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두려움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초기 대응을 잘못하는 바람에 현재 2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오고, 확진자만 7만 명이 넘는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중국을 비롯한 모든 나라에서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때, 몇몇 대형 교회 목사들의 부적절한 설교가 또다시 사람들에게 빈축을 사고 있다.

이번 코로나-19로 중국에서 많은 사람이 감염되고 죽은 사건을, 중국이 기독교를 핍박하고 선교사를 모두 쫓아냈기 때문에 발생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설교한 것이다. 그 근거로 사용한 본문은 출애굽기의 열 재앙, 민수기 16장에서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에게 내리신 징벌, 다윗의 인구조사로 인한 징벌 등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자들을 질병으로 심판하신 내용이 담긴 구절들이다.

이런 설교의 근거는 질병이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된 예가 존재한다는 데 있다. 구약에서 질병은 때때로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되며, 신명기 28장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을 때 받는 징계로 질병이 언급되고 있다(신 28:21-22, 27). 이렇게 구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에 대한 심판의 수단으로 질병이나 전염병을 사용하신다.

하지만 지금 설교되는 것처럼 구약의 예를 문자 그대로 가져와 현재의 전염병이나 사건에 대입하는 일은 해석학적으로 문제가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구약에 나오는 질병이나 자연재해 등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적용하는 게 복음적이고 선교적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구약에는 분명히 질병이나 전염병을 하나님의 심판 도구로 사용한 예들이 나온다. 이런 경우에는 반드시 하나님이나 선지자의 예고가 등장하고 그 뒤에 질병이 발병하므로 그 질병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한다.

출애굽기의 열 재앙도 모세가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것을 미리 바로에게 예고했고,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면 재앙을 내렸다. 예고하지 않은 경우(세 번째, 여섯 번째)는 재앙의 연속선상에서 지금 내리는 재앙이 분명히 하나님께서 내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 아홉 번째 흑암 재앙은 예고가 없었어도 바로가 하나님께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모세를 불러 재앙을 그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린 목적은 바로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과 놀라운 권능을 알고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바로는 모세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애굽에서 내보내게 된다. 즉, 애굽에 내린 재앙은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는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 다윗의 잘못을 지적한 후 다윗의 죄에 대한 징벌로 전염병을 내리셨다. 이 처참한 광경을 마주한 다윗은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달았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재앙을 통한 징벌이 목적이 아니라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게 하려는 방편이었던 것이지 단순히 징벌을 위한 심판은 아니었다.

민수기 16장의 질병으로 인한 징계는 좀 더 복잡하다. 일차적으로는 레위 지파인 고라와 르우벤 사람 다단과 아비람이 파당을 만들고 모세와 아론에게 반역하는 일이 생긴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모세는 이들과 싸우지 않고 바로 여호와께 물어보자고 제안했고 하나님께서 직접 여호와의 영광으로 나타나 직접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징계하신다.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그들에 대한 심판이 여호와를 멸시한 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신다. 하나님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죄를 밝히셨는데도 이 말씀에 수긍하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모세와 아론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다시 여호와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시며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기 위해 질병을 보내신다.

모세와 아론은 이런 하나님의 진노에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향로를 들고 질병이 창궐하는 백성들 사이로 들어가 백성들을 위해 속죄하며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에서 구해 낸다. 여기서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 편을 들어 주시며 백성들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거나 벌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어 가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그들 사이로 들어가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 애쓰는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렇게 질병이 일어나는 본문들을 보면, 하나님 자신 혹은 선지자를 통해 심판의 예고와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위해 일으키신 질병은 절대로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는 애굽의 동물에게 돌던 전염병이나 애굽의 장자 죽음에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다. 다윗의 범죄로 내려진 질병도 다윗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멈추셨고,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진 질병도 아론이 향로로 백성들을 위해 속죄하자 하나님께서 멈추셨다.

사무엘상 5장을 보면 블레셋에 간 법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땅에 심한 전염병이 돌게 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 질병에 속수무책이었고 이 환란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질병은 인간의 능력으로 치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며 인간이 잘 관리한다고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무사안일과 시스템 부재와 무능으로 일어나는 대형 참사나 전염병과는 다른 차원이다.

