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우리의 아들이 태어났다.

 

의식이 반쯤 돌아온 상태에서 나는 병원에서 커다란 동요가 일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문들이 열렸다 닫히고, 귓속말과 고함 소리,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발끝을 들고 조심조심 걷는 소리가 번갈아 가며 들렸다. 나중에는 사람들이 내 방에 살금살금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고, 어느 순간 눈을 떴더니 간호사가 아기가 아니라 종이 뭉치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그 서류를 내 침대의 이불 밑에 집어넣는 것이 아닌가.

 

바깥 거리도 온통 소란스러웠다. 간간이 비명 소리와 총성이 들리고,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만세, 만세' 하고 외치는 커다란 함성이 계속 반복되었다. '만세!' 그 소리는 거의 포효와 같았다." (메리 린리 테일러, <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책과함께, 2014, 225.)

3·1 운동 당시 갓 출산한 산모였던 메리 테일러(Mary L. Taylor)의 자서전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그의 남편 앨버트 테일러(Albert W. Taylor)는 1896년 광산업자로 내한했다가 UPI 통신사의 임시기자직을 겸하게 되어 3·1 운동을 가장 먼저 세계에 타전했다. 이후 원한경 선교사(H. H. Underwood), 미 영사 커티스와 함께 경기도 화성 제암리와 수촌리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3·1 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학살 현장을 취재해 세계에 고발한 한국인의 선한 벗이자, 양심적인 언론인이었다.

이 부부의 외아들 브루스가 태어난 직후 세브란스병원 병실에서 메리가 목격한 3·1 운동의 풍경들은 생동감이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세브란스 직원들(선교사와 한국인 간호사들)의 인식과 대응이 인상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메리 테일러와 앨버트 테일러 부부.
메리 테일러와 앨버트 테일러 부부.
테일러가 취재한 제암리 사건 현장
테일러가 취재한 제암리 사건 현장

"'우리도 모두 한국인들의 대의가 성취되기를 기도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말을 마친 수간호사는 창가에 모여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던 한국인 간호사들에게 돌아서서 무어라고 말을 했다. 이어서 모두 함께 무릎을 꿇더니 기도를 했다. 그런 다음 수간호사를 선두로 재빨리 병실을 나갔다." (메리 린리 테일러, <호박 목걸이 : 딜쿠샤 안주인 메리 테일러의 서울살이 1917~1948>, 책과함께, 2014, 226.)

메리는 에스텝 수간호사를 통해 세브란스병원 직원들이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인쇄기를 병원 시트 보관 창고에 숨겨 뒀는데 발각되었고, 경찰들이 인쇄물을 찾고 있지만 그것들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에스텝 수간호사는 한국인들이 벌인 만세 운동을 두고 독립에 대한 염원을 표현한 평화적 시위라고 말했다. 메리는 "지금 한국은 전 세계의 모든 민중과 손을 잡고 자유와 인류애를 다짐하고 있었다. 나는 수간호사의 들뜬 표정에서 그녀 역시 그들과 같은 이상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고 회고했다.

세브란스에서 출산 직후 아들을 안은 메리 테일러. 그녀는 창밖으로 3·1 운동의 군중을 바라보았다.
세브란스에서 출산 직후 아들을 안은 메리 테일러. 그녀는 창밖으로 3·1 운동의 군중을 바라보았다.
서울 태평로를 가득 메운 3·1 만세 시위 군중.
서울 태평로를 가득 메운 3·1 만세 시위 군중.

