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중엽 우리나라 연해에는 수많은 외국 군함들이 출몰했는데 그 군함에는 한결같이 국기와 소속을 알리는 기가 달려 있었다. 그래서 국기가 특정한 나라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1876년 강화도에서 일본과 개항 조약을 맺을 때 일본에서는 국기를 내걸었으나 조선은 그렇지 못했다. 일본 사절이 조선의 국기는 무엇이냐고 묻자 오경석吳慶錫이 임기응변으로 강화 연무당 여기저기에 그려진 태극을 가리키며 '저것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문양이다'라고 대답했다. 사실 태극은 건축물이나 생활 도구 등에 많이 그려져 있어 그 말이 억지는 아니었다."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9 : 500년 왕국의 종말>, 한길사, 2003, 225-226.)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 조선의 양반 관료들은 근대적 의미의 외교 관계나 조약, 국가 개념 및 상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이때가 태극이 구한말 조선과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그 방향이 대략 결정된 시점이었다. 변화하는 국제 현실과 제국주의의 발호에 무지한 한 관료의 임기응변적 손짓에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조선의 민중도 <주역>과 <태극도설> 같은 철학서의 심오한 이론과 의미까지 헤아리진 못했겠지만, 태극에 담긴 천지 음양, 태극이 남녀 귀천이 조화하고 평등하는 대동大同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몸과 삶으로 이미 체득하고 있었으리라. 그래서 태극은 개항기 이후 한국 사회와 민족의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채택되고 민중의 생활 속에 깊숙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대한성공회 강화읍교회 대문에 그려진 십자가와 태극 문양.
대한성공회 강화읍교회 대문에 그려진 십자가와 태극 문양.

역설적이게도, 구한말 태극기는 외적으로 조선 500년이 추구하고 구축해 온 지배 가치와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했지만, 내적으로는 억눌리고 잠들어 있던 민중 역할에 대한 각성과 대동 세상을 향한 욕망을 자극해 새로운 시대를 향해 달음박질치게 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반상의 차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제가 국가 시스템과 사회제도로 고착된 조선 500년의 끝자락에 서서 이러한 태극 사상과 대동 세상의 구체적 실현이 비로소 가능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예기禮記>의 예운禮運 편에는 우리 민족의 정신사에 도도히 흐르는 대동사상과 그 세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大道之行也,天下爲公 (대도지행야 천하위공) 選賢與能, 講信修睦 (선현여능 강신수목)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고인부독친기친 부독자기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사노유소종 장유소용 유유소장 환과고독폐질자 개유소양) 男有分, 女有歸 (남유분 여유귀) 貨惡其棄於地也, 不必藏於己 (화오기기어지야 불필장어기) 力惡其不出於身也, 不必爲己 (역오기불출어신야 불필위기) 是故謀閉而不興, 盜竊亂賊而不作, 故外戶而不閉 (시고모폐이부흥 도절난적이부작 고외호이불폐) 是謂大同 (시위대동)"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세계에서는 천하가 천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현명한 자를 등용하고 능력 있는 자가 정치에 참여해 신의를 가르치고 화목함을 이루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이 아닌 남의 부모도 사랑하며, 자기 자식뿐 아니라 남의 자식에게도 자애롭게 된다. 나이 든 사람들이 그 삶을 편안히 마치고 젊은이들은 재주와 능력을 펼칠 수 있으며 어린이들은 안전하게 자라날 수 있고 혼자 남겨진 남편, 부인, 고아, 자식 없는 노인, 병든 자들이 모두 부양되며, 남자들은 모두 각기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여자들은 돌아갈 곳이 있도록 한다. 물건은 아무 곳에 두더라도 아무도 가지려 하지 않으며,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들은 스스로 하려 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음모를 꾸미거나 간사한 모의가 일어나지 않고 도둑이나 폭력배들이 횡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집마다 문을 열어 놓고 닫지 않으니 이러한 사회를 일러 '대동 세상'이라 한다."]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그렇게 구한말 태극기의 게양과 함께 조선 500년 동안 억눌린 어깨를 펴며 역사의 전면에 얼굴을 새롭게 드러낸 상징적 인물이 바로 백정 출신 기독교인 '박성춘朴成春'(1862~1933)이었다.

