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텔쟈의 손수건
순정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표ㅅ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깃발', 유치환의 첫 시집 <청마 시초>, 1939.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이다. 시인은 펄럭이는 깃발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고 말했다. 깃발이 지닌 태생적 집단성과 동질감이 뭇사람의 심장을 뛰게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 깃발의 이상 너머에 드리운 호전성과 폭력, 공포에 몸서리쳐지는 이중 구조를 시인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 언표한 것은 아닐까.

1930년대 말 시인이 보았음직한 그 깃발은 무엇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그가 현실의 일상 속에서 맞닥뜨렸을 다수의 깃발은 일장기(혹은 욱일기, 만주 국기)였을 것이다. 다만 시인의 내면에서 나부꼈을 그만의 깃발은 - 누구도 알 수 없지만 - 일장기는 분명 아니었으리라. 저 시에 언급된 깃발의 정체를 유추하는 일은 독자 저마다의 몫이겠지만, 우리는 그것을 '태극기'로 상정했을 때라야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애수" 등의 시어들에 공감하며 안도하게 된다. 저 깃발을 일장기로 치환하는 순간, 유치환의 시는 현제명의 '희망의 나라로'(1931)가 일제 만주 침략을 찬양한 곡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역겨운 친일 어용문학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국가와 민족의 상징체계들은 오랜 역사와 부침, 갈등과 동의 과정을 거치며 수용되고 자리매김해 왔다. 그 역사의 노정을 면밀히 살펴보는 일은 오늘 우리 삶의 현장에서 나부끼는 깃발들의 정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 될 것이다.

맨 처음 공중에 달린 깃발

시인은 묻는다. "맨 처음 공중에 깃발을 달 줄 안 그"가 누구인지. 아마도 깃발의 첫 게양자는 사냥꾼 혹은 군인이었을 것 같다.

"사냥을 할 때나, 적과 싸우게 되는 전쟁터에서 이러한 표적과 신호가 많이 사용되었음에 틀림없다. 다수의 군중이 떼를 지어 오고 갈 때에 대오가 필요하게 되고, 대오를 편성하자면 각자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 표준과 가치가 필요하게 됨은 물론이요, 이 대오를 지휘하는 지휘자의 표지나 군호를 위하여서도 기와 같은 성질의 것이 꼭 필요하게 되었으므로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국기에 앞서 군기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손도심, <세계의 국기>, 개조출판사, 1967, 34-35.)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깃발은 전쟁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착안되고,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부족과 지역공동체, 더 나아가 제국과 근대 민족국가 수립 과정에서 배타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깃발의 정체성과 성격은 구약성서에도 수차례 확인된다. 주로 큰 단위의 무리(군대)를 나타내는 깃발인 '데겔'(민 1:52; 2:2)과 작은 단위의 무리(종족, 가족)을 나타내는 기호인 '오트'(민 2:2; 시 74:4), '높다', '눈에 띄다'는 뜻의 '나사스'에서 유래한 '네스'(출 17:15 ; 시 60:4 ; 사 11:12) 등의 표현이 등장한다.

귀스타브 도레의 성화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투'. 깃발은 전쟁 수행의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구약성서에서도 깃발은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도구(출 17:16 ; 민 2장, 사 5:26; 13:2, 18:3, 30:17 ; 렘 4:21, 50:2, 51:12, 27 등)로 등장한다. 주로 병력의 집결과 통제, 적군에 대한 선전포고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한편으로는 전쟁과 재난으로부터 사람들이 대피하도록 안내는 구원과 회복의 상징(사 11:10 ; 시 60:4 ; 렘 4:6 등)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전쟁과 관련 없이 사용된 사례도 있다. 아가서는 사랑의 성취와 경사를 알리는 상징으로 깃발(아가 2:4)을 언급하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깃발'에 대한 언급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데, 다만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진리와 구원을 향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의 목표점을 '푯대'(σκοπόν, '주시하다'라는 뜻의 σκέπτομαι에서 유래)라고 언급하고 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13-14, 개역개정)."