간호사들이 메리의 침대 밑에 숨겨 놓은 종이 뭉치는 기미 독립선언문이었다. 병실이 어둑할 무렵, 아들을 보러 온 남편 앨버트는 종이 뭉치를 발견해 급히 아들을 내려놓고 한 장을 꺼내 읽었다. 그는 아들과의 행복한 밤을 뒤로하고, 그날 밤 동생 빌에게 독립선언문 사본과 3·1 운동에 대해 쓴 기사를 구두 뒤축에 숨겨 도쿄로 보냈다. 더 엄격하고 삼엄한 검속령이 내려지기 전에 이 놀라운 소식을 미국 본사에 타전하기 위함이었다. 앨버트는 급히 기사를 넘기고 난 후,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병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잠든 아들을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며, 일본인들이 많은 시위자를 체포하고 진압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태극기가 교차되어 편집된 <독립신문> 3·1절 기념호(49호, 1920년)의 독립선언서. 본 선언서 왼쪽 측면에는 "대한민국 2년 3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태극기가 교차되어 편집된 <독립신문> 3·1절 기념호(49호, 1920년)의 독립선언서. 본 선언서 왼쪽 측면에는 "대한민국 2년 3월 1일"이라고 적혀 있다.
1919년 4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 전문과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 임시헌장, 선서문, 정강을 비롯해 여기에도 태극기가 교차해 삽입되어 있다.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1919년 4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독립선언서. 독립선언서 전문과 임시정부의 각료 명단, 임시헌장, 선서문, 정강 등이 담겼다. 여기에도 태극기가 교차 삽입되었다. 사진 제공 국가기록원

앨버트와 메리는 외아들 브루스의 탄생만큼이나 한국인의 독립선언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누구보다도 기뻐하고 한국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함께 응원했던 푸른 눈의 선한 이웃이었다. 이후 전개된 한국인의 시련과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지 않고 세상에 전하고자 애썼던 양심적이고 용기 있는 증언자였다. 이러한 그들의 드라마틱한 삶의 한 장면이 펼쳐진 장소는 기독교 의료 선교 기관 세브란스병원이었다.

일장기가 삽시간에 변하여
태극기 되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의료 기관이자 개신교 연합 의료 선교 기관이었던 세브란스병원(제중원)에는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중 한 명이었던 이갑성李甲成(1889~1981)이 제약 담당 사무원으로 재직 중이었다. 의전 재학생 이용설은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병원 지하에서 등사해 세브란스 의전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캐나다 출신 세균학 교수 스코필드 선교사는 내한 선교사로서는 유일하게 이갑성과 은밀히 소통하며 3·1 운동에 협력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국제 정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해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이후 3·1 운동의 진상과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해외에 알리는 일에 적극 협력했다. 졸업생들 중에도 박서양과 김필순, 이태준, 배동석, 이용설 등 의사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가 적지 않았다.

이렇듯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는 역사적 의미를 따졌을 때 단순히 한국 기독교의 선구적 의료 선교 기관일 뿐 아니라 스러져 가는 민족과 국가의 독립과 미래를 위해 헌신한 민족운동의 기지 역할도 감당했다.

태극 문양이 표기된 제중원의 약 광고(왼쪽, <독립신문> 1898년 10월 12일 자).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이토 히로부미가 세브란스병원에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장면(오른쪽, 1908년). 병원 외부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태극 문양이 표기된 제중원의 약 광고(왼쪽, <독립신문> 1898년 10월 12일 자). 한일 강제 병합 직전 이토 히로부미가 세브란스병원에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장면(오른쪽, 1908년). 병원 외부에 성조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세브란스병원 내 태극 모양으로 조성된 정원에서 기념 촬영을 한 세브란스 간호학교 학생들 모습(1931년).
세브란스병원 내 태극 모양으로 조성된 정원에서 기념 촬영을 한 세브란스 간호학교 학생들 모습(193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뿐 아니라 기독교 연합 대학인 연희전문학교 학생들도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연희전문 학생대표 김원벽金元璧이었다. 김원벽은 민족 대표 이필주 목사의 집에서 서울시 내 전문학교와 중학교 학생 대표단을 소집해 청년 학생들이 3월 1일 오후 2시에 탑골공원으로 집합하기로 결의하고, 28일 승동교회에서 각 전문학교 대표들과 함께 이갑성으로부터 전해 받은 독립선언서를 배부했다. 그는 3월 1일과 5일 두 차례의 만세 시위를 지휘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연희전문학교 학생 대표로서 3·1 운동의 서울 집회를 이끈 김원벽 선생.
연희전문학교 학생 대표로서 3·1 운동의 서울 집회를 이끈 김원벽 선생.
그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8년 4월 12일 자).
그의 별세 소식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1928년 4월 12일 자).

