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주 폐하 탄신 날에 평양서 성교聖敎하는 백성 삼백여 명이 국기를 높이 달고 대동강 건너 사각 대청으로 모여 처음에 교우 한석진 씨가 기도하고 우리나라 자주독립한 경사로운 것을 연설하고, 방기창 씨는 모든 교우를 흥기興起하여 독립가를 부르고 이영언 씨는 연설하되 우리나라가 일찍이 청국에 속하여 종노릇만 하더니 지금은 자주국이 되었으니 우리 인민들도 각각 자주할 마음을 두어 대군주 폐하의 성덕을 돕고 태서泰西 각국과 같이 문명 개화되어 보자 혹 풍설을 들은즉 우리나라는 개화되기 어렵다 하나 이는 지각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말이라 일본국이 삼십 년 전에 극히 쇠미하더니 지금은 동양에 제일 개화되어 국부 병강하고 인민이 태평한지라 어찌 그러한고 하니 인재를 교육함이라. 우리 조선 사람들도 인재가 없는 바이 아니로되 교육이 없는 까닭이라. 이제부터 교육을 힘 쓰거든면 나라가 저절로 자주 기초가 더욱 튼튼하여질지라 하며 김종섭 씨가 연설하되 우리나라가 단군 기자 때부터 자주독립 이룬 이름도 알지 못하다가 오늘날 우리들이 독립가를 부르는 것이 모두 우리 대군주 폐하의 성신 문무하신 덕택이라 하고 여러 교우들이 만세를 부르고 종일토록 길거拮据 하였다더라." ('잡보', <독립신문>, 1897년 9월 2일 자 3면.)

1897년 고종의 탄신일을 맞은 평양 기독교인들 모습이다. 평양 쾌재정(사각 대청)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행사에서는 신자 300여 명이 참석해 태극기를 높이 게양했으며, 한석진이 기도하고 방기창의 인도로 독립가를 제창했다.

이 당시 행사를 진행한 사람들은 장로교의 영수였던 이영언(1898년 사망)을 비롯해 이후 평양신학교의 첫 입학생(김종섭, 방기창 1905년), 첫 졸업생(방기창, 한석진 1907년)으로, 한국교회의 지도자로서 부흥과 체제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이들이었다. 이처럼 새로운 자주독립 국가의 국민,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내재화한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후 수학하게 된 신학교에서 자연스레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조화하게 되었다.

1896년부터 제정된 황제탄신기념일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충군애국'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이 행사에는 어김없이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각종 악기를 사용해 애국가와 '독립가' 등을 불렀다.
1896년부터 제정된 황제탄신기념일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충군애국' 신앙을 공개적으로 표현했다. 이 행사에는 어김없이 태극기가 게양되었고, 각종 악기를 사용해 '애국가'와 '독립가' 등을 불렀다.

1905년 개교한 평양신학교의 초기 단체 사진을 보면, 한석진은 태극기를, 길선주는 성경을 들고 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 정체성을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러한 신학생들의 민족주의적 행동에 대하여 사진 속 신학교 교수(선교사)들은 크게 문제 삼거나 경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교수진 스스로도 자국에 대한 강한 자긍심과 민족적 혹은 국가적 정체성을 내재화하고 상호 존중하는 문화를 지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세기 말 개신교 내한 선교사들은 다양한 교파적 배경을 지님과 동시에 미국·영국·캐나다·호주 등 근대 서구 다양한 국민국가의 정체성도 강하게 지녔다. 따라서 개항 이후 외국 공관들과 내한 선교사들이 각종 행사나 의례에서 자국의 국기를 사용하던 관행은 한국인들에게 낯설지만 인상적인 일이었다. 특히 전 세계에 파견된 미국인 내한 선교사들이 보인 자국 국기(성조기)를 향한 사랑은 남달랐다. 그들은 교회나 학교를 설립할 때마다 국기에 대한 미국식 태도를 한국인에게 가르쳤다.