이처럼 성서에서 깃발은 실제적인 전쟁 수행과 긴급 상황에 대한 신호의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사랑과 진리라는 관념적·추상적 가치를 담아내는 상징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깃발의 성격과 기능은 오늘 우리의 현실에도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전쟁 수행과 국가 정체성을 드러내는 호전성과 배타성이 수반되는 동시에 애민·애족·애국뿐 아니라, 초월적 인류애의 가치와 진리 추구라는 보편성을 동시에 담지한 이중성이 '깃발'이라는 표상에 서려 있다.

황해도 소래교회에 내걸린
성 조지 십자기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깃발은 최초의 자생적 민중 교회인 황해도 장연 소래교회의 옛 사진에서 확인된다. 소래교회는 만주의 초기 개종자 서상륜이 1885년 3월 동생 서경조가 사는 황해도 장연 소래松川에서 전도해 세운 우리 민족의 첫 자생적 토착 교회이다. 소박한 한옥 예배당과 사래 긴 밭, 사립문 언저리에 앉고 서 있는 얼굴을 알 수 없는 두 인물이 130여 년 전 초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묵묵히 증명해 보여 준다.

한국교회의 원형적 이미지인 이 교회당에는 오늘 우리에게 익숙한 첨탑이 없다. 대신 낯선 깃발의 게양이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하늘을 찌를 듯 장대에 걸려 나부끼는 깃발은 당시 한국인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십자 문양이었다. '성 조지의 십자가'(St. George’s cross). 이 낯선 깃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이를 통한 구원, 진리의 궁극적 승리를 표현하는 기독교의 상징이었고, 이 땅에서 선포된 새로운 복음의 시그널이었다.

성 조지 십자기가 하늘 높이 게양된 황해도 장연 소래교회(1895년경).

소래교회에 성 조지의 십자가 깃발이 내걸리던 시기는 한반도에 전쟁의 암운이 짙게 드리워진 때였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일본 세력의 힘이 약화되고 청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과시하던 시기, '척왜양이'斥倭洋夷의 기치를 높이 세운 한국 민중이 동학농민혁명으로 봉기했다. 조선 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청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청국의 한반도 출병에 일본도 침입하여, 결국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놓고 벌인 청일전쟁(1894)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으로 한반도의 민중은 생명과 재산을 빼앗기고 전쟁 공포에 쫓겨 피난처를 찾아 길을 나서야 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숱한 민중은 강제로 전투에 투입되거나 병참 지원에 동원되어 죽거나 다쳤다. 여성과 노인, 아동들은 굶주림과 질병, 강간과 죽임의 공포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이렇게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동학도들에 대한 색출이 극심하던 상황에서 도피 중이던 동학도들은 선교사의 거처나 교회에 몸을 숨기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를 향해 몰려들었다. 마펫 선교사의 편지 내용이다.

"전투는 9월 15일에 벌어졌다.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던 불쌍한 한국인들은 놀랐고 그 중 반은 죽거나 도망쳤다. 평양에 남아 있던 교인들 대부분은 예배당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주님께서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S. A. Moffett’s letter to Dr. Ellinwood, Nov. 1, 1894 중에서)

평양에 진주한 일본군은 교회의 재산은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기독교 선교 본국과 미국 등과의 외교적 관계, 아시아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유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청일전쟁을 겪은 민중에게 교회는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는 피난처의 의미로 각인되었다. 심지어 서양 세력 척결을 기치로 내세웠던 동학도들까지 성 조지 십자기가 세워진 교회로 숨어들었다. 당시 교회는 외국인의 영역이자 치외법권적 지대라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교회 입구에 십자기 혹은 성조기를 내거는 사례가 생겼다. 치외법권 구역임을 표시하는 상징이었다. 황해도 소래교회의 성 조지 십자기는 유명하다. 매켄지가 교인들과 함께 구덩이를 파고 장대를 세운 후 십자기를 게양했는데, 그 십자기는 동학군에게도 효력이 있었다. 십자기가 게양된 지 오래지 않아 동학군들이 지나가다가 깃발을 보고 외국인을 만나러 왔다. 그 후 동학군 접장과 지도자들이 매켄지를 찾아 왔고, 그 답례로 매켄지도 동학군들이 사는 마을을 방문했다." (E. A. McCully, A Corn of Wheat or the Life of Rev. W. J. McKenzie, 1903, 154-155.)

