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는 그저 신호일 뿐" 

"(일제) 당국은 조선의 국가적 상징인 태극을 반지나 부채의 문양으로 쓰는 것조차 허용하질 않는다. 조선의 관리들이나 독재자들의 쩨쩨함이 정말이지 거짓말 같기만 하다." (<윤치호 일기>, 1919년 6월 23일 월요일 중에서) 

"오늘은 총독부 시정始政 기념일(10월 1일)이다. (중략) 조선인들이 경축일에 일장기를 달지 않은 탓에 일본인 관리들과 민간인들이 잔뜩 화가 났다. 그들은 조선인들이 일장기를 달지 않은 걸 두고 국기에 대한 모독이라고 말한다. 난 국경일에 일장기를 다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본 치하에서 사는 한, 통치자들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 큰 굴욕(한일 강제 병합 - 필자 주)은 감수하면서 사소한 일에 목숨을 걸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가 하면 당국은 조선인들에게 일장기를 달라고 강요하지 않을 만큼 너그러워야 한다. 그들, 즉 당국자들은 조선의 국가 상징인 태극을 문양으로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한다. '우리는 너희들의 국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우리의 국기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조선에 와 있는 일본인들의 좌우명이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1일 수요일)

예상치 못한 3·1 운동의 확산과 지속은 일제 당국을 당황케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직접 만들어 만세 시위에 참여했으며, 심지어 일장기에 태극기를 그려 넣어 재사용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에 일제는 일반인들의 반지나 부채 따위의 생활용품에 그려지는 태극 문양까지도 규제하기에 이르렀다.

3·1 운동에 참여하지도 찬성하지도 않았던 당대 최고의 기독교인 엘리트 윤치호조차 그의 일기에서 일제의 이러한 과민 반응이 "쩨쩨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윤치호는 총독부 기념일에 일장기 게양을 거부하며 - 비록 소극적이라 할지라도 - 저항하는 조선인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한심하게 생각했다.

윤치호는 일제의 태극 문양 사용 금지 조치도, 일장기를 게양해야 하는 현실을 냉정하게 수용하지 못하는 조선인들의 저항도 모두 불만스러웠다. 한때 애국가를 작사해(혹은 그렇게 알려진) 뜨거운 애국심을 표현했던 윤치호는 그 특유의 현실주의적 태도와 사고로, 서서히 일제의 지배와 일장기 게양에 타협점을 찾고 있었다.

3·1 운동이 거의 마무리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돼 체제를 갖춰 갈 무렵이던 10월, 조선에서는 천황 탄생일(천장절)에 일장기 게양 여부를 두고 논쟁이 있었다. 이러한 시류에 대해 윤치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태극은 한국인의 생활 깊숙이 사용돼 온 친숙한 문양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생활용품의 태극 문양 사용조차 금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태극선', 19~20세기 제작 추정, 도쿄박물관 소장).
태극은 한국인의 생활 깊숙이 사용돼 온 친숙한 문양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생활용품의 태극 문양 사용조차 금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태극선', 19~20세기 제작 추정, 도쿄박물관 소장).

"내일 일장기를 달 것이냐 하는 문제가 최근 며칠간의 가장 중요한 골칫거리였다. 내 생각은 이렇다. 우리가 민영환 씨처럼 자살을 하거나 이승만 군처럼 떠난다면, 그것은 별문제다. 하지만 좋든 싫든 우리가 일본 법령의 보호하에서 사는 한, 다시 말해서 좋든 싫든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해 그 법령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한, 그 법령이 요구하는 사항을 준수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조선인들 입장에서 일장기는 그저 일본의 법령하에서 살고 있다는 신호일 뿐이다. 그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일본 법령에 호소하지 않겠다고 작심한다면 모를까, 그런 게 아니라면 그저 신호에 불과한 일장기 게양을 거부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30일 목요일)

"아침에 일장기를 내건 가정집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 동네에서 일장기를 단 집은 우리 집뿐이었다. 경찰관들이 상점과 가정집을 돌면서 일장기를 달라고 독려하느라 동분서주했다. 예전에 프리드리히대왕이 사람 하나를 때리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날 무서워하지 마! 넌 날 좋아해야 해!'