1905년 평양신학교 재학생들과 교수들. 맨 앞줄의 한석진이 태극기를, 길선주가 성경을 들고 있다.
1905년 평양신학교 재학생들과 교수들. 맨 앞줄의 한석진이 태극기를, 길선주가 성경을 들고 있다.
기독교 학교와 부흥회에 게양된 태극기

19세기말 20세기 초 열강의 각축장이 된 한국의 위태로운 시대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을 통한 근대 자주 국가 건설 의지와 독립 정신 고취에 적극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많은 선교사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 학교를 세워 차세대를 향한 신앙 교육과 민족 교육을 적극적으로 병행해 나갔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배재학당 당훈을 "욕위대자欲爲大者 당위인역當爲人役"(크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라)으로 정했다. 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 20:26-27)라는 성경 말씀을 교육 이념에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우리 학교의 목표는 통역관이나 기술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폭넓게 교양을 쌓은 사람을 만들고자 하는 것"(<미감리교 해외선교부 연례 보고서>, 1892, 285.)이라고 밝히며, 기독교적 근대 교육을 통해 근대적 시민과 지도자를 양성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아펜젤러 전기를 집필한 그리피스는 이러한 그의 교육철학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배재학당 운동장에 도열한 학생들.
배재학당 운동장에 도열한 학생들.

"이 민족 앞에 아펜젤러는 잔치를 벌이고, 생명의 떡을 찢어 나누고자 했다. 목소리와 펜으로, 낡아빠진 중국 학문에 짓눌려 있던 젊은이들 대신에, 배재학당에서 훈련된 근대적 삶을 영위할 자질을 갖춘 수백 명의 교사들이 아펜젤러의 눈앞에서 배출되었다. 동시에 깨어 있는 젊은이들과 호기심 많은 어른들은 세계와 인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자기 민족과 인류의 진보를 위하여, 보다 고상한 역할을 감당하도록 고무되었다. 그들을 구원하려고 예수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기에." (W.E. Griffis, A Modern Pioneer in Korea : The Life Story of Henry G. Appenzeller, 1912, 180.)

이화학당을 창설한 스크랜턴 대부인(Mary F. B. Scranton, 1832~1909)도 한국인에 대한 기독교 학교의 교육목표는 한국인의 주체적인 민족성과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 그 가치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에 있다고 역설했다.

"나는 학생들이 서양인의 생활양식과 의복제도를 따르게 하도록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한국사람을 가장 훌륭한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려 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따라 교육하려고 힘쓰는 것뿐이다." (The Godpel in All Lands, 1888, 373.)

이러한 초기 한국 기독교의 교육 선교는 단순히 개종자들을 양산하는 도구가 아니라, 새로운 근대국가의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소양, 즉 애국심과 민족애, 민주주의, 사회적 약자를 향한 헌신과 개혁의 자세를 기독교 교육을 통해 배양하려는 일이었다. 그러한 교육철학에 기초해 19세기 말 20세기 초 풍전등화의 한반도 현실에서 기독교 학교는 자연스럽게 애민 애족 독립 정신 고취의 중심이자 대안적 공간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각 교파 선교부들은 서울의 배재학당이나 이화학당을 모델로 삼고, 각 지역의 교회 건물을 이용해 지역의 아동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매일학교'(Day School)를 실시했다. 그 목적은 기독교 교육을 통한 지역 복음화였다. 당시의 학생들은 전통 유교 가치만을 배우는 서당보다 신학문을 가르치는 매일학교에 입학하기를 원했고, 전국 각 지역의 교회에서는 교인 스스로 학교 건물을 짓고 예산을 마련해 매일학교를 운영했다. '아현여학교', '상동매일학교', '동대문매일학교', '인천매일학교', '평양매일학교', '공주매일학교' 등 전국 각처 교회에서 매일학교 운동이 전개되었다.

매일학교에서는 주로 한글과 한문, 기독교 교리와 성서를 비롯해 근대적 지식들과 예체능을 교육했으며, 매일학교에 입학한 소년과 소녀들은 아동 시기부터 기독교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고취해 갔다. 인천 내리교회가 우리나라 최초로 설립한 초등교육 기관인 '영화소년매일학교'(Boys Day School)의 단체 사진과 평남 강서교회에서 운영한 강서매일학교 학생들의 단체 사진을 보면 자연스럽게 태극기가 게양된 모습이 확인된다.

인천 영화학교와 강서매일학교 학생들(1900년대 초). 학생들의 배후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인천 영화학교(위)와 강서매일학교 학생들(1900년대 초). 학생들 배후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인천 영화학교(위)와 강서매일학교 학생들(1900년대 초). 학생들 배후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남감리교 선교의 일환으로 윤치호가 설립한 개성 '한영서원'(이후 송도고보)에서도 실재적 기술과 지식 습득을 위한 실업교육과 더불어 민족의식 함양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한영서원의 학생들이 군사훈련을 받으며 촬영한 초기 사진에도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으며, 1907년 개성 지역 기독교 학교 학생들의 야유회 사진 속에서도 어김없이 학생들은 태극기를 들고 행사에 참여했다. 진남포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남포매일학교 학생들이 방문 선교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선두에도 태극기가 게양된 모습이 눈에 띈다.