일본군과 관군의 추격을 피한 동학도들까지도 포용한 19세기 말 한국 사회의 새로운 '소도'蘇塗는 '교회'였다. 그리고 선교 초기 교회로 몰려든 신자들 중 상당수는 혼란한 정세 속에 자신의 생명과 재산, 안위를 지키기 위해 교회로 몰려온 이들이었다. 초기 기독교 선교의 결실과 성과는 이러한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와 민중의 현실적인 요구가 토대로 작용했다.

성 게오르기우스
: 순교자에서 전사로

성 조지 십자기는 흰색 바탕에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전형적인 십자기다. 이 깃발은 제노바의 국기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이후 잉글랜드, 조지아의 국기, 이탈리아의 밀라노, 제노바, 도이칠란트의 프라이부르크,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시기에도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성 조지의 십자기가 유럽 전역에서 사랑받고 각국과 도시의 상징 깃발로 사용된 데에는 십자군 원정의 역사가 그 배경에 있다. 십자군의 동방 원정길에 사용된 군기가 바로 성 조지의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 '성 게오르기우스와 용'(1432~1435년경).

성 조지(St. George)는 성 게오르기우스(St. Georgius)의 영어식 발음이다. 성 게오르기우스에 대해서는 303년경 팔레스티나 지방의 디오스폴리스(Diospolis)라고 불리던 룻다[Lydda, 현재 텔아비브의 남동쪽에 위치한 중소 도시, 현재 도시명은 로드(Lod)]에서 순교했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496년 교황 젤라시우스 1세(Gelasius I)가 반포한 교령에선 "성인을 공경하는 것은 정당하나, 성인의 정확한 행적은 하느님만이 알고 계신다"고 말했다. 다만 일찍이 게오르기우스가 동방교회와 서방 교회 양쪽에서 '위대한 순교자'로 널리 알려지고 공경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전해지는바 그는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 터키 이즈미르(İzmir)]에서 275년에서 285년 사이에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기 입대를 제안받아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 군인들이 로마의 신들에 헌신하지 않는다면 체포하겠다는 칙령이 발표되자, 게오르기우스는 이에 거부하여 마침내 참수형을 당해 순교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초기 교회에서 게오르기우스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는 전사나 군인보다는 순교자로 고착되어 있었다.

성카타리나수도원에 그려진 '성모자와 성인들'(6세기). 성모자 양편에 성 테오도루스(좌)와 성 게오르기우스(우)가 서 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게오르기우스에게서는 군인과 전사의 이미지가 발견되지 않는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는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전 유럽으로 알려지고 확산됐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는 십자군 원정의 군기로 사용되었고, 잉글랜드의 왕 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는 성 게오르기우스를 자신과 자기 군대의 수호성인으로 삼았다. 성 게오르기우스에 대한 새로운 영웅적 전설은 1260년경 제노바의 대주교 보라기네의 야코부스(Jacobus de Voragine, 1228~1298)가 쓴 <황금 전설 Legenda aurea>에서 처음 등장했다.