 

조선인들의 마음속에 일본식 충성심과 신도神道를 심어 주려는 시도야말로,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행하고 있는 가장 어리석은 일 중의 하나다. 충성심과 신도는 일본의 토양에 적합한 민족성이고 종교다. 열대식물이 조선의 정원에서 자랄 수 없는 것처럼, 이 두 가지는 일본의 역사적 환경과 유리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윤치호 일기>, 1919년 10월 31일 금요일)

윤치호는 일장기가 단순한 '신호'에 불과하고, 일제의 법령하에 통치당하는 현실이므로 일장기 게양에 대한 감정적·민족적 저항은 불필요한 일이라고 합리화했다. 반면, 일장기 게양을 강요하며 천황에 대한 충성과 신앙을 주입하려는 일제의 태도에 대해서도 냉소했다. 당대 최고 지식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모순돼 보였다. 하지만 그 자신도 결국 모순적 태도에 함몰돼 가고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윤치호(1865~1945).
윤치호(1865~1945).

3·1 운동을 겪은 일제는 보다 치밀하게 조선인들의 정신과 민족성을 파괴하고 작위적이라 하더라도 천황에 대한 충성과 신앙을 조선에 이식하기 위한 강고한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었다. 윤치호가 진단한 일제의 법령이 지배하는 현실은 외면적으로 문명국처럼 보이지만, 더욱 정교하고 노골적인 폭력과 야만이 도사리는 야누스의 얼굴이었다.

윤치호가 그의 일기에 남긴 "일장기는 그저 신호일 뿐"이라는 논리는 이후 1930년대 말 파시즘 시기 일제 당국이 한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할 당시 "신사참배는 그저 국가 의례일 뿐"이라는 회유 논리의 숨겨진 일란성쌍생아 같다는 기시감을 들게 한다.

바꿀 수 없다면 지운다 – 일장기 말소 사건 

"손군은 우리 학교(양정고보)의 생도요, 우리도 일찍이 동경-하코네箱根 간 역전경주驛前競走의 선수여서 마라톤 경주의 고와 쾌를 체득한 자요, 손군이 작년 11월 3일 동경 메이지 신궁明治神宮 코스에서 2시간 26분 41초로써 세계최고기록을 작성할 때는 '선생님 얼굴이 보이도록 자동차를 일정한 거리로 앞서 모시오'하는 요구에 '설마 선생 얼굴 보는 일이 뛰는 다리에 힘이 될까'하면서도 이때에 생도는 교사의 심장 속에 녹아 합일되어 버렸다. 육향교六鄕橋 절반 지점에서부터 종점까지 차창에 얼굴을 제시하고 응원하는 교사의 쌍협雙頰(양 뺨)에는 제제할 줄 모르는 열루熱淚(뜨거운 눈물)가 시야를 흐르게 하니 이는 사제합일師弟合一의 화학적 변화에서 발생하는 눈물이었다. 그 결과가 세계기록이었다. 이런 처지에서 베를린 전파를 잡을 때에 남다른 감격이 없지 못하다. [김교신,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김교신 전집 1 - 인생론>(부키, 2001), 36~37쪽]

일본의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이자 <성서조선> 편집인으로 유명한 김교신 선생은 양정고보의 박물학 교사로 재직하면서 당대 최고의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정신적 멘토로 그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김교신은 제자 손기정의 올림픽 금메달 소식에 남다른 감격을 전하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김교신(1901~1945)과 양정고보 제자들.
김교신(1901~1945)과 양정고보 제자들.

"어째 손기정 군에게 우승의 영예가 돌아왔나. 식자에게는 일대 의문이다. 때에 공중에 소리가 있어 가로되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저의 심사心思에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중략) 높은 것을 낮추시고 낮은 것을 높이시며, 강한 자를 꺾으시고 약한 자를 세우시느니라(눅 1:51-53)'고.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시다. 손 군의 우승은 우리에게 심술궂은 여호와 신의 현존을 설교하여 마지 않는다. (1936년 9월)." [김교신, "손기정 군의 세계 마라톤 제패", <성서조선> 1936년 9월호, <김교신 전집 1 - 인생론>(부키, 2001), 37~38쪽]

