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왕에는 항상 대한국기를 바라보고 슬피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슬프다 너 대한국기여 너는 무슨 연고로 영국 십자기와 같이 오대양과 육대주에 널리 꽂히지 못하였으며 너는 무슨 연고로 미국의 사십팔성기와 같이 십삼도 안에서 영구히 빛나지 못하며 이태리국 삼색기와 같이 반도국의 영광을 날리지 못하며 아라사(러시아)의 쌍솔개기와 같이 아세아와 구라파 대륙을 굽어보지 못하고 다만 동방 한 모퉁이에서 수치와 욕을 면치 못하고 있어서 서녘 하늘에 풍우가 일며 너의 다리가 흔들리며 남녘 지방에 티끌이 날리며 너의 낯이 참담하여 너를 대하는 이천만 형제로 하여금 애곡함을 말지 않게 하니 슬프다. 너는 어느 때에나 나라 사기史記의 신령한 빛이 돌아오게 하며 국민의 권리를 붙들어 호위하리오 하고 눈물을 뿌렸더니 오늘날에 이르러서야 한국 국민의 국가 정신을 보니 네가 분발하여 일어날 때가 반드시 있으며 네가 독립을 할 날이 반드시 있으리로다.

 

국민의 국가 정신이 이 같은즉 우리 독일무이獨一無二하시고 지존 지대至尊至大하신 상제上帝께서 너의 위에 임하사 너로 하여금 나라의 혼을 부르게 하시며 너로 하여금 나라의 힘을 붙들게 하시고 너의 이르는 곳에 보배로운 빛이 항상 비치더니 저 마장魔障(귀신의 장난)이 무슨 물건이며, 고통이 무슨 물건이며, 수치가 무슨 물건이며, 번뇌가 무슨 물건인가. 무릇 일체 한국동포들아 이외의 혁혁한 국기를 항상 볼지어다. 그 대내의 국가 정신이 여기 있느니라. 바람이 임하여 대한국기에 대하여 두 번 절하고 한 붓을 들어 전국 동포를 권면하노라." ('논설 – 자국 정신',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7일 자 1면.)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를 불과 1년 6개월 앞두고 비애와 한탄의 눈물을 쏟으며 <대한매일신보> 주필은 위와 같이 통렬한 애가哀歌를 읊조리고 있었다. 처연하게 나부끼는 태극기 옆에는 언제인가부터 섬뜩하고 음험한 일장기가 팔짱을 끼듯 교차해 걸려 있었으리라. 이러한 기괴한 풍경이 바로 1909년 망국 직전 한반도 태극기의 처지였다.

친일 단체 일진회가 남대문 앞에 게양한 태극기와 일장기. 통감부는 1907년 8월 27일 순종 즉위식에 일본 황태자가 방한할 당시 숭례문을 통과하는 것은 조선 왕실을 숭배한다는 의미라 하여 친일 단체 일진회를 통해 숭례문 성곽을 철거하게 하고 마차로 덕수궁까지 이동했다. 숭례문과 서울 성곽의 수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진회는 일본 황태자가 지나갈 수 있는 봉영문奉迎門을 조성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게양했다.
친일 단체 일진회가 남대문 앞에 게양한 태극기와 일장기. 통감부는 1907년 8월 27일 순종 즉위식에 일본 황태자가 방한할 당시 숭례문을 통과하는 것은 조선 왕실을 숭배한다는 의미라 하여 친일 단체 일진회를 통해 숭례문 성곽을 철거하게 하고 마차로 덕수궁까지 이동했다. 숭례문과 서울 성곽의 수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일진회는 일본 황태자가 지나갈 수 있는 봉영문奉迎門을 조성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게양했다.

기록상 태극기가 처음 내걸린 민간 행사는 1896년 11월 독립문 정초식이었다. 이러한 군중 집회와 '애국가' 혹은 '독립가'의 제창은 태극기가 민족 공동체와 국가를 상징하는 표상임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과정이 되었다. 이렇게 태극기는 단순히 "대한제국의 주권과 국체의 상징"으로 시작해 이후 "애국심을 표현하는 도구", 더 나아가 "애국심을 투사投射하는 대상"으로 확장해 마침내 '임금과 인민의 몸을 받은 존재', 즉 국가 자체라는 계몽이 진행되었다.