"카파도키아의 원주민이었던 게오르기우스는 군인으로서 호민관 계급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리비아 지방의 실레나라는 도시에 여행을 가고 있었다. 이 마을 가까이에는 호수만 한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역병을 일으키는 용이 숨어 있었다. 이 괴물의 광포를 달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매일 두 마리의 양을 용의 먹이로 바쳤다. 결국 마을에는 양이 떨어졌고 사람들은 용에게 양 한 마리와 남자 혹은 여자 한 명을 공물로 바쳤다. 제비뽑기로 청년이나 처녀의 이름이 뽑히면 징발에서 면제되는 사람은 없었다. 곧 젊은이들은 거의 모두가 잡아먹히고 말았고, 어느 날 왕의 외동딸이 제비에 뽑혔다. 공주는 포박되고 용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다. 왕은 슬픔으로 정신을 잃고 자신의 금과 왕국의 절반을 내놓으며 공주를 살리고자 하였으나, 진노한 백성들은 이를 거부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공주를 축복했고, 공주는 호수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게오르기우스가 우연히 공주 옆을 지나가게 되었고, 자초지종을 들은 게오르기우스는 공주를 돕는다. 용이 나타나고 성인은 치명상을 입히고, 공주의 허리띠를 용의 목에 감게 하여 도시로 들어간다. 그는 두려워 도망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용을 죽이겠다고 말한다. 그날 여인과 아이들은 계산에 넣지 않고 2만 명이 세례를 받았고 게오르기우스는 칼을 뽑아 용을 죽이고 용을 도시 밖으로 옮기라고 명령한다. 네 마리의 수소들이 용을 성벽 바깥에 있는 넓은 들판으로 끌어내었다. 왕은 게오르기우스에게 많은 돈을 주었는데 그는 돈을 거절하고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고 왕에게 작별을 고했다." (보라기네의 야코부스, <황금 전설 : 성인들의 이야기>,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7, 385-392.)

미술사학자 정은진의 연구("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 순교자에서 기사로",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vol 38, 2013)에 따르면, 게오르기우스의 성인 이미지에 군인 이미지가 삽입된 때는 11세기경이었다. 10세기 이전까지 숭고한 순교자로만 각인되었던 성 게오르기우스에게, 십자군 전쟁이라는 거대한 전환점이 계기가 되어 이교도와 싸우는 전사의 이미지가 덧씌워진 것이다.

그 이미지 전환의 절정으로 12세기 <황금 전설>을 통해 용과 싸워 여성을 구하는 스토리가 가미되었다. 이는 그리스의 영웅담 '페르세우스와 안드로메다'의 이야기와 오버랩된다. 거룩한 순교자가 벌이는 용과의 투쟁은 기독교 성인을 영웅으로 이상화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용과의 사투 끝에 공주를 구한다는 설정은 중세 유럽 최고의 판타지 <트리스탄과 이죄 Le Roman de Tristan et Iseut> 이야기에서 차용되었다. 켈트인들의 전설을 근간으로 구전되었던 설화를 12세기 프랑스 남부 시인들이 필사해 전 유럽에 알려진 트리스탄과 이죄의 사랑 이야기는 기사가 용을 물리치고 미녀를 구하는 일화로 유명하다.

위의 그림부터, 파올로 우첼로의 '트리스탄과 이죄'(1455~1460년)와 '성 조지와 용'(1458~1460년). 두 작품의 구성이 매우 유사하다.

그러면 왜 이런 성 게오르기우스에 대한 새로운 전설이 12세기 유럽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313년 그리스도교의 공인 이후 교회는 꾸준한 선교와 교세 확장을 통해 중세 기독교 유럽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으며, 엄격한 기독교적 윤리관과 평화주의를 표방했다. 공교롭게도 1000년경에 이르러 신흥 직업군이 등장했는데, 바로 '기사'였다. 야금술과 말 사육 기술의 성장, 무기와 등자鐙子의 발달은 막대한 자금력을 지닌 귀족들이 주군에게 충성하는 직업 전사들을 육성하도록 자극했다. 그러나 교회는 다수 직업군인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성직자들은 살인의 죄를 범하지 않으면서도 정기적으로 전투를 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고, 교회가 제시한 대안이 바로 '십자군'이었다. 교회는 기사들이 서로를 죽이는 대신 이교도들을 죽이도록 권장했다. 이렇게 10세기의 유럽 교회는 세속적 지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약자를 위해 무력을 행사하는 이상적 전사의 모델을 새롭게 창출하고 있었다. 그 모델이 바로 '성 게오르기우스'였다.