위쪽부터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 중인 개성 한영서원 학생들(1907년), 개성 인근으로 야유회를 떠난 개성의 신자들과 한영서원 학생들(1908년), 선교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진남포매일학교 학생들(1907년). 이들 모두 각 행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다.
위쪽부터 목총을 들고 군사훈련 중인 개성 한영서원 학생들(1907년), 개성 인근으로 야유회를 떠난 개성의 신자들과 한영서원 학생들(1908년), 선교사를 맞이하기 위해 도열한 진남포매일학교 학생들(1907년). 이들 모두 각 행사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다.

감리교뿐 아니라 장로교의 각 지역 기독교 학교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00년 설립된 전주 신흥남학교에서도 선교사 지도하에 모든 학생이 태극기를 들고 도열한 모습(1908년)이 확인되며, 목포장로교회에서 운영한 목포남학교의 학생들이 십자기와 태극기 아래 목총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은 모습(1908년)도 인상적이다. 평양 숭덕학교 학생들은 대운동회에서 태극기를 들고 집단체조를 실시하고 있다(1907년).

선교사의 지도하에 태극기를 들고 도열해 있는 전주신흥학교 학생들(1908년).
목총을 들고 지도교사 및 교인들과 함께 서 있는 목포남학교 학생들(1908년).
태극기를 들고 집단체조를 실시하는 평양 숭덕학교 학생들(1907년). 이들은 모두 기독교 학교에서 태극기를 들고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함께 교육받았다.
위쪽부터 선교사의 지도하에 태극기를 들고 도열해 있는 전주 신흥학교 학생들(1908년), 목총을 들고 지도교사 및 교인들과 함께 서 있는 목포남학교 학생들(1908년), 태극기를 들고 집단체조를 실시하는 평양 숭덕학교 학생들(1907년). 이들은 모두 기독교 학교에서 태극기를 들고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을 함께 교육받았다.

이처럼 초기 개신교회와 그 학교들이 보인 태극기 게양의 모습은, 교회가 민족의식을 존중하되 비정치적인 신자들도 육성하기 위한 절충안이었다. 1906년 당시 목포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진행한 프레스톤 선교사의 진술을 보자.

"내가 참여한 가장 강력한 부흥회가 최근 목포에서 일어났다. (중략) 성령의 특별한 초대와 분명한 인도하심으로 남감리교 저다인 목사가 내려와 일주일 동안 하루 두 번 설교했다. (중략) 처음부터 끝까지 기도, 중보 기도, 고백의 영이 회중에게 쏟아졌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부흥회 4일 동안 150명이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부흥회 기간 동안 몇 명이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고 설교하기 위해 기도를 멈추라고 할 때까지 계속했는데, 이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집회의 목적은 외부인 전도보다는 신자들을 일깨우고 생동력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만족스럽게 달성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받은 은혜를 분명하게 간증했다. 더욱이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회심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먼 지방에서 온 매우 명석한 남자의 경우였다. 그는 정치적 목적으로 기독교를 이용하려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신앙적 경험을 하였다." (J.F. Preston, "A Notable Meeting", The Korea Mission Field, Oct, 1906, 227-228.)

1905년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피탈된 해였으며, 1907년은 고종이 을사늑약의 무효를 세계열강에 호소하려다 실패한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강제 퇴위당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국권을 빼앗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한 해였다. 이 조약에는 비밀 각서가 첨부되었는데,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 및 경찰권을 일본이 운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비밀 각서를 근거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는 해산되었고, 이에 항거하는 정미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국권이 피탈되어 가는 시기에, 교회는 정치적 목적으로 교회로 흘러들어 오는 이들을 경계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종교적 각성과 회개 운동을 통해 이들의 상실감을 위로하거나 신앙 체험으로 정치적 울분을 극복하도록 이끌기도 했다. 비록 한반도의 망국과 전환기에 교회는 비정치화와 종교적 심연으로 침잠했지만, 태극기라는 국가 상징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면서 국권피탈이라는 슬픔과 절망을 위로하고 새로운 희망의 가능성을 신앙을 통해 발견할 수 있도록 모색했다.