1894년 그가 중병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아들 봉출(박서양)이 곤당골 예수교학당의 무어(S. F. Moore) 선교사에게 아버지의 응급 상황을 알렸고, 무어는 당시 고종의 시의侍醫로 활동하고 있던 에비슨(O. R. Avison)을 대동해 왕진 치료를 해 주었다. 마침내 기사회생한 박성춘은 크게 감동하여 곤당골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백정의 출석에 반발하는 양반들의 모습을 맞닥뜨리게 된다.

"선교사 무어 목사는 여러 조선인들을 일요일마다 교회에 모이게 했는데, 박성춘도 이 모임에 들어갔다. 물론 이들은 갓도 쓰지 않은 사람들이 끼어드는 것을 보고 눈을 흘겼으며, 백정의 친구들이 집회에 많이 나오기 시작하여 이 모임이 흔히 백정교회라 불리게 되자 몹시 당황하게 되었다. 무어는 양반들과 협의하고 교인인 백정을 교회 밖으로 몰아낼 수 없다고 했으며, 결국 양반들이 교회에서 나오기로 결정하여 교회가 번성하게 되었다." (O. R. 에비슨, <구한말 비록>, 대구대학교출판부, 1984, 193-196.)

무어 선교사는 기독교의 '만민 평등' 가치를 내세워 백정들을 교회에서 내보내 달라는 양반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에 반발한 양반들은 인근 홍문섯골교회로 분립해 나갔다. 이렇듯 선교 초기 기독교는 조선 500년의 고질적인 신분제도와 차별, 배제의 인습과 문화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대안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었다.

백정 출신 박성춘이 장로로 장립된 승동교회 신축 예배당 모습(1913년 준공).
백정 출신 박성춘이 장로로 장립된 승동교회 신축 예배당 모습(1913년 준공).

기독교의 '만민 평등'의 정신에 고무된 박성춘은 이후 백정 해방 운동을 펼쳤다. 갑오개혁으로 명목상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백정을 향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은 여전하여 백정은 호적도 없고, 상투도 틀지 못하며, 갓이나 망건도 쓸 수 없었다. 당시 백정들 중에는 정부의 칙령만을 믿고 도포를 입고 외출했다가 구타를 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1895년 콜레라가 만연했을 당시 방역 책임자로 활동했던 에비슨은 정부를 대표한 유길준의 감사 편지에 회신하며, 백정도 상투를 틀고 갓을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박성춘도 무어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백정 차별 제도 철폐를 다시 확인해 달라는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해 5월 13일 백정 차별을 금지하는 내용의 칙령이 다시 한번 반포되고 11월에는 전국에 방이 붙었다. 이에 환호한 박성춘은 '500년 동안' 금기시되었던 의관衣冠을 갖추고 여러 백정들과 함께 하루 종일 종로 거리를 행진했다. 얼마나 좋았던지 잘 때도 갓을 벗지 않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박성춘의 이러한 경험은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로서, 새로운 대동 세상의 시민 사회운동에 적극 동참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1898년 3월 10일부터 독립협회 주최 하에 외세의 침탈과 이권 개입, 간신들의 전횡과 부패에 대해 비판하는 민중 대회인 만민공동회가 수개월간 개최되었다. 이 당시 첫 모임에만 한양 시민 1만 명 이상이 종로 거리에 운집해, 정부의 정책과 외세의 침탈 행위에 구체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더 적극적인 자주독립과 사회 개혁 운동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만민공동회의 군중집회는 10월에 그 절정에 이르렀다. 10월 29일 정부 관료들도 함께하는 관민공동회가 개최되었다. 의정부 참정 박정양을 비롯한 법무대신, 탁지부대신, 중추원 의장, 한성부판윤 등 정관계 거물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러한 대규모 시국 집회의 개막 연설자로 단상에 선 인물은 바로 백정 출신 박성춘이었다. 그는 조선의 천민 출신으로, 정부의 관료들과 시민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1898년 10월 29일 종로에서 개최된 관민공동회에서 개막 연설을 하는 박성춘. 그는 백정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정부 관계자와 한양 시민들 앞에서 시민의 권리와 책임에 대해 역설했다. 그의 등 뒤에는 당당하게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1898년 10월 29일 종로에서 개최된 관민공동회에서 개막 연설을 하는 박성춘. 그는 백정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정부 관계자와 한양 시민들 앞에서 시민의 권리와 책임에 대해 역설했다. 그의 등 뒤에는 당당하게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나는 대한의 가장 천한 사람이고 무지몰각합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나라를 이롭게 하고 인민을 편하게 하는利國便民 길은 관민官民이 합심한 연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햇볕을 가리는 천막(차일遮日)에 비유하자면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나 많은 장대를 합하면 그 힘이 심히 견고(공고鞏固)합니다. 원컨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세 이어지게 합시다." (독립협회에서 주최한 관민공동회, 박성춘의 개막 연설 중에서, 1898. 10. 29.)