하나님께서 내리는 재앙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다는 성격을 지닌다. 즉, 구약의 재앙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알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던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 재앙을 받는 사람들은 왜 이런 재앙을 받는지 선지자나 하나님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런 구약 본문의 특징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그대로 현대 사건에 적용해 해석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구약 본문 내용을 문자적으로 현재 문제에 적용할 경우, 엘리 제사장 집안의 불행이나 웃시아 왕의 질병 등을 근거로 목회자 가정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를 전부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는 끔찍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 사건을 현재 상황에 적용할 때는 항상 신중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둘째, 구약은 질병이나 자연재해 등 재앙을 모두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는 해석을 배격하고 있다. 욥기를 보면 욥은 분명히 하나님께서도 인정한 의인이지만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재앙을 경험한다. 10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죽음, 어마어마한 부의 상실, 매 순간 숨쉬기도 힘든 극심한 육체적 고통 등 한 인간이 감당하기도 해결하기도 어려운 재난을 만난다. 욥이 겪는 재난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였다. 당시 인과응보 세계관으로 볼 때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한 친구들이 와서 욥에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고 이 고난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하고 설득한다.

하지만 우리도 알다시피 욥은 죄 때문에 고난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으로 고난받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친구들의 조언과 설득에 화를 내며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며, 하나님께 빨리 자신의 앞에 나타나 무죄함을 증명해 달라고 호소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지만, 욥이 왜 이런 고난을 받았는지는 설명해 주시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격차가 심한지에 대한 설교만을 하셨고, 그 말씀을 통해 욥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껴 오히려 자신의 무지와 오만함에 대해 하나님 앞에 회개한다.

이렇게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앙 가운데는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경륜에 속한 것이 아주 많다. 이 부분은 악함이나 불의, 부실과 같은 인간의 잘못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시며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다스리신다. 그 뜻을 인간이 다 알 수는 없기에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되지도 않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도 인간의 질병이나 신체적 장애를 인간의 죄와 연결해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선천적 시각장애인을 보고 그가 앞을 못 보는 것이 그의 죄 때문인지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을 때,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답하신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질병과 재난에 대해 쉽게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판단을 내리려는 경향을 경고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예수님의 경고에도 한국교회 일부 목회자는 질병이나 태풍이나 지진 등과 같은 자연재해나 심지어는 인간의 잘못으로 저질러진 대형 사고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경솔하게 설교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나 자연재해나 질병에 대해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고대부터 감당할 수 없는 사건과 자연재해를 신의 분노라고 생각하며 이를 잠재우기 위해 제사하고 제물을 드리는 등 다양한 종교 행위들을 했다. 인간의 종교는 이런 인간의 근원적 두려움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 성격은 기독교 정신이 아니다.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폭력적인 무서움에 두려워하며 굴복하고 굴종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기독교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그 근원이 있다. 기독교인은 비록 죄인이고 부족하지만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 주신 놀랍고 믿을 수 없는 사랑에 감격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겠다고 고백한 사람들이다.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은 재앙을 내려 두려움으로 인간을 통치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러 모두 하나님의 큰 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무한한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심각한 질병이 있거나 자연재해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라고 말하며 두려움을 일으킨다면 우리가 배우고 알던 하나님 모습이 아니라 미신적 신을 전하는 것이다.

이런 재앙과 두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할 일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는 것이다. 자연재해나 전염병과 같은 재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다시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기억하고 그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이런 상황이 닥칠 때에야 신의 자리에서 본래 우리 자리인 인간의 자리로 돌아간다.

둘째는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마음을 갖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돕기를 힘쓰는 것이다. 욥은 자신에게 죄인이라고 공격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요청한다(욥 19:21). 이런 욥의 요청은 현재 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의 요청이다. 우한에서 온 어느 선교사님 편지에서처럼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자들이라는 손가락질 대신 위로와 사랑을 전하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기도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오직 겸손히 사랑하며 섬기는 본연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이런 모습을 통해 오히려 우한을 비롯한 중국에 복음의 문이 열리는 계기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박유미 / 비블로스 성경인문학연구소 소장. 총신대에서 구약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총신대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내러티브로 읽는 사사기>(새물결플러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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