이러한 기독교 교육기관의 학생들이 3·1 운동에 적극 나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역사관·시대정신을 공동으로 품어 내고 당당히 선포한 집단적 회개 사건이자 혁명 사건이었다. '회개'의 본뜻은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즉, "생각을 고쳐먹는"다는 것이다. 왕의 백성, 천황의 신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로서 나 자신이 이 땅의 주인이자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집단적으로 자각하고 회개를 경험한 사건이 바로 3·1 운동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전근대의 가부장성과 차별적 사회구조, 제국주의의 폭력 앞에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비전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교회사의 한 장면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일제의 무단통치가 심화한 1919년에 이르러, 기독교 신앙을 통해 민족의 자존과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조화시켜 나가는 것은 한국교회의 역사적 당위가 되었다. 3·1 운동 당시 교회는 외국인 선교사들의 안전망이라는 치외법권적 특권을 이용해 각 지역 시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태극기 제작과 배포도 교회를 중심으로 적극 이루어졌다. 당시 기독교인들이 3·1 운동 참여 과정에서 태극기를 제작·게양·배포했다는 사실을 증언한 민족 대표 김병조 목사의 저술과 3·1 운동에 직접 참여하거나 목격한 도인권 목사와 선교사들의 진술 몇 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숭실학교 태극기. 1919년 3월 1일 평양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숭실학교 교정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던 것이다. 3·1 운동 이틀 전 숭실학교 학생 김건, 박병곤 등이 제작. 교장 마펫 선교사가 보관하다가 사후 그의 아들이 1974년 숭실대학교에 기증했다(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숭실학교 태극기. 1919년 3월 1일 평양 지역 독립 만세 운동을 주도한 숭실학교 교정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던 것이다. 3·1 운동 이틀 전 숭실학교 학생 김건, 박병곤 등이 제작. 교장 마펫 선교사가 보관하다가 사후 그의 아들이 1974년 숭실대학교에 기증했다(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장).

"한국에서의 독립운동

조선, 평양 1919년 3월 1일 (중략)

 

한국인들 사이에는 요 며칠 동안 분명히 억누른 흥분이 감돌고 있고, 우리는 그때에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B(S. A. Moffett) 씨와 C(E. M. Mowry) 씨 그리고 나(C. F. Bernheisel)는 그 모임에 직접 참가해서 우리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기로 했다. AA(선천)의 F(S. L. Roberts) 씨도 후에 늦게 와서 운동장 뒤편에 서 있었다. 운동장은 3000명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우리는 아주 앞쪽의 한쪽 열 옆으로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의 모든 교회학교와 대부분의 공립학교에서 온 학생들이 참석했다.

 

입구 정면에는 강단이 있었고, 그 주위와 뒤에는 몇몇 목사들과 이 도시의 장로교 임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에는 제5교회(서문외교회)의 목사이며 장로회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제4교회(산정현교회)의 강규찬 목사는 이미 고종 황제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친 후 김선두 목사는 이제 송영가를 부르고 축도를 하며 봉도회를 마친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다음 순서가 남았으니 그 자리에 그냥 앉아있어 달라고 말했다.

 

축도를 한 후, 김선두 목사는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로마서 9장 3절의 두 성경 본문을 봉독했다. 그가 이 말씀을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볼 때, 심각한 일이 남아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제4교회(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있는 정일선이 연단에 올라서서, 읽어서 알려 드려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이 그의 평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날이며, 내일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고 말했다. 청중들은 굉장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자 그는 사실상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자, 한 사람이 올라가 사람들이 지켜야 할 것을 설명했다. 불법적인 짓을 해서는 안 되고, 모두 주어진 지시에 따를 것이며, 관헌에게 저항하지 말고 일본인 관리나 민간인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강규찬 목사가 민족 독립에 대한 연설을 했다. 연설이 끝날 때 즈음에 몇 사람이 태극기를 한 아름씩 건물에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커다란 태극기 하나가 연단에 걸리자,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태극기가 물결쳤다. 그리고서 우리 모두가 대열을 지어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자고 그들에게 설명했다." (C. F. Bernheisel,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Chosen. Pyengyang, Chosen, March 1st ,1919" 이 보고서는 <Korean Independence Outbreak>(1919)에 익명으로 게재되었다.)