이 연설은 불과 수년 전에는 인간 취급도 받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인 일개 백정이 조선 500년 뿌리 깊은 신분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고 근대 시민사회의 새로운 출현을 양반 관료들과 시민들 앞에서 당당히 외친 한국 근대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 중 하나였다.

만민공동회의 노력으로, 마침내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원칙으로 황제에게 제출된 헌의 6조를 관철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은 자주성을 가진 군주 주권국가를 확립하되 의정부를 폐지하고, 서구의 상원의회와 같은 중추원을 국가 의결기관으로 설립하여 왕권을 견제하는 일을 비롯해 재정 기관의 탁지부 일원화, 공정한 재판제도 확립, 외세의 배격, 부정부패 척결, 공정한 인사 제도 도입 등 정치와 사회제도의 개혁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이러한 개혁 성과에 위협을 느낀 수구파들은, 독립협회가 의회(중추원) 설립이 아닌 황제 폐위와 민주 공화제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전단을 뿌리고 고종에게 모함했다. 이에 놀란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들을 체포했으며, 정치 깡패(보부상)들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진압하고는 결국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해산했다.

독립협회와 일진회. 왼편의 독립관은 청나라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을 1896년 독립협회가 개수하여 사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회의를 개최하거나 시국 집회, 대중 계몽 강연회 등을 열었다. 한편 독립관 옆 팔각형의 양관에 자리를 잡은 일진회는 친일 매국 단체로 조선의 문명 개화를 촉진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에 앞장섰다.
독립협회와 일진회. 왼편의 독립관은 청나라 사신이 머물던 모화관을 1896년 독립협회가 개수하여 사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수시로 회의를 개최하거나 시국 집회, 대중 계몽 강연회 등을 열었다. 한편 독립관 옆 팔각형의 양관에 자리를 잡은 일진회는 친일 매국 단체로 조선의 문명 개화를 촉진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의 조선 침략과 식민지화에 앞장섰다.

이렇게 박성춘이 개막 연설에 참여한 관민공동회는 한국 사회에 자주적 민주 시민사회의 희망을 보여 주었지만, 기득권에 눈이 먼 황제와 수구파들에 의해 그 꿈이 짓밟히고 말았다. 하지만 백정 박성춘은 태극기가 게양된 관민공동회 단상에 올라, 종로 거리에서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 한양 시민들을 향해 역사의 당당한 주체로서 자신의 이름과 생명을 걸고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참하겠다고 외쳤다. 이 연설은 이미 한반도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박성춘의 아들 봉출(박서양)은 이후 에비슨 박사의 제자가 되어 세브란스의학교 첫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첫 한국인 교수가 되었는데, 백정 출신 교수의 부임 소식에 불만과 저항의 태도를 보인 당시 의학생들에게 그가 첫 강의 단상에서 했던 일성一聲 은 다음과 같았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조수 박서양(왼쪽)의 도움을 받아 에비슨이 수술하는 장면(오른쪽)을 찍은 유리 건판 사진(등록문화제 제448호)이다.
세브란스병원에서 한국인 조수 박서양(왼쪽)의 도움을 받아 에비슨이 수술하는 장면(오른쪽)을 찍은 유리 건판 사진(등록문화제 제448호)이다.

"내 속에 있는 500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십시오."

평민과 양반 출신 학생들에게 무시와 냉대, 조롱을 받았던 그는 기독교 신앙을 통한 정체성과 존재의 회복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선택할 수 있었고, 이후 만주로 이주해 한인 이주 사회를 위한 의료 및 교육 사업, 독립운동과 독립군 지원 사업을 이어 갔다.

이렇듯 백정 출신 박성춘과 박서양 부자의 삶에 기독교와 태극기는 그렇게 아로새겨져, 그들의 인생이 더 넓은 터전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성취해 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 되었다.

서린동 한성감옥의 개종자들

백정 박성춘이 1898년 만민공동회 개막 연설을 했던 바로 그 역사적인 자리에는 현재 전봉준 장군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영풍문고가 들어서 있는 서린동은 사실 조선 시대 죄수들을 수감하던 한성감옥(전옥서)이 있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조선 후기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도 다수 수감되거나 순교했으며, 외세 침탈과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에 저항한 동학 농민군의 지도자들도 이곳에서 처형(1895년 3월 30일)되었다.