"(독립)신문 사장(서재필)이 연설하되 '대체 무슨 일이던지 까닭이 있는지라. 오늘날 조선 학교 학도들이 여기 모여 대운동회를 할 때 이 마당을 조선 국기로 단장을 하였으니 그걸 보거드면 조선 인민도 차차 국기가 무엇인지 알며 국기가 소중한 것을 아는지라. 국기란 것은 우흐로는 님군을 몸 받은 것이요 아래로는 인민을 몸 받은 것이라. 그러한 고로 국기가 곧 나라를 몸 받은 것이니 이렇게 학도들이 모여서 운동회를 할 때에 국기를 모시고 하는 것은 조선 인민들이 차차 조선도 남의 나라와 같이 세계에 자주 독립하는 것을 보이자는 뜻이라.'" (<독립신문>, 1897년 4월 29일 자 1면.)

이러한 태극기의 위상은 대한제국의 국운이 망국의 시기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초월적 단계로 격상되어 갔다. 1907년 미국에서 귀국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처럼 한국에서도 국기 의례를 시행할 것을 제안하고 국기에 대한 사랑과 숭상을 의전적으로 보급하고자 했다.

'국기 예배'라는 제목의 기사. 도산 안창호(사진 오른쪽)의 제안으로 태극기를 숭상하는 행사가 공식 행사로 채택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국기 예배'라는 제목의 기사. 도산 안창호(사진 오른쪽)의 제안으로 태극기를 숭상하는 행사가 공식 행사로 채택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서서西署 만리현 의무균명학교義務均明學校에서 지난해去年 귀국하였던 미국 유학생 안창호 씨가 생도에게 대하여 권면한 내개內開(봉투에 넣어 봉하여진 편지 내용)에 '미국 각종 학교에서는 애국 사상으로 매일 수업上學 전에 국기國旗에 예배禮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것(唱함)을 보았은(見한)즉, 그 개명開明 모범模範은 사람으로 하여금今人 감격感昻케 한다. 그러므로然則 우리나라凡吾 학교들도 이제부터 시행하자從今施行' 함으로 그 학교該校에서 지난 달去月 일주일曜日로 위시爲始하여 배기창가례拜旗唱歌例를 행한다더라." ('국기 예배',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 자 2면.)

1907년 국가 존망 위기에 처한 대한제국은 안창호의 제안을 기점으로 기독교 예배 의식을 차용한 '배기창가례拜旗唱歌禮'를 채택했다. 이러한 학교에서의 국기 의례는 오늘 우리에게도 익숙한 국민의례와 학교 조회의 역사적 연원이 되었다. 체제의 허약과 붕괴 조짐은 사회규범과 제도를 더욱 보수화·제도화·형식화하는 관성이 있다. 현재까지 전승되어 온 국기 게양 이벤트와 퍼포먼스가 바로 이러한 망국의 불안이 정점에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07년 당시 '배기창가례'가 어떠한 형태로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큰절을 하거나 허리와 고개를 숙여 태극기를 향해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자세를 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러한 태극기에 대한 사랑과 숭배는 일장기라는 실체적 그림자를 품은 불안한 사랑이었다.

태극기와 일장기의 대결

일반적으로 교회사 연구가들은 국권 상실의 절망이 높아 가던 시기의 한국교회가, 1907년 대부흥 운동 이후 개인적 내세 신앙과 성령 체험에 몰두한 나머지 '비민족화'되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흥의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근대 시민 정체성과 만민 평등 사상을 공유하며 오히려 더욱 끈끈하고 내밀한 애민 애족 정신을 구축했다. 1903년 원산 대부흥의 산실인 원산 남산동교회 신축 예배당 기념사진(1906년)을 보면, 전 교인 뒤로 태극기를 게양해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표현했다.

