쪽)는 조항을 포함한 11개조로 된 간단한 회칙을 통과시킨 뒤, 위원장에 일본 교회의 니와 세이지로丹羽淸次郎, 부위원장에 아키츠키 이타루秋月致, 정춘수 등이 당선됐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법적으로 일본기독교단 산하에 예속 됐다. 이 시기부터 일제는 한국교회 전체를 대상으로 신사참배를 대대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령'을 내려 민족말살·황국신민화 정책을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내선일체'의 미명하에 조선인 청년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실시했다. 이에 경성의 각 교파 기독교회들은 1942년 5월 11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신자 1000여 명을 동원한 가운데, '징병제 감사 기독교 신도 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감리교 정춘수·박연서 목사, 장로교 전필순·김영주 목사 등은 "진충보국盡忠報國의 결의를 보이고, 동시에 전 조선 700만 청년에게 용진분기勇進奮起할 것"을 외쳤다[<기독교신문>, 1942년 5월 13일 자]. 그들은 이 행사장에서 다음과 같은 낯 뜨거운 성명을 낭독하고 천황의 장수를 기원하며 '성수만세聖壽萬世'를 봉창했다.

1942년 대전역에서 전선으로 출병하는 조선 청년들을 배웅하는 이 땅의 가련한 어머니들. 그들이 손에 들고 흔든 일장기와 "덴노 반자이!"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1942년 대전역에서 전선으로 출병하는 조선 청년들을 배웅하는 이 땅의 가련한 어머니들. 그들이 손에 들고 흔든 일장기와 "덴노 반자이!"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병합 이후 이날이 빨리 오기를 얼마나 앙망仰望하고 있었던가. 30여 년간 조선 시정 중施政 中 최대의 획기적 업적이고, 특히 남 총독(미나미 지로 총독 - 필자 주)의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이념에 현실적인 요소를 넣은 것이어서 실로 찬송할 말이 없다. 지금이야말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는 대도大道가 열린 것이다. 소집을 받을 청년 제군! 제군은 폐하의 방패가 되려는 어신임御新任을 얻은 것이다. 이 감격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또 일장기에 환송을 받는 세계에 관절冠絶한 황군 용사를 내 아들, 내 손자 내 동생을 갖는 아버지도 조부도, 형도, 누나도 울어라. 울 수 있는데 까지 울어라. 울음이 그치거든 여하如何히 하여 이 감격에 답할까를 종용히 생각하라. 기실其實 아등我等은 아직도 황국신민으로서의 자격에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폐하의 적자赤子라고 말하여 부끄러운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반도 동포에 이 영광을 사하옵신 광대무변廣大無邊의 어인자御仁慈에 봉대奉對하여 감사感謝의 적성赤誠을 봉하게 됨에 응소應召되는 자는 물론 노약남녀老若男女는 함께 감분흥기感奮興起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중략) 취중就中 아등我等 기독교도는 율선率先 몸으로써 이것의 지도指導에 당할 정신대挺身隊가 되기를 전 동포에 호소하고 또한 서약하는 바이다." ['징병제 감사 기독교 신도 대회: 성명서', <기독교신문>, 1942년 5월 13일 자, 2면] 

한국교회의 훼절한 지도자들은 전투기와 기관총 대금을 헌납하고 교회 종과 대문을 떼다 바쳤으며, 많은 청년들에게 전장에 자원입대하라고 종용·강권했다. 그리고 전장으로 떠나는 장병들에게 일장기를 들어 환송했다. 특히 눈에 띄는 전쟁 부역 활동은 동남아시아·태평양 등지에서 전쟁을 치르는 군인들을 위한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이는 전선에서 무더위에 고통받는 장병들에게 천황에 대한 충성·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일장기가 그려진 '히노마루 부채'를 다량 제작해 보내는 사업이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이러한 일제의 전시 총동원 체제에 동원되거나 적극 동참했다. 1942년 이래 한국교회의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에 관한 보도는 적잖이 확인된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기사 몇 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태평양전쟁 시기 제작된 히노마루 부채의 앞면(사진 위)과 뒷면(사진 아래). 국방부인회(1932~1942)에서 제작해 전장에 헌납한 부채로 '국방 부인의 노래'와 '총후의 꽃' 노래 가사가 뒷면에 적혀 있다. 사진 제공 홍이표
태평양전쟁 시기 제작된 히노마루 부채의 앞면(사진 위)과 뒷면(사진 아래). 국방부인회(1932~1942)에서 제작해 전장에 헌납한 부채로 '국방 부인의 노래'와 '총후의 꽃' 노래 가사가 뒷면에 적혀 있다. 사진 제공 홍이표