천주교의 평등 사상과 동학의 인내천人乃天(사람이 곧 하늘) 사상은 유교의 차별적 세계관을 국체로 숭상하는 이들에게는 불온하고 위험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처형되기 직전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내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새벽에) 남몰래 죽이느냐?"고 관원들에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부패하고 무기력한 당대 조선의 국가권력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처형도 은밀히 숨어서 진행할 수밖에 없을 만큼 허약하고 비겁했다.

전옥서로 끌려가는 전봉준의 모습(위)과 현재의 전봉준 동상(아래).
전옥서로 끌려가는 전봉준의 모습(위)과 현재의 전봉준 동상(아래).

전봉준 장군의 처형 이후 창설된 독립협회는 1898년 3월부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근대 민주주의를 소개하면서 개혁적 정치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수구 세력들이 고종을 설득해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이에 연루된 이들을 한성감옥에 수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이곳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던 인사들은 내부 토목국장을 역임했던 남궁억, 개화파 원로 유길준의 동생인 유성준, 시위 진압 책임이 있는 경무관인데도 오히려 독립협회를 지지했던 김정식, 처음부터 독립협회 핵심 세력으로 참여했던 이상재와 그의 아들 이승인, 법무협판을 지낸 이원긍, 신소설 <금수회의록>의 저자 안국선, 후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배재학당 학생 신흥우·박용만 등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체포, 구금되었다.

수감 당시 개화 인사들 모습. 맨 왼쪽의 이승만은 중죄수 복장으로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김정식, 이상재, 유성준, 홍재기, 강원달. 뒷줄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한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 아들).
수감 당시 개화 인사들 모습. 맨 왼쪽의 이승만은 중죄수 복장으로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부터 김정식, 이상재, 유성준, 홍재기, 강원달. 뒷줄 오른쪽부터 부친 대신 복역한 소년, 안국선, 김린, 유동근, 이승인(이상재 아들).

당시 개화파 양반 엘리트들의 집단 투옥은 한성감옥 내에 적잖은 변화를 불러왔다. 1902년에 새로 부임한 김영선 감옥서장은 이승만의 요청을 수용해 옥중 도서관을 설치했다. 독립협회의 양반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언더우드·아펜젤러·벙커·헐버트 등의 선교사들은 이때를 양반 엘리트층에 대한 전도 기회로 삼았고, 그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서적을 한성감옥에 넣어 주었다. 다양한 서구의 과학·철학·역사·정치 관련 서적뿐 아니라, 한글 성경과 기독교 서적도 함께 제공되었다.

한성감옥을 찾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승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성감옥을 찾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승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03년에 이르러 이상재와 이승만, 김정식, 박용만, 유성준 등 양반 유학자들이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읽기 시작하면서 감옥 내 집단 개종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때는 마음속 깊이 정치적 야망과 정적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웠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집단 회심은 정치적 야심가의 모습에서 겸양의 신앙인으로 스스로를 변모케 했다.

집단 개종한 이후 한성감옥의 수감자들. 이전보다 표정이 밝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다.
집단 개종한 이후 한성감옥의 수감자들. 이전보다 표정이 밝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있다.

"이 해(1903년) 12월 말에 피수된 여러 동지들이 모여 서로 말하기를 우리 오늘날 이와 같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을 얻음은 모두 이근택 씨(당시 그들을 곤경에 처하게 한 정적 - 필자 주)의 덕이라 출옥한 후에는 그를 심방하고 치사함이 옳다 하고 원수 갚을 생각이 이같이 변한 것을 일동이 감사하는 뜻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유성준, '밋음의 동기와 유래' <기독신보>, 1928. 7. 11. 5쪽)

1903년 한성감옥에서의 양반 엘리트 그룹의 집단 개종 사건은, 그동안 한국교회가 주로 민중 계층을 중심으로만 수용되던 상황에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개종한 이들은 이후, 한국교회의 충실한 지도자로서, 구국 계몽 운동의 선구자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후 수립되는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의 주축 멤버들이 모두 이들 옥중 개종자들이었다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다.