"준비했던 태극기를 숭덕학교 큰 승강구에다 높이 걸어 놓게 되니 일반대중들은 미치리만큼 놀라며 흥분하였다. 이어서 독립선언식을 정중히 거행하게 되었다. 나는 먼저 독립선언식의 취지와 주제를 선포한 것이며 강규찬 목사는 연설을 하였고 정일선 목사(전도사 - 인용자)는 선언문을 봉독하였으며, 윤원삼 황민영 양 씨는 태극기를 대중에게 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곽권응 씨는 10년 만에 애국가를 인도하여 일반 대중이 제창토록 하였고, 김선두 목사는 이 집회의 사회를 하였다. 이러한 일의 구체적 상황은 독립운동혈사獨立運動血史에 평기評記되어 있는 것이다. 이 회합이 진행된 때는 일본 경관 수십 명이 달려와서 이 운동의 지도자들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수천 군중이 달려들어 우리를 전체로 잡아가라고 고함과 반역을 하니 그들은 실색을 하고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큰 태극기를 선두에 내세우고 해추골로 시가행진을 하려고 나와본즉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만세를 부르고 있었으며 좌우 상점에는 눈부시리만큼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일장기가 삽시간에 변하여 태극기가 된 것은 장차 일본이 한국의 국권 앞에 머리 숙일 예표인 양 보였다." (장로교계 주동자 중 한 사람으로서 3월 1일 평양 만세 시위에 참여했던 <도인권都寅權 회고록>(1962), 34-37.)

"의주 인민의 독립선언

 

김병조, 김승만은 비밀 기관의 간부가 되고, 유여대는 시위운동의 회장이 되어, 운천동雲川洞에서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하여 50여 교회와 사회 각 단체에 통고문을 밀포하여 2월 28일 밤에 군내 양실학원養實學院에 모여 회의하고, 다음 날에 경성에서 (거사하라는) 전보가 내도來到하였으므로 (중략) 오후 1시에 2000여 명의 민중이 학슬봉鶴膝峰 아래에 회집하였다.

 

유여대가 헌앙軒昻한 기개와 충성스럽고 간곡한 언사로 취지를 설명하고 독립가를 제창한 후, 황대벽, 김이순 두 사람의 연설이 있었으니, 공중에 펄럭이는 팔괘국기八卦國旗(태극기)는 선명한 색채가 찬란하고 벽력과 방불한 만세 부르짖음 소리는 뜨거운 피가 비등하매 통군정統軍亭 숙운宿雲에 놀란 학이 화답하여 울고, 압록강의 오열嗚咽하는 파도에 물고기와 자라가 고개를 내밀고 듣더라." (김병조가 1920년 상하이에서 출판한 <한국 독립운동사> 중. ; 김형석 편, <일재 김병조의 민족운동>, 남강문화재단출판부, 1993, 217-218.)

"함흥에서 아무런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인 1919년 3월 2일 밤과 3월 3일 새벽에 기독교 학교의 학생들 몇 명과 교사 한 명이 체포되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3일 월요일에 경찰이 (장날인데도) 가게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는 말이 있었다.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중심가에 모였다.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나팔을 불었고, 이를 신호로 하여 군중들은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고, 태극기가 물결쳤다." [맥래 선교사(Rev. M. D. MacRae, 마구례)가 1919년 3월 20일 함흥 만세 시위의 실상을 영국영사관에 알리고 총독부에 항의하기 위해 직접 작성한 진술서. ; "Statement by Rev. M. McRae of Events in Hamheung, Korea(Seoul, March 20th, 1919)," <Korean Independence Outbreak>(1919)]

평양 출신 한국 화가 혜촌 김학수 화백이 그린 '평양 남산현교회'(1998년).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했다.
평양 출신 한국 화가 혜촌 김학수 화백이 그린 '평양 남산현교회'(1998년). 3·1 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했다.