위와 같은 김교신의 감상은 1936년 일제의 신경을 더욱 날카롭게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으리라. 김교신이 인용한 누가복음 1장 51~53절은 독일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선전하고자 했던 나치스에게도, 일본의 마라톤 우승에 환호했지만 실상 그 면류관의 주인공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일제 당국에게도 뼈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대륙 침탈의 야욕을 노골화하며 조선에 대한 문화 통치를 전시체제로 전환해 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1920년대와는 달리 조선에서의 언론통제와 검열은 더욱 엄격해졌으며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과 전체주의적 통제는 강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 손기정과 남승룡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과 3위 소식(1936년 8월 10일)은 일제의 체제 선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3·1 운동 이후 문화 통치기에 설립된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는 시상대에 오른 손기정 사진을 게재하면서 그의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지워 보도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에서 연설하는 여운형(1886~1947) 선생. 1945년 8월 16일, 종로YMCA. 여운형 선생의 뒤편에 태극기 시안이 부착돼 있고, 우측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깃발이 게양돼 있다. 건준위 깃발에도 태극이 그려져 있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에서 연설하는 여운형(1886~1947) 선생. 1945년 8월 16일, 종로YMCA. 여운형 선생의 뒤편에 태극기 시안이 부착돼 있고, 우측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깃발이 게양돼 있다. 건준위 깃발에도 태극이 그려져 있다.

'일장기 말소 사건'의 첫 언론사는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여운형의 딸 여연구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전송해 온 손기정 선수의 입상식 사진을 쥔 아버지는 기쁨에 앞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였다. '신문을 이대로 내야 하는가? 아니다.' 아버지는 단호한 결심을 하고 사내 간부들을 불러 사진동판에서 선수의 가슴에 일장기를 지워 버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모두 반대하였다. 그렇게 되면 신문이 폐간될 것은 물론 모두 감옥 귀신이 될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안심하십시오. 절망에 빠진 우리 민족에게 기개와 자긍심을 안겨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리하여 8월 10일 <조선중앙일보>는 '오호, 대한의 남아여!'라는 즉흥시를 비롯해서 손기정의 특집 기사로 꽉 차고 가슴에 일장기를 지워 버린 선수의 사진이 크게 났다. [여연구,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2001)]

<조선중앙일보>의 일장기 말소 보도는 여운형 선생과 더불어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이 투철한 양정고보 마라톤 선수 출신이자 손기정의 선배였던 유해붕 등 <조선중앙일보> 몇몇 직원들의 협력으로 이뤄 낸 사건이었다. 이 신문은 보도 직후 검열에 적발되지 않았고, 유해붕에게 이 사실을 전해들은 <동아일보>의 이길용이 후속으로 일장기 말소 보도를 이어 간 것이었다. 이후 <동아일보>의 말소 사실이 문제시되면서 <조선중앙일보>도 관련자들이 처벌받고 신문은 자진 휴간에 들어가 마침내 폐간됐다.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도 기독교인이었고,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이길용 기자도 인천 영화학교와 서울 배재학당을 졸업한 독립운동가 출신 기독교인이었다.

<동아일보> 일장기를 말소한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 원판 사진(위). 손기정·남승룡 선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조선중앙일보>1936년 8월 13일 자 조간 2판 지면(왼쪽)과 손기정 선수의 가슴 일장기를 말소한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 자(24일 석간) 2판 지면.
<동아일보> 일장기를 말소한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 원판 사진(위). 손기정·남승룡 선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운 <조선중앙일보>1936년 8월 13일 자 조간 2판 지면(왼쪽)과 손기정 선수의 가슴 일장기를 말소한 <동아일보> 1936년 8월 25일 자(24일 석간) 2판 지면.

이길용 기자는 배재학당 졸업 후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공부하던 중 귀국해 철도국에 취업하고, 3·1 독립선언서와 상해임시정부 기밀문서 등을 철도 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자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돼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른 바 있다. 출옥 후 송진우 사장 권고로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이길용은 대전지국에서 근무하며 대전 감리교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와 대전청년회의 뿌리가 된 대전소년회를 창설하는 등 애국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한국 최초의 체육 전문 기자로 <여자 정구 10년사>·<조선 야구사> 등을 집필하며 한국의 주체적인 스포츠 역사를 정리했다.