원산 남산동교회 신축 예배당에서 신자들이 함께한 사진. 교회 전면에 태극기를 교차해 게양한 것이 눈에 띈다.
원산 남산동교회 신축 예배당에서 신자들이 함께한 사진. 교회 전면에 태극기를 교차해 게양한 것이 눈에 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운은 날로 쇠약해 갔다.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일제가 한국 침탈을 기정사실화하면서 교회 내에서도 강제적으로 일장기를 게양토록 하는 조치가 빈번해졌으며, 이는 민족적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대표 사례가 1909년 초 순종 황제가 평안도 일대를 돌아본 '서북 순행' 당시 교회와 학교 기관에서 일장기를 태극기와 함께 게양하는 것에 평양의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가 강한 거부감을 표출하며 저항했던 사건이다.

1909년 1월 27일 평양역 앞에서의 순종 서북 순행 장면. 평양역 입구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되어 게양되어 있다. 순종은 1909년 1월 경상도와 충청도 순행을 마친 후, 27일부터 2월 3일까지는 7박 8일간 평양·의주·신의주·개성 등지를 순행하고 돌아왔다. 이 순행에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비롯한 궁내부 201명, 내각 49명, 통감부 29명 등 총 279명이 호종원으로 참여했다. <순종 황제 서북 순행 사진첩>,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1909년 1월 27일 평양역 앞에서의 순종 서북 순행 장면. 평양역 입구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되어 게양되어 있다. 순종은 1909년 1월 경상도와 충청도 순행을 마친 후, 27일부터 2월 3일까지는 7박 8일간 평양·의주·신의주·개성 등지를 순행하고 돌아왔다. 이 순행에는 이토 히로부미 통감을 비롯한 궁내부 201명, 내각 49명, 통감부 29명 등 총 279명이 호종원으로 참여했다. <순종 황제 서북 순행 사진첩>,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이번 서도 거동 시에 지영차로 한일 국기를 같이 달려는 문제에 대하야 평양야소교회 목사 길선주 씨와 장로 김성택 안봉주 박치득 제씨가 극력 반대하야 교회 여러 학교에서 태극기만 달았는데 그곳에 잇는 경찰서에서 김성택 씨를 불러다가 일본기 달지 아니한 일을 질문하매 김씨가 대답하기를 모든 학도들이 다 일본기 다는 것을 즐겨 하지 아니함으로 이같이 하였노라 하였다더라." ('일국기 반대',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5일 자 2면.)

태극기에 대한 한국 기독교인의 애정과 관심은 1903년 한국 최초로 조선인 미주 이민단이 하와이와 멕시코 지역에 이주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역만리 타국에 정착하게 된 한인 이민자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에 정착하는 불안감과 고국을 향한 그리움을 해소하고자 신앙에 의지했고, 자연스럽게 한인 교회는 이민 사회 구심점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1906년경에 이르러서 한인들은 13개 교회와 35개 전도소를 갖추었고, 하와이 한인 교회는 10년 만에 예배당 39개, 신자 3800명에 이르렀다. 당시 하와이 한인 중 70~80%에 달하는 규모였다. 이는 초기 미주 지역 이민 사회가 교회와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확장·발전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케 한다. 이렇게 성장한 하와이 한인 교회들에는 한민족의 동질성과 공동체성을 확인시켜 주는 태극기가 어김없이 게양되었다.

그러나 하와이는 이미 일본인 이민자들이 다수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일본 이민 사회와의 교류 및 관계 또한 요구되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 연회가 열릴 경우, 다인종 사회가 참여하는 대개의 연례 회의는 한인 교회에서 개최되었다. 1909년 하와이 한인 교회에서 열린 회의 사진을 보면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다. 당시 한일 강제 병합을 눈앞에 둔 시점에 한일 이민자 간의 적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음에도 양국기가 교회에 게양되어 있는 모습은 당시의 미묘한 전환기적 상황을 여실히 증언해 주고 있다.