"그해(1907년) 서울은 선교사들이나 한국 기독교인들이 모두 새로운 마음으로 생활하기를 바라는 강한 열망으로 새해를 시작했다. (중략) 한국인 장로(길선주)가 와서 이 대도시의 교회들에서 며칠을 보냈다. 이것은 정화 체험의 시작이었다. (중략) 죄로 인한 고뇌와 슬픔, 고백할 때의 극심한 고통, 삶에서 나타나는 깊고 놀라운 능력의 현상들이 동일하게 나타났다." (Jones & Noble, The Religious Awakening of Korea, 1908, 22-23.)

망국의 그늘이 드리운 태극기를 게양하고 부흥회에 임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느꼈을 죄책감이란 무엇이었을까. 각자의 나태와 안일함, 윤리적 일탈과 무관심 속에서 국권피탈이라는 절망적 상황을 맞았다는 각성이 그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수치와 모욕감을 녹여 내고자 기독교 신앙이라는 거대한 용광로 속으로 자신들을 내어던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가니의 열기가 달아오른 바로 그 현장에서 태극기는 그렇게 민망한 모습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1907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게일 선교사를 환영하는 인파 2000여 명이 서울 연동교회에서 환영회 겸 부흥회를 개최했을 때에도 한국 기독교인들은 태극기와 십자기를 게양했다.
1907년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온 게일 선교사를 환영하는 인파 2000여 명이 서울 연동교회에서 환영회 겸 부흥회를 개최했을 때에도 한국 기독교인들은 태극기와 십자기를 게양했다.
행군 나팔 소리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어서가세 / 바삐가세 / 구세할때 / 늦어가오

구자세자 / 이두자를 / 형제마다 / 깊이 듣고

열심으로 / 단체하여 / 속히속히 / 구세하세

("군가", 32-36행, <필사본 구세군 가사>)

1907년에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되었다. 이듬해 낯선 신식 군복을 입은 브라스밴드가 행군 찬송을 부르며 황성 거리에 등장했다. 군복을 벗고 망연해 있던 구한국 군인들은 구세군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들은 구세군에 가입하면 군복과 무기를 지급받고 독립운동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외형상 군대의 틀을 갖춘 구세군이었으나 그들에게 총은 지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구세군은 기독교의 기본 원리를 비롯해 엄격한 사회윤리와 절제 운동, 사회악 해소와 빈민 구제라는 사회 선교의 구체적 소명을 가르쳤다.

많은 군인들은 실망하여 구세군을 떠났지만, 일부는 구세군에 남아 이 또한 민족 구원의 새로운 대안의 길이라 믿고 전도와 사회 구제 사업에 동참하고 헌신했다. 이렇게 구세군은 총이 아닌 자선냄비의 종소리로 새로운 나라의 꿈을 향해 행진해 나갔다.

1901년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서울 평동에서 개최된 구세군 한국 총회 모습. 회중 뒤편에 게양된 태극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1901년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서울 평동에서 개최된 구세군 한국 총회 모습. 회중 뒤편에 게양된 태극기가 선명하게 보인다.

구세군과 달리 유소년 및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감리교회의 학교에서는 실제적인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특히 한반도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교회와 기독교 학교는 민족의식 함양뿐 아니라 군사훈련의 요구 앞에도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군사훈련을 더 체계화한 대표적인 기독교 학교가 공옥소학교와 상동청년학원이었다. 두 학교는 전덕기 목사를 필두로 김구, 이준, 이동녕, 이동휘, 노백린, 이회영, 남궁억, 신채호, 최남선, 이상재, 이상설, 양기탁, 주시경, 이필주, 이승훈, 안창호, 이승만 등 쟁쟁한 민족운동가들이 활동한 상동청년회(소위 상동파)가 운영하였다.

전덕기 목사는 1904년 상동청년학원을 통해 민족 독립운동에 헌신할 인재 양성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정신 앙양을 목적으로 두고, 독립지사들을 강사·교사·특별강사로 초빙하여 차세대 청소년들에게 교수토록 했다. 이 학교에서는 기독교 신앙 교육뿐 아니라 한글, 한국사, 외국어, 각종 신문화(음악·미술·연극 등)와 체육을 교육했다.