이길용은 스포츠를 통해 식민지 조선이 여전히 건재함을 세계에 알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1932년 8월 제10회 미국 로스엔젤레스 올림픽에 마라톤 종목에 출전한 김은배·권태하 선수의 결승선 통과 사진에서 가슴에 부착된 일장기를 말소하면서 숨겨진 의기를 분출했다. 일제를 향한 그의 도전은 1936년 8월 <동아일보> 표지에도 이어져, 손기정 선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삭제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신동아>에 일장기 삭제 사진을 실은 것도 그가 주도해 진행된 일이었다. 연일 이어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이길용과 그의 동료들은 종로경찰서에서 극한 고문을 받은 뒤 1936년 9월 25일 강제 사직을 당했고, <동아일보>는 네 번째 정간을 당하고 <신동아>는 폐간되고 말았다. 이길용은 그 뒤에도 네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이길용(1899~?) 기자.
이길용(1899~?) 기자.

해방 직후 이길용은 <동아일보>에 복직했고, 조선체육회(현 대한체육회)를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 1946년에는 이승만과 김구 선생이 공동회장으로 참여한 '기미 독립선언 전국대회'에 실행위원으로 참여했고 본 행사의 사회를 맡았다. 이후로 그는 <대한 체육사>와 <체육 연감>을 정리해 발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 당시 납북됐다. 1991년 이길용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1989년부터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그의 숭고한 정신과 삶을 기념해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공적 조서 개요를 보면 그가 일제강점기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민족 해방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꿈의 청년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1919년 만철滿鐵경성관리국에 근무하며 철도 수송 업무를 맡아 보는 것을 이용하여 상해임시정부에서 보내오는 반일격문反日檄文을 수송하며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았고, 1936년 8월 25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자인 손기정의 사진을 <동아일보>에 게재할 때 손 선수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리고 보도함으로써 민족정신을 일깨운 후 일제의 강제에 의하여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당한 공적이 인정되므로 건국훈장 애국장에 해당되는 분으로 사료된다."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관리 번호 제6292호) 

기독교인 여운형과 이길용의 용기 있는 일장기 말소 보도는 조선 언론과 민족 지도자들에 대한 일제의 노골적인 탄압과 전시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비록 신문 지면을 통해서였지만, 일장기 말소라는 방식으로 일제에 담대히 저항한 두 기독교인 저널리스트의 양심과 정신은 더욱 빛나는 역사로 후대에 남게 됐다.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은 "슬푸다"라는 외마디 소리만을 엽서에 적어 친구에 부쳤던 청년 마라톤 선수 손기정의 설움에도 일말의 위로를 주었을 것이며, 일제 강점 통치에 울분을 토하던 조선 민중들에게도 한줄기 희망이 됐다.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 수여 직후에 친구에게 보낸 엽서(위)와 사인. 여백에 "슬푸다"라는 단 세 글자만이 적혀 있다. 손기정 선수는 비록 일본 대표 선수로 출전했지만, 자신의 사인에서 일본식 이름인 'Kitei Son'이 아닌 한국 이름과 'KOREAN'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드러냈다. (박건호 소장).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 수여 직후에 친구에게 보낸 엽서(위)와 사인. 여백에 "슬푸다"라는 단 세 글자만이 적혀 있다. 손기정 선수는 비록 일본 대표 선수로 출전했지만, 자신의 사인에서 일본식 이름인 'Kitei Son'이 아닌 한국 이름과 'KOREAN'이라는 민족 정체성을 드러냈다. (박건호 소장).
교회 마당에 설치된 국기 게양탑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대륙 침탈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일제는 새로운 전시체제에 국가를 총동원하고 사상 통일을 이루기 위해 각종 국가 행사를 개최하며 신사참배 강요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32년부터 '만주사변에 대한 기원제'나 '만주사변 전몰자 위령제' 등에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을 동원하려 했지만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마침내 1935년 11월 평남도청에서 일어난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으로 인해 총독부와 도 당국은 '학교장 파면과 강제 폐교를 불사하겠다'는 경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일제의 신사참배 및 국가 의례 참가 강요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1.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 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2.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臣民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No. 114>(1940. 4.), 182~183쪽]

1937년 중일전쟁 직후 대륙 침략에 자신감을 얻은 일제는 1938년 1월 29일, 개신교 대표자들을 총독부 학무국에 초청해 전시체제와 황국신민화에 협조하라고 설득했고, 같은 해 2월에 이르러 조선총독부는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정 정책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1. 시국 인식 철저를 위하여 기독교 교역자 좌담회를 개최하여 지도 계몽에 힘쓸 것. 

2. 시국 인식의 철저를 위한 지도 및 실시

(1) 교회당에 국기 게양탑을 건설할 것.