1909년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의 선교 연회 기념사진. 1909년 한인과 일본인들의 갈등과 적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음에도 양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민병용 소장/로베르타 장 제공.)
1909년 하와이 한인 감리교회의 선교 연회 기념사진. 1909년 한인과 일본인들의 갈등과 적대감이 최고조에 달했음에도 양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민병용 소장/로베르타 장 제공.)
의병장 출신 구연영 전도사의 순국

기독교계에서도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 과정에 대해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대표적으로 경기도 광주·이천 지역에서 활동한 구연영·구정서 전도사 부자의 순국 사건을 주목할 수 있다. 1895년 일제가 자행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해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당시 경기도 광주와 이천 지역을 통해 활동하던 구연영은 의병대 중군장이 되어 백현(이천 널고개) 전투를 압승으로 이끈 바 있다. 그러나 남한산성 점거 이후 경북 의성까지 내려가 항전하던 그는 의병 운동에 한계를 느껴 반년 만에 회군했다. 그리고 구국 운동의 새로운 방편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전도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20개가 넘는 교회를 세웠으며, 오히려 더욱 강한 민족의식과 구국 의지를 담아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믿음은 진실한 신념으로 상제上帝를 신봉하고 그리스도基督의 교훈으로 죄과罪過를 회개하고 진리의 삶으로써 완전한 인간의 기초를 삼고자 함이오,

 

소망望은 확고한 소망을 가지고 관존민비官尊民卑, 의타 사상依他思想, 직업 차별職業差別, 미신 허례迷信虛禮 등 악풍 폐습惡風弊習을 타파 개선하며 신교육新敎育을 흡수하여 현실 만에 낙념落念 말고 직업에 충실함이오.

 

사랑愛은 진정한 애의 정신으로 경천애인敬天愛人을 표어로 하고 하느님을 공경하며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고 정의로 단결하여 모르는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조국 광복의 기초라." ('춘경春景 구연영 선생 약전', <獨立血史>, 2권, 1950, 179.)

의병장 출신 양반의 개종과 전도 활동은 지역사회에 큰 변화를 주었다. 그는 자신의 노비들을 풀어 주었고 천민들에게도 존칭을 사용해 광인狂人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구연영은 권서인 활동에 충실하면서도 각 지역의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해 구국 계몽 운동을 진행했다.

특히 친일 어용 단체인 일진회一進會(1904년 친일파 송병준 주도로 설립된 친일 어용 단체)의 민낯을 폭로하고 일제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는 집회를 개최했다. 이에 일제 헌병대는 기밀문서에서 "경성 동편 십여 군에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어질 것이요, 배일자排日者도 근절될 것"이라고 했다. 구연영은 일본의 한반도 침략 계획과 일진회 활동에 큰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1907년 구한국 군대 해산에 따라 거병된 정미의병으로 전국은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일본군 헌병대는 의병장 출신 전도사 구연영과 그 아들 구정서가 활동하는 이천 지역에 진주하여 마침내 두 부자를 이천 우시장 미루나무에 묶고 팔과 다리를 칼로 찌른 후 총살했다. 초기 개신교 전도인 중 첫 순국이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구연영·구정서 전도사 부자와 그들의 순국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1907년 9월 29일 자 3면). 구연영 전도사(중앙)와 그를 기리는 순국 추모비(오른쪽). 추모비는 이천중앙교회 앞에 건립되어 있다.
구연영·구정서 전도사 부자와 그들의 순국을 보도한 <대한매일신보> 기사(1907년 9월 29일 자 3면). 구연영 전도사(중앙)와 그를 기리는 순국 추모비(오른쪽). 추모비는 이천중앙교회 앞에 건립되어 있다.

"일병 오십여 명이 이천읍 안에 들어와서 예수교 전도인 구연영 구정서 부자를 포살하고 그 근처 오륙 동리를 몰수히 충화하엿다더라." ('부자 구몰', <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29일 자 3면. ※구몰俱沒: 부자가 모두 죽다 / 충화衝火: 일부러 불을 지르다)

구연영·구정서 부자의 비극적 죽음을 몇 줄 단신으로 보도한 <대한매일신보>는, 그로부터 2년 후 친일 매국노들과 일진회의 패악질로 스러져 가는 조국과 태극기의 처량함을 한탄하며 다음과 같은 울분에 찬 논설을 내놓았다.