"원산 기독교연합회 주최로 지난 7월 8일 밤에 중앙교회당에서 지나사변(일본에서 중일전쟁을 이르던 말 - 편집자 주) 급 대조봉대(일왕이 미국에게 선전포고한 날 - 편집자 주) 기념 예배회를 열고, 부위원장 권의봉權義奉 목사 사회하에 국민의례로 시작하여 '성서적으로 본 금차 전쟁'이란 제로 위원장 김상권金尙權 목사의 시국 설교가 있었고, 히노마루日ノ丸 부채 헌금을 한 후 폐회하고, 다시 간담회로 옮기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한다." ['원산 기련 주최 사변 기념 예배', <기독교신문>, 1942년 7월 2일 자]

"빗나는 대전과를 거두어 싸우고 잇는 남방의 제일선 용사에게 종후의 서늘한 바람을 보내자고 본사에서 제창한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은 사회 각 방면에 큰 반향을 이르켜 연일 적성의 헌납 부대가 쇄도하고 잇는 중인데 24일에는 부내 종로 2정목 91번지 조선기독교서회 양원주삼(梁原柱三, 양주삼)씨가 본사를 방문하고 부채 1000본의 대금으로 280원을 기탁하엿다." ['적성의 히노마루 부채 일천 본을 헌납: 조선기독교서회의 적성赤誠', <매일신보>, 1942년 4월 28일 자]

"남방의 고열 속에서 충용무비忠勇無比한 활약을 하고잇는 육해군 장병에게 총후 국민의 적은 뜻이라도 표하겟다는 본사 주최의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의 소문을 들은 의산노회 교직자 혁신회革新會에서는 신의주와 의주군 일대에 잇는 각종의 예수교회 단체에 헌납하기를 제의하야 크다란 감격 밑에 각 교회 신도들은 1만 본을 자진 헌납하엿다. 20일 오후 1시 동 혁신회장 산본득의山本得義씨는 본보 평북지사를 방문하고 1만 본 대금 2800원을 내여 노흐며 겸손한 태도로 다음과 가치 말한다.

 

'귀사에서 히노마루 부채를 헌납한다는 사고를 보고 의산노회 교직자 혁신회에서는 전 교도의 헌납을 꾀하엿습니다. 세간에서는 기독교도들은 찬송가나 부르고 기도나 하는 줄로만 알지만 우리들은 신앙보국信仰報國이라는 큰 깃발 밑에서 국책에 순응하려 합니다. 귀사의 이 헌납 운동은 실로 더운 지대에 출정한 육해군 장병에게 적지 안은 도움이 될 것을 알고저 그나마 1만 본을 헌납한 것입니다. 이 헌납하는 부채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붉은 신앙이 잇는 것을 특별히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적성의 히노마루 선자扇子 신의주서 만 본 헌납: 야소교도들 애국의 열정", <매일신보>, 1942년 5월 22일 자]

<기독교신문> 1942년 6월 3일 자 기사 '감리교단 충청구역 연회 개요'를 보면 여자 사업의 중요 사업으로 '일장기 부채(日ノ丸扇子, 히노마루 센수) 백 본 헌납百 本 獻納'이라는 보고가 확인된다. 이처럼 히노마루 부채 헌납 운동은 서울의 대표적인 기독교 기관인 기독교서회를 비롯해 지방 교회와 여성들에게까지도 요구되는 전시 총동원 체제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일장기 부채 헌납 운동 관련 기사들. '원산 기련 주최: 사변 기념 예배', <기독교신문>, 1942년 7월 29일 자(사진 위),  '적성의 히노마루 부채: 일천 본을 헌납 조선예수교서회의 적성', <매일신보>, 1942년 4월 28일 자(사진 왼쪽), '적성의 히노마루 선자 신의주서 만 본 헌납: 야소교도들 애국의 열정', <매일신보>, 1942년 5월 22일 자(사진 오른쪽).
일장기 부채 헌납 운동 관련 기사들. '원산 기련 주최: 사변 기념 예배', <기독교신문>, 1942년 7월 29일 자(사진 위),  '적성의 히노마루 부채: 일천 본을 헌납 조선예수교서회의 적성', <매일신보>, 1942년 4월 28일 자(사진 왼쪽), '적성의 히노마루 선자 신의주서 만 본 헌납: 야소교도들 애국의 열정', <매일신보>, 1942년 5월 22일 자(사진 오른쪽).

1937~1945년은 한국교회사 굴욕과 암흑의 시대였고, 이 시기 한국 그리스도인들 안에서는 훼절과 순교가 교차했다. 전시체제 총동원령의 열기 속에 히노마루가 새겨진 부채를 들고 땀을 식혔을 그 시대의 부채질 소리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답답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후텁지근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한 일장기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산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수혜자이자 생산자이다. 그래서 결혼하고 출산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 시대의 다양한 조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특하고도 다양한 문화와 관습을 만들어 왔다. 그런 점에서 문화라는 것도 순수하게 문화적인 것은 없고 다분히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박건호,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휴머니스트), 236쪽] 