(2) 기독교인의 국기 경례, 동방 요배, 국가 봉창, 황국신민서사 제창을 실시할 것.

(3) 일반 신도의 신사참배에 바른 이해와 여행을 힘쓸 것. 

(4) 서력 연호의 사용을 삼갈 것. 

3. 외국인 선교사에 대해서는 이상의 것들의 실시에 관하여 자각시킬 것. 

4. 찬송가, 기도문, 설교에 있어 불온 내용을 검열, 임검臨檢 등으로 보다 엄중히 취체取締할 것. 

5. 당국의 지도에 따르지 않는 신자는 법적 조치를 취할 것. 

6. 국체에 맞는 기독교의 신건설 운동은 이를 적극 원조할 것." [<朝鮮總督府施政三十年史>(조선총독부, 1940), 833쪽]

이러한 일제의 회유와 억압 속에 기독교조선감리회는 1936년 6월 양주삼 총리사가 총독부 초청 좌담회에 참석한 후 일제의 입장을 수용했으며, 1938년 9월 "신사참배가 교리에 위반이나 구애됨이 추호도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도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함으로써 한국 개신교의 대표 교파·교회들이 일제의 전시 총동원 체제와 황국신민화 정책에 순응하기에 이르렀다.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마치고 일동 평양 신사참배를 실시한 장로교 대표들.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마치고 일동 평양 신사에 참배를 실시한 장로교 대표들.

이러한 일제의 교회 통제 정책 중에서도 신사참배 문제와 교회당 내 국기 게양탑 건설의 문제가 가장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다음은 1938년 5월 수원 기독교인들의 일장기 게양 반대 운동에 대한 보도다.

"수원서 고등계에서 목사 등 다수 남녀 기독교 신자를 검거 취조 중이던 바 요지음 취조의 일단락을 짓고 목사 외 좌기 6명의 남녀 기독교 신자를 보안법 위반 등 죄명하에 10일 경성지방 법원검사국에 송국하여 와서 방금 동법원 사상검사가 취조를 하고 있다는데 사건의 내용은 수원 기독교 신자를 중심으로 신사참배와 국기 게양을 반대하는 불온 운동을 일으키려던 것이라 한다." ['수원서 사건 기독교도 송국送局, 일당 7명 경성으로 : 신사참배와 국기 게양 반대 운동으로', <동아일보>, 1938년 5월 11일 자]

국기 게양과 신사참배에 저항한 수원 지역 기독교인들에 대한 <동아일보> 1938년 5월 11일 자 보도.
국기 게양과 신사참배에 저항한 수원 지역 기독교인들에 대한 <동아일보> 1938년 5월 11일 자 보도.

위의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부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은 일제의 교회 내 국기 게양 및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소수에 불과했으며 전국 대다수 교회는 일제의 정책에 순응하며 교회 내에 국기 게양탑을 설치하고 일제가 요구하는 국가 행사를 적극적으로 개최했다. 필자가 당시의 언론 자료들을 조사한 바 교회당에 국기 게양탑을 설치한 지역적 사례와 그 범위는 평남·함북·전남·강원·충남·경북 등 전국적인 규모였다. 1938년 봄, 교회당 내 국기 게양대 설치와 국가 의례 개최에 관련한 신문 보도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 내에 국기 게양탑 설치와 국가 의례 개최 요구에 순응한 교회들에 대한 신문 보도들.
교회 내에 국기 게양탑 설치와 국가 의례 개최 요구에 순응한 교회들에 대한 신문 보도들.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용반리에 잇는 장노파 교회에서는 지난 년말에 한 수일 동안 련합 사경회를 개최하엿는데 그때에 매일 황국신민의 서사誓詞를 제창하야 국민의 관념을 강조하엿다. 이것은 종내의 경향으로 보면 일대 원향願向으로서 당국에서도 감격하고 잇다.
 