특히 체육은 구한국 군대의 직업군인 출신인 이필주(훗날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에게 맡겨 여러 체육 종목을 지도함과 동시에 학생들에게 군복과 같은 유니폼을 입히고, 목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제식과 행군 등의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이러한 훈련 광경은 서울 시내의 유명한 구경거리였는데, 대내외적으로 한국 청소년들의 기개와 기상을 선보이려는 목적도 있었다.

위쪽부터 내리교회 영화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 광경(1900년대 초), 상동청년학원의 졸업증서(1911년). 감리교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현순 목사가 학원장이었던 때에 한상원 졸업생에게 발급된 졸업증이다.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진 시기인데도 상단에 지구와 한반도, 십자기와 태극기가 교차된 이미지가 사용된 점이 인상적이다.
위쪽부터 내리교회 영화학교 학생들의 군사훈련 광경(1900년대 초), 상동청년학원의 졸업증서(1911년). 감리교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현순 목사가 학원장이었던 때에 한상원 졸업생에게 발급된 졸업증이다. 한일 강제 병합이 이루어진 시기인데도 상단에 지구와 한반도, 십자기와 태극기가 교차된 이미지가 사용된 점이 인상적이다.

일제의 한국 침탈이 노골화한 1905년에는,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하던 박용만이 도미하여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 청소년들을 모아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일제에 저항할 독립군 장교로 양성할 목적하에 1909년 미 중부 네브래스카주 커니(Kearney)에 세웠다. 이는 식민지로 전락한 고국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해외에서 시작한 최초의 구체적 도전이었다. 그가 미국에 소년병학교를 설립한 것은, 상동청년회와 연계된 나름의 계획을 실행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박용만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배경과 관련해 <사이토 문서>에 실린 '조선독립운동의 근원'에서 상동청년회에 대한 언급이 이를 시사한다.

"메이지明治 37년(1904) 가을, 즉 러일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때에 예수교 전도의 이름 아래 상동청년회라는 것이 출현하였다. (중략) 청년회의 간부는 이동녕, 이승만, 정순만, 이희간, 박용만, 조성환 외에 예수교 목사 전덕기를 회장으로 하고 (중략) 회의 사업은 청년학원을 경영하여 뜻있는 청년을 양성하는 외에, 미국에 이민의 명분으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이민 개발 회사와 묵계를 맺어 이희간을 러일전쟁 중에 고등군사탐정으로 종군하여 얻은 6만 8000원 중 1만 3000원을 유학생의 미국 상륙 휴대금으로 유용하고, 박용만과 이희건(이희간의 동생)을 미국에 파견하여 그 수지(상륙 후 휴대금은 바로 반환하는 방법)를 맞추었고, 이어 이승만도 유학생 감독으로 도미하고 이희간도 또한 상황 시찰을 위해 일시 도미하였다." (<조선총독부관계사료 "齋藤實 文書" 9>, 고려서림, 1990, 354-360.)

박용만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는 상동청년회 활동 당시 상동교회에서 운영한 공옥소학교와 상동청년학원에 큰 영향을 받았다. 상동청년학원의 교과목이 "국문, 영어, 한문, 산술, 지지, 역사, 습자, 수신, 성서, 체조"("학원모집광고", <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인 점과, 1909년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의 교과목이 "국어, 영어, 한문, 일본어, 수학, 역사, 지리, 과학, 성서, 병학"(안형주,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지식산업사, 2007, 171-173.)인 점을 보면 소년병학교가 상동청년학원의 교육 내용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년병학교에서 상동청년학원과 달리 '습자'(글쓰기)와 '수신'(윤리·도덕)을 빼고, '일본어'와 '과학'을 추가한 것만이 예외적이며, 두 학교 모두 '성서'를 중요 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네브래스카주 커니와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위)과 그 훈련 광경.
네브래스카주 커니와 헤이스팅스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위)과 그 훈련 광경.

공옥소학교와 상동청년학원에서 강조한 교육 내용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 고양 및 군사훈련이었다. 1907년 당시 공옥소학교 학생들이 행진하며 부르던 <행보가行步歌>는 상동청년회의 교육 이념을 여실히 느끼게 해 준다.