피맛길, 그 차별의 역사를 끊고
우뚝 선 새 시대의 모뉴먼트

서울 종각의 옛 성서공회와 예수교서회 자리 바로 맞은편에는 한국 기독교의 청년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했던 서울YMCA가 위치해 있다. 과거 조선 500년 신분 차별의 상징적 길이었던 종로 뒷골목, 피맛길. 사대부들의 가마를 피해 민초들이 걸어야 했던 저 500년 묵은 옛길의 질기고 질긴 숨통을 단숨에 끊어 버렸던 그 건물이 바로 오늘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서울YMCA회관이었다. 1908년 준공한 이 건물은 마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기념비(Monument)와도 같았다.

1908년 준공 초기의 종로 YMCA회관. 현관 초입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1908년 준공 초기의 종로 YMCA회관. 현관 초입에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이 새 회관은 서울의 심장부에 우뚝 서 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진고개의 천주교당과 덕수궁을 빼놓으면 이 회관은 서울에서 가장 훌륭하고 출중한 건물이다." (J. S. Gale, Korea in Transition, 1909, 238-239.)

기독교청년회(YMCA)는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청년들의 세계적 연대체로서, 기독교 정신이 사회 속에서 구체적 모습으로 구현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1844년 창립되었다. 1903년 10월 28일 한국의 황성기독교청년회 창립 이후 1904년부터 미래 청년 지도자들을 양성키 위해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이라는 교육기관도 시작되었다. 당시 한국교회의 YMCA 운동을 주도한 헐버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다 살펴봅시다. 한국의 개신교 기독교인이야말로 이 강산의 가장 총명하고 가장 진취적이며, 가장 충실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이 없습니다. (중략) 그들의 비전을 흐리게 하는 올가미를 걷어 버리게 하고, 그들의 희망을 밝혀 주는 데에는 뭐 대단한 캠페인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 문을 연 YMCA가 도와주면 됩니다." (H. B. Hulbert, The Education Needs of Korea, The Korea Review, 1904년 10월호, 451.)

임시 건물에 교실을 마련한 청년회학관은 처음에는 야학 형식으로 150여 명의 학생들에게 주간 3일의 교육을 실시했으며, 1906년에 이르러 수강 인원의 증대로 학관이 정식으로도 발족했다. 청년회 학관에서는 기독교와 신문물을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배우지 않았다. 실용적 기술(설계, 목공, 염색, 섬유, 도자기, 비누, 피혁, 인쇄, 양화, 사진, 금속가공 등)과 실업교육도 병행했다.

YMCA회관의 기계공작(위), 목공 실습(아래) 광경.
YMCA회관의 기계공작(위), 목공 실습(아래) 광경.

"금개今開한즉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각 학교를 창설하고 국내 청년들을 교육하는데 그중其中에 공업교육과를 특설特設하고 과목과 연한을 규정하여 물품 제조하는 학술을 교습하여 (중략) 한국의 부흥지원富興之原이 재차在此할지라. 전국의 행복과 개인의 행복이 숙대어시孰大於是리오. 차此는 본국의 유지제씨有志諸氏와 외국의 인애제군자仁愛諸君子가 병심동방幷心同方하여 진실주거眞實做去함이니 상천上天이 한국을 권애眷愛하시는 은총이 아니면 영유시야寧有是也리오." (이상재, '富興說', <황성신문>, 1906년 11월 7일)

직접 기술을 연마하는 공작 실습 참여를 선뜻 내켜 하지 않던 양반 출신 청년들도 결국 노동 실습에 참여하게 되었고, 청년회에서 실시하는 야구·축구·농구·배구 등 다양한 스포츠 게임을 통해 노동과 체육의 가치와 의미를 깨달아 갈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배움과 훈련의 과정을 통해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이와 차별은 서서히 불식되어 갔다.

YMCA의 이러한 사회변혁적 활동에는 한국 강점을 노골화한 일제에 대한 항일 의식과 애국정신이 깃들어 있었다. 1907년 1월, 250여 명이 참여한 YMCA 월례 회의를 은밀히 참관한 일본공사관 직원의 보고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묘사가 나온다.