역사학자 박건호는 2020년 출간한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 - 평범한 물건에 담긴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중의 체취가 깃든 일상의 흔적을 통해 대중적·미시적 역사 서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는 12장 '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에서 해방 이후 태극기를 게양한 결혼식 문화를 통해 국가주의가 당대 민초들의 삶과 일상에 미친 강한 영향력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태극기가 게양된 1950년대 결혼 사진들.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 국가주의적 상징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박건호 소장
태극기가 게양된 1950년대 결혼 사진들. 이승만 정부는 북한과의 체제 경쟁의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일상생활에 국가주의적 상징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박건호 소장

 "이런 결혼식 문화의 배경에는 일제강점기 말 군국주의의 영향이 있는 듯하다. 이제껏 내가 수집한 일제 말기의 결혼 기념사진 대부분은 결혼식장에 일장기가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은 대부분 결혼식장에서 혼례를 치르는 '신식 결혼식'을 하지 않고 예전처럼 신부집에서 혼례를 치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결혼식장에서 '신식'으로 예식을 치르고 남긴 결혼 기념사진들, 그중 특히 일제강점기 말의 사진에는 어김없이 일장기가 등장한다. 욱일기는 물론이고 일본의 동맹국이던 독일의 나치 깃발이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일제강점기 황국신민화 교육의 일환으로 궁성 요배(동방 요배), 황국신민서사 암송 강요와 함께 히노마루(일장기)에 대한 배례가 강요되었는데, 그 영향으로 결혼식장에도 일장기가 걸렸을 것이다. 이런 일제강점기 결혼식장의 일장기가 해방 이후 자연스럽게 태극기로 바뀐 것이 아니었을까?" (12장 '결혼과 출산, 그리고 국가주의', 245~247쪽) 

박건호는 "해방 이후 북한 체제와 대결해야 하는 이승만 정부가 국민 결속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태극기의 상징성을 더욱 강조"했으며, "1950년대 한국인들이 해방을 기쁨을 일상생활에서 표현하는 차원에서 결혼식장 태극기 게양을 실천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는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던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지배 이데올로기는 힘이 세다. 일제 파시즘의 전시체제는 해방 이후 수립된 새로운 대한민국 정부 위정자들에게도 매력적인 지배 논리로 일정 부분 수용·동원됐다. 아울러 한국전쟁이라는 극심한 민족상잔 비극을 겪은 이후로는, 실제적으로 상존하는 주적을 앞에 두고 더욱더 강고한 국가주의를 주입해야 했을 것이다.

파시즘 시기 일제의 지배 논리는 '식민지민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한 제국'이었다. 아동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맹세하는 서사를 암송해야 했으며, 모든 젊은이들은 국가의 미래 세대를 생산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며 혼례를 치러야 했다. 결혼식장에 일장기가 게양된 것은 이러한 파시즘 지배 이데올로기의 상징적인 풍경이었다. 그리고 신식 결혼식에서 가장 선호된 장소인 교회 예배당은 이러한 풍경이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공간이 됐다.

교회 내 일장기(혹은 욱일기) 게양 풍경은 비단 결혼식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은퇴 목회자 기념식이나 유치원 졸업식 등 교회에서 이뤄진 행사 대부분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려 갔다. 그렇게 파시즘 시기 한국교회는 국가권력에 철저히 순응해, 얻을 수 있는 일상의 안락과 일말의 권력을 향유하며 도적같이 찾아올 '해방의 카이로스'를 향해 달음박질하고 있었다.

일제 말기 일장기와 욱일기를 게양한 결혼식 풍경. 박건호 소장
일제 말기 일장기와 욱일기를 게양한 결혼식 풍경. 박건호 소장
1940년대 초, 대전감리교회 인동예배당에서의 결혼식 풍경. 사진 제공 김영순
1940년대 초, 대전감리교회 인동예배당에서의 결혼식 풍경. 중앙에는 일장기가, 오른쪽 벽면에는 황국신민서사가 부착돼 있다. 사진 제공 김영순
만국기가 게양된 1940년대 교회 결혼식 풍경. 만국기 중에는 나치기와 욱일기,일장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소장
만국기가 게양된 1940년대 교회 결혼식 풍경. 만국기 중에는 나치기와 욱일기,일장기 등이 포함돼 있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소장
1940년대 욱일기와 일장기가 포함된 만국기를 게양한 삼척읍교회 결혼식 풍경. 사진 제공 홍승표
1940년대 욱일기와 일장기가 포함된 만국기를 게양한 삼척읍교회 결혼식 풍경. 사진 제공 홍승표
1934년 함경남도 단천읍교회 보구유치원 졸업식 풍경.
1934년 함경남도 단천읍교회 보구유치원 졸업식 풍경.
1942년 함중노회 강두송 목사 성역 30주년 기념식. 예배당 전면 상단에 욱일기와 일장기를 포함한 만국기가 게양돼 있다.
1942년 함중노회 강두송 목사 성역 30주년 기념식. 예배당 전면 상단에 욱일기와 일장기를 포함한 만국기가 게양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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