산 곱고 물 맑은 우리 동반도는 / 사천년래 살아오는 우리 땅

사시 기후 항상 좋고 화평한데 / 우리 그 중에서 호흡하누나

하나님은 좋은 천지 주셨으나 / 지금 우리 더욱 힘쓸 때로다

전일 태도 급히 벗어버리고서 / 강한 용맹으로 다 나아가누나

지식을 넓히고 신체를 강케해 / 부강흥성하는 모든 학문을

주야 바삐 촌음 다투어가면서 / 풀무 속에 백련 강철이 되게

약육강식 험한 오늘 당한 세계 / 열심하는 의기 우리 갑줄세

사면 열강들은 호랑들 같으나 / 무릅쓰고 마고 몰아나가세

(후렴) 나아가누나 나아가누나 / 우리 학생들이 나아가누나

("공옥소학교 행보가",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23일 자.)

박용만은 바로 상동청년회의 이러한 교육 이념을 더욱 강화하고, 미주 지역에서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무장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다음은 한인소년병학교의 군가이다.

이 몸 조선 국민 되어 / 오늘 비로소 군대에 바쳐

군장 입고 담총하니 / 사나이 놀음 처음일세

군인은 원래 나라의 번병藩屛 / 존망과 안위를 담당한 자

장수가 되나 군사가 되나 / 나의 직분 나 다할 것

나팔소리 들릴 깨마다 / 곤한 잠을 쉬이 깨어

예령 돌령 부를 때마다 / 정신차려 활동하라

우리 조련 이같이 함은 / 황천이 응당 아시리라

독립기 들고 북치는 노래 / 대장부 사업 이뿐일세

(후렴) 종군악從軍樂 종군악 / 청년 군가 높이 하라

사천년 영광 회복하고 / 이천만 동포 안녕토록

종군악 종군악 / 이 군가로 우리 평생

("소년병학교 군가", <신한민보> 1914년 4월 16일 자 2단.)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 설립 목적은 첫째, 장기적인 독립 투쟁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서방의 최신 군사교육을 습득해 우수한 핵심 장교들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둘째, 문약文弱해진 민족의 성격을 바로잡고 폭넓은 신지식과 세계정세에 밝은 눈을 갖도록 서방국가의 앞선 교육을 받게 한다는 것(안형주의 같은 책, 124-125.)이었다. 하나 더 추가하면, 기독교 신앙으로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민족의식과 의지를 함양하려 한 것이다. 당시 소년병학교의 일과시간표를 보면, 오전 6시 기상 이후 오전 7시 50분에 아침 예배를 드리고 하루 종일 교육과 훈련을 마친 후, 오후 9시 10분에 저녁 예배를 드리고 하루 일과를 마치는 일상(124-125.)이었다. 소년병학교의 하루 시작과 마무리는 '예배'였던 것이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을 전후하여 뜨겁게 타오른 민족의식과 애국심, 일제 침탈에 대한 적개심으로 설립된 학교였다. 이 학교를 통해 독립군 간부를 양성해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파견, 무장 항일 투쟁 운동을 지원하려 했다. 하지만 한인소년병학교는 1914년 6기 생도를 받고 폐교의 운명을 맞았다. 일본이 미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해 압박을 느낀 헤이스팅스대학이 지원을 끊었기 때문이다.

소년병학교는 6년간 170여 명이 입학해 40여 명이 졸업했다. 졸업생들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고, 학계와 언론계 등에 종사하기도 했다. 소년병학교 동문 중 널리 알려진 이로 기독교 실업가인 유일한(유한양행)과 초대 보건사회부장관 구영숙 등이 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의 주필로 자리를 옮겼던 박용만은 다시 하와이로 이주해 1913년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를 창설하고 300여 명의 군인을 양성했다.

박용만은 1914년 6월 하와이 오아후섬 카훌루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사관학교를 개교했으며, 이곳에서 300여명의 군인들을 훈련시켰다. 국민군단 사열식 모습(1913년, 위)과 훈련 중 휴식 광경(아래). 훈련병들 뒤로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박용만은 1914년 6월 하와이 오아후섬 카훌루에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하고 사관학교를 개교했으며, 이곳에서 300여명의 군인들을 훈련시켰다. 국민군단 사열식 모습(1913년, 위)과 훈련 중 휴식 광경(아래). 훈련병들 뒤로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네브라스카 커니의 농장과 헤이스팅스의 캠퍼스, 국민군단사관학교의 오아후섬 훈련장 등은 비록 타국의 설움과 외로움이 가득한 땅이었지만, 망국의 절망 속에서도 태극기를 게양하고 강열한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으로 조국의 해방을 위해 피땀 흘린 역사의 현장이었다. 나라 잃은 소년과 청년들이 기도하며 바라보았을 네브래스카와 하와이의 태극기는 그렇게 처연히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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