함북 경성군鏡城郡 하의 긔독교도는 일전의 교도의 시국 좌담회를 열고 다음과 가튼 사항을 협의하엿다. ①매월 6일의 애국일 기타 축제일에는 신사에 참배할 것. ②예배일 기타 교회에 집회한 때에는 황거皇居를 요배할 것. ③각 교회 내에 국긔 게양탑을 건설할 것. ④축제일에는 반드시 각 집에 국긔를 게양 할 것 등을 협의하고 곳 이것의 설시에 착수하야 교도의 시국 인식을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엇다 한다." ['천도교와 기독교도 등 애국 행사 적극 참가 : 각 교회당에 국기 게양탑 건설코 황국신민의 서사 제송', <매일신보>, 1938년 1월 18일 자 2면]

"전남에 있어서의 기독교 목사를 위시하여 신도들 상당 다수에게서 높아지고 있는 황군의 위문, 국방 헌금, 신사참배 등 상당한 열성을 보이고, 심지어는 도제직회都諸職會 같은 것을 열어, 각 교회 매일 국기 게양탑을 건설하는 것을 결의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인쇄하여 각 교도에게 배포하는 등, 비상시국에 즉응하여 교연躈然하게 분기하고 있음은 왼쪽의 이러한 겹치는 이름들로 확인된다. 광주 양림정교회 목사 김영국, 광주 금정錦町 동 이경필李敬弼, 중앙교회 동 최병준, 가메오카정亀岡町교회 양응수, 광주교회 총무 김창선, 강진교회 집사 황복규 외 65명은 솔선하여 4월 2일의 진무덴노 마츠리神武天皇祭(신무천황제) 때에 신사참배를 행하여, 총후의 열성을 피력하기에 이르렀다." ['각 교회도 국기 게양탑 건설, 전남의 기독교들, 총후의 집성을 피력', <부산일보>, 1938년 4월 7일 자 5면]

"춘천「그리스트」교회에서는 지난 1일 교회 정문에 국긔 게양탑을 건설하야「그리스트」신자도 훌륭한 황국신민인 것을 자랑하엿는데 압흐로는 집회가 잇는 때마다 벽두에 먼저 황국신민의 서사를 제창하기로 결정하엿다." ['춘천 기독교회서도 국기 게양, 신사참배 - 조국에 진충보국을 결의', <매일신보>, 1938년 4월 16일 자 3면]

"보은 야소교회에서도 황국신민으로서 그 의무를 철저히 하기 위하야 동 야소교 구내에다가 국긔 게양대를 설치하는 동시에 지난 17일에는 야소교인 50여명이 당일 오후 1시에 보은 신명신사를 참배하얏다 한다." ['보은 야소교회서도 교도가 신사참배 : 구내에는 국기 게양대', <매일신보>, 1938년 4월 19일 자 4면]

"비상시국에 잇서서의 총후 국민의 인식 강조에 박차를 가하고 일층 일본 정신과 내선일체의 인식 강조를 위하야 청진부 내의 중앙中央, 서부西部, 동부東部, 신암동성결新岩洞聖潔, 제칠일안식第七日安息의 각 교회에서는 국기 게양탑에 집회하야 일반 신자의게 국가 관렴의 보급을 위해 당국과 일체 협동하리라 한다." ['청진 각 교회에서 국기 게양탑 설치', <매일신보>, 1938년 5월 10일 자 2면]

"충남 부여군 내에 산재하여 잇는 예수교회 각 단체 34개소의 교역자 전부가 부여경찰서 연무장에 집합하야 교역자 시국 좌담회敎役者時局座談會를 개최하고 현하 중대 시국에 당면한 이즈음 기독교 교역자로서 마땅히 가진 태도와 새로운 인식을 현저히 하고저 흉금을 펴노코 잇엇는데 그중에 제일 중대 문제는 국체명징國體明徵에 관하야 금후로는 ①각 신도들도 각기 교회 예배 순서에 국가 합창, 신민서사를 반드시 너흘 것과 ②각 교회마다 국기 게양대를 설치하고 동방 요배를 할 것과 ③축제일에는 반드시 신사참배를 실행할 것을 결의하엿다는데 지난 4월 26일의 국민정신 총동원 주간을 계기로 하야 각 교회는 전부 국기 게양대를 설치하고 국기를 게양하엿으며 예배 시마다는 국가 합창한 후 신민서사를 암송하엿다는데 국체명징의 인식이 각 신도들에까지 철저하게 되엇으므로 현하 국민정신의 총동원에 제하야 만흔 성과를 거두게 되엇다 한다." ['부여 기독교회에서 국기 게양대 설치',<동아일보>, 1938년 5월 8일 자 7면]