이상의 몇몇 진술만 살펴보더라도 3·1 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전국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면서 만세 시위 현장에서 대개 대형 태극기를 게양하고 시민들에게 다수의 태극기를 배포해 참여를 독려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평양 거리 상점 곳곳에 태극기가 게양되고 수많은 일장기가 삽시간에 태극기로 바뀐 것은 장차 일본이 한국의 국권 앞에 머리 숙일 예표인 양 보였다"는 도인권 목사의 회고는 자못 인상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3·1 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의 태극기 제작 배포 관련 기사는 다양하게 확인되나 지면 관계상 이 정도의 소개로 소략하고자 한다.)

3·1 운동 결과로 전환된 일제의 문화 통치에는 1910년 이후 거의 10년간 금기시되었던 태극기 제작과 게양이 여전히 금기시되었지만, 태극 문양 사용에 대해서는 우회적으로 용인되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 언론·출판·결사의자유를 허락하는 모양새를 갖추었다. 이러한 변화된 분위기에서 192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의 다양한 문화적 양식과 표현 속에 구 한국의 상징이었던 태극 문양이 조심스럽게 반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3·1 운동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애비슨이 교장을 겸하고 있던 연희전문학교의 신축 교사에서 확인된다. 3·1 운동 이후 조선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뜨겁게 일어나던 시기, 내한 선교사들도 한국인들을 위한 고등교육에 더 많은 지원과 확대를 위해 재정과 인력을 투입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연희전문학교의 캠퍼스 내에 더 나은 교육 여건을 확보하기 위한 석조 교사들이 속속 신축되었다.

미국 LA의 찰스 스팀슨(Charles S. M. Stimson)이 대학 설립 자금으로 기부한 2만 5000달러를 기반으로 1920년 8월 연희전문의 첫 석조 건물이 준공하게 되었다. 이 건물의 준공식에는 기독교와 정관계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는데, 행사장에는 어쩔 수 없이 일장기가 교차 게양되었고, 단상에는 영국과 미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하지만 연희전문의 선교사들과 학교 관계자들은 이 건물의 동측과 남측 베이 윈도(bay window) 상단에 화강암으로 태극 문양을 새겨 넣었다. 아울러 스팀슨관의 중앙 출입문은 특별히 제작된 태극 문양의 유리문이 설치되었는데, 그 문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1924년과 1925년 연이어 준공한 아펜젤러관과 언더우드관에도 동일한 패턴의 태극 문양이 건물의 베이 윈도 상단에 자랑처럼 새겨졌다.

1920년 스팀슨관 준공식(왼쪽). 월남 이상재 선생이 축사를 했다(오른쪽). 일제강점기이기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지만, 건물의 베이 윈도 상단과 출입문에는 태극 문양을 은밀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1920년 스팀슨관 준공식(왼쪽). 월남 이상재 선생이 축사를 했다(오른쪽). 일제강점기이기에 일장기가 게양되어 있지만, 건물의 베이 윈도 상단과 출입문에는 태극 문양을 은밀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베이 윈도 상단에 태극기가 새겨진 스팀슨관(왼쪽)과 아펜젤러관(오른쪽).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귀국 직전 스팀슨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애비슨 교장 부부(중앙). 그들의 뒤로 태극문이 보인다. 이 문은 현재도 남아 있다.
베이 윈도 상단에 태극기가 새겨진 스팀슨관(왼쪽)과 아펜젤러관(오른쪽).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을 마치고 귀국 직전 스팀슨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애비슨 교장 부부(중앙). 그들의 뒤로 태극문이 보인다. 이 문은 현재도 남아 있다.
현 아펜젤러관 모습.
현 아펜젤러관 모습.