"애국가, 이 창가唱歌는 비애悲哀다. 즉, 그 뜻은 우리나라 삼천 리 강토疆土와 500년 종사宗社를 천주天主에 빌어 독립을 빨리 회복해 주십사고 노래하는 것으로서, 듣기에는 눈물이 나도록 (중략) 기도하고 폐회하였다." (일본공사관 편책, 1907년 기밀 서류철 갑 사법계에 수록된 일련의 청년회 상황 보고, <한국 독립운동사 1>, 401쪽)

위 문서에서는 의사부議事部 보고와 이상재 선생의 연설, 신임 학감 및 공업 교사 그레그(G. A. Gregg) 소개 등의 진행 과정이 묘사되고 있는데, 신임 학감 소개에 덧붙여 "우리들은 잘 공부하여 한편으로는 나라를 위하고, 한편으로는 학감의 마음에 보답할 것을 명심하여야 하며, 또 우리는 (중략) 우리나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특별히 강조해 기록했다. 당시 YMCA의 청년운동, 교육 운동의 목표와 정체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YMCA학관은 보통과·어학과·공업과·상업과·야학과 등으로 나뉘어 다양한 근대 교육을 시도해 나갔으며, 개교한 지 3년이 지난 1907년에 이르러서는 학생이 1800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1906년부터 1907년 6월까지 10개월간의 통계에 의하면 축구 경기가 56회, 실내 체육 경기가 33회 개최되었으며, 부족한 체육 시설에 대한 아쉬움이 수시로 토로되었다.

또 1906년부터 7년까지 성경연구회의 모임 횟수가 크게 증가했으며, 여병현, 윤효정, 이승만, 안창호, 윤치호, 이상재, 이준, 최병헌, 전덕기, 김규식, 지석영 등이 연사로 참여한 종교 집회와 강연회에는 회마다 평균 16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다. 1907년 세계적인 선교 운동가이자 국제YMCA 학생부 책임자였던 존 모트(J. R. Mott)가 내한해 집회를 진행했을 때에는 6000여 명의 관중이 모여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창단 초기의 YMCA야구단 모습.
창단 초기의 YMCA야구단 모습.
1909년 삼선평三仙坪에서 개최한 황성기독교청년회 주최 축구 대회. 축구 대회 운동장에는 십자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1909년 삼선평三仙坪에서 개최한 황성기독교청년회 주최 축구 대회. 축구 대회 운동장에는 십자기와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다.

1903년 11월 향정동(현 인사동, 태화빌딩 자리)에 처음 임시 회합 장소를 마련하고 공간을 조금씩 확보해 온 황성기독교청년회는 날로 성장하는 청년 사업의 요구에 더 이상 회관 건축을 미룰 수 없었다. 정령正領 벼슬을 한 현흥택玄興澤의 24칸 기와집(지금의 종로2가 9) 기증으로 대지가 마련된 후, 중국 상해의 알제비스리(Alger Beesly)사의 건축사 퍼시 비스리(Percy M. Beesley)가 1906년 3월 서울을 방문하여 설계와 건축 관련 조사를 실시했다.

건축 경비는 국내외 모금으로 충당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1838~1922)의 4만 달러 쾌척과 각계각층의 위정자들과 시민, 독지가들의 후원을 통해 1907년 5월 중순부터 공사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설계 감리는 돈함(B. C. Donham)이 맡았고, 공사는 헨리 장(Henry Chang)이라는 중국인이 맡았다.

YMCA회관 건축을 위한 모금 홍보 사진. 태극기와 기부금이 어우러져 있다. 월간지 <THE WORLD'S WORK VOLUME XVI MAY> 1908년 10월호에 소개된 사진이다.
YMCA회관 건축을 위한 모금 홍보 사진. 태극기와 기부금이 어우러져 있다. 월간지 <THE WORLD'S WORK> 1908년 10월호에 소개된 사진이다.
1907년 기공식 이후 건축이 한창 진행 중인 YMCA회관.
1907년 기공식 이후 건축이 한창 진행 중인 YMCA회관.

마침내 1907년 11월 14일 오후 2시, 신축 YMCA회관의 상량식이 개최되었다. 당시 나이 11세의 황태자 이은李垠과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대신 이완용과 각부 대신들, 중추원 칙임관들, 일본군 조선주둔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내외국 고등관들과 외교 사절단, 미합중국 주한 총영사, 내한 선교사들, 한국교회의 지도자 등이 건평 600평, 벽돌 3층의 위용을 갖춘 종로의 신식 빌딩 건축을 축하하기 위해 참석했다.