"오늘날 한국에 무슨 물건이 남아 있는가. 외교도 저 역적이 팔았으며 군대와 경찰도 저 역적이 팔았고, 삼림과 광산도 저 역적이 팔았으며, 사법권도 저 역적이 팔았고 정부 관리자리도 저 역적이 팔았으니 그 남은 것은 빈껍데기 대한이라 하는 명칭뿐인데 지금 와서는 이 빈껍데기까지 한입에 집어넣고자 하여 소위 합방 성명서를 주출하였으니 오호라! 동포여 아는가 모르는가! (중략)

 

생각하여 볼지어다. 합방이 된 이후에는 단군을 배척하고 천조대신天照大神(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을 받들 것이오, 군부君父를 버리고 명치 천황을 높일 것이며, 조국의 태극기를 버리고 태양기를 잡을지니 동포의 마음이 이때에 어떠하겠는가. 저 일진회는 외교권을 내어준 것이 독립하는 복이라 하고 모든 이익을 다 빼앗기는 것이 행복의 종자라 하더니 이제 또 그 성명서에 하기를 황실을 존숭한다 인민의 복이 된다 보호국의 수치를 벗어 버린다 하였으니 오호라! 지옥을 천당이라 하는 마귀들아 그 말의 간교하고 불경함이 어찌 이렇게 심하뇨.

 

폐일언蔽一言하고 저 일진회는 한국이 한 치만 넘어도 한 치를 멸하고 한인이 일개만 넘어도 일개를 죽이고자 하나니 동포들아 아는가 모르는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논설 - 두 번 한국 동포에게 고하노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12월 8일 자 1면.)

20세기 초 제국주의의 폭력과 침탈 앞에 무기력한 조선 지식인들은 이제 단군왕검 자리를 일본 천조대신이, 대한제국 황제 자리를 일본 천황이, 태극기 자리를 일장기가 차지하리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비극 앞에 무기력한 동포를 향해 덧없는 호소만을 쏟아 낼 뿐이었다.

태극기에 새긴 혈서의 신앙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통해 나라의 외교권이 강탈당하고 일제의 조선 침탈 야욕이 극에 달하자 천주교인 안중근(안응칠)과 상동감리교회 웹웟청년회 출신 우덕순 등 항일 투사 11명은 1909년 3월 동의단지회東義斷指會를 결성하고 왼손 약지 첫 관절을 잘라,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는 혈서를 남겼다.

안중근 의사(왼쪽)와 그의 재판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제작된 '대한의사안중근공혈서' 엽서. 엽서 중앙에 단지회 동지들이 함께 쓴 '대한 독립' 태극기 혈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 태극기의 원본은 안 의사 사후 동생 안정근이 보관하다 1946년 분실했다.
안중근 의사(왼쪽)와 그의 재판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제작된 '대한의사안중근공혈서' 엽서. 엽서 중앙에 단지회 동지들이 함께 쓴 '대한 독립' 태극기 혈서가 수록되어 있다. 이 태극기의 원본은 안 의사 사후 동생 안정근이 보관하다 1946년 분실했다.

단지회 동지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당국과 남만주 철도 건설을 협의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토 암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채가구역은 압록강 건너 봉천에서 출발한 하얼빈행 기차가 중간에 기관차를 바꾸기 위해 머무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중간 정차역인 채가구와 종착역인 하얼빈에서 각각 이토 암살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다음은 안중근의 '장부가'에  우덕순이 답가 형식으로 작성한 '의거가' 내용이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 너를 한번 만나고자 일평생에 원했지만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也런고 / 너를 한번 만나려고 수륙으로 기만리를