비록 3·1 운동을 통해 구체적인 민족 독립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이후 건립된 연희전문학교의 신축 교사를 드나드는 학생들은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조화하며 장차 성취할 독립의 이상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배움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태극이 아로새겨진 연희전문의 건물과 태극문을 통해 이후 윤동주·송몽규·강성갑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이곳을 통해 위당 정인보, 외솔 최현배, 한결 김윤경 등,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하에서도 한국의 정신과 언어를 연구하는 한국학 연구의 토대를 만들고 이후 조선어학회 주축 멤버가 된 이들이 배출되었고, 일본의 식민 사관에 대항하는 민족 사관의 역사적 노력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일제 파시즘 광기 속에 민족 얼이 파괴되어 가는 절망의 시절 윤동주가 한글 시를 붙들고, 여러 선생과 후학들이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지켜 내기 위해 투쟁한 최후의 보루가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대학이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역설이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연희전문에 유학한 윤동주 생가의 막새기와. 삼태극 문양과 주변의 십자가. 무궁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또한 기독교 신앙(십자가)을 통한 민족 구원(삼태극, 무궁화)의 의지를 만주 용정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확고히 했던 결과였다(연세대 윤동주기념관 소장).
연희전문에 유학한 윤동주 생가의 막새기와. 삼태극 문양과 주변의 십자가. 무궁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또한 기독교 신앙(십자가)을 통한 민족 구원(삼태극, 무궁화)의 의지를 만주 용정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서 확고히 했던 결과였다(연세대 윤동주기념관 소장).
강당 트러스에 새긴 태극 문양

1919년 4월 1일 충남의 고도 공주에서도 대한 독립 만세 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공교롭게도 충청권 최대의 만세 시위라고 알려진 천안 병천 장날 만세 시위가 열린 날, 공주에서도 똑같이 장터 시위가 일어난 것이다.

이날 공주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이들은 감리교 윌리엄스(F. E. C. Williams) 선교사가 설립한 영명학교 교사와 목사, 학생들이었다. 3월 24일부터 영명학교의 현석칠·안창호·김수철·김관회 등은 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 활동을 전개했으며, 25일에는 교사 김관회가 김수철에게 독립선언서 제작을 의뢰했다. 김수철 권유로 유우석(유관순 열사의 오빠)·노명우·윤봉균·강윤 등이 3월 31일 오후 3시경 영명학교 기숙사에 모여 윤봉균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인쇄해 1000매를 준비했다. 이 선언서는 4월 1일 강윤·노명우·유우석·양재순 등 영명학교 학생들이 공주시장에 나가 군중들에게 배포했다. 학생들은 장터에 운집한 회중 앞에 서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날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했던 강윤姜沇(1899~1975)은 함께 운동을 전개한 동기들과 함께 일제에 체포·구금되었고, 공주지방법원에서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함께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병천에서 공주로 잡혀 온 유관순은 5년형을 선고받은 뒤 경성복심법원으로 옮겨져 3년형을 언도받았다.

공주 3·1 운동을 주도한 강윤과 유우석 등이 재학했던 공주 영명학교.
공주 3·1 운동을 주도한 강윤과 유우석 등이 재학했던 공주 영명학교.

영명학교의 윌리엄스 선교사는 일제 당국과 재판장을 찾아다니며 학생들 입장을 대변하며 탄원했다. 결국 구속 교사와 학생들에 대해서는 조건부 감형이 이루어졌으며, 영명학교는 이듬해 신입생 모집을 못 하게 되었다. 강윤을 비롯한 7명의 3·1 운동 주도자들은 졸업식은 치르지 못하고 졸업장만 받았다.

강윤의 도일渡日
건축가의 길

공주 3·1 운동 주동자 중 한 명이었던 강윤은, 출소 이후 윌리엄스 선교사 추천으로 일본으로 떠나 시가현의 오미하치만에서 활동하던 평신도 선교사 보리스(W. M. Vories)를 찾아갔다. 강윤은 보리스가 선교적 목적으로 설립한 건축 사무소에서 건축 일을 배우게 되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에는 일본인·중국인·미국인·소련인·베트남인 등 다양한 인종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조선인은 세브란스병원 의료 선교사 추천으로 와 있던 임덕수와, 윌리엄스 선교사 추천으로 들어온 강윤이었다. 이 건축 사무소 직원들은 각기 국적과 성격이 달랐지만, 모두 크리스천이었다.