조선통감과 일본군사령관의 밀착 호위(혹은 감시)하에 참석한 황태자는 신화新貨 1만 원을 하사하고 '一千九百七年'이라는 여섯 글자를 적어 주었고, 황태자와 통감은 나란히 회관 입구의 초석 둘을 하나씩 정초했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기독교 신문 <예수교신보>는 황태자의 글씨에 대해서만 보도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정초식에 참가한 황태자 이은(1907년, 왼쪽), 황태자가 직접 쓴 '一千九百七年' 정초석의 현재 모습(오른쪽).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 정초식에 참가한 황태자 이은(1907년, 왼쪽), 황태자가 직접 쓴 '一千九百七年' 정초석의 현재 모습(오른쪽).

"그때에 황태자 전하께옵서 금 일만 환을 하사하옵시고 예필睿筆로 일천구백칠 년 여섯 자를 크게 쓰셨는데 여러 손님들이 다 들러 구경하더라." (<예수교신보>, 1907년 11월 27일 자.)

이 글씨가 적힌 정초석은 6·25 전쟁 당시 폭격에도 살아남아, 1961년 재건한 서울YMCA회관 입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을사늑약 이후 망국의 그늘이 드리운 종로 하늘 아래 새 시대의 이상과 한국의 독립 자주를 외치는 청년운동 단체 회관 기공식에 참가한 이들의 면면은 그로테스크(grotesque)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망국의 운명을 예감하면서도 마지막 안간힘으로 몸부림치는 청년들의 치열함과 처연함이 교차하는 자리. 절망이 절정에 이른 곳에서 극한의 희망을 쏘아 올리던 역설의 자리였다.

학관 학생들이 도열한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의 모습으로, 입구에 태극기를 게양했다(위). 현재의 서울YMCA 빌딩 전경(아래).
학관 학생들이 도열한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의 모습으로, 입구에 태극기를 게양했다(위). 현재의 서울YMCA 빌딩 전경(아래).

1908년 12월, 황성기독교청년회 회관이 낙성하여 개관식을 거행했다. 개관 예식은 3일간 지속되었으며, 서울의 수많은 교회와 학원에서 본 회관의 개관 축하 행사를 가졌다. 새 회관은 960평의 부지와 약 600평의 건물로 강당, 체육관, 교실, 도서관, 공업실습실, 식당, 목욕탕, 사진부, 사무실, 소년부 등 다양한 기능과 공간을 구성했다. 게일 선교사는 1905년 선교 편지에서 YMCA회관의 의미와 건축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YMCA회관이 일반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YMCA는 이제 시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 회관은 상가와 관가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고 대지는 훌륭한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나가 쉽게 찾아올 수 있다. 무엇보다 흐뭇한 일은 많은 사람들이 이리로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1년 동안 내쳐 더 큰 회관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나는 이제 YMCA를 통하여 나의 다년간의 소원이던 청년들을 만나게 되었다. 천민의 자식, 상인들의 자식, 선비 또는 양반들의 자식이 한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밤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질레트 씨가 별도로 각종 교육사업과 강연 등에 관한 보고를 하였거니와, 모든 사업을 하든지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기도를 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성경 공부는 계동桂洞(북촌의 한 동리)에 사는 양반집에서 금요일마다 한다. 그 당시 한성판윤이던 김 씨는 성경 공부를 하는 데 자기 집 사랑채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계동에서 찬송가 소리가 나기는 이것이 처음 일이며, 성경 공부를 하는 것도 이것이 처음이었다. (중략)

 

지금 이때야말로 한국이 천시天時를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 YMCA는 이 도시 청년들의 유일한 집회 장소로서 또 실질적인 사교 장소로서의 의의가 크다. 미신은 서구적인 세력에 밀려 무너져 가며, 국민 생활은 전면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청년들이 천시를 만나고 국민 생활이 변하고 있는 것, 일평생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일하던 애국자들에게는 다시없는 기쁨이요, 힘이 아닐 수 없다. 신자들이 이처럼 많이 모여드는 것을 볼 때, 하느님이 이 나라를 버리시지 않으며, 도리어 큰일을 예비하사 YMCA를 통하여 그의 목적을 성취하려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J. S. Gale’s Letter to the International Committee, YMCA, New York, on June 1905)

게일의 증언대로 "천민의 자식, 상인의 자식, 양반의 자식"이 차별과 구별의 구습을 극복하고, 기독교의 복음과 신앙 안에서 민족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한자리에 앉고, 뜻과 힘을 모으기 시작한 그 자리. 종로통 피맛길의 심장부에 새 시대의 기념비(모뉴먼트)로 우뚝선 YMCA회관에는 그렇게 자랑처럼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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