혹은 윤선 혹은 화차 천신만고 거듭하여 / 노청露淸 양지 지날 때에 앙천하고 기도하길

살피소서 살피소서 주 예수여 살피소서 / 동반도東半島의 대제국을 내 원대로 구하소서

오호라 간악한 노적老賊아 / 우리我等 민족 이천만을 멸망까지 시켜 놓고

금수강산 삼천리를 삼천리를 소리 없이 뺏느라고 / 궁흉극악窮凶極惡 저 수단을 (중략)

지금 네 명 끊어 지닌 너도 원통하리로다 / 갑오 독립 시켜 놓고 을사체약乙巳締約한 연후에

오늘 네가 북향할 줄 나도 역실 몰랐도다 / 덕 닦으면 덕이 오고 죄 범하면 죄가 온다

너 뿐인 줄 알지 마라 너의 동포 오천만을 / 오늘부터 시작하여 하나둘씩 보는 대로

내 손으로 죽이리라"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8일 자 1면)

거사에 대한 우덕순의 의지는 이처럼 결연했다. 안중근·우덕순의 이토 암살 계획은 민족 해방을 향한 신앙적 결단이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거사의 기회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 계획은 우덕순이 하얼빈을 맡기로 했었다. 결행 하루 전에 거사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각자의 위치를 다시 바꾸게 되었다. 하지만 이토가 탄 기차가 채가구역을 통과할 때 러시아 경찰 당국이 역사 전체를 봉쇄하는 바람에 우덕순은 은신처였던 지하실에 갇혀 있어야 했다. 결국 1909년 10월 26일 오전 7시, 이토는 안중근의 총에 죽었다.

안중근 의사 공판 장면. 앞줄 왼쪽부터 유동하·조도선·우덕순·안중근.
안중근 의사 공판 장면. 앞줄 왼쪽부터 유동하·조도선·우덕순·안중근.
우덕순의 '의거가',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8일 자 2면.
우덕순의 '의거가',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18일 자 2면.

이로써 안중근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당했으며, 우덕순은 징역 3년 형을, 조도선·유동하는 징역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우덕순은 경성감옥에 수감 중 1908년의 함흥감옥 탈옥 사건이 드러나 형이 추가되어 7년의 옥고를 치르고 1915년 2월에야 출옥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처단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한반도는 완벽히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갔다. 태극기는 더 이상 나부낄 공간을 허락받지 못했다. 망국 대한亡國大韓의 비애를 목 놓아 울던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에 강제 매수되었고,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발행되었다. 강제 병합 직후 이 신문에서는 태극기의 처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단신으로 보도했다.

"각 학교 및 관청과 회관 양제옥자문洋製屋子門(서양식 건물 입구) 비 위에 조각凋刻한 태극기호太極旗號를 일전日前부터 일절一切 말거抹去(기록 따위를 뭉개버리거나 지워 없앰)하고 다시 일본기호日本旗號를 게양 및 부착揭付한다더라." ('잡보 - 태극기호 말거', <매일신보>, 1910년 9월 3일 자 2면)

1910년 가을 이후, 이제 한반도 어디에서도 태극기의 게양이나 표시는 불법이 되었다.

1910년 소위 '한일 합방'을 기념하여 발행된 다양한 기념엽서들. 명치 천황과 고종의 얼굴이 그려진 엽서(왼쪽 위) 배경에는 오얏꽃과 국화,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하고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의 사진이 그려진 엽서(오른쪽 위), 경운궁 대한문이 그려진 엽서(왼쪽 아래)에도 태극기와 일장기가 있다. 봉황이 그려진 '일한 합방 기념' 카드(오른쪽 아래)에는 일장기와 태극기가 대각선으로 교차되어 그려져 있다.
1910년 소위 '한일 합방'을 기념하여 발행된 다양한 기념엽서들. 명치 천황과 고종의 얼굴이 그려진 엽서(왼쪽 위) 배경에는 오얏꽃과 국화, 태극기와 일장기가 교차하고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의 사진이 그려진 엽서(오른쪽 위), 경운궁 대한문이 그려진 엽서(왼쪽 아래)에도 태극기와 일장기가 있다. 봉황이 그려진 '일한 합방 기념' 카드(오른쪽 아래)에는 일장기와 태극기가 대각선으로 교차되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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