"신사참배 문제로 당국에서 수차 종용하여 온 결과 시국이 점차 중대화함에 감하여 선산군善山郡(현재의 경북 구미시 - 필자 주) 내의 각 야소교에서는 종래 고집하여 오든 신자 불참배는 포기하고 모든 국가 행사에 참가하여 황국신민으로서의 총후 국민의 의무를 다하고저 지난 천장절에도 일제히 봉축식을 거행하고 아침마다 각 교회에서 시국 인식에 대한 기도를 하고 경축일에는 일장기를 놉히 걸고 시국 재인식에 철저를 강화하고 잇든 바, 지난번 선산 야소교회에서는 동교회 시국 인식에 대한 강화講話를 소목사蘇牧師가 장시간에 긍하여 설화한 바 일반 부녀 신도들은 솔선하야 각각 푼푼이 거출하여 제1선에서 활동하는 황군을 위하야 국방비로 금 3원 3전을 소관 경찰서에 의뢰하엿다 한다." ['신사참배와 국기 게양 - 선산 교회서도 실시', <매일신보>, 1938년 5월 17일 자 4면]

<동아일보>·<매일신보>·<부산일보> 등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1938년 4월~5월에 걸쳐 전국 교회의 국기 게양탑 설치와 황국신민서사 제창, 국가 제창, 동방 요배, 신사참배의 실시에 대한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은 2월 총독부가 교회에 대한 시정 정책을 발표한 직후의 일이라 주목된다. <매일신보> 평남 용강군 장로교 연합 사경회의 황국신민서사 제창 소식을 알리는 보도에서는 그 말미에 "이것은 종래의 경향으로 보면 일대 원향으로서 당국에서도 감격하고 있다"고 말하며, 같은 신문의 선산교회 관련 보도 서두에서는 "신사참배 문제로 당국에서 수차 종용하여 온 결과 시국이 점차 중대화 함에 감하여 선산군 내 각 야소교에서는 종래 고집하여 오던 신자 불참배는 포기하고"라는 대목에서 이 시기가 한국교회 훼절·굴종의 실질적인 전환점이 되고 있음을 명징하게 보여 준다.

<매일신보> 1932년 12월 29일 자에 게재된 남산 국기 게양탑(현재 남산 팔각정 부근, 왼쪽) / <경성일보> 1933년 2월 19일 자에 수록된 국기 게양탑 설치 광고(가운데) / <대륙신사대관>(1941)에 수록된 천안 신사의 국기 게양탑 전경. 일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전국의 다양한 시설(학교, 관공서, 종교 시설, 공원 등)에 국기 게양탑을 대대적으로 설치했다. [이순우, '서울 남산 꼭대기 국사당 터에 건립된 일제의 국기 게양탑',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민족사랑>, 2016년 12월호, 47쪽에서 인용]
<매일신보> 1932년 12월 29일 자에 게재된 남산 국기 게양탑(현재 남산 팔각정 부근, 왼쪽) / <경성일보> 1933년 2월 19일 자에 수록된 국기 게양탑 설치 광고(가운데) / <대륙신사대관>(1941)에 수록된 천안 신사의 국기 게양탑 전경. 일제는 1930년대 중반부터 전국의 다양한 시설(학교, 관공서, 종교 시설, 공원 등)에 국기 게양탑을 대대적으로 설치했다. [이순우, '서울 남산 꼭대기 국사당 터에 건립된 일제의 국기 게양탑', <민족문제연구소회보 - 민족사랑>, 2016년 12월호, 47쪽에서 인용]

위의 기사들처럼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이 고조된 1930년대 말에 이르러 교회는 예배당에 일장기를 게양하고 교회 내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와 국가 의례를 노골적으로 실시하게 된다. 이러한 일장기와 신사에 대한 숭배와 선양 사업은 한국 기독교가 그동안 지켜 온 신앙의 정통성과 민족 정체성 양 축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유래가 없는 타협과 굴종이었다. 결국 1938년의 치욕적 역사를 통해 소위 '민족 교회'로서의 역사적 명맥은 소수의 저항자들을 통해 계승·유지될 수밖에 없게 됐다.

예배당 입구에 '종교보국'과 '황도선양'이라고 적힌 팻말을 부착한 경남 합천의 한 농촌 교회 모습. (1938년 이후).
예배당 입구에 일장기가 새겨진 '종교보국'과 '황도선양'이라는 팻말을 부착한 경남 합천의 한 농촌 교회 모습. (1938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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