보리스건축사무소와 간사이공학전수학교에서 건축을 배울 당시의 강윤(가운데).
보리스건축사무소와 간사이공학전수학교에서 건축을 배울 당시의 강윤(가운데).

보리스건축사무소는 이윤을 추구하기보다는 건축을 선교 사업의 일환으로 삼았다. 일본을 비롯해 조선, 중국, 만주, 동남아시아 등지에 선교 사업을 위한 교회, 병원, YMCA, 복지시설, 선교사 저택 등의 건축물을 왕성하게 건축했으며, 그렇게 40여 년간 1484건의 건축물을 시공했다.

일본에서 건축을 배우고 풍부한 경험을 쌓은 강윤은 1933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3·1 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도일한 지 13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사이 그는 간사이공학전수학교(현 오사카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보리스건축사무소 주축 멤버로 성장했다.

귀국 직후 강윤이 맡은 사업은 서울 정동에서 대현동으로 이전하는 이화여전 새 캠퍼스를 조성하는 일이었다. 그는 1935년 이화여전의 본관·음악당·중강당·체육관을, 1936년에는 기숙사·보육과·영어실습소·가사실습소 등을 지었다. 이외에도 한국 내에 다양한 기독교 관련 건축물을 시공했다. 태화사회관, 공주 공제의원, 대천 외국인 선교사 수양관, 세브란스병원, 평양 광성중학교, 함흥 영행중학교, 대구 계성학교, 원산중앙교회, 철원제일교회, 나남교회, 부산진교회, 해방 이후에는 이화여대 대강당,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본관 등 그가 한반도에 시공한 건축물은 145건에 달했다.

3·1 운동의 원점, 태화사회관

한국으로 돌아온 강윤이 1930~1940년대 지은 건물 중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곳은 바로 종로의 '태화사회관'이었다. 바로 이 자리에는 다양한 역사의 노정과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예전에는 순화궁터(중종이 순화 공주를 위해 지어 준 사저)였고, 후에 친일파 이완용의 땅이 되었는데, 3·1 운동 당시에는 명월관 지점 태화관太華館이라는 이름의 식당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이 이 건물을 매각하면서 남감리교 여선교사들이 구입하여 '태화여자관'(1921년, 후에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사용되었다.

옛 순화궁 전경.
옛 순화궁 전경.

이렇게 조선 시대에는 명문대가·권문세도 양반 귀족이 살던 대감집이자, 왕이 등극하기 전에 살았던 잠룡저, 일제강점기에는 친일파 이완용의 가족이 살다가 장안 제일의 요릿집이 되어 3·1 운동 당시에는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복잡하고도 독특한 이력의 순화궁, 태화관은 기독교 선교의 새로운 장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던 것이다.

태화여자관泰和女子館이라는 이름으로 1921년 4월 문을 연 이곳에서는 서울의 여성과 학생, 청년들의 전도 집회와 성서 교육, 부녀자들을 위한 직업교육, 요리, 재봉, 위생, 아동교육, 유치원 및 탁아 사업, 여성들의 친교와 교류 활동, 야학과 우유 급식 등 다양한 여성 사회복지 사업이 전개되었다. 마이어스 선교사가 이곳의 원래 이름인 태화太華를 태화泰和로 바꾼 것은 사대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이곳을 통해 여성들이 큰 평화와 하나님나라의 조화를 이루라는 뜻이었다.