타자를 향한
정복과 폭력의 상징

교회가 고안하고 확산시킨 성 게오르기우스의 전설은 십자군 전쟁에 강력한 동기를 제공하였으며, 마침내 광기 어린 폭력과 정복의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활용되었다. 십자군의 역사는 기독교가 인류에 끼친 가장 치욕스러운 만행의 역사로 평가된다. 그 해악은 기독교 이외의 세계를 타자화·악마화하고 그에 대한 혐오와 분노, 폭력을 정당화하는 사유의 메커니즘을 제공한 것이었다. 게오르기우스가 용과 싸우는 모습은 그러한 타자의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구현해 주었다. 기독교에서 용은 악마나 사탄으로 묘사되며 적그리스도로 규정(계 12:7-9; 20:2)되었다.

'십자군을 이끄는 그리스도', 1090년경. 십자군의 창과 방패에 성 조지의 십자기가 그려져 있다.

기독교 외부 세계를 '너'가 아닌 '그것'으로 규정하며 악마화·타자화한 기독교 유럽의 정신은 '힘의 숭배'를 신학화한 제국주의를 수립에도 기여하며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제국주의 팽창의 역사는 명실상부 '기독교 유럽'의 세계적인 확산 과정이기도 했다. 미국의 교회사학자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는 기독교의 지구적 확산이 절정에 달한 1800년대를 '위대한 세기'(the Great Century)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20세기까지 전개된 서구 기독교의 세계 선교는 아시아·아프리카·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침략하고, 수탈하고, 학살하고, 다양한 문화를 파괴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과정이었다. 기독교 이외의 세계를 이교와 사탄의 영토로 규정했던 십자군의 관점과 다르지 않았다. 19세기 말 내한한 개신교 선교사들에게서도 이러한 타자 인식의 메커니즘은 여실히 작동했다.

소래교회에 내걸린 성 조지 십자기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복음의 순전한 시그널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기독교 세계 바깥에 대한 혐오와 분노, 폭력을 정당화해 온 십자군의 신학과 서구 제국주의의 민낯이 드리운 이중성이 교차하는 심벌이었다. 한국교회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러한 서구 제국주의의 심벌이 내걸린 교회가 신생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신음하던 민중의 최후 피난처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반도가 기독교 선교 국가와 제국주의 침략국이 이원화한 첫 교회사의 현장이었다는 특수한 상황이 빚어낸 역사적 이중 구조였다. 이러한 역사의 이중 구조는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교회의 야누스적 두 얼굴을 끊임없이 반복해 드러내 보여 주었다. 현대 한국교회의 대표적 인물이 해방 공간에 남긴 설교문의 한 대목이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발표한 공산당선언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한 괴물이 유럽을 횡행하고 있다. 곧 공산주의란 괴물이다.' 저들의 말대로 공산주의야말로 일대 괴물입니다. 이 괴물이 지금 삼천리강산에 횡행하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이 괴물을 벨 자 누구입니까? 이 사상이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입니다. 이 용을 멸할 자 누구입니까?" (한경직 목사, 1947년 설교 '기독교와 공산주의' 중에서, <건국과 기독교>, 보린원, 1949. 212.)

저 그로테스크적인 성 게오르기우스의 전설 이야기로 야기된 중세 기독교 유럽의 광기와 폭력이 20세기 한국 현대사에서도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니었음을 한국교회의 한 걸출한 목회자의 일성에서 모골이 송연하도록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과민한 감흥일까.

한국교회에 나부낀 첫 깃발은 이렇게 복음의 향긋한 매력과 십자군의 비릿한 광기가 교차하며 저 황해도 장연 땅에서 그렇게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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