한국YWCA도 바로 이곳,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던 '별유천지 6호실', 즉 '태화정'에서 출범했다는 사실은 이곳이 한국 여성 선교와 여성운동의 배꼽 자리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하지만 옛 별유천지 태화정의 현 위치를 직접 찾아보면 휑한 공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태화빌딩 남측 주차장 부지(옛 태화유치원 자리)이다. 이렇듯 3·1 운동의 역사적 현장이 빌딩의 부속 주차장으로 변모해 있는 데에는 안타까운 역사적 과정이 존재했다.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왼쪽). 태화관 내부에서 독립선언식을 진행한 민족 대표 33인(오른쪽).
태화관 별유천지 6호실(왼쪽). 태화관 내부에서 독립선언식을 진행한 민족 대표 33인(오른쪽).
'한양韓洋 절충식'으로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 표현하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의 옛 건물은 한국 근대건축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아름다운 건축물이었다. 3·1 운동에 참여해 민족의식과 기독교 신앙이 남달랐던 강윤은, 한국의 전통적인 팔작지붕과 르네상스 양식이 조화를 이룬 '한양 절충식'으로 회관 건물을 시공했다(1939년). 강윤은 자신에게 인생의 고난과 기회를 동시에 주었던 3·1 운동의 역사적 원점에서,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기독교 신앙과 민족정신을 조화한 역사적인 기념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태화사회관 도면과 외관 및 내부 강당 전경.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태화사회관 도면(아래), 외관(왼쪽 위) 및 내부 강당 전경(오른쪽 위).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강당의 측면 트러스에 태극 문양이 보인다(왼쪽). 강윤은 강당의 장의자 측면에도 태극 문양을 조각해 넣었다(오른쪽).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강당의 측면 트러스에 태극 문양이 보인다(왼쪽). 강윤은 강당에 깔린 장의자 측면에도 태극 문양을 조각해 넣었다(오른쪽). 사진 제공 태화복지재단

강윤은 태화관 옛 한옥의 기와를 재활용해 새 건물의 기와지붕에 올렸다. 기존의 역사성을 새 건물이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일제의 파시즘이 극에 달했던 이 시기에 그는 한국인에게 친숙한 토담 형식의 외벽을 쌓고 한옥의 전통 띠 문양을 장식했다. 내부의 전형적인 고딕풍 예배당과 교육 공간은 서양식으로 구성했다. 구조재인 목조 트러스와 장의자 등 곳곳에 한국을 상징하는 암호처럼 태극 문양을 새겼다. 강윤은 태화사회관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YMCA회관 뒤로 보이는 태화복지재단. 삼태극은 태화복지재단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YMCA회관 뒤로 보이는 태화복지재단. 삼태극은 태화복지재단의 상징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태화빌딩 앞에는 3·1 독립선언 유적지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태화빌딩 앞에는 3·1 독립선언 유적지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이 '양식'이 우리 건축가에게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일까. 그 지방에서 나오는 재료로 그 지방의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모양의 집을 세우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닐까." (<조선과건축朝鮮と建築>, 1940년 4월호)

이렇듯 공주 3·1 운동을 주도해 옥고를 치르고, 도일해 근대건축을 배워 온 민족운동가 강윤은 자신의 전공인 건축을 통해 신앙과 민족의식을 묵묵히 펼쳐 보였다. 이곳은 일제의 제국주의 야욕이 정점에 달했던 파시즘 시기에 식민지민의 저항과 불굴의 의지, 그리스도인의 소망과 믿음을 건축이라는 양식에 담아 담대히 표현해 낸 3·1 정신의 상징, 기념비와도 같았다. 그러나 이 건물은 일제 말 전시체제, 해방 공간, 한국전쟁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변형·철거 위기를 겪었다. 그때마다 강윤은 태화사회관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전쟁을 치르고 1955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부가 건물을 되찾았을 때에도 강윤은 이 건물의 복원 공사를 맡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윤은 1975년 1월 30일 76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으며, 태화사회관 옆 중앙교회에서 장례를 치렀다. 강윤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추서되었으며, 2004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되었다.

태화기독교사회관은 강윤의 사후 5년 뒤인 1980년 인사동 개발계획으로 철거되었다. 비록 3·1 독립선언식이 열렸던 태화관, 이후 3·1 정신을 계승해 이 땅의 선교와 복지, 근대화에 기여한 태화사회관은 그 역사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 터는 여전히 남아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겸허히 돌아보게 한다.

저작권자 © 